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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랑.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제법 거칠었다. 에르하르트는 평소와 같이 무표정이었지만 그가 현재 여느 때보다 예민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행동으로 알 수 있었다.
가령 이마로 흘러내리는 금발을 쓸어올리는 손길이라든가, 초조한 듯이 테이블을 불규칙한 리듬으로 툭툭 치는 손가락, 혹은 뚫어져라 책을 보다가도 무의식적으로 발코니를 흘끔거리는 시선이 그랬다. 아까는 수시로 발코니를 들락거리며 바다 너머를 노려보듯 내다보기까지 했다.
“전하. 집중이 되지 않으세요?”
멀리서 내심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보던 레아가 조심히 말을 건넸다. 그녀는 에르하르트와 시선이 마주하자마자 다른 쪽으로 흘깃 눈짓했다. 에르하르트에게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초빙되어 온 아홀렌 백작은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입꼬리가 경련이 일 정도로 웃고 있었다.
“곤해 보이십니다. 전하. 다음으로 미루시는 것은 어떠실지요.”
레아가 운을 떼자 아홀렌 백작은 얼른 그것을 날름 받았다.
사정은 어떻든 그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황자였고, 배움의 의무가 있었다. 제르바에서는 황제가 싸고도는 척 그의 배움을 가로막았지만 올리비아는 그가 무엇이든 배우길 원했다. 아홀렌은 그런 까닭으로 청해진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백작.”
그의 가르침을 여태껏 단 한 번도 귀담아들은 적은 없다. 그래도 듣는 시늉 정도는 했는데 오늘은 영 그럴 만한 심적 여유가 없었다. 에르하르트는 고민의 여지 없이 동의를 표했다.
“신의 광휘가 모쪼록 황자 전하의 발치에 닿기를.”
“전하. 저도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의 축객이 떨어지자마자 적잖이 불편한 눈치였던 백작은 서둘러 나갔다. 레아는 그 뒤를 따라나섰다. 레아까지 나가고 홀로 남은 에르하르트는 그제야 의자에 억지로 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켜서 발코니로 나갔다.
속이 부글부글했다.
그는 속으로 날짜를 헤아렸다. 사흘까지 세보다가 속이 뒤집히기에 그만뒀다. 그동안 라얀은 코빼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에르하르트는 수면 위로 빼꼼 드러내는 흑발과 청명한 녹안 대신 새하얀 포말이나 일렁이는 파도 따위나 봐야 했다.
첫날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제게 얼른 자라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말과 함께 이틀 후에 온다고 했으니까. 어처구니는 없었지만 제 할 말만 끝내고 바닷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지는 인어를 붙잡을 능력이 제게는 없으니 에르하르트는 다음 날 오면 이렇게 자신을 배려해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것은 다음 날부터였다.
라얀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어디 숨어서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서 그의 이름을 수차례 부르며 숨기 좋을 만한 곳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동이 트기 직전까지 찾아다녔으나 별빛에 비쳐 반짝이는 연록빛의 눈동자를 지닌 인어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도 사정이 있겠거니 했는데 그다음 날에도 라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노려보면 그가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에르하르트는 발코니의 난간을 짚은 채 너머에 펼쳐진 바다를 노려봤다. 그토록 염원하고 기대하는 태양을 볼 수 있는 낮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이 시간에 나타날 리 만무하지만, 며칠째 이어지는 의미 없는 습관 같은 것이다.
“…라얀.”
에르하르트는 발코니의 난간을 꾹 움켜쥐며 꾹꾹 억누른 목소리로 인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기적처럼 수면 위로 빼꼼 나와 손을 흔들어줄 것만 같아서.
라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라얀의 이름을 속삭이던 에르하르트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분명 물결이 흔들렸다. 저번에도 그는 이런 식으로 라얀을 발견한 적 있었다. 그러니 착각이 아닐 것이다.
에르하르트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 침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백작을 배웅하고 돌아오던 레아와 어깨가 부딪쳤다. 뛰는 힘의 반동으로 레아가 두 걸음 밀려나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에르하르트는 도저히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전하! 전하!”
어떤 초대에도 응하지 않으며 도통 성 밖으로 나서는 법 없던 황자가 체통도 없이 뜀박질하여 정문 앞까지 오자 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은 허둥지둥하다가 길을 열어줬다. 에르하르트는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도 않았고, 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뛰니 숨이 조금 달렸다.
호흡을 고르고 싶은 욕구조차 참은 채 그는 절벽 위에 서서 아까 발코니에서 발견한 반짝이던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가 본 것이 확실하다면 당장에라도, 다른 사람들 시선 따위 상관없이 내려갈 생각으로.
“…….”
그러나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겨우 고르며 절벽 위에 섰을 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새파란 물결과 포말에 부딪히는 돌바위뿐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착각과 간절함이 빚어낸 허상이었다.
자각하자 겨우 삼키고 있던 허탈이 그를 당겨 내렸다. 묘한 탈력감이 그의 다리를 휘어 감았다. 전하, 전하. 헐떡이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에르하르트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레아는 거리를 좁혀왔다. 그녀는 부딪힌 곳이 욱신거리는지 한 손으로 그곳을 짚었다.
“저번에도 이러시더니, 무슨 일이 있으신 거예요?”
“…….”
“전하.”
답답한 기색이었다. 레아는 그렇지 않아도 에르하르트가 요 며칠 신경이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그 원인이 무엇일지를 헤아리고 있었다. 올리비아의 안부 편지를 받은 날 이후로 쭉 이렇게 예민한 상태이니 그것이 혹 황자의 신경 어딘가를 건드린 것은 아닌지 내심 염려했다.
“별거 아니야.”
레아의 염려와 걱정을 충분히 인지했으면서도 에르하르트는 쌀쌀히 등을 돌렸다. 그는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흘끔 하늘을 바라봤다. 찰나의 시선이었다. 곧장 시선을 곧게 한 에르하르트가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는 것을 발견한 이는 없었다.
작은 소란 아닌 소란을 일으킨 뒤 도로 성내로 돌아온 에르하르트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할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상당히 많아 보이는 레아를 내쳐 물리고 침실에 틀어박혔다. 괜히 또 발코니를 서성이며 헛짓을 하는 대신 무거운 걸음을 움직여 침대에 드러누웠다.
눈이 뻑뻑하고 피곤했다.
밤에는 혹시 라얀이 오지 않을까 동굴로 가서 날이 밝을 때까지 서성이기를 반복했고, 낮에도 이상하게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며칠간 낮잠을 자던 날이 무색했다. 아니, 원래 이게 당연한 건데 그새 낯설어진 게 우습기도 했다.
몇 번이고 굴러도 될 만큼 큰 침대에 몸을 내팽개치듯 뉜 에르하르트는 더 이상 생각하기 싫어서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 한잠도 이루지 못한 신경은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살얼음 위를 칼날로 디뎌 걷는 것처럼 날카롭고 위태로웠다.
부정적인 감정의 조각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엉망으로 휘저어서 에르하르트는 번쩍 눈을 떴다.
“전하.”
그와 동시에 레아가 바깥에서 그를 불렀다.
“전하. 정원에 장미가 어여쁘게 피었어요.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홍차를 진하게 우리려 하는데, 오늘은 저와 함께 티 타임을 즐겨주지 않으시겠어요?”
“…….”
“전하. 에르하르트 전하.”
그녀의 목소리는 퍽 간절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아. 팔이 좀 뻐근하네요.”
그가 반응하지 않자 레아는 아까 그와 부딪힌 것을 부러 들으라는 듯이 상기시켰다. 열이 펄펄 끓어도 내색하는 법 없던 레아가 엄살 아닌 엄살을 부리는 것은 고치처럼 틀어박힌 그를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매사 날이 서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이가 다 빠진 칼날처럼 무딘 에르하르트가 이상하게 구니까.
그녀의 작전은 제법 성공적이었다. 에르하르트는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예민한 감정을 움켜서 집어넣으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레아가 한결 편안하게 웃었다.
“아프다면서 잘도 웃네.”
“전하를 뵈니 아픈 게 금방 사라지는걸요. 저와 티 타임을 함께해 주실 거지요?”
“하자며.”
내키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도로 들어가겠다는 뉘앙스를 풍기자 레아는 양손을 내저으며 그를 정원으로 안내했다.
레아가 아르헨에 내려온 뒤 정성을 잔뜩 쏟고 있는 정원은 볼만했다. 그녀의 성정을 반영하듯 깔끔했으며 한편으로는 단정하고 우아했다. 과하지 않고 절제된 후원엔 향긋한 꽃내음이 만발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 급히 마련된 테이블에는 달콤한 디저트와 진한 홍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원래 에르하르트가 좋아하는 종류의 찻잎과 요즈음 곧잘 찾던 간식이었다.
“이거, 치워.”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쿠키를 보자마자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휘저었다. 레아는 요즘 곧잘 간식을 찾으시지 않았느냐고 묻는 대신 현명하게 말을 아끼고 쿠키가 담긴 트레이를 시녀에게 건네는 것으로 에르하르트의 안전에서 치웠다.
조금은 날 선 분위기에서 티 타임이 시작되었다.
“날이 좋아요.”
레아는 티 타임을 즐겼고, 에르하르트는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종종 동참을 해주었다. 이런 식으로 말문을 열면 그는 대개 무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러게. 비나 내리지.”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그가 퍽 기꺼워해 아르헨에 오기 전 신경 써서 챙겨 온 찻잎으로 우린 찻잔을 기울이지도, 그렇다고 레아의 말에 무던히 긍정해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날이 좋아 이토록 바다의 물결이 잔잔한 대신 폭우가 내리고 집채만 한 파도가 모든 걸 삼켜버릴 것처럼 들썩거렸더라면 그것을 핑계 삼을 수 있었을 테니.
“어이 그리 심술을 부리실까.”
“…레아.”
부드러운 다독임에 에르하르트는 한숨처럼 그녀를 불렀다.
“매일 보던 존재가 갑자기 보이지 않아 마음 어딘가가 이상하고 짜증 나는 건 당연한 건가?”
레아는 깨달았다. 에르하르트가 어린애다운 구석도 없고, 만사 권태로워 보여 종종 잊지만 실은 아직 성인이 되기까지 까마득히 먼 소년인 것이다. 아르헨에 와서 올리비아의 편지를 받고 나니 갑자기 그녀가 그리워진 게 분명했다. 제르바에 있는 동안은 올리비아가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도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그를 찾아 얼굴을 보였으니.
동시에 짠해졌다.
세상 귀한 것만 접해도 모자랄 황자가 이런 부재로 인한 상실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에.
“그럼요. 전하. 그것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랍니다.”
레아는 얼른 그의 마음을 한결 달랠 수 있을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 자신이 겪는 감정이 생소한 탓에 그것을 극도로 거부하던 에르하르트의 심경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지 않은지 그의 표정이 아까보단 한결 나아졌다.
에르하르트는 무언가를 곱씹는 듯하다가 작게 코웃음을 치더니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다 식었네.”
“다시 우려오라고 할까요?”
“됐…….”
에르하르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불덩이가 속을 휘젓더니 울컥 솟아올랐다. 시선을 내리자 푸른 잔디밭이 붉은 피로 적셔져 있었다.
“전, …전하!”
레아의 새된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한 겹 벽으로 막은 것처럼 먹먹했다. 아. 물속에서 라얀이 무슨 말을 하면 이렇게 들렸었는데. 이 상황에 걸맞지 않은 생각이 우스워서 피식 웃은 에르하르트는 무겁게 까라지는 몸을 비틀비틀 흔들다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 * *
라얀은 울적한 표정을 숨길 생각 없이 아티사의 수호 결계가 시작되는 곳을 서성거렸다. 넘고 싶다. 넘고 싶다. 아무리 간절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생각으로 가득 찬 라얀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알레가 엄한 눈으로 라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얀.”
“이렇게 시퍼렇게 눈을 뜨고 지켜보는데 설마 내가 밖으로 나갈까 봐서?”
라얀이 새침한 표정으로 쏘아붙이자 알레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가요.”
“나한테 근신령을 내릴 수 있는 건.”
“네. 근신령을 내릴 수 있는 메르에게 고할까요, 그러면? 아무래도 그게 좋겠죠?”
“…들어가. 들어간다니까.”
라얀은 투덜거리면서 제 궁으로 날래게 헤엄쳐 갔다. 알레가 있는 방향으로 꼬리질을 거세게 하는 것은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항의이자 심술이었다.
라얀은 조개 침대에 엎드려서 꼬리로 바닥을 툭툭 내려쳤다. 괴고 있는 팔 사이로 흘끔 고개를 돌린 그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알레를 뚱한 눈으로 바라봤다. 알레는 라얀이 노려보든 말든 타격도 없다는 듯이 수문장처럼 서서 그를 지켜봤다.
“알레. 안 가?”
“뭘요.”
“잠깐 온 거라며. 내가 걱정돼서.”
알레는 완전히 온 게 아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여전히 범고래족에 발목이 매여 있는 상태였다. 그 말에 의하자면 알레는 이미 떠나고도 남아야 했는데 며칠째 라얀의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곧… 됐고, 내가 지금 갈 수 있겠어요? 호시탐탐 나갈 기회만 노리는 라얀을 혼자 두고?”
“안 간다니까.”
“퍽도.”
알레는 코웃음 치며 그의 말에 불신을 드러냈다. 알레가 사라지자마자 에리히를 보러 갈 생각이었던 터라 라얀은 차마 강력하게 부정할 수가 없었다.
“라얀. 왜 그렇게 겁이 없어요?”
“…….”
“인간을, 그래,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도 문제긴 한데 상어한테 쫓겼어요. 죽을 뻔했다고. 이틀 내내 악몽에 시달리는 것 같더니 그새 다 잊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혼자 바깥으로 나가는 게 무섭지도 않아요? 어?”
알레는 참다못해 와르르 말을 쏟아냈다. 이것도 상당히 참는 것임을 저 철부지 인어가 알아야 할 텐데 모를 것이 뻔했다.
그날을 생각하면 알레는 정말 머리가 싸늘해지다 못해 몸이 굳는 것만 같았다. 흑해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홀로 있다가 그가 다가가자마자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라얀의 모습이라니. 창백한 얼굴이며 상어의 주둥이에 찔려 불그죽죽해진 등의 살갗까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전투 능력조차 없는 라얀이 어떻게 상어 떼를 따돌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도통 말해주지 않아 모르겠지만, 그런 운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혼자서 상어를 만났으면 두려워 몸을 사려야 할 텐데 하루 정도 깜짝깜짝 놀라고, 이틀 정도 악몽에 시달렸을 뿐 지금은 또 아무렇지도 않게 바깥에 나갈 궁리 중이었다.
그것도 하필 인간을 만나야 한다고.
라얀이 상어 떼에게 쫓긴 일은 그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면, 이 일은 두통을 안겨주었다. 특히 저렇게 못 나가게 한다고 토라져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깨질 것 같았다.
라얀의 수호자가 된 걸 단 한 순간도 후회한 적 없지만, 지금은 조금 후회가 될 듯 말 듯도 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결국 그의 수호자가 되기야 할 테지만.
“앞으로 조심할 수 있는데.”
“그게 조심한다고 일어나지 않을 일이에요?”
“그동안은 괜찮, …았단 말이야.”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목소리를 높였던 라얀은 알레의 눈빛이 수상쩍자 금방 기세를 가라앉히고 눈치를 봤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또박또박 했다.
누가 저렇게 키웠지. 아, 그렇지. 대부분 그가 키웠다. 유리는 쓸데없는 거나 머릿속에 집어넣기나 했으니.
라얀을 낳은 것은 메르일지 몰라도 그를 키운 것은 알레였다. 그래서 더 속이 터졌다. 자신이 키웠는데 어떻게 저토록 순진해 빠진 인어로 자랐는지. 아일라 정도만 됐어도. …물론 라얀 앞에서만 숨길 뿐 저 잘난 맛에 사는 아일라를 생각해 보면 그것도 그것대로 머리가 아프기는 했다.
알레는 한숨을 내쉬며 라얀이 누운 자리 옆에 앉았다. 도로 엎드린 라얀은 콧방귀를 흥흥거리면서 고개를 돌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라얀.”
“…….”
“시 메르.”
그가 싫어하는 호칭으로까지 불렀는데도 어깨만 움찔거리고 정정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단단히 토라졌음을 몸으로 시위하는 것이었다.
“그 인간은.”
“…에리히.”
중얼거림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잠깐 곱씹던 알레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의 이름이 에리히인가 보죠.”
“…….”
침묵은 긍정이었다. 그토록 싫어하는 호칭으로 부를 때도 가만있더니 인간을 인간으로 칭할 때는 참지 못하고 말을 고친다니, 기가 막혔다. 도저히 표정이 관리되지 않아서 알레는 연거푸 얼굴을 쓸어내렸다. 수차례 심호흡하며 스스로를 달랜 뒤에야 평정을 가장할 수 있었다.
“좋아요. 좋아. 그 인, …에리히는 어떤 사람인가요?”
도대체 어떻게 당신을 홀린 것이냐는 말은 겨우 삼키며 묻자 그제야 라얀의 고개가 제 쪽으로 살짝 돌아왔다. 먹물처럼 풀어 헤진 머리칼 사이로 선명한 녹안이 보였다.
“…말하면 보러 가게 해줄 거야?”
“듣고 판단해 볼게요.”
허락해 준 것도 아닌데 라얀은 화색이 되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흰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조금 전까지 다 시들어가는 해초 같더니 금세 팔팔해져서는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에리히는 나한테 맛있는 걸 많이 줘!”
아. 그러니까 순진하기 짝이 없는 라얀을 고작해야 먹을 것 따위로 꼬여냈다는 소린가. 불쑥 튀어 나가려는 뒤틀린 심보를 겨우 누르며 더 말해보라는 듯이 고갯짓했다.
라얀은 손짓 발짓까지 구사해 가면서 인간과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바빴다. 알레의 입장에서는 저게 그렇게 특별한 일인가 싶었다. 역시 인간이 무슨 짓을 해서 홀린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졌다. 제 그런 생각을 모를 라얀은 계속 신나서 재잘거렸다.
마음이 확고해진 것과 별개로 라얀의 목소리는 질리지 않아서 들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알레. 인간들은 마음을 표현할 때 입을 맞춘대. 신기하지? 너는 알고 있었어?”
“…라얀은 그걸 어떻게 알게 됐는데요?”
알레의 목소리가 낮아졌지만 제 기분에 휩쓸린 라얀은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마냥 천진했다. 속이 벌써 몇 번이 뒤집혔다.
“에리히가 말해줬으니까.”
그 순간 알레의 머릿속에서 그 인간은 대충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인어를 꼬신 속 시꺼먼 파렴치한으로 각인되었다.
“그냥 입을 맞추는 거랑 키스는 다르다는데, 어떻게 다른지는 말해주지 않겠대. 너는 알아?”
“라얀.”
“응?”
“…에리힌지 뭔지 보러 굳이 가야겠으면 저도 같이 가요.”
“알레도? 왜? 너도 이제 인간이랑 친구가 되고 싶은 거야?”
라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치가 영 없는 편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꽤 빠른 편에 똑똑한데 왜 저 인간에 한해서는 이렇게 눈멀고 귀먹은 것처럼 구는지 모르겠다. 평소였더라면 알레가 아무리 웃는 얼굴을 했어도 이상함을 감지하고 경계했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치고, 어떻게 할래요?”
“…그럼 오늘 보러 가도 돼?”
“그럼요.”
알레는 만약 그자가 라얀을 꾀어내는 존재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제거할 생각이었다. 설령 그로 인해 라얀이 슬퍼하더라도 그래야만 했다. 어차피 인연을 맺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정을 떼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고 설령 제거하지 않게 되더라도 슬슬 라얀을 한 번 달래줄 필요성은 있었다. 일족으로부터 돌아오라는 전언을 무시한 지 수일째였다. 며칠 정도는 더 모르는 척할 수 있겠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었다.
계속 누르면 라얀은 알레가 일족에게 돌아가자마자 또 몰래 아티사를 나갈 게 분명했다. 아일라나 유리에게 언질해 두든가, 정말 협박한 대로 메르에게 고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가 죽기 전까지는 다신 아티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어쩌면 감옥에 영원히 유폐될지도 모른다. 여태 후계자의 호칭을 지니고 있는 왕자를 치우기엔 그만한 명분은 없으니.
또 라얀이 시름시름 빛을 잃어가는 모습을 더 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일부는 있었다.
“…….”
그는 이렇게도 생각이 복잡한데 정작 라얀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바빴다. 한숨만 푹푹 나왔다. 알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 *
아티사가 고요에 잠기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이 유난히 길었다. 라얀은 알레를 재촉하며 뭍으로 향했다. 항상 에리히와 만나는 동굴로 가서 빼꼼 고개를 드러냈다. 그 옆으로 알레도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범고래의 모습으로 연안까지 나오기에는 너무 눈에 띄니 그도 인간의 모습을 유지했다.
“여기인가요?”
“응!”
라얀은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보고 싶은 이는 볼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없지? 항상 에리히가 먼저 와 라얀을 기다렸다. 그를 놀라게 해보고 싶어서 아무리 바지런을 떨어도 언제나 에리히가 먼저 와 있었다.
“그 인, …에리히가 항상 이렇게 라얀을 기다리게 했어요?”
“아니. 엘이 먼저 와 있었는데. 이상하다.”
혹시 며칠 동안 오지 않아서 토라진 거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오늘은 오지 않는 날이겠거니 싶었나. 라얀은 언제나 에리히가 서 있던 자리를 빤히 보다가 휙 동굴을 빠져나갔다. 알레는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라얀의 뒤를 바삐 쫓았다.
라얀은 에리히의 침실이 보이는 곳에 멈춰 섰다.
“…….”
불이 꺼져 있었다.
자그마한 불씨의 흔적도 엿볼 수 없이 새까맣게. 반면 다른 방은 이상할 정도로 불이 밝아 환했다.
“라얀, 이리 와요. 인간들이 깨어 있나 본데 누가 발견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잠깐만, 조금만 더…….”
라얀이 슬금슬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알레가 대경실색하여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라얀은 손을 휘저어서 알레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제힘으로는 한참 모자랐다.
“매번 만난다는 곳에서 기다려요. 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알레가 그를 살살 달랬다.
“…그럴까?”
“당연히 그래야죠.”
라얀은 불 꺼진 에리히의 방과 알레를 번갈아 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얀은 방 한구석에 틀어박혀 교차한 팔 사이에 고개를 숙여 넣고 웅크렸다. 며칠간은 심통을 부린 것이었더라면, 지금은 상심에 잠겨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전부 에리히 때문이었다.
‘돌아가야 해요. 날이 밝으려 하고 있어요.’
밤새 기다리다 못해 하늘에 어느덧 어스름한 새파란 기운이 돌았다. 에리히가 서 있던 자리를 뚫어지게 노려만 보면서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알레가 결국 그의 목덜미를 낚아채 아티사로 돌아가길 종용했다. 밤에 다시 와보자면서. 그때는 그 인간도 있을 거라고. 가끔은 깜빡 잠드는 날도 있지 않겠냐고.
달래는 말에 마지못해 돌아갔는데, 다음 날에도 에리히는 오지 않았다.
다음다음 날에도.
“…….”
왜 오지 않는 거지. 며칠 동안 내가 오지 않아서 실망했나. 아니면 이제 친구가 되기 싫은가. 우리는 종족이 다르니까? 그의 주위에는 다른 친구들도 있으니까? 당사자인 에리히를 보지 못하는 이상 바로 확인할 수 없는 추측들이 머릿속에서 엉망으로 난무했다.
라얀은 수정구를 노려봤다. 반짝거리는 밖의 세계가 담겨 있는 구슬은 에리히가 제게 준 선물로 현재 그의 보물 1호였다.
“너무해.”
친구가 되기 싫어도, 토라졌어도, 지루해졌더라면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해야 했다. 라얀은 그것을 툭 던졌다. 수정구가 도르르 잘만 굴러갔다.
“…….”
그것을 빤히 보던 라얀이 마지못해 도로 주우려고 손을 뻗는 찰나였다.
“라얀!”
바깥에서 그를 부르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라얀은 그것을 황급히 낚아채 대충 숨겼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숨기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며 아일라가 들어왔다.
“아일라.”
“알레가 너한테 좀 가보라던, …세상에. 라얀. 너 무슨 일 있니?”
표정이 왜 이래. 가볍게 웃으며 다가와 꼬리지느러미를 가볍게 얽으며 인사를 건넨 아일라는 뒤늦게 라얀의 안색을 살피며 의문을 표했다. 뺨을 꾹 누르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는 악력이 세심하지는 않아서 라얀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어 그녀의 손을 떨쳐냈다.
“내 표정이 뭐가 어때서.”
“어릴 적에 나랑 장난치다가 실수로 기둥 하나 무너트려 놓고 잔뜩 혼나서 열흘 근신령을 받았을 때도 짓지 않은 표정인데. 이거.”
아일라는 턱을 쓸며 사뭇 심각한 얼굴을 했다.
“알레한테 혼났어? 그래?”
“아니야.”
“어쩐지. 알레가 너한테 가보라고 하는 게…….”
“아니라니까.”
즉각 부정했지만 아일라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라얀은 아일라를 흘겨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알레의 의도야 뻔했다. 며칠 내내 올라가서도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라얀의 기분은 저조해져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보다 못해 아일라와 놀면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바쁜 인어를 굳이 불러온 것 같은데 효과는 없었다. 라얀조차 이 기분을 해소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라얀?”
라얀의 반응이 평소와 다르니 아일라는 조금 당황했다. 수십 년 동안 라얀의 기분이 이렇게까지 가라앉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열흘 근신령을 받았을 때는 물론이고 성체가 되는 데 실패했을 때마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그들의 앞에 섰다.
정말 무슨 일이 있나.
‘아일라. 바쁜 일이 있으신 게 아니라면 라얀에게 좀 가주실 수 있나요?’
알레에게 그 말을 전해 듣고 올 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기껏해야 알레가 없는 사이 무슨 사고를 쳐서 한 소리 듣고 토라진 정도이겠지 했는데. 라얀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하는 우울함이 깔려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걸 어떻게 달래주지.
“라얀. 우리 밖에 나갈까? 응?”
그와 시선을 맞추며 겨우 그가 좋아할 법한 말을 했는데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아니면 좋아하는 거 잡아줄까?”
이것도 아닌가. 라얀의 녹안이 음울하게 일렁거렸다. 아일라는 그의 눈치를 봤다.
“…나 혼자 있을래. 아일라.”
라얀은 풀썩 엎드렸다.
“라얀.”
“…….”
“라얀?”
아일라는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하지만 라얀은 미동도 하지 않고 이불에 파묻은 얼굴을 들지 않았다. 얘가 오늘 진짜 이상하네. 아일라는 중얼거리다가 결국 떠났다.
문이 닫히고 금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도 한참을 가만히 누워 숨만 쌕쌕 몰아쉬던 라얀은 이불에 파묻고 있던 몸을 벌러덩 뒤집었다. 천장이 보였다. 라얀은 그걸 보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속눈썹이 눈가를 간지럽혔다.
라얀도 답답했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고, 의견도 구하고 싶었다. 제 심정을 토로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나마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알레는 에리히를 영 못마땅해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유리나 아일라는 결코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손으로 이불을 쿵쿵 내려치던 라얀은 입술을 꾹 깨물며 박차고 나갔다.
다행히 알레는 메르의 부름으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아마 오는 데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라얀은 퍽 용감하게 나갔다. 물론 알레가 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괜히 한 번 주변을 살폈다.
당연히 알레는 없었고, 그를 유심히 지켜보는 인어는 없었다.
라얀은 요리조리 그들을 지나쳐 그가 바깥으로 나갈 때 매번 이용하는 결계 앞을 기웃거렸다. 그는 나갈지 말지의 기로에 서 있었다.
누워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그런 가정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에리히도 늦은 밤에 나오다가 누군가에게 들켜서 나오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그런. 그러니 해가 뜰 때 가면 그를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근거 따위는 없는 낙관이었다.
라얀은 침을 삼키며 결계를 손으로 헤치며 나아갔다.
막상 나오기는 했는데, 라얀은 순간 갈피를 잃었다. 밤에야 모두 잠든 시간이니 경계를 서는 인어가 몇 되지 않아 그들의 눈만 피하면 됐지만 낮은 그렇지가 않았다. 저번에 아일라와 함께 바깥을 둘러볼 때 마주친 인어만 몇이었던가.
그렇다면 방법은 조금 외진 곳을 통하는 것뿐인데, 그곳이 외진 이유는 흑해의 경계가 가까워서였다.
어떡하지.
“…….”
고민했고, 그 시간은 그렇게 짧지 않았다.
라얀은 손을 뻗었다.
결계를 벗어나자 온화했던 물살은, 서늘하게 피부에 들러붙었다. 라얀은 어깨를 살짝 떨며 주위를 바짝 경계했다.
그때 상어족이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은 에리히와 놀고 난 여운에 잠겨 주변 경계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라얀은 움직일 때 물결의 파동이 번지지 않도록 꼬리짓마저 조심했고 주변에 연신 귀를 기울였다.
라얀은 조금씩 아티사에서 멀어졌다.
그는 긴장하는 한편 에리히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질서정연하게 정리했다. 일단 며칠 동안 오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고, 에리히에게도 설명을 요구해야겠다. 그리고, 또…….
“어린 인어께서는 참, 겁도 없으시지.”
지독히 낮은 목소리가 흥미를 머금어 라얀의 고막에 사뿐 내려앉았다.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라얀은 아연해져서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긴장으로 몸이 삐걱거렸다.
“…아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청년이 나른하게 웃으며 라얀을 보고 있었다. 그는 라얀과 시선이 마주치자 미끄러지듯이 다가왔다. 흰 피부, 위험하게 빛나는 보랏빛의 눈, 넘실거리는 까만 머리가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어떻게?”
“흔적을 풀풀 풍기면서, 어떻게?”
“저는…….”
“조심했다고 말하고 싶을 테지.”
아샤는 눈웃음을 지으며 손짓했다. 근처에서 그림자가 아른아른 흔들렸다.
“그동안 또 장애물 하나를 달고 다녀 다들 잠잠했을 뿐이지.”
아샤의 손이 뺨을 덮었다.
“흑해에는 어린 인어가 누구의 보호도 없이 바깥을 겁도 없이 돌아다니다 쫓겼다는 소문이 파다하거든.”
“…….”
“다들 지금 어린 인어에게 아주 관심이 많아. 여러모로. 혹은, 여러 의미로.”
그는 라얀의 귀에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여러 의미, 라는 말에 무수한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 라얀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몸을 물리고 아샤를 바라봤다.
“…아샤는, 무슨 의미인데요?”
아샤는 설마 그런 걸 물어볼 줄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인지 유쾌해 보였다.
“글쎄. 잡아먹을까.”
“…….”
“너희의 아티사에는 흑해의 마녀가 어린 인어를 꾀어내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잖니.”
아샤의 손이 라얀의 뺨에서 목을 타고 덧그렸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몸을 뒤로 물리지도 못할 만큼 잔뜩 긴장해서 그의 보랏빛 눈을 바라봤다.
“아샤가, 흑해의 마녀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아샤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불리는 것 같구나.”
“…….”
“그러면, 라얀 내가 너를 잡아먹어도 될까?”
“저, 저는 맛이 없을 건데요.”
라얀은 얼른 그의 말에 토를 달았다.
아샤는 어디 더 말해보라는 듯이 그의 목덜미에 올려둔 손을 거두어가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라얀은 잡아먹어서는 안 될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보세요. 이렇게 살도 없고.”
“하지만 야들거리지.”
“어, 어, 또 잡아먹힐 때 아파서 소리를 질러서 입맛을 떨어지게 할 수도 있어요.”
“고통 어린 비명은 입맛을 돋우는 훌륭한 애피타이저고.”
“또, 또 제 수호자가 화를 낼 거예요.”
“내가 그깟 어린 범고래 하나를 이기지 못할까.”
아일라가 알레를 이길 수 있다고 자신만만할 때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아샤는 정말로 알레를 손짓만으로 이길 것 같았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본능이었다.
“그럼 내가 널 잡아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더 없는 거니?”
그의 빈약한 근거는 전부 철벽같이 가로막혔으니 라얀은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라얀은 오늘 흑해의 마녀―사실은 마녀가 아니라 남성체 인어였지만―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아직 에리히를 보지도 못했는데. 왜 며칠 동안 오지 않았느냐고 묻지도 못했는데.
“…저는 하자품이에요. 그러니까 맛이 없을 거예요.”
“하자?”
아샤의 눈에 부쩍 흥미가 어렸다. 그의 시선이 탐색하듯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찰나였으나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아. 그래. 네가…….”
이윽고 그가 탄성을 토하며 의미 모를 말을 했다. 긍정적인 반응에 라얀은 기대에 차서 그를 바라봤다. 아샤는 보랏빛 눈을 휘어 접으며 허리를 굽혔다.
“방금 말한 것은 제법 흥미로웠다.”
“…….”
“그러니까.”
그는 라얀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속삭임을 들은 라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돌아가렴.”
속 모를 웃음을 지은 아샤는 한마디만 남기고 거품처럼 사라졌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았다. 라얀의 눈앞에는 오로지 드넓은 바다만이 보였다.
아샤의 말을 무시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라얀은 결국 아티사로 돌아갔다. 주변에 일렁이던 그림자가 사라지기 무섭게 눈에 불을 켠 알레와 마주쳤다. 그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라얀이 눈썹을 잔뜩 끌어 내리며 답답한 마음에 바깥을 좀 돌아다녔다고 하자 더 캐묻진 않았다.
‘일족에게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잠깐 들렀던 거라 가서 마무리를 짓고 와야 할 것 같다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라얀은 마침 감시의 눈인 알레가 떠나는 것이 달가웠다.
‘약속해요, 라얀. 제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말썽부리지 않겠다고.’
라얀이 영 미덥지 않은지 알레는 단단히 일렀다. 라얀은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로 흔들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얼굴로 멍청한 표정이나 지었다.
알레는 아까보다 더 불안한 기색이었다. 왜 그가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라얀은 잘 몰랐지만 그동안 바깥으로 나가는 동안 그를 좇는 것들의 존재를, 알레는 알았을 테니까.
그는 한 번 더 신신당부하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그길로 아티사를 떠났다.
라얀은 알레가 떠나고, 밤이 깊었을 때 숨죽여 아티사를 빠져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수면 위가 아니었다. 라얀은 일렁이는 흑해의 경계에 섰다. 시꺼먼 구덩이가 라얀을 집어삼킬 것처럼 끊임없이 흔들렸다. 라얀은 마른침을 삼키며 경계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흑해의 경계를 넘었지만 물살의 흐름은 바뀐 게 없었다. 그저 더 깊은,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르렁대는 울음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라얀은 몸을 잔뜩 굳힌 채 주변을 살피다가 돌아갈지 말지 고민했다. 그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라얀. 네가 바라는 것을 하나 들어줄까? 가령, 네가 보고자 하는 인간을 보러 뭍에 올라설 수 있는 두 다리라든가.’
나긋하게 속삭이던 말이, 너무 매력적이라.
하지만 여기까지 들어와서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를 꾀어내려는 속임수가 아닌가 싶어졌다. 라얀은 주춤거리면서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여기까지 와놓고 도망갈 셈이니.”
등 뒤에 닿는 촉감과 정수리로 내려앉는 목소리에 라얀은 기겁해서 뒤돌았다. 아샤가 속 모를 웃음을 지으며 한 손을 팔랑팔랑 가볍게 흔들었다.
“…진짜 방법이 있어요?”
“어떤?”
“저는 아직 성체가 아니라.”
“성체는 아니지만, 네 말대로라면 성체가 되어야 했지만 되지 못한, 누군가의 흠이지.”
아샤는 말로 난도질했다.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던 바가 누군가의 입을 통해 언급되는 건 조금은 생소했으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라얀이 별 동요가 없자 아샤는 흐흠, 하고 웃더니 손짓했다.
그에게 끌리듯이 어둠 속을 헤집어 들어갔다.
마냥 무서운 줄로만 알았는데 각오했던 것보다는 무섭지 않았다. 라얀은 그를 따라가면서 흘끔흘끔 훔쳐봤다.
빤히 보는데 보랏빛 눈과 마주쳤다. 라얀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다행히 아샤는 별말하지 않았다. 라얀은 그 후로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가는 길에만 집중했다.
곧 그의 거처에 닿았다.
라얀은 숨을 삼켰다. 그의 거처 앞에는 켈피가 지키고 서 있었다. 그것은 아샤의 옆에 라얀을 보자마자 캬악, 캬악 소리를 내지르면서 겨눌 것처럼 창을 들었다.
“그만. 내가 초대한 손님이잖니.”
아샤의 명령에 켈피는 언제 난폭하게 굴었냐는 양 잠잠해졌다.
“나의 형제들이 인어에게 낯을 가리는 편이라.”
그러는 그쪽도 인어이지 않으냐는 반박은 혀끝으로 삼켜져 목구멍으로 말려 들어갔다. 하지만 아샤는 그가 삼킨 말이 짐작된다는 듯 피식거리며 라얀을 데리고 들어갔다.
흑요석과 오팔, 자수정 등의 갖가지 보석이 빛을 머금어 안을 밝혔다. 아주 밝지는 않았으나 식별이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라얀은 머뭇거리다가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딱딱해 보였는데 꽤 푹신했다.
“그러면 거기 앉아서 이야기를 해보렴.”
“어떤 이야기를요?”
“가령, 그 인간을 어떻게 만났는지에 관한 것이나.”
아샤는 에리히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 걸까. 그것은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아까부터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다. 라얀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봤다.
“네 수호자와 주고받던 대화의 파편을, 누군가 전해주었지.”
아. 라얀을 노리며 따라다녔다던 그들인 게 분명했다. 참 귀도 밝았다.
라얀은 머뭇거리다가 에리히에 대해 이야기했다. 알레에게 말했을 때처럼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알레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인간인 에리히를 내켜 하지 않았고, 그것은 라얀에게도 잘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감정들이 전부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기에 에리히를 밉게 보지 말라고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알레에게 말했을 때와 달리 아샤에게는 그런 불편한 감정을 느낄 필요 없었다. 그냥 하고 싶은 말들을 하면 됐다.
그래. 그렇구나. 그는 간혹 시선은 부딪히지 않은 채 호응은 해주었으나 에리히를 향한 호불호를 엿볼 수는 없었다.
에리히와 언제부터 알았고, 또 현재에 이르기까지 간략한 설명을 끝내고 숨을 골랐다. 아샤는 흥미로 반짝이는 눈으로 라얀을 보다가 제 손에 있던 것을 후, 하고 불었다.
살랑살랑 거리를 좁혀온 것은 손바닥만 한 구체였다. 그것은 제 손바닥 위에 사뿐히 안착했다. 라얀은 그것을 유심히 바라봤다. 까만색의 액체가 넘실넘실 흔들리며 원 안에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 아샤가 길게 뻗은 손가락 세 개를 곧게 펴서 흔들었다.
“세 시간.”
“…….”
“오로지 보름이 뜨는 날, 지상에서 허락된 시간이지.”
그리고 마침 오늘이 보름이고. 라얀은 그의 속삭임을 들으며 액체를 바라봤다.
아샤는 주의 사항이라든가 다른 말들을 상냥하게 덧붙였지만 라얀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얼른 뭍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그래서 직접 성문을 두드려 에리히를 만나고 싶었다.
“저 그런데요. 아샤.”
안달이 난 와중에도 라얀은 의문이 들었다.
“왜 이런 걸 제게 주세요? 혹시 제게 뭘 바라는 게, 아니, 저한테 흑해로 오라거나…….”
“하하.”
라얀의 말은 그가 소리 내 웃는 소리에 묻혔다. 아샤는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양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라얀은 입을 꾹 다물고 그가 웃음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아샤의 웃음은 길었다. 잦아들 즈음은 라얀의 입술이 삐죽거리며 튀어나오려 할 때였다. 그는 겨우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가다듬었다.
“종종, 나를 찾아와 주렴.”
“…….”
“그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줘도 좋고. 내게 네 시간의 조금을 내어주면 된단다. 꽤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하는데.”
그의 말대로 어려운 요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까 제게 적대적이었던 켈피도 그렇고, 흑해에 오는 것은 무서웠다. 라얀의 머뭇거림을 아샤는 금방 짐작해 냈다.
“수락한다면 그 시간 동안은 흑해의 누구도 네게 날 선 적의를 겨누지 못할 거란다.”
이만하면 자신이 밑지는 거라고, 아샤는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말했다. 이에 거짓이 없다면 이건 정말로 그가 밑지는 제안이 맞았다. 아무리 라얀이라고 해도 미심쩍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끝 모를 고독은 종종 이렇게 누군가에게 관대를 베풀게 만들지.”
그가 고독을 입에 담을 때 말로 설명하지 못할 괴리감이 들었지만 라얀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자그맣게 끄덕이자 아샤의 표정이 밝아졌다. 얼른 가보라는 그의 말에, 라얀은 그가 내어준 것을 꼭 움켜쥐고 뒤돌아서 흑해를 나갔다.
라얀이 떠나간 홀.
아샤는 왕좌에 앉아 권태롭게 몸을 늘어트렸다. 기척이 들리고 씨 서펜트가 들어와서 몸을 조아렸다. 경애를 표하는 몸짓에 스윽 눈길을 주었다. 온기 없는 자안은 서늘하기만 했다. 아까의 웃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아이는?”
그는 곧장 본론을 말했다.
<무사히 흑해를 벗어났습니다. 누구도 그 어린 인어에게 해를 끼치지는 못할 겁니다.>
당연한 말이다. 아샤가 건드리지 말라고 명했고,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감히 그에게 반발하려 했던 상어 둘은 그날 그의 손에 갈가리 찢겨 죽었다. 잔혹한 손속이 고작 며칠 전의 일이었으니 그날 풍긴 피비린내를 기억하는 흑해의 것들은 아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눈치를 보았다.
<한데 왕이시여.>
몇백 년 전, 흑해를 완전히 장악해 지배자로 군림하는 아샤를 흑해의 것들은 왕이라 칭했다. 아샤는 그들의 왕이 될 생각은 없으나, 복종하겠다는 것들을 내칠 필요도 없으니 두었다.
<어린 인어에게 어찌 호의를 베푸십니까.>
“동족이라 그런 것인가 싶어서?”
씨 서펜트는 서둘러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아샤는 보통 흑해에 머물지만 권태를 이기지 못할 때는 밖으로 나가 학살을 일삼았다. 그의 손에 짓이겨지는 것은 고작해야 아티사를 들락거리는 것들만이 아니었다. 인어 역시 여지없이 그의 손에 찢겨 참혹한 시체가 되었다.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그 시기엔 그에게선 씻겨나가지 않는 피비린내가 풍겼고, 그것이 아샤의 코끝에 번질 때가 되어서야 무의미한 학살을 중단하고 도로 흑해에 틀어박혀 시간을 허비했다.
그날도 그런 목적으로 나간 날이었는데 아샤는 어린 인어를 죽이는 대신 살려 보내다 못해 흑해의 것들로부터 보호하는 자비를 베풀었다. 그것도 일시적이 아니라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유라.”
아샤는 허공에다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어린 인어를 생각하는 눈엔 모처럼 빛이 돌았다.
그는 이유를 묻는 라얀에게 고독함을 까닭으로 들었다. 그 대답은 완전한 진실은 아니었으나 완벽한 거짓 또한 아니었다.
“재미있어서.”
인간과 어떤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선대가 그러니 자연스레 그들의 감정을 습득한 인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바깥의 세계에 동경을 품고, 기어이는 인간과 인연을 맺은 존재. 그것도 ‘그’ 메르의 후계자라니. 결말이 어떻게 날지 궁금해졌다.
“…제법 오랫동안, 나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줄 것 같거든.”
부디 이런 내 예상이 맞아야 할 텐데. 만약 그가 다시 지루한 권태를 느낀다면 스스로를 흠이라고 칭한 가여운 어린 인어는 그의 보호를 잃고 갈가리 찢기고야 말 테니.
아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 * *
미지근한 액체가 넘겨질 때마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에르하르트가 불편을 참지 못하고 결국 미간을 좁히자 레아는 안절부절못했다.
“많이 불편하신가요?”
깨어나고 나서 골백번은 들었을 질문이다. 대답해 봐야 제대로 듣는 것 같지도 않아서 에르하르트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꾸역꾸역 삼켰다. 혓바늘이 돋은 데다가 목은 아팠고, 식욕 역시 딱히 없었지만 레아는 며칠 만에야 의식을 찾은 그에게 뭐라도 챙겨 먹이려고 애를 쓰는 게 보였다. 에르하르트는 그것을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전하. 제가 보이세요?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조금 전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눈물이 맺힌 다갈색 눈동자였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며칠 새 야윈 뺨은 그녀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텐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에르하르트는 착실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때에서야 레아는 며칠간 속에 고였을 숨을 길게 뱉어내었고, 지금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진정하지 못하다가 이제 겨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피곤해. 쉬어야겠다.”
“그렇게 하셔요, 전하. 아까 의사가 그러지 않습니까. 아무 생각 말고 쉬는 게 제일이라고.”
에르하르트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서리자 레아는 얼른 그가 들고 있던 잔을 거두고 눕는 것을 도왔다. 이불을 여며주기까지 했다. 평소였다면 알아서 할 거라며 손길을 밀어냈을 텐데 오늘은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레아는 거듭 돌아보다가 겨우 문을 닫고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에르하르트는 팔을 비스듬히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새파란 눈은 한 점 온기 없이 냉랭했다.
“…사흘이라. 사흘.”
에르하르트는 자신이 의식을 잃었던 시간을 곱씹었다. 사흘. 길었다. 고비는 넘겼다는데 계속 깨어나지를 않아서 걱정했다며 레아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방심했다.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는데. 평화로운 분위기에 젖어서 경계를 늦추었다. 궁정에 있을 때는 올리비아의 관심이 늘 그에게 쏠려 있었던 터라 이런 식으로 손을 댄 적이 없기에 방심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니까 에르하르트나 레아나 그의 차에 독이 들었으리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이번은 운이 좋았다. 올리비아는 잔걱정이 많았고, 매일 전전긍긍하다가 그에게 독을 조금씩 먹여 내성을 기르게 했다. 아니, 이것을 운이라고 해야 했을까. 어쩌면 황제는 정말로 에르하르트를 죽일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경고, 혹은 과시였다.
가령, 멀리 있어도 너는 여전히 내 손아귀를 벗어난 게 아니라고. 올리비아와 안부 서신을 전하지 말라고. 서서히 그녀에게서 잊히라고. 그래서 언제고 다가올 죽음을 얌전히 기다리라고.
평소였더라면 에르하르트는 순응했을 것이다.
지겹게도 느리게 다가오는 죽음을 곱씹으며, 또 차라리 그럴 바엔 스스로 죽음의 손을 잡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을 터였다. 조금은 충동적으로 절벽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던 그때처럼.
“자꾸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그런데 이제 와 의문이 들었다. 굳이, 이렇게 얌전히 살아줘야 하는가, 하고.
까닭도 알 수 없는 악의를 순순히 감당하면서? 내가 왜? 그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의문은 에르하르트의 마음에서 무기력을 걷어내고 대신 그 빈자리를 분노의 불씨로 채웠다.
어쩌면 이제는 때때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시시각각 닥쳐오는 위협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란 간단하다. 원래의 주인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가지는 것이다. 쉽지는 않았지만 아주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일단 그의 뜻을 안다면 올리비아가 전심전력으로 도울 테고, 황제의 성화로 올리비아를 입적한 윈스턴 공작가는 글쎄, 이것을 보고도 그를 돕지 않으면 머저리들이 아닐까.
“…….”
에르하르트가 뻗은 손바닥에는 마력으로 빚어낸 빛의 구가 희미해졌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하며 점멸했다. 대기의 마나가 그의 손을 중점으로 둥글게 모였다.
그는 곧 인상을 찡그리며 마력을 흩어냈다. 아직 몸이 회복이 덜 된 터라 금세 기력이 달렸다. 역시 쉬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은 자꾸만 수면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에르하르트는 잠이 들지 못한 채 또다시 사흘을 곱씹었다.
아까와 같은 감정의 결은 아니었다.
에르하르트의 시선이 슬쩍 어딘가로 향했다. 바깥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는 벽장이었다. 오래 고민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몸을 움찔거리던 에르하르트는 벽장을 등지며 눈을 꾹 감았다. 그로도 모자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위 아닌 시위는 얼마 이어지지 않았다. 이불 끝을 밀어내며 살며시 시선을 올린 에르하르트는 조금 더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자꾸만 늘어지는 몸을 추슬렀다. 침대 아래로 발을 디디자 찰나 현기증이 일었다. 사흘이나 누워 있었다고 기운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별수 없었다.
한 발, 한 발 조심히 발을 디디는데 문밖이 소란했다.
에르하르트는 혀를 찼다. 오늘에서야 깨어난 터라 부쩍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레아가 어지간한 일로 소란을 허락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시끄러운 것은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즉 레아 선에서 해결이 안 된다면 그녀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올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레아가 들어왔는데 에르하르트가 침대에 없다면?
레아는 그 자리에서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는 한숨을 쉬며 문가로 다가갔다. 일단 무슨 일인지라도 파악해 볼 셈이었다. 가로막는 문은 육중했으나 귀를 기울이면 듣지 못할 것도 없었다.
“대장. 이것은 경비 선에서 쫓아낼 일이지, 그것을 굳이 여기까지 끌고 올 일인지 모르겠네.”
레아의 목소리가 냉랭하고 신경질적이었다. 제 앞에선 마냥 염려만 하고 죄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아마 그가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내내 저렇게 경계를 곤두세웠으리라.
“그것이 차림새는 영 볼품없지만, …그게 또, 그자의 생김새가 마냥 무시할 정도가 아니라.”
경비대장은 우물쭈물하면서도 할 말을 했다. 그가 들은 것은 고작해야 대화의 단편이었으나 대강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됐다. 그리고 왜 저렇게 레아가 날 서게 구는 것인지도.
그에게 독을 탄 차를 내온 시녀는 그 자리에서 자살했고, 대강 뒤에 누가 있는지도 짐작할 테지만 레아는 지금 신원을 알 수 없는 모든 자가 의심스러운 게 분명했다.
“하옵고 계속 전하를 찾으시니, 혹 전하와 연이 닿은 이가 아닌가 하여.”
에르하르트는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눈매를 찡그렸다.
“전하께서는 아르헨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네. 그동안 닿을 만한 연도 달리 없었지.”
레아 역시 다를 바 없는 반응이었다. 에르하르트는 아르헨에 내려온 이후로 연회를 한 번 베풀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달리 귀족들과 교류를 이어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그의 행보가 어떨지 알 수 없으나, 설령 교류를 하더라도 그는 미래의 일일 뿐, 현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경비대장은 호소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더 들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레아 선에서 해결될 테니,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올 일은 없을 터였다. 에르하르트는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라얀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알 것이라며 계속 호소하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인. 부디 전하께 말씀을 전해 올릴 수 있도록…….”
경비대장의 말은 채 완성되지 않았다. 반대 방향으로 한 발짝 걸음을 디디려던 에르하르트가 문을 열고 나갔기 때문이다. 경비대장은 곧장 경의를 표했고, 레아는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조급한 마음을 겨우 눌렀다.
“그 애를 데려와.”
“예, 예?”
“아니, 아니다. 내가 직접 가겠다.”
에르하르트는 결국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걸음을 놀렸다. 걸을 때마다 힘에 부쳤지만, 신경이 온통 다른 데 기울어져 있었다. 레아가 기겁하며 그의 뒤를 따르며 차라리 불러올 테니 기다리라고 호소했지만 그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 * *
라얀은 울적함이 물든 녹안으로 도저히 제게 열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거대한 성문을 바라봤다. 먼바다에서 보았을 때도 우뚝 서 있던 성은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컸다. 물론 아티사의 궁전보다 아름답진 않았지만 밝을 때 보면 꽤 아름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은 했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은 잠시였다.
겨우겨우 왔는데 저 문은 도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리히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 당연히 그에게 데려다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경계 어린 눈으로 자신을 쫓아내려 할 뿐이었다.
“꼬마. 지금이라도 가지 그러냐?”
벽에 등을 기댄 채 쪼그려 앉아 있는 그를 보며 인간이 혀를 쯧쯧 차며 넌지시 권했다. 라얀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장님이 백작 부인께 고하러 갔다. 까딱 재수 없으면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니까?”
“…….”
“거 알아서 해라. 감옥에 갇히면 고생하는 건 너지. 어린 게 혹시 감옥에 갇혀 고생할까 봐 신경을 써도 듣는 척도 하지 않는군.”
라얀이 내내 묵묵부답이자 인간도 빈정이 상한 것 같았다. 라얀이 말없이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그는 홀린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못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언제 씩씩거렸냐는 양 흠흠, 목을 가다듬더니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렸다.
그의 시선이 치워지자 라얀은 다시 고개를 돌려서 성문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슬쩍 시선을 올리자 첨탑에 걸려 있던 둥근 달이 그새 옆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동굴에서 소요한 시간도 짧지 않은데 여기에서 저들과 대치한 시간도 있었으니. 한데 에리히는 도저히 눈앞에 나타나질 않으니 자꾸만 초조해졌다.
일단은 돌아가는 게 좋을까.
하지만 에리히를 보기 위해 다시 올라오려면 한참이 걸린다. 동굴에서 매일 기다릴 수야 있지만, 그건 이 성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보다도 기약이 없었다.
“에리히는, 정말 못 만나?”
라얀은 잔뜩 풀이 죽어 제게 계속 가라 밀어내던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부터 자꾸 자신이 에리히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기막혀하며 당혹스러워하던 사내는 이제 놀라지도 않았고,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손이나 휘저을 뿐이다.
라얀은 하늘을 한 번 더 보다가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셌다. 딱 열까지만 세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기약이 없더라도 오늘은 가야 했다. 그에게 허락된 지상의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벌써 숨이 가빴다. 호흡을 해도 턱없이 모자랐다.
하나, 둘, …일곱, 여덟.
숫자는 점점 열을 향해 나아갔다. 여덟에서 그는 숫자를 세는 것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아홉을 세기 시작했을 때,
“라얀.”
그의 정수리로 목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열.”
라얀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손을 뻗으며 고민 없이 덥석 안겼다. 몸을 움찔 떤 상대방도 이내 몸을 낮추며 그를 안아주었다.
에리히가 그를 마주 안는 순간,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라얀은 그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성체의 인간이 적잖이 놀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실제로 레아는 놀란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생김새야 경비대장이 묘사한 바대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귀티가 흘러넘치기는 했다. 구불거리며 길게 늘어진 머리는 제국에서 그리 흔하지 않은 새까만 머리였고, 아주 말갛고 연한 초록색의 눈은 별을 박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어디에 있든 시선을 받을 만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김새와 달리 행색은 영 초라한 소년이 에르하르트를 덥석 안았을 때 레아는 소년의 외모에 감탄했던 것도 잊고 걸음을 재게 놀렸다. 신체 접촉이라면 질색하는 에르하르트가 혹여 저 소년을 밀어내면 다칠 게 눈에 훤했기 때문이다.
해서 살살 달래보려고 했는데 그녀가 마주한 것이 자신을 끌어안는 소년을 냅다 밀치는 게 아니라 마주 안아주는 에르하르트라니. 그녀는 꿈인가 싶어 남몰래 손등을 꼬집어보아야 했다. 당연히 현실이라 따끔하니 아팠다.
“전하.”
그녀는 얼른 정신을 수습했다. 성문 앞이었다. 늦은 밤이라고 해도 사람의 시선이 있었다. 저리 찬란한 금발을 휘날리고 있으니 누구든 그가 황자인 걸 알 텐데 길바닥에서 웬 소년을 마주 안고 있는 모습은 괜한 추문에 시달리기에 십상이었다.
“아…….”
에르하르트는 레아의 부름에 뒤늦게 정신을 수습하며 안고 있던 몸을 살짝 떨어트렸다. 정말 살짝이라 틈이 보이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래.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라 안으로 가야지.”
“에리히.”
소년이 에르하르트를 올리비아나 부르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소년이 손을 파닥파닥 흔들자 순순히 허리를 굽혀 귀를 내어주는 에르하르트의 모습도 기함할 일이었다.
무어라 속닥거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에르하르트의 표정이 점점 변하는 것만큼은 잘 보였다. 하. 이마를 짚으며 숨을 내쉰 에르하르트는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손을 맞잡고 일어나려다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다리를 쓰는 게 영 불안해 보였다. 그것이 비단 제게만 보이는 부분이 아니었는지 에르하르트는 소년을 훌쩍 안았다.
“전.”
에르하르트는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오늘에야 겨우 깨어났다. 기력도 회복하지 못했을 텐데 제 또래의 소년을 안아 드는 것을 보고 레아는 입술을 뻐끔거렸지만 더 말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젓는 그로 인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을, 아니, 마차를 준비해라. 이 아이를 데려다줘야 할 것 같으니.”
골머리 썩는 표정으로 말하는 에르하르트의 모습 역시 낯설어 놀라웠지만 레아는 거기에 신경을 기울일 수 없었다. 에르하르트는 분명 저 소년을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품을 봐서는 저 소년을 저택으로 데려다주려는 이가 누구인지 명확히 보였다.
“다른 이에게 일러서 부족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레아는 더 이상 그가 원하는 대로 입을 다물어줄 수가 없었다.
“내가 가겠다.”
“전하께서는 쉬셔야 합니다.”
“이건 명령이야.”
“전하!”
“명령이라고 했다. 캐번디 백작 부인.”
에르하르트가 그녀를 레아나 유모가 아닌 백작 부인이라고 칭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의지가 확고한지를 보여주는 뜻이기도 했다.
묘한 대치가 이어지자 비슷한 또래에게 안겨 있는 게 불편한지 연신 몸을 뒤척거리던 소년이 몸을 굳히고 눈치를 보는 게 보였다. 데구루루 구르는 눈동자는 에르하르트를 한 번, 레아를 한 번 봤다. 그러더니 에르하르트의 옷을 잡고 살살 흔들었다. 시선을 흩트리려는 게 분명했다.
“…금방 돌아오셔야 합니다.”
결국, 굽힌 쪽은 레아였다. 에르하르트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내 마차가 준비되고, 에르하르트는 소년을 에스코트해 마차에 먼저 태운 다음에야 뒤따라 탔다. 레아는 기가 막혔으나 마차의 문을 닫아주고, 마부에게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탁. 마차의 문이 닫히자마자 라얀은 다리가 아픈 것도 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게 인간들이 타고 다니는 거야?”
해마 같은 건가 보다. 신기했다. 그러나 기다리는 대답은 없고 툭툭, 손가락으로 의자를 치는 소리가 곧 그의 주의를 환기했다. 라얀은 에리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게 중요해?”
물론 아니다. 신기해서 정신을 빼앗겼을 뿐 이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라얀은 에르하르트를 보자마자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일단은 왜 오지 않았느냐는 것부터, 그사이 얼굴은 왜 그렇게 상했느냐는 것까지.
라얀이 입술만 달싹거리자 한숨을 내쉰 에리히가 벽에 손을 대고서는 무어라 중얼거린다. 손을 중심으로 빛이 번지더니 라얀과 에리히의 형상이 빛에 휩싸였다. 라얀이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그들은 늘 만나는 동굴에 도착해 있었다.
서는 바람에 체중이 온전히 실리자 또 다리가 지끈거렸다. 익숙해질 듯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이었다. 그래도 묘약을 삼키고 꼬리가 갈라져 다리가 되는 때보다야 나았다.
그때는 정말 태어나 처음 겪는 고통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다른 성체 인어들은 인간화할 때 매번 이런 고통을 겪나 했지만, 그랬더라면 진작 아일라가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니, 어쩌면 조금 아플 수도 있겠구나.’
그러고 보니 아샤가 조금 아플 수도 있다고 했던가. 이게 어떻게 ‘조금’일 수 있지. 원망도 잠시, 생살이 쪼개지는 듯한 아픔이 등골을 타고 흘러 숨을 헐떡거릴 때에서야 청록빛의 비늘로 뒤덮여 있던 꼬리가 인간의 다리가 되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아파서 끙끙거리던 라얀은 파도에 떠밀려 온 게 분명한 로브를 대충 맨몸에 걸치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성에 갔고, 에리히를 만났으며, 지금이었다.
“다리는 또 왜 이러고.”
금세 라얀의 불편을 눈치챈 에리히가 자기도 얼굴이 아까보다 부쩍 창백해진 주제에도 그를 부축하면서 투덜거렸다. 아픈 와중에도 그의 창백한 얼굴이 신경 쓰이고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마냥 작은 인간일 줄로만 알았는데 라얀이 인간의 두 다리를 얻어 땅에 서니 키 높이가 비슷했다. 물론 근소한 차이로 라얀이 조금 더 컸지만.
라얀은 그를 위아래로 훑기 바쁜데 에리히는 그를 성실히 부축해 경계에 세워놓았다. 눈앞에 바다가 보였다. 라얀은 조금 주저하다가 훌쩍 뛰어들었다. 풍덩. 새하얀 포말이 일며 몽글몽글한 거품이 올라왔다.
두 다리가 붙으며 반짝거리는 청록색의 비늘이 피부를 뒤덮었다. 사라졌던 아가미도 목덜미에 작게 생겨서 빠끔빠끔 움직이고, 인간처럼 동그래졌던 귀는 다시 날렵해졌으며, 손가락 사이사이엔 다시 갈퀴가 생겼다.
몸을 둥글게 만 채 물속에서의 호흡을 즐긴 라얀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상기하고 물 밖으로 불쑥 나갔다. 에리히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는 분명 반가워하는 기색으로 마주 안아줬으면서, 이제는 또 쌀쌀맞았다.
“그래서, 그동안 왜 오지 않았어?”
“너도 안 왔으면서.”
라얀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되받아쳤다.
“…일이 있었다. 하여튼 왜 안 왔지?”
그는 말을 뭉뚱그리며 화살을 돌렸다. 매번 저렇게 말을 삼키지. 라얀은 눈을 흘겼지만 에리히는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몰라.”
“라얀.”
“…….”
“그래. 먼저 말하지. 조금 아팠어.”
라얀이 도저히 입을 열 것 같지 않자 에리히가 한숨을 내쉬며 순순히 말했다. 라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어쩐지. 얼굴이 좋지 않더라니. 마냥 어린 줄 알았던 에리히가 그를 훌쩍 안아 드는 게 신기하고 새삼스러웠는데 역시 연약한 인간이 맞는 것이다.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니다.”
에리히는 험악한 얼굴로 제 연약함을 부정했다. 라얀은 그게 더 애틋해서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많이 아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지금 더 안 좋아 보이는 건, …됐다. 이래서 말하지 않으려고 한 거야.”
짜증스러운 말투를 감추지 못하고 나직하게 짓씹은 에리히는 제 뺨에 얹은 라얀의 손을 치우려는 듯 고개를 틀었다. 자칫 매정해 보이지만 제 온기가 라얀에겐 뜨겁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하는 배려였다.
그러고 보니 아쉽다. 인간일 때는 그와 마주 안아도 그렇게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딱 끌어안기 좋은 아주 말랑말랑한 온기. 한데 변신이 풀리자마자 다시 그의 체온이 뜨겁게 느껴졌다.
“하여튼 나도 말했으니 너도 대답해야지, 라얀. 왜 오지 않았어? 내가 얼마나…….”
쏘아붙이던 에리히가 말하는 중간에 입을 다물었다. 마땅찮아 보였고, 귀 끝은 발그스름했다.
“내가 얼마나, 뭐? 왜 말하다 말아. 에리히?”
“할 필요 없는 말이었으니까.”
“치.”
“그래서 오지 않은 이유가 뭐냐니까. 라얀.”
라얀은 곰곰이 생각했다. 오지 못한 이유는 역시 알레의 감시 때문이지만, 원인은 따로 있으니 그것부터 풀어내야 할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상어 떼에게 쫓겼었어.”
“상어? 쫓겨?”
“아샤 덕에 별일은 없었는데, 그날 몰래 바깥에 나갔다가 온 걸 알레한테 들켜서 못 나왔어.”
그때 상어에게 쫓기던 공포와 손짓 한 번으로 상어들을 쫓아냈던 아샤, 그리고 제게 무섭게 화내던 알레까지 전부 다 생생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무서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겨우 알레를 설득해서 왔더니 너는 안 보이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연약한 에리히에게 의젓한 모습을 보이지 못할망정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
그런 마음으로 부러 가볍게 이야기했는데도 에리히의 표정이 심각했다. 어쩌면 상어의 날카로운 이빨을 상상하며 겁을 먹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친 데는? 어디 다치진 않았어?”
어차피 네가 상어를 만날 일은 없다고 말하려던 라얀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얀의 반응이 굼뜨자 에리히는 유심한 시선으로 그를 살폈다. 만지지도 못하고 살피는 모양새에 눈을 깜빡거리던 라얀의 입꼬리가 풀렸다.
“봐봐.”
라얀은 물속에서 몸을 빙빙 돌렸다가 상체를 바위에 걸친 채로 여봐란듯이 보여주었다. 상어의 주둥이에 긁힌 등이 불그스름했지만, 하루 자고 나니 금세 가라앉아서 이제는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친 데 하나도 없지?”
에리히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다친 구석을 살펴볼 수 없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라얀은 그제야 밝게 웃으며 조잘조잘 말을 붙였다. 만나지 못한 기간이 짧지만은 않았으니 쌓인 말이 많았다. 가령 조만간 알레와 또 올 수도 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난 것은 비밀로 해야 한다든가. 에리히는 왜 그래야 하냐고 하면서도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바위에 팔꿈치를 걸친 채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도란도란 말을 나누는데 문득 아쉬웠다. 기왕 다리를 가졌었으니 그와 이 바다를 벗어나 어디든 걸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얼른 보름이 다시 오면 좋겠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라얀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새침을 떨었다. 오늘은 그도 경황이 없어 더 캐묻는 것을 잊은 듯하니 보름이 오면 그때 말해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나도 인간들처럼 땅을 디뎌 걸을 수 있다고. 적당한 온기의 손도 마주 잡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어쨌든 우리 무슨 일이 생기면 앞으로 여기다 뭐라도 남겨두기야. 기다리지 않게.”
“너나 잘, …그래.”
에리히는 반박하려다가 곧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대답했다.
“자. 약속해.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약속해?”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마리는 약속할 때 새끼손가락을 걸라고 칭얼거리더군.”
“마리? 새끼손가락? 그걸 어떻게 걸어?”
“자. 이렇게.”
에리히는 손을 가볍게 쥐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것을 멀뚱멀뚱 보자 그는 라얀의 손도 똑같은 모양새로 만든 다음에 제 새끼손가락을 얽었다. 혹여 제 온기가 뜨거울까 봐 조금 틈을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얀은 그의 배려보다는 얽히는 손가락에 더 관심이 갔다. 꼭 인어들이 꼬리를 얽는 것과 같지 않나. 라얀은 새끼손가락을 단단히 얽은 채 꼼지락거리다가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렸다. 부서지는 달빛이 그들의 얽힌 손을 적셨다.
“약속.”
라얀은 이 약속의 표식이 썩 마음에 들어서 살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