5
완연한 여름이었다.
아르헨의 여름은 제르바보다 부쩍 더웠고, 바다를 둘러 안고 있는 탓인지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열어둔 창 사이로 밀려 들어오는 짭조름한 내음의 바람에 커튼이 흔들려 나부꼈다. 이제는 익숙해진 더위 속에서 에르하르트는 제게 도착한 초청장을 하나하나 살폈다.
들어오는 것 중 나름대로 엄선해 내어준 것일 텐데도 살펴봐야 할 양이 제법 많았다. 영애의 생일 파티이지만 변경백의 초청이니 가야겠고, 이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거절해도 상관없었다. 가문과 날짜를 확인하며 가야 할 것과 거절할 것을 하나하나 정리하자 남는 것은 몇 되지 않았다.
고르고 고른 몇 개의 초청장에 수락하는 내용을 적어 내리던 에르하르트는 오른 가슴에 달아둔 브로치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잠깐 멈칫했지만 써 내려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잉크를 적신 펜촉은 망설임 없었다. 날씨를 묻는 말로 서문을 열어 귀하의 초대에 기꺼이 응낙하겠다는 말로 마무리한 뒤 인장을 찍어 봉랍했다.
“이것을.”
시종에게 답신을 건넨 에르하르트는 그가 떠난 자리를 보다가 커튼을 친 뒤 달려 있던 브로치를 뜯어내다시피 손으로 움켜잡았다.
마력을 주입하자 우웅 소리를 내며 흐릿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딱히 좋지는 않아서 구겨진 미간이 반듯하게 펴질 즈음 형상이 완성되었다.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되는군요. 말도 워낙 꼬아서 쓰시려면 한참 걸리실 줄 알았습니다.”
―이게 무엇이니.
“보시다시피. 서신으로는 전할 수 없는 말들이 오가기엔 꽤 적당해 보여. 게다가 어머니의 서신이 아르헨에 닿을 때마다 마땅찮으신 분이 제르바에 계시지 않습니까.”
본래 고안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가령, 전서구가 닿지 않는 저 새까만 심해에 존재하는 존재와 소통하기 위한. 바쁜 와중에도 밤낮없이 매달려 마법진을 만들고 실패하기를 반복해 겨우 그럴싸한 것을 만들긴 했는데 라얀이 사는 곳은 그의 마력이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1년 넘게 고안한 것이니 폐기하기도 아까워 쓸 만한 데가 달리 없을지 고민하다가 개량해서 올리비아에게 보냈는데 쓰는 데는 문제가 없는 모양이었다. 다만 막대한 마력을 쏟아붓고도 한 번밖에 쓰지 못하니 효율이 현저히 떨어져 또 만들기에는 영 엄두가 나지 않지만.
―들켰으면 어쩌려고.
“하지만 아들이 어머니를 생각해 아르헨에서 직접 공수해 보낸 아름다운 에메랄드가 박힌 브로치는 무사히 어머니에게 닿았지요. 그러면 된 거 아닙니까.”
올리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 어린 수심이 선명했다. 에르하르트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동안은 서신으로 말이 오가 오랜만에 보는 그녀는 왜인지 작고 여려 보였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
“어머니?”
―폐하께서 지극히 살펴주시는데 그럴 리가. 참, 무얼 하고 있었니?
“카나반 변경백이 딸의 생일 파티에 초청하는 초청장을 보냈기에 수락하는 답장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카나반 변경백의 아들과 승마를 하기로 했으니 곧 올 테지요.”
―…….
올리비아는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리히. 에르하르트. 어쩌려고 그러느냐?
하지만 이내 심각해진 표정으로 질책했다.
―폐하께서 부쩍 신경이 날카로워지셨다.
“헤셀러스 전역을 통치하시느라 공사다망하실 분이 아르헨에는 매번 귀를 열어놓으시나 보군요. 제가 달리 한 게 무엇 있다고. 휴양지에서 몸을 다 회복하고 나니 홀로 지내기 쓸쓸하여 교분을 쌓았을 뿐인걸요.”
황제가 벌써 십수 년째 총애하는 총비 올리비아 윈스턴의 아들이라는 이름값은 대단했다. 그가 언젠가부터 슬슬 초청에 응하며 파티에 참석하기 시작하자 아르헨의 군권을 움켜쥔 카나반 변경백이나, 상권을 틀어쥔 하셀 남작 등이 앞다투어 그를 불렀다. 에르하르트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1년 전부터 그는 아르헨 내에서 입지가 제법 넓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늘 그에게 눈과 귀를 열어놓는 황제에게도 전해진 게 분명했다.
―대체 왜 그러니. 조용히, 얌전히 지내면……!
“얌전히 지내다가 죽을까요?”
―에리히!
올리비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어떤 생각이신지 잘 압니다.”
황제의 눈에 띄지 않도록 사는 듯, 아닌 듯 살다 보면 언젠간 잊히리라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자라 성인이 되면 타국의 공주와 결혼시켜 보내든지, 망명을 시키든지. 그것도 아니면 그녀가 받는 총애에 기대 에르하르트를 계속 살릴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폐하께서 그것을 두고 보실 리 없으니.”
그것은 증명되지 않았는가. 에르하르트 너를 잊지 않고 있노라 보낸 독차가 명징한 증거였다.
“이제 와 제가 죽지 않을 방법은 하나뿐이 아니겠습니까.”
애초 에르하르트는 그녀의 기대에 희망을 품어본 적 없었다. 삶에 달리 의욕이 없으니 두었을 뿐.
―에리히. 나는 고작해야 후궁에 불과하다. 출신조차 미천하지.
“지금은 윈스턴 공의 누이시지요. 폐하께서 승인하셨는데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한때 그녀가 몰락한 귀족 가문의 딸로 황제의 정부로 이름 높았던 세펠드 후작부인의 시녀로 봉직하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은 황제의 유일한 차비이며, 그의 인가를 받아 윈스턴 공작가에 입적해 공작의 누이가 되었다. 그러니 이제 와 누가 그녀의 출신을 트집 잡아 헐뜯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폐하께는 장성한 아들만 넷이다. 그중 황후의 소생인 파비안 황자는 올해 성인이 되자마자 윈스턴 공녀와 약혼했지. 폐하께서 내게 윈스턴을 주셨으나 윈스턴의 뜻은 그곳에 있다.
“뜻이야 꺾으면 그만인걸요.”
꺾을 방법이야 많다며 에르하르트는 웃었다.
―…에리히.
결국 올리비아는 한숨을 쉬듯이 그를 불렀다.
“살고 싶어요. 죽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
“어머니. 단지 그뿐입니다.”
그녀는 얼빠진 표정을 지은 채 눈을 깜빡거렸다. 그럴 만했다. 언제나 권태로운 얼굴로 이러나저러나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에르하르트가 스스로 살고 싶다는 말을 꺼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에르하르트는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그녀는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몸을 바로 했다. 눈가가 조금 붉은 듯도 했지만 에르하르트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너는 영리한 편이니 알고 있을 테지만 밝히기엔 적당한 때가 아니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깨달았다.
“압니다.”
조금 자랐다고 이전보다야 운용할 수 있는 마력은 더 많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계는 있었다. 항상 오기로 버틸 뿐이다. 이것도 매개인 브로치에 미리 마력을 담았기에 가능하지, 순수한 마력을 이용했더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고작 이 정도의 힘이니 아직은 황제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숨겼다.
―르네궁 후원의 장미가 아주 아름답게 피었지. 간만에 티파티를 열어야겠구나.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었으니 그것을 누리고 살아도 될 텐데, 올리비아는 권력을 극도로 경계했다. 꼭 참석해야 하는 파티가 아니면 나서지 않았고, 당연히 티파티를 먼저 주도하는 일도 드물었다. 그랬던 올리비아가 사교계에 스스로 발을 들이민다는 것은 대답이었다. 에르하르트를 살리는 데에만 주력하지 않고 그와 뜻을 함께하겠다는.
“감사합니다, 어머니.”
―감사는. 이렇게라도 보았으니 아쉬움은 한결 달래졌지만 하루라도 빨리 네가 얼마나 컸는지 눈으로 보고 싶구나.
“…….”
―마리도 널 많이 보고 싶어 한단다.
“저도 그렇다고 전해주세요.”
―그런 말은 조금이라도 진심을 담아주렴. 에리히.
마냥 가벼운 지적에 에르하르트는 말없이 웃었다.
“전하. 카나반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그때 바깥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침 올리비아 쪽에서도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흘려보내던 마력을 끊었다. 미세하게 금이 간 보석의 표면을 보다가 책상 위에 올려둔 에르하르트는 그를 응접실로 안내하라고 했다.
마른 얼굴을 쓸어내는 손짓엔 피로함이 묻어나 있었다.
몸이 피곤한 것은 아니다. 물론 잠을 줄여가며, 매시 매초를 나누어서 공부에 혹은 사교를 하는 데 사용하다 보니 종종 몸이 피로를 호소했으나 그보다는 정신적인 피로가 더 컸다.
타인과 교류하는 것에 관심 없고 오히려 관계에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는 그에게 속내를 적당히 감추고 불특정 다수와 교분을 쌓는 과정이 힘에 부쳤다.
“왜 살고 싶어져서.”
몸을 늘어트린 채 이제 와 소용없을 말을 중얼거린 에르하르트는 고개만 돌렸다.
“…….”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얼른 해나 지면 좋겠다. 오늘 어둠이 사방에 드리우면 찾아올 존재를 생각하니 한결 기분이 괜찮아졌다. 그만큼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고 느끼기는 하지만 적어도 흐르는 시간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없을 때보다는 훨씬 견딜 만했다.
요즘 불만이 많던데 달래줄 것들이나 가져가야겠다.
아. 오늘도 그 달갑지 않은 인사는 함께일까. 에르하르트는 매번 자신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는 라얀의 수호자를 생각하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전하.”
그가 한참을 나오지 않자 바깥에서 재차 그를 불러 재촉했다. 그제야 늘어트린 몸을 세우며 표정을 고쳤다. 적당한 웃음을 가면처럼 걸친 에르하르트는 엉성하게 푼 크라바트를 올바르게 조이곤 길을 나섰다.
문을 열었을 때는 조금 전까지 보였던 피로는 찾아볼 수 없었다.
* * *
라얀은 공기 방울을 손으로 툭 튕겼다. 동글동글한 공기 방울은 찌그러졌다가 제 모양을 찾으면서 떠미는 힘에 멀리 날아갔다. 그 뒤를 잇듯 다른 공기 방울이 쏜살같이 그의 것을 앞질렀다.
“봐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봐주고 있잖니.”
불만을 담아 중얼거리자 조금 전 가벼운 손짓만으로 라얀의 것을 여유롭게 앞지른 아샤가 나른히 웃으며 대답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라얀은 이내 됐다는 듯이 편편한 바위에 몸을 늘어트렸다. 머리카락이 굽슬굽슬 나부꼈다. 흔들리는 머리칼 사이로 아샤가 보였다.
“어린 인어께서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을까.”
“…….”
“그렇게도 좋아하는 인간을 보러 가는 날이면서.”
“그거야.”
라얀은 대답하려다가 순간 주저했다. 왠지 제 이유가 너무 궁핍하게 느껴지는 탓이었다.
“라얀.”
“…해서요.”
“그렇게 작게 말하면 제아무리 귀가 좋다는 데 자부심을 가지는 것들조차 못 알아들을걸.”
“요즘, 에리히가 너무 바쁜 것 같아서요.”
말하고 나니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지만 사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에리히와 만나는 날이 줄었다. 이틀에 한 번이던 게 사흘에 한 번, 나흘에 한 번이 되었다. 게다가 라얀도 알레가 눈에 불을 켜고 있을 때면 조금 자제해야 하니 겹치는 날이 얼마 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생긴 거 아닐까?”
“…….”
“그 애는 인간이니, 인어보다야 같은 인간이 더 편할 테니까.”
아샤는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일 테지만 라얀은 말문이 턱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주 틀린 추측도 아니었다. 한정된 시간에나 만날 수 있는 라얀과 달리, 아무 때나 곧잘 만날 수 있는 인간이 더 편하고 친숙할 수도 있으니까.
“…얀.”
“…….”
“라얀.”
“아.”
거듭한 부름에야 라얀은 얼빠진 표정을 겨우 수습했다.
“왜. 이상하니.”
“아니요. …아니, 네. 이상한 것 같아요”
제게도 아일라나 알레, 유리, 그리고 이젠 아샤까지 있으니 그에게 라얀 말고 다른 친구가 있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데 기분이 이상했다. 속내를 그대로 말하자 내내 나른하게 웃고 있던 아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웃는데, 웃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한.
“친구?”
“네.”
“내가?”
네, 하고 한 번 더 긍정했던 라얀은 뒤늦게 문제점을 찾았다.
“아니. 아샤는 친구가 아니고…….”
부정하다가 라얀은 곧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고 보니 어떤 말로 그를 정의 내려야 할지를 생각한 적이 없었다. 2년 전 그와 인연이 닿고부터 그에게 바깥 세계의 이야기를 전해주며, 가끔은 제 잡다한 일상생활까지 공유하고는 했지만.
“음. …그러면 은인?”
흑해의 마녀에 대한 이야기가 떠돈 것이 벌써 몇백 년은 되었으니 아샤는 그만큼의 세월을 살았다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이제 겨우 태어난 지 50년 된 라얀은 그와 비교하자면 까마득한 핏덩이였다. 확실히 친구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쨌든 그를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사실이니 겨우 쥐어짜 내며 눈치를 보자 아샤는 방금의 미묘한 표정을 거두고 웃음을 터트렸다. 보랏빛의 눈이 가느다랗게 접혔다. 어찌 보면 유쾌해 보이기도 했고, 혹은 비웃음처럼 보이기도 했다. 워낙 냉랭한 얼굴이라 쉬이 기분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흑해에 올 때마다 발발 떨던 어린 인어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구나.”
“그거야 아샤가 있으니까…….”
켈피나 씨 서펜트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모든 종족이 다 무섭지만 라얀은 아직도 상어가 제일 무서웠다. 흑해의 경계를 넘을 때 상어의 노란 눈빛과 마주치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은 아샤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샤가 있는 한 그는 안전할 테니까.
실제로 라얀은 알레 없이 에리히를 보러 갈 때도 주변을 경계하며 긴장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누군가를 믿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닌데.”
“네?”
“아무것도.”
그래도 확실히 요즈음엔 흑해에 들어올 때 덜 긴장하는 것 같다는 감상에 잠겨 있던 라얀은 그가 중얼거리는 말을 채 듣지 못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아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너의 수호자가 돌아오는 날이라고 하지 않았니.”
“아!”
라얀이 흑해에 드나드는 것은 알레에게도 비밀이었다. 또 없으면 도끼눈을 뜨고 어디를 다녀왔느냐고 할지도 몰랐다. 상냥하기만 했던 알레는 요즘 곧잘 그를 닦달하며 이러다 늙어 죽는 게 아니라 시름에 잠겨 죽을지도 모른다고 한탄했다.
“가야겠어요.”
그리고 저녁엔 에리히를 만나러 가야 하니 한숨 자야 했다. 라얀은 전보다 부쩍 잠이 많아져서 잠깐잠깐 잘 시간이 필요했다.
“또 올게요.”
라얀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내밀었다. 그것을 빤히 보던 아샤가 속 모를 표정을 지으며 꼬리를 얽었다. 라얀은 씨익 웃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인사한 뒤 쏜살같이 돌아갔다.
* * *
<라얀, 말해봐요. 저 없는 동안 뭐 하면서 지냈어요?>
저녁에 함께 아티사를 빠져나가 바깥 세계로 가는 동안 알레가 영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추궁했다. 라얀은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게 앞만 똑바로 보면서 대꾸했다.
“그냥, 아일라랑 놀거나 궁에 얌전히 있었지.”
아일라와 놀기는 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그를 살피러 오는 아일라는 요즘따라 왜 이렇게 보기 어렵냐고 불만이었다.
<아일라가 요새 당신이 영 안 보인다고 하던데.>
“…….”
<라얀?>
“그냥 아티사 구석구석 놀러 다녔어. 요즘 궁에 있는 것도 조금 불편하단 말이야.”
답을 재촉하던 알레가 이번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얼마 전 궁에서 메르와 마주쳤고, 메르는 라얀과 함께 있던 알레에게만 말을 걸었을 뿐 라얀에게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간단한 안부는 차치하고 라얀을 보지도 않았다. 라얀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히려 알레가 안절부절못했다.
<아, 곧 도착하겠네요.>
알레는 결국 추궁하던 것도 뒤로하고 말을 돌렸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던진 말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알레가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졌다.
“응. 근데 알레. 인간으로 변신 안 해?”
<전 근처에서 쉬다가 부를 테니까 혼자서 다녀와요.>
“정말?”
<제가 그 인간이랑 마주해 봤자 싸우기밖에 더하겠어요.>
아. 라얀은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라얀이 보기에도 둘은 썩 사이가 좋지 않았다. 티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긴 한데 티가 났다. 그리고 그들의 신경전은 주로 라얀을 주제로 했다.
<다녀와요.>
“응.”
<그리고 그 인간한테 입 좀, …됐어요. 됐어.>
하지만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아도 어지간하면 동행하는데. 뻔히 며칠 전의 일 때문에 라얀을 배려하는 게 보이는 처사였다. 싫지는 않아서 라얀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히를 만나러 갈 때 알레가 함께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대화의 결이 달랐다. 할 수 있는 것의 폭도 대단히 적었다. 알레는 라얀이 에르하르트에게 숨을 불어 넣어 바닷속을 구경시켜 주는 걸 내켜 하지 않았다.
알레는 인간 따위에게 바닷속의 아름다움을 보여줘 봐야 그것에 감탄하는 게 아니라 기어이는 탐낼 뿐이라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일축했다. 수백 년 전의 비극은 그 탐욕으로 일어난 거라고. 라얀이 에리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알기에 직설적으로 말하진 않고 둘러 둘러 풀었지만 결국 요약하자면 그런 뜻이었다.
하지만 라얀은 에리히에게 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다시 보여주고 싶었다. 상황이 허락했다면 아티사까지도. 아티사는 세상 어디보다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이니. 에리히 역시 정신없이 홀릴 게 분명했다.
저 애도 인어면 좋을 텐데.
“눈만 내놓고 뭐 하는 거야.”
같이 심해를 유영하며, 종종 몰래 바깥 세계를 구경하면서 모든 일상을 공유하면 좋을 텐데.
“라얀.”
눈만 빼꼼 내밀고 에리히를 바라보고 있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에리히는 들춰보고 있던 책을 덮으며 라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삐쳤어?”
“에리히는 거짓말쟁이니까.”
이틀 전, 약속한 날에 왔더니 있어야 할 에리히는 온데간데없고 그가 남긴 짧은 메모만 보고 돌아가야 했다. 라얀은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러다가 오리 입술 된다.”
“…….”
“작고 어린 인간에게 때로는 관용을 베풀어줘야지? 그래야 한다면서?”
“그렇긴 한데.”
수긍하기는 했는데 왠지 에리히의 말재주에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라얀은 눈만 빼꼼 내밀고 그를 보는 대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가까이 다가가서 뻗은 손을 잡았다. 쭉 끌어 올려진 몸은 바위에 닿았다. 걸쳐 앉은 채로 라얀은 그가 보고 있던 책을 흘끔거렸다.
“저건 뭐야?”
“널 가르치려고 가져온 책?”
“…….”
“표정 보니 농담도 못 하겠군.”
“거짓말하지 마.”
라얀은 투덜거렸다.
“그렇게 공부하는 게 싫어?”
“어려워.”
“그때 보니까 잘 배우던데.”
1년 전인가. 라얀은 그에게 인간의 글을 조금이나마 배워야 했다. 이유란 별거 없었다. 둘이 약속한 날 만나지 못할 때 표식을 남기기로 했는데 서로 쓰는 언어가 달랐던 탓이다. 에르하르트가 남겨둔 메모를 읽지 못한 라얀은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알레에게 들켜서 또 한참을 아티사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에르하르트는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게 좋겠다고 선언했다.
문제가 있다면 인어의 언어는 절대 그가 익힐 수 없는 것이었다. 인어의 언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라얀이 좋은 선생님이 아니었다.
‘왜 이걸 몰라? 에리히, 바보야?’
나자마자 습득한 것이라 라얀은 그가 단번에 익히지 못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한참을 싸운 그들은 라얀이 인간의 언어를 익히는 쪽으로 합의를 봤다. 뻗대려고 했지만 가르치는 데 소질이 없던 라얀과 달리 에르하르트는 잘 가르쳤다.
하지만 에리히와 놀기 위해 나왔지, 무언가를 배우러 나온 게 아닌 라얀은 대충 몇 개의 문장을 깨친 이후로는 그 이상의 가르침을 거부했다.
“나는 더 안 배울 거야.”
어차피 바깥 세계의 언어는 에리히와 이런 식으로 소통하는 것 말고는 필요 없을 말일 뿐이다. 라얀이 강경하게 나오자 에리히가 흐음, 하고 턱을 쓸었다.
“하지만 이번 보름에 네게 구경시켜 줄 데가 있었는데.”
“뭔데?”
“그… 참, 네 그 수호자는, 아직 오지 않았나?”
입술을 달싹이던 에리히는 곧 알레를 찾았다. 알레가 그를 내켜 하지 않듯 에리히도 알레를 내켜 하지 않는지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제 친구와 수호자이니 서로 친하게 지내면 좋을 텐데 왜 이렇게 아웅다웅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알레는 같이 왔는데 다른 데 있어.”
“이 근처에서 숨어서 지켜보는 건 아니고?”
“알레는 안 그래.”
“…….”
“말해봐. 뭔데? 뭐야? 어디 데려갈 건데?”
영 못마땅한 눈치로 주변을 더 둘러보던 에리히는 라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귓가에 그의 숨이 닿아 간질거렸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몸을 움츠리던 라얀의 눈이 커졌다.
“축제?”
즉각적인 반응에 에르하르트는 입가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갈무리했다.
‘참, 전하. 올해 여름 축제가 열리는데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낮에 닐스 카나반과 승마를 하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르헨의 여름 축제가 화제에 올랐다.
‘축제?’
‘예. 열흘 후부터 나흘간 열립니다.’
‘…한번 자세히 말해봐라. 공자.’
축제 이야기를 하는 내내 대꾸는 해주지만 시큰둥해 보이던 에르하르트가 별안간 관심을 가지자 닐스는 조금 더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장황한 설명을 대강 축약해 보자면 2년에 한 번씩 열리는데 올해가 바로 축제가 열리는 해였다.
그는 축제에 관심이 없었지만, 관심을 가질 만한 인물이 제 주위에 하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바로 제 눈앞에서 녹빛의 눈을 반짝거리는 아주 아름다운 인어가.
“마침 보름 즈음에 축제가 열린다더군.”
“갈래!”
“축제가 뭔지나 알아?”
“그럼 에리히는 알아?”
순수하게 되받아친 질문에 에리히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알고 있지만 그 역시 축제에 가본 적이 없어서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아까 닐스가 축제 때 뭘 볼 수 있는지 열성적으로 설명했는데 라얀에게 얼른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서 죄 흘려듣는 바람에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뭐, 신기한 게 많고.”
“많고.”
“볼거리도 많지. 네가 좋아하는 맛있는 것도 많이 팔걸.”
“정말?”
세세하기는커녕 궁색하기 짝이 없는 설명이었는데도 라얀은 마냥 좋아서 방실방실 웃었다. 그가 지금 기분 좋은 걸 증명하듯 꼬리가 살랑거리며 수면을 탁탁 내려쳤다.
“갈래. 가고 싶어. …아.”
신나서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라얀의 표정이 순간 흐려졌다.
“알레가 있으면 못 가는데.”
에르하르트는 탄식을 삼켰다. 그 생각을 못 했다. 라얀이 수호자라고 하는 그 범고래 일족의 후계자인지 뭔지는 라얀이 보름이 뜨는 날에 뭍에 올라오면 다리가 생기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고 있는 건 라얀과 에르하르트뿐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고작 세 시간. 보름이 뜨는 날에 만나지 못할 때도 있다 보니 라얀이 두 다리로 걷는 모습은 이제까지 채 열 번도 보지 못했지만 에르하르트는 매번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라얀에게 고작 수정구로 보여줄 수 있는 세상 말고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어서.
그가 제게 자신이 사는 세계를 보여줬듯이, 에르하르트 역시 그러고 싶었다.
“요즘 자주 불려가서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
“또 이번이 아니어도 다음에도 있을 거고.”
“그렇다면 그때까지 조금 더 우리의 언어를 익혀보는 건 어때? 네가 직접 읽을 수 있으면 좋잖아. 아, 그래. 화폐 가치도 알려줄까? 네가 직접 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
“싫어.”
에르하르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어지간한 일에 말랑하게 구는 라얀이 경우에 따라 단호하게 거부하는 때가 있었다. 그 반응이 색달라서 종종 놀리고 싶으면 부러 권했는데, 이번에도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소소한, 근래 그가 도모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면 라얀과의 대화는 의미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와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물론 지난 며칠간 있었던 피로가 씻겨나갔다.
“어차피 에리히랑만 같이 다닐 테니까 조금 몰라도 괜찮아.”
에르하르트는 라얀이 신기했다. 어쩌면 저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잘할 수 있을까. 다정하고 상냥한 말이 습관이 되도록 다정하고 상냥한 이들 틈에서 자랐나. 하긴. 워낙 사랑받았을 것이다. 그는 그럴 만한 성격이었고, 범고래가 라얀을 싸고도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뭐. 그러기야 하겠지만, 제대로 알려주지 않을 수도 있지.”
“…….”
“매운 음식이라고 쓰여 있는데 단 거라고 너를 속인다거나.”
괜히 기분이 이상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자 라얀이 한쪽 눈썹을 아래로 찡그렸다.
알아온 시간이 있다고 이제 대충 라얀이 눈썹을 일그러트리는 모양만 봐도 그가 지금 어떤 감정인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충분히 유추됐다.
역시나 예상대로 라얀의 손이 소매 끝에 닿았다. 그는 그대로 에르하르트를 잡아당겨 바다에 빠트렸다. 더운 날씨로 미지근해진 바닷물이 옷을 적시며 늘어졌다. 혀에 스미는 물이 짰다.
에르하르트는 이제 간단한 영법은 익혔지만 아직도 못하는 척 허우적거렸다. 몸이 물 아래로 자꾸만 가라앉았다. 라얀은 허우적거리는 그를 낚아채며 제 입술 위에 입술을 맞대며 숨을 불어 넣었다.
일부러 허우적거리던 도중 물을 먹어 알게 모르게 가빠진 숨이 진정되었다. 바깥에서 숨을 쉬는 것과 다르지 않게 호흡할 수 있는 이 과정은 겪을 때마다 늘 신기했다.
“거짓말쟁이.”
라얀은 더는 헐떡이지 않는 에리히를 보면서 한마디 툭 던졌다.
“너 헤엄칠 수 있게 된 지 좀 됐잖아.”
“아닌데.”
어떻게 알았지. 연기를 어설프게 했나. 하지만 허우적거리는 과정에서 물을 먹을 정도로 그는 꽤 열성적으로 물에 빠진 사람 흉내를 냈었다.
“내가 멍청인 줄 알아? 그것도 모르게.”
“…….”
“모르는 척해줬던 거였거든.”
에리히가 어,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라얀은 콧방귀를 뀌었다. 한두 번이야 깜짝깜짝 놀랬지만 계속 속을 만큼 그렇게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물살을 가르는 게 호흡하는 것보다도 쉬운 삶을 살았다. 어떻게 모를까. 그런데도 그간 모르는 척해준 것은 단순히 그게 에리히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거로 놀라게 하지 마. 알았어?”
“알았어. 약속.”
에리히는 자연스럽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저게 뭔지 몰라 멀뚱멀뚱 있었지만 이제는 능숙하게 새끼손가락을 얽은 라얀은 그를 이끌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알레가 찾기 전에 오며 가며 봐둔 아름다운 장소로 그를 데려가 구경시켜줄 생각이었다. 붉고 푸른 산호는 제가 보기에도 무척 아름다웠으니 에리히가 보기에도 만족스러울 게 분명했다. 불투명한 꼬리지느러미가 그의 기분을 대변하듯 살랑살랑 흔들렸다.
* * *
헤셀러스의 수도 제르바.
하얀 대리석을 깎아 만든 거대한 성은 멀리서 봐도 새하얗게 눈부셨다. 대리석으로 큰 틀을 잡고 향을 덧입힌 백목단을 기둥으로 세운 황성은 단연 헤셀러스의 명물이라 불렸다. 타국에서 오는 사절단은 헤셀러스 황성의 아름다움을 찬탄하곤 했다.
어디 하나 모자람 없는 황성에서도 유독 심혈을 기울여 축조한 궁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르네궁이었다. 르네궁은 보통 황제의 별궁으로 쓰였으나 이번 대는 예외적으로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궁의 주인이 되었다.
어느덧 십수 년째 르네궁의 주인으로 그 입지를 확고히 한 올리비아 윈스턴은 불투명한 침의 가운을 입은 채 거울 속 얼굴을 살폈다. 요즘 부쩍 창백해진 안색을 숨기기 위해 뺨에 붉은기가 도는 분으로 덧댄 얼굴은 혈색이 돌아 조금은 볼만했다.
“폐하께서 드셨습니다.”
“모시렴.”
올리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황제를 맞이했다. 예민해 보였던 인상이 올리비아를 보자 조금은 완만하게 풀어졌다.
“폐하.”
“리브. 그리 예를 갖추지 말라니까.”
황제는 성큼성큼 다가와 올리비아의 손을 잡아 굽힌 몸을 바로 세웠다.
“제가 폐하께 어찌 그러겠습니까.”
“짐이 허락했다.”
올리비아는 옅게 웃었다. 그제야 황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곤 올리비아를 잡아끌었다. 시녀들은 눈치 빠르게 주안상을 차렸다.
“피로해 보이십니다.”
“국정을 보는 일이야 언제나 그렇지.”
“그러신가요. 폐하께 짐을 지우는 일은 한시라도 빨리 해결되어야 할 터인데.”
술을 따르며 올리비아는 그가 듣기에 기꺼워할 말을 고르고 다듬어 속삭였다. 황제는 제 아들의 목줄을 움켜쥐고 있는 절대자였다. 그런 이상 올리비아는 그의 신경을 거스를 수 없었다. 한때는 그를 사랑했던 것도 같은데 이제는 그런 감정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그런 일이야 언제나 산적해 있는 것을.”
올리비아는 잠깐 표정을 수습하지 못해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그가 말하는 산적해 있는 일 중 하나가 에르하르트를 이르는 게 뻔하므로. 올리비아의 앞에서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어도 그는 매번 에르하르트를 마땅치 않게 여겼다.
‘제 아이를 죽이시면 따라 죽을 겁니다. 폐하께서 정녕 저를 죽지 못하게 만드신다고 하여도, 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이를 따라갈 거예요. 제가 못 할 것 같나요?’
에르하르트가 태어나고 딱 5일 되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아직 붉은기도 채 가시지 않은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 올리비아는 황제와 날을 세웠다.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황제가 기껏해야 총비의 목숨 따위 중요하겠느냐고 했더라면 에르하르트는 그날 어린 생을 다했으리라.
하지만 올리비아의 도박은 성공했고, 에르하르트가 성년이 되는 스무 살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숨죽이면 됐는데 그녀의 계획은 자꾸만 어긋나고 틀어졌다.
“그대는 건강이나 살펴라. 또 앓아눕지 않았나. 요즘 부쩍 자주 앓는 것 같아 그게 걱정이야.”
“가벼운 감기입니다.”
“어의에게 보이라고 해도 고집을 부리고.”
“그 정도의 병이 아니라 부끄러울 뿐입니다. 폐하의 차비가 엄살을 부린다는 소문이 황성에 파다해질 텐데 제가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니겠어요.”
“누가 뒤에서 그대를 두고 수군거릴 수 있다고.”
“요즈음 마리가 응석이 늘어 그것을 상대하는 게 피곤했던 모양이어요. 조금 더 신경 쓸 테니 그만 염려하세요. 폐하께서 지니신 근심에 저를 얹고 싶지 않습니다.”
올리비아는 부러 더 환하게 웃으며 목소리를 밝게 했다. 황제는 그녀를 유심히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술잔을 기울였다. 그제야 올리비아는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참. 티파티를 준비 중이라지.”
“소문이 이리도 빠르니. 보세요. 폐하. 제가 몸이 좋지 않았더라면 티파티를 열어 귀부인들을 부를 수나 있었겠나요.”
마리엘이 곧 일곱 살이니 신경 쓸 게 많다며 부러 더 재잘거렸다.
“그래. 황녀에게도 또래의 친우들이 필요하니. 혹시라도 초청에 응하지 않거든 곧장 짐에게 말하라.”
“대신 벌이라도 내리시려고요?”
“못 할 것도 없지.”
“그러다가 역사에 다시 없을 요사한 악녀가 폐하를 현혹한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어찌합니까.”
“고작 그런 게 무서워서야. 리브. 그대의 마음이 이리도 여리니 짐이 종일 걱정을 놓을 수가 없다.”
황제는 피식 웃으며 올리비아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건조한 손이 부드러운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마리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황제는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곧 그 애의 생일이 아니었던가.”
올리비아는 순간 호흡을 잊었다. 마리엘의 생일은 이미 지났다. 그가 말하는 ‘그 애’란 에르하르트였다.
올리비아는 다시 긴장했다. 황제는 제 앞에서 드러내지 않지만 전해지는 말이 있었다. 에르하르트가 아르헨에서 그 존재감을 부쩍 드러내는 걸 못마땅해하다 못해 기어이 마시던 술병을 던져 깨트렸다고.
“그래서 선물은 무엇이 좋을지 고민이랍니다.”
“그 애의 생일이기도 하고 여름을 날 겸 아르헨에 다녀오는 건 어떤가. 실로 간만에 어미와 만나는 것도 퍽 의미깊은 선물일 터.”
“…아르헨에요?”
“그래. 그대도 그 아이를 못 본 지 2년이나 지났으니 부쩍 보고 싶을 것이다. 나 역시 요양 간 아들이 쾌유하였다는데 마냥 모른 척할 수 없는 노릇이니.”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친히 보러 가겠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곳에서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가 어떤 살의도 드러내지 않는 지금 올리비아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이란 한정되었다.
“폐하의 관대함에 감사드립니다.”
“내 아들이기도 하니 그리 말라.”
올리비아는 숨이 막혔다.
문득, 올리비아는 그 애의 생을 속박하고 있는 예언, 아니, 저주를 떠올렸다. 극비에 부쳐져 극소수의 몇 명을 제외하면 모르는, 황제가 에르하르트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붉은 별 아래 태어난 이는 황좌를 피로 적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