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에리히. 침대에 엎드려 누운 라얀은 여전히 생소한 이름을 혀로 굴렸다. 동시에 금실처럼 가는 머리카락을 살폈다. 아티사로 돌아온 그는 가장 먼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나도록 꼭 움켜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수정구에 보관했다. 제 손바닥만 한 길이의 머리카락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잃어버릴 것처럼 가늘어 어쩔 수 없었다.
투명한 수정구 안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머리카락은 반짝거렸다. 자체적으로 빛이 나는 것도 아님에도 그랬고, 이것을 볼 때마다 에리히라고 불러달라던 그 인간이 떠올랐다.
연약하기 짝이 없을 줄 알았던 인간은 예상했던 것과 달리 느물거렸고, 조금 얄미웠다. 음. 그러니까, 두 번째 성장을 마치고 능력을 발현해 말석이나마 솔리저스(수호 인어를 이르는 명칭)의 자리를 허락받은 아일라와 성격이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심술궂었다.
이름 부르지 말라니까 자기가 부르고 싶다며 라얀이라고 부르는 것이라든가, 다른 것을 담보로 잡고 대답을 미루는 것이라든가.
“라얀!”
아, 아니다. 라얀은 얼른 제 판단을 정정했다. 인간은 저렇게 무턱대고 찾아오지는 못할 테니, 아일라와 닮았다고 하는 건 아무래도 그 인간에게 대단한 실례였다.
아일라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인어 중 성체가 되지 못한 라얀을 유일하게 멀리하지 않는 존재였다. 시간이 날 때면 그의 궁을 찾는 그녀는 여느 때처럼 무턱대고 라얀을 찾아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뭐 해?”
둥실거리던 수정구를 얼른 손으로 낚아채며 돌아보자 청록빛의 머리칼이 부드럽게 굽이치는 여성체의 인어가 라얀에게 다가와 꼬리로 제 꼬리를 톡톡 두드리듯이 맞댔다.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그건 또 뭐고.”
민첩하게 숨긴다고 숨겼는데 그새 봤는지 표정이 짓궂었다. 그건 어릴 때와 똑 닮았다.
“아무것도 아니.”
“―기는. 수정구? 안에 뭐가 들었네.”
손을 뻗어 수정구를 낚아채 간 아일라는 유심한 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저게 인간의 머리카락이라는 걸 알 리 없지만 괜히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무슨, 어디서 누구 수염이라도 뽑았니?”
“이리 줘.”
“아니면 또 유리가 어디서 이상한 거 물어다 준 거야?”
수정구를 손바닥 위에서 도르륵 굴리던 아일라의 눈이 이내 미심쩍은 빛을 띠며 가늘어졌다. 어릴 적부터 붙어 있다시피 한 아일라는 유리의 장난기를 잘 알고 있었고, 거기 곧잘 넘어가던 라얀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아니야.”
“그러면?”
“그냥…….”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라얀은 말을 흐렸다. 눈초리가 점점 미심쩍어지는 아일라를 외면하며 그녀의 손에서 수정구를 낚아채 다른 곳에 뒀다.
아일라의 시선이 계속 따라붙기에 또 빼앗기거나 추궁당할까 봐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더 이상 그 인간의 머리카락이 담긴 수정구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라얀은 머쓱해졌다. 아마도 그런 라얀의 성향을 알기에 그녀 또한 억지로 관심을 거둔 것일 수도 있었다.
“안 바빠?”
“바빠.”
바빠도 너무 바쁘다며 투정을 부리는 아일라는 라얀의 다리 위에 제 머리를 올리고 비비적거렸다. 둘 다 어렸을 때부터 든 버릇이었지만 라얀은 이 상황이 조금 웃기기도 했다. 완연한 성체가 된 아일라가 엎드려 제 지느러미에 뺨을 비비적거리는 건 아무래도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무거워.”
또한, 성체가 된 아일라가 여전히 이런 버릇을 가지고 있는 건 옳지 않다. 누구도 라얀을 그리 칭하지 않았지만 그는 하자품이었고, 아일라는 제 또래의 인어 중에서도 능력이 단연 발군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비슷한 시기에 첫 번째 성장을 마친 인어 중 유일하게 두 번째 성장을 마치고 솔리저스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겠는가.
그러다 보니 아일라의 반려가 되고 싶어 하는 인어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들은 아일라가 라얀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걸 싫어할 것이다.
“거짓말하지 마.”
밀어내려고 하자 더 달라붙더니 기어이는 끌어안았다. 굽실거리는 짙푸른 색의 머리카락이 살갗에 닿아 간지럽혔다. 바르작거리다가 체념했다. 스스로 인정한 바대로 바쁜 아일라가 시간을 쪼개가며 온 이유야 빤했다. 며칠 전 그날 도무지 시간을 내지 못해서 찾아오질 못했으니 틈이 나자마자 그를 살피는 것이다. 툭툭 건네는 배려가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설령 무겁다고 해도 익숙해져야지. 라얀.”
“왜?”
“그거야, 너는 내 약혼자잖아.”
아일라는 대체 언제의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 어린 시절, 그들은 반려의 인을 나누기로 약속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메르의 뜻이었다. 지금만 봐도 알겠지만 어릴 적부터 아일라는 장차 성장 후의 미래가 기대되는 인어였다. 메르는 아일라를 라얀의 곁에 곧잘 붙여두려 했고, 반려 이야기도 오가긴 했다.
하지만 아일라는 성체가 되었으며, 라얀은 당장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하자품이 되었다. 이제 우스갯소리로라도 약혼이든, 반려든 그런 말을 할 수 없었고, 해서도 안 됐다. 그리고 어차피 라얀이 성체가 되지 않는 이상 반려의 인을 나눌 수도 없었다.
“켈라가 그 말을 들으면 상심하겠어.”
“켈라라니. 나보다 능력 발현도 늦는.”
―까지 말하던 아일라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제 품에 안고 비비적거리는 라얀은 ‘그’ 켈라보다도 더 못나 성체도 되지 못했다는 걸 잠시 잊은 게 분명했고,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당황하는 것도 아주 선명하게 티가 났다.
그랬기에 라얀은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그, 라얀. 밖에 나갈까?”
라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일라가 말하는 게 궁의 바깥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 듯해서.
“어떻게?”
이미 알레와 수차례 아티사 바깥으로 나갔고, 유리와도 나간 적 있으며, 심지어 저 혼자 나간 적도 몇 번 있으면서도 라얀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라얀.”
그를 부르는 아일라의 눈이 가느스름했다.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알레와 곧잘 나간 걸 내가 몰랐을까 봐? 영 답답해하는 것 같고, 알레가 그 성격에 너를 어디 위험한 데 데려갔을 리는 없으니 모르는 척했을 뿐이야.”
라얀은 덜컥 내려앉는 심장을 겨우 제자리에 놓으며 가슴을 쓸었다. 보아하니 자세한 건 모르는 게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모르는 게 당연했다.
아일라가 라얀 혼자 바깥세상을 구경 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저 성격에 저렇게 평온하게 말했을 리 없다. 알레는 물론 유리까지 진작 가만두지 않았을 테고 어마어마한 잔소리에 압사당하겠지. 어쩌면 아일라는 제 일마저 뒤로하고 라얀을 감시할지도 모른다. 그런 성격이었다.
“나가자, 라얀. 알레도 없어서 요즘은 한참 못 나갔을 거 아니야.”
알레와 유리가 없는 걸 기회 삼아 이미 몇 번이나 혼자 나간 적 있던 라얀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모르는 척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일라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아일라는 라얀을 바깥으로 잡아끌었다. 아티사의 수호 결계를 벗어나자 아름다운 풍경은 사라졌지만 심해는 여전히 아득했으며, 안온했다. 바깥세상도 아름답지만 이곳에 비할 바 아니었다. 라얀은 아티사를, 그가 태어난 이 바다를 더할 나위 없이 사랑했다.
라얀의 꼬리가 살랑거리자 아일라의 입꼬리도 위로 끌어 당겨졌다. 정작 그녀가 신나서 온갖 곳을 데리고 다녔다. 지나는 중간중간 다른 자들을 마주치기도 했다.
아일라가 어린 인어를 데리고 나온 것에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 하려다가 그게 라얀인 것을 확인한 뒤 입을 꾹 다물고 지나친 인어도 있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시선들이었다.
“라얀.”
정작 아일라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재미있는 데 갈래?”
그러니 이건 그녀 차원의 위로였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잠깐 고심하는 듯하던 아일라는 라얀을 끌고 갔다. 아일라의 ‘재미’는 다른 이들과 궤가 다르므로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설마 그녀가 그를 크라켄의 먹이로 던져주진 않을 것이다. 곧 걱정을 풀고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물살의 흐름과 유연하게 치고 가는 움직임에 속도가 붙었다.
그들이 멈춘 것은 청록과 흑색의 경계, 그러니까 흑해가 보일 즈음이었다.
라얀은 시꺼먼 구덩이 같은 경계를 얼빠져서 봤다. 흑해 너머는 크라켄과 씨 서펜트, 그리고 상어들의 영역이었다. 메르는 그들의 영역을 존중해 주었다. 그보다는 불가침 구역이라 보는 게 맞을 테지만, 어쨌든 왕은 흑해 너머의 영토에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렇기에 인어나 아티사와 메르에게 맹약한 일족 역시 흑해 가까이에는 실수로라도 가지 않았다.
인어에겐 가장 금기라 할 수 있는 바깥 세계는 오갔어도 흑해 근처까지 와본 것은 처음이었다. 라얀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아일라를 봤다. 지금 제정신이냐는 눈빛에 아일라는 칭찬을 들은 것도 아닌데 괜히 수줍은 표정으로 웃었다.
이런 걸 보면 아일라는 그의 오랜 친구가 맞았다.
“알레와 여기에 왔으면.”
“가만두지 않았겠지. 하지만 라얀. 내가 더 강한걸.”
범고래 일족의 후계자인 알레는 겨루기에 만만찮은 상대임이 분명할 텐데도 아일라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네가 괜히 나중에 호기심 생겨서 몰래 올까 봐 미리 데리고 온 거야. 한번 보라고.”
“…….”
“저 너머에는 마녀가 산다는 이야기가 있잖아.”
“어린 인어를 꼬여내는?”
“그렇지. 그리고 우리 라얀은 아직 어리니까. 나쁜 마녀가 라얀을 꾀어내 잡아먹으면 어떡해?”
반려 타령일 땐 언제고 그새 어린애 취급이었다.
라얀은 들은 체 만 체하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새까맣게 일렁이는 곳을 바라봤다. 흑해의 마녀가 어린 인어를 꾀어내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는 부모에서 아이에게 대대로 구전되는, 그러니까 동화 같은 것이다. 간혹 어린 인어가 말을 듣지 않으면 흑해의 마녀가 잡아간다는 식으로도 쓰이곤 했다.
“아일라. 정말로 흑해에 마녀가 살까?”
“궁금해?”
“뭐.”
“그냥 지어낸 얘기겠지. 기껏해야 상어 일족이나 크라켄 정도나 있지 않을까. 크라켄이라니. 으으. 생각만 해도 징그러워. …라얀 너, 미리 경고하는데 얼씬도 하지 마.”
가볍게 대꾸하던 아일라가 금세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라얀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겁도 없이 이 근처를 기웃거릴 만큼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라얀의 모든 관심은 흑해 너머가 아니라 바깥 세계의 그 인간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아.
올 때까지 기다린다던 그 애는 오늘도 기다리고 있을까.
며칠이 지났으니 어쩌면 체념해서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갑자기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분명 아티사로 돌아오는 내내 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추슬렀음에도 그랬다.
“이만 갈래.”
라얀이 흥미 잃은 눈으로 돌아가자고 하자 아일라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방금까지 호기심 어린 눈을 했기에 한참 구경하다 갈 줄 알았건만. 하지만 라얀의 기분이 별로 나빠 보이지도 않는 데다가 다 제쳐 놓고 오긴 했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아일라는 라얀을 궁에 데려다주고 여느 때처럼 친애를 표한 뒤 돌아갔다. 그리고 라얀이 홀로 남아 수정구를 만지작거리던 그 밤.
라얀은 수면 밖으로 빼꼼 머리를 내밀었고,
“이제야 온 거야?”
당연하다는 듯이 달빛 아래 푸르게 휘는 시선을 마주했다.
라얀은 그 눈을 마주치자마자 어딘가 꾹 뭉쳐져 있던 긴장과 초조가 풀리는 걸 느꼈다. 동시에 조금 약도 올랐다. 그가 언제고 오리라고 생각한 게 분명한 어린 인간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연한 심술이었다.
“오면 대답해 준다고 했으니까.”
아니, 라얀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태양처럼 빛나던 인간을 구한 건 본능이었고, 제 손으로 구한 인간에게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에리히는 인간이었고 그랬기에 친밀함을 느껴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들어 단단히 경계하려고 할 때면 자신을 해칠 의도는 없어 보이는 인간의 모습에 풀어지다가, 다시 또 그를 바깥으로 불러내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에 약이 오르고.
어려웠다.
라얀은 좋고 싫음이 분명했고, 싫어서 외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게 더 많았다. 알레나 유리, 아일라, 아티사는 말할 것도 없었고 이제는 그를 보려고 하지도 않는 메르까지도 싫지 않았다. 그런데 저 인간은 무어라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해했다.
“…왔으니까 말해줄 거야?”
“그때 내일 오면 말해준다고 했잖아. 라얀.”
이미 세 밤이나 지났는걸. 그는 손가락 세 개를 펼치고 흔들면서 대답했다.
대답을 듣는다는 건 오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말을 들은 라얀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라얀은 저번에 손으로 물을 끼얹었던 것과 달리 꼬리로 수면을 툭 올려쳤다.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물세례가 인간에게 쏟아졌다.
졸지에 쏟아지는 물을 뒤집어쓴 인간은 눈을 깜빡였다. 젖은 속눈썹이 늘어지듯 느리게 움직였다. 저번과 달리 거세게 물을 끼얹어놓고도 눈치를 보기는커녕 보란 듯이 흥흥, 콧김을 내뿜는 라얀을 보면서 그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추워.”
겨우 웃음을 감춘 에르하르트는 몸을 웅크렸다. 춥다고 중얼거렸지만 당연히 춥지 않았다. 춥기는. 제르바에 비하자면 이곳은 봄이었다.
또한 황제의 수작으로 궁내청에서는 제대로 물품을 보내주지 않아 겨울이면 장작이 부족해 벽난로도 틀지 못하고 추위를 견뎌야 했던 에르하르트는 그 감각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거짓말을 한 것은, 염려로 물드는 녹색 눈을 보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인간. 추워?”
예상했던 대로 라얀은 안절부절못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것도 잊고 가까이 다가와 에르하르트를 살폈다. 고작 물세례 따위가 뭐라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순한 가정에 불과했지만 이번에 확실해졌다. 라얀은 그를 연약하게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일 일이 있었나. 아니, 그걸 떠나서 억울했다. 연약해 보이는 건 자신이 아니라 라얀이었다. 그는 만지기라도 하면 깨질 것처럼 섬세해 보였다. 그런데 그런 라얀의 눈에는 자신이 연약해 보인다니. 레아에게 어리다는 소리야 수차례 들어봤지만 연약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어서 이상했다.
“응. 추워.”
억울하긴 하지만 그 감정은 뒤로하고 에르하르트는 눈을 내리깔며 추위를 타는 척 굴었다. 라얀은 갈등이 서린 눈으로 몸을 움찔거리더니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허공에 파닥거리는 게 그러면 물기가 마르지 않을까 하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아직도?”
라얀이 파닥거리는 손짓은 조금의 바람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에르하르트는 얕게 갈퀴가 있는 새하얀 손을 보다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 약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더운 바람이 젖은 옷을 훑고 지나갔다. 머리칼에 맺힌 물기가 건조하게 말랐다. 그것이 자신이 일으킨 손바람 때문이라고 여긴 라얀의 표정이 밝아졌다.
“라얀.”
이름을 불리는 게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닐 텐데 그는 낯선 것을 보듯 에르하르트를 바라봤다. 에메랄드보다는 옅고, 페리도트보다는 진한 색을 띤 눈은 왕국 하나를 통째로 내어줘도 아깝단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자, 봐.”
더 가까이는 다가오지 않으니 에르하르트가 먼저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바위에 걸터앉았다. 정강이까지 바닷물에 잠겼다. 춥다며? 라얀은 그런 의미를 담아 동그랗게 눈을 떴고 에르하르트는 모르는 척 옷자락에 여며온 수정구를 꺼냈다.
투명한 수정구의 만질만질한 표면에 얼굴이 비쳤다. 라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짧게 웃은 에르하르트는 수정구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아무것도 없던 수정구 안이 일렁이더니 연기가 뭉치고 엉기고 풀어지면서 어떤 형상을 그려냈다. 금빛의 태양과 새파란 하늘. 라얀의 눈처럼 녹빛을 띠는 바다. 새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날아올라 어디론가 향하는 하얀 새들, 동동 떠다니는 작은 선박.
낮의 세계였다.
아마도 라얀이 그토록 궁금해할.
“보여? 이게 태양이다.”
에르하르트는 수정구 속에 빚어진 태양을 톡톡 치며 일렀다.
이미 라얀의 눈은 빨려 들어갈 것처럼 수정구에 향해 있었다. 열기를 품은 눈을 보며 에르하르트는 며칠간의 고심이 그리 헛되지 않았음에 괜히 뿌듯했다. 비록 과하게 마력을 운용하느라 기력이 떨어져서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이것은 본래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에르하르트는 황실에 백여 년 만에 다시 태어난, 마정석 없이도 순수하게 대기의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존재였다. 결국은 사장되어버린 황위 계승의 법률을 도로 부활시킬 수 있는 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황제의 눈엣가시이기도 했다.
황제가 알게 된다면 에르하르트가 올리비아의 아들이든 아니든, 올리비아가 에르하르트를 죽이면 따라 죽겠다고 제 목숨을 건 협박에도 주저하지 않고 화근이 될 그를 제거하려고 들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올리비아는 그가 자라 어느 정도 힘을 갖추기 전까지는 에르하르트의 비밀을 지키고자 했다. 그 역시 어머니의 눈물겨운 모정을 알기에 생에 달리 미련 없었음에도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마력을 다루지 않았다. 게다가 어차피 아직은 마력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데 힘에 부치다 보니 딱히 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랬던 그가 대기의 마력을 끌어 양손에 휘어잡은 것은 제 눈앞에 있는 알 수 없는 이 미지의 존재 때문이다. 이곳이 제르바가 아니라 아르헨이라 해도 위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닌데도 후회는 없었다.
“이건 하늘이지.”
“…파래.”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귀가 붉었다. 하얀 뺨은 홍조가 서려 있었다. 작고 어린 인어는 명백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후회라는 감정에 사로잡힐 틈조차 없게 만들었다.
“밝아, 아티사처럼.”
아티사. 그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머무르는 인어의 영역을 이르는 말이라는 것쯤이야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낮인데 이렇게 어두울까 봐?”
“알레는 아무런 얘기도 해주지 않았고, 유리는 반짝거리는 태양만 얘기해 줬으니까.”
“그들은 누군데?”
“내 수호자.”
범고래랑 돌고래 일족의 후계자들이야. 이미 다른 데 관심이 쏠린 라얀은 그가 물어보지도 않은 것을 재잘거렸다. 언제 경계했냐는 듯이 잔뜩 풀어져 있었다. 몽글거리는 크림 같았는데, 애당초 시선은 그를 향해 있지도 않았다. 홀린 시선을 빼앗고 싶은 마음 반, 두고 싶은 마음 반이라서 턱을 괸 채 얌전히 있던 에르하르트는 수정구를 든 손을 슬쩍 제 쪽으로 가까이 당겼다.
살랑살랑 다가온 라얀이 제 몸에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는 살이 맞닿을 만큼 가까워진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기야. 알았더라면 진작 멀어졌을 것이다. 그는 고양이 같았다. 관심을 주면 경계하고, 모르는 척 풀어두면 자신이 먼저 무방비하게 다가왔다. 에르하르트는 그가 홀딱 빠져 있는 틈을 타서 더 자세히 살펴봤다.
풍성한 속눈썹은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었고, 슬쩍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대본 손은 자신의 것보다 조금 더 작았다. 옆으로 시원하게 트인 눈은 크고, 입술은 붉었으며, 오닉스처럼 까만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부드럽게 늘어져 새하얀 피부에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
라얀이 수정구에 홀린 것처럼 에르하르트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까딱까딱 흔들리던 손가락이 늘어진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예민하게 날 선 신경을 무디게 했다. 그의 목소리는 기억 저편에 잠겨 있던 꿈결 같은 노래를 떠올리게 만들어서 눈이 감길 듯 나른해졌다.
반쯤 감긴 눈으로 라얀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던 에르하르트는 어느 순간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시선을 내렸다. 라얀이 에르하르트를 보고 있었다.
“…손.”
“음?”
“내 머리를 만지고 있잖아.”
“그러면 안 돼?”
안 되나. 안 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라얀은 고민하느라 대답할 때를 놓쳤다.
“아니면 싫어?”
그렇다고 싫지도 않은 것 같다. 싫은 것보다 좋은 게 많았지만 라얀은 대개의 것에 호오가 분명한 편이었다.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인간은 만족스럽게 미소를 머금으며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유리나 알레가 곧잘 제 주둥이를 비벼대기는 했지만 누군가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은 처음이다. 메르는 그를 후계자로 대했을 뿐, 품 안의 자식처럼 귀여워하며 애정을 쏟지는 않았다. 한데 저보다 한참 어릴 인간이 그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생소한 감각에 낯설어하는데 미끄러지는 손등이 저번처럼 뺨에 닿았다.
놀라기도 했지만, 뜨거웠다.
“왜 자꾸 피해?”
라얀이 뜨거움을 피해 몸을 물리자 인간은 그새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다.
“…뜨거워.”
“내 손이?”
의아한 표정으로 제 손을 움켜쥐던 인간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기이한 문양의 마법진이 푸른빛으로 떠올랐다가 손으로 스몄다. 그 손은 다시 라얀의 뺨에 닿았다.
“이제 안 뜨겁지?”
열감이 느껴지던 손은 언제 그랬냐는 양 서늘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아. 그는 인간이다. 연약해 보이기는 해도 한때 이 푸르른 바다를 피로 물들인 이들과 같은 존재. …새삼스러운 자각에 경계하며 거리를 둬야 하는 게 옳은데도 라얀은 그와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그는 닿는 온기가 뜨겁다는 말에 춥다면서도 제 피부를 차게 해주는 이였으며, 또한 라얀에게 허구일지언정 바깥의 낮을 보여준 최초의 존재였다.
“…에리히.”
제 이름을 거듭 반복해 부르는 것을 막아 세우느라 불렀던 것을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고집스럽게 인간, 이라고 칭하던 라얀이 갑자기 그의 이름을 부르자 에리히는 라얀의 속내를 파악하려는 듯 곧게 뻗은 눈썹을 찡긋거리면서 빤한 시선을 보냈다.
라얀은 그의 손바닥 위에 손가락으로 꼼질거리며 제 이름을 썼다. 라얀(ȑɋȲǶɊǸ). 그러고는 곱씹는 그를 향해 제 손바닥을 뒤집어 내밀었다. 아무런 대화도 이어지지 않았지만 인간은 라얀이 그런 것처럼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서늘하게 식혔지만 그래도 제 것보다는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에 고였다. 마침표를 찍듯,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진 손가락의 감각이 잔상처럼 남았다. 꼼지락거리기 위해 손가락을 까딱이려는 찰나 손이 붙들렸다.
“에리히.”
간지러움을 삭여낸 뒤에야 라얀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혀로 굴렸다. 혀끝이 아래로 눌리는 감각은, 조금 신기했다.
“응. 라얀.”
마주치는 시선과 부르는 음성이 간지러웠다.
“…….”
라얀의 손에는 여전히 지상의 낮이 작은 원에 담겨 반짝거렸고, 그새 다시 둥글어진 달빛은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 * *
레아는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에르하르트를 바라봤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두 눈을 감고 있는 이는 대체 누구일까.
에르하르트 윈스턴 헤셀러스. 황후가 없었더라면 출신 성분이 어떻든 황후에 책봉되었을 거라는 말까지 암암리에 나돌 정도로 황제의 전무후무한 총애를 받는 차비 올리비아 윈스턴의 하나뿐인 아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황제의 미움을 한 몸에 받는 아들이기도 했다.
그 비이상적인 미움에 레아는 한때 혹여 에르하르트가 올리비아의 부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런 생각은 곧장 고칠 수밖에 없었다.
에르하르트는 순도 높은 황금을 녹여 만든 것처럼 반짝이는 금발을 지니고 태어났고 그것은 헤셀러스 혈통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다 떠나서, 에르하르트는 젊은 시절 섬세하게 이루는 선과 예민해 보이는 인상으로 사교계 레이디들의 마음을 술렁거리게 했던 황제의 얼굴을 다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쨌든 황제에게 미움을 받다 못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밀려난 에르하르트는, 해가 이리 환히 떠 있는 낮에 자는 법이 없었다. 어디 낮뿐인가. 밤에도 잘 자지 않았다. 누워서 눈만 감고 있거나 혹은 잠들더라도 조금의 소음에도 잠기운 없는 눈으로 깰 만큼 얕은 수면이라 그는 침실 안은 물론 문밖에도 시종을 세워두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날이 서 있었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젖도 떼지 못한 갓난쟁이 시절부터 유모로 황성에 들어와 벌써 십수 년을 그의 곁을 살폈는데 어떻게 모를까. 에르하르트는 아르헨에 온 뒤로도 한참 잠도 이루지 않고 발코니 너머의 바다를 보거나, 매사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
물론 지금이라도 만물에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쏟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낮에, 그것도 자신이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눈을 붙이는 것은 대단히 유의미한 일이었다.
푹신한 카펫이 구두 소리를 삼켜주지만 그래도 의식적으로 발소리를 죽인 레아는 조심히 다가갔다. 들고 있던 것을 놓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잠들어 있는 에르하르트를 가만히 바라봤다.
남쪽에 크게 튼 창문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내리쬐는 방 안에서 그는 대단히 평화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 무표정하거나 비웃느라 올라가는 입꼬리가 제자리에 있으니 아직은 어리고 앳된 티가 났다.
‘레아. 그럴 거면 마리에게 가는 게 어때? 어머니에겐 내가 친히 추천장을 써줄 테니.’
에르하르트는 자꾸 자신을 어린애처럼 대할 거면 이제 막 다섯 살 생일을 넘긴 여동생 마리엘 황녀에게 가는 게 어떻겠냐고 빈정거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레아의 눈에 에르하르트가 어려 보이는 건, 그가 정말로 어려 보여서는 아니었다. 걸음마도 못 하던 때부터 지켜보며 그의 배냇짓, 기는 거, 걸음마, 말을 익히는 과정, 달리는 것까지 그의 역사를 전부 옆에서 지켜봤는데 어떻게 그가 훌쩍 커 보일 수 있을까.
일찍 앞세워야만 했던 자식보다도 오랜 세월을 지켜봐 왔다. 아마 에르하르트가 성년이 되고 결혼을 해 아이를 낳더라도 레아의 눈에는 마냥 아기일 적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
아르헨의 온화한 기후가 빙설보다도 차갑게 굳어버린 마음을 풀어지게 한 것은 아닐까. 그런 거라면 여기로 쫓아낸 황제에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로 잠을 청하면 좋으련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좋은 벗이나 아니면 평생을 약속할 연인을 만나 일가를 꾸린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본래라면 총애하는 차비의 아들로 영특하기까지 해 황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야 했을 황자를 보며 바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기사가, 혹은 연인이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을 발치에 두며 누려야만 했건만.
레아는 쓰게 넘어가는 침을 삼키며 나가려 등 돌렸다. 단잠을 즐기겠다는데, 아무리 올리비아가 전서구를 보냈다 한들 그것을 이유로 깨울 수는 없었다. 함께 곁들인 간식이나 홍차는 말할 것도 없었다.
“밤손님도 그것보다는 기척을 내겠어.”
조심조심 나가던 레아는 낮게 잠긴 미성에 고개만 뒤로 했다. 빙설보다도 서늘한 푸른 눈이 나른한 기운으로 깜빡거리며 레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달게 주무시는데 방해할 수야 있나요.”
도로 가까이에 온 레아는 티 테이블에 간식을 내려놓았다. 단내가 물씬 풍겼다. 솔솔 풍기는 설탕 냄새에 미간을 좁힌 것도 잠시, 에르하르트는 표정을 바로 했다. 왜 자꾸 그리도 싫어하는 단것을 달라고 하느냐는 레아의 의문을 풀어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피곤하세요? 어인 일로 낮잠을 그리 주무세요.”
레아는 진하게 우린 홍차를 제 앞으로 밀며 계속 말을 걸었다.
피곤하기는 했다. 며칠째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원래도 깊게 잠드는 편은 아니긴 했지만 최소한의 눈 붙이는 시간은 있었다. 한데 요 며칠 한참 동안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으니 그 여파가 결국은 해 떠 있는 시간까지 닥친 것이다.
“갑자기 키가 크려고 그러시나.”
“…….”
“뼈마디가 욱신거리지는 않으세요? 남동생도 전하의 나이 즈음 뼈마디가 쑤신다고 하더니 훌쩍 컸답니다. 곧 그 아이처럼 저를 내려다보시는 것은 아닌지.”
발코니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자야 할 시간이 되면 얌전히 침대에 눕는 그의 모습에 완전히 경계를 푼 레아는 그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제 동생 이야기를 꺼내며 설레는 눈으로 재잘거렸다.
“당연히 내가 언젠간 내려다보기는 할 테지만 고작 낮잠 한 번으로 너무 앞서갔어. 레아.”
레아의 입장에서 고작 낮잠 한 번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그러니까 수시로 자야 하는 어린 시절이 아니고서는 에르하르트는 낮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남의 기척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깊게 잠든 적은 더욱 없었다.
황제가 암살자를 보낸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경각심을 가지는 게 좋을까. 그런 생각을 잠깐 하다가 살기 위한 방책을 모색하는 제 모습이 낯설어서 에르하르트는 입가를 문질렀다.
“그랬던가요?”
“그래.”
“해도 기왕 깨셨으니 더는 주무시지 않는 게 좋겠어요. 전하께서는 낮잠을 청해보신 적이 없어 잘 모르실 테지만 오래 주무시면 밤에는 말똥한 눈으로 새벽을 보실 수도 있답니다.”
그렇다면 낮잠을, 매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며칠에 한 번 정도는 청하는 게 좋지 않을까. 에르하르트는 무표정한 낯을 유지한 채로 레아가 속내를 읽는다면 놀랐을 생각을 이어갔다.
“그리고 올리비아 전하께서 전하의 안부를 묻는 서간을 보내셨답니다.”
그의 생각을 그치게 한 것은 검붉은 색의 가시장미 인장으로 봉랍된 한 통의 편지였다. 올리비아 윈스턴. 밀빛의 겉봉에 쓰인 우아한 필체는 올리비아의 것이 맞았다. 필체가 아니더라도 여섯 개의 가시가 새겨진 장미는 황제가 올리비아에게 하사한 상징 문양이었다. 어지간히 미친 게 아니고서야 누구도 이것을 흉내 낼 수는 없었다.
“…….”
단단히 마른 인장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던 에르하르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뜯었다. 연한 분홍빛의 내지에는 겉봉에 쓰인 것과 같은 필체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별거 없는 내용이었다.
간단한 안부와 사교계의 근황, 마리엘이 그새 조금 더 자랐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아르헨은 어떤지, 그곳은 나쁘지 않은지 묻는 말로 두 페이지 가득한 서간은 마무리되었다.
먼 길 오는 사이 누군가에게 탈취될 수도 있는 전서구에 중요한 것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별거 없는 내용을 한 번 더 살핀 다음 그것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팔랑였다. 에르하르트는 푹신하게 파묻혀 있던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가 제 몸보다 배는 더 큰 책상 앞에 앉자 레아는 눈치껏 깃펜과 잉크, 양피지를 챙겨주었다. 새까만 잉크에 펜촉을 푹 담갔다가 뺀 에르하르트는 생각을 정리하듯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를 내려다보다가 망설임 없이 손을 움직였다.
올리비아의 안부 편지가 그랬듯이, 그의 안부 편지도 누가 보든 별것 없는 내용뿐이었다. 펜이 양피지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아무런 일정도 없던 오후를 채웠다.
* * *
가는 데만 며칠은 소요될 편지를 빼곡하게 채우고 나서 식사를 마치고, 연무장을 산책하듯 한 바퀴 돌고 나자 날이 저물었다. 레아는 물론 침구 정리를 해준 시종이 나가고 혼자 남기 무섭게 에르하르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벽을 짚으며 익숙하게 길을 헤집어 바깥으로 나갔다.
얼마나 익숙해졌는지 빛을 발하는 마력구를 띄우지 않아도 헤매지 않고 통로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통로가 있는 동굴에서 조금 나선 에르하르트는 로브를 헐겁게 풀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수면 아래로 잔물결이 일더니 익숙한 얼굴이 불쑥 튀어 올랐다. 꼭 밤에만 와서 에르하르트가 그와 밤을 함께 뜬눈으로 보내다가 결국 오늘 낮 꾸벅꾸벅 조느라 레아를 놀라게 하는 데 일조한 인물이었다. 그래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에르하르트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라얀의 뺨엔 볼우물이 움푹 팼다.
“에리히!”
“오래 기다렸어?”
라얀은 고개를 내젓는다. 그를 보다가 몸을 낮춰서 앉은 에르하르트는 로브의 주머니에 챙겨온 쿠키를 꺼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은 라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나를 기다린 거야. 아니면 이 쿠키를 기다린 거야?”
“둘 다.”
조금의 고민도 없어 보이는 당당한 대답은 뻔뻔하지만 밉지는 않았다. 쿠키를 하나 쥐여 주자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한입 깨물었다.
“어때?”
“달고, …어, 이건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
라얀은 먹어보고 설명해 달라는 듯이 제 앞으로 내밀었다. 황자에게 자기가 조금 뜯어 먹다 만 쿠키를 내미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물론 그는 사람이 아니고 인어이니 제약도 없고, 지적할 필요도 없지만 처음에는 그가 무턱대고 갖다 댔을 때 당황하긴 했었다.
이제는 꽤 능숙하게 한입 베어 문 에르하르트는 아릴 정도로 단맛에 혀를 찼다가 그가 말하는 알 수 없는 맛이 무엇인지를 곱씹었다. 건과일 조각이 씹혔다.
“이건 새콤하다고 하는 거다.”
“새콤?”
도로 라얀에게 내밀면서 대답을 해주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다시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눈이 즐거운 빛으로 반짝거렸다.
‘이게 뭐야?’
서로의 이름을 나누고, 열다섯 번의 밤이 그들을 지나쳤다.
첫날 제가 마력을 불어 넣어 만든 것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혹시나 해서 마들렌을 챙겼다. 그렇게 바깥의 세계를 궁금해하니까. 경계 어린 눈으로 보다가 손톱만큼 먹고 눈을 동그랗게 뜨던 라얀을 기억했다. 뺨은 발그레 붉어졌고, 눈은 반짝거렸다. 얼마나 기분이 좋으면 수면 위로 살짝 드러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기도 했다.
그 이후로 마들렌보다 조금 더 단맛이 나는 것을 가져다주니 반응은 더욱 격렬해졌다. 단것을 좋아하는 게 명확한 라얀의 반응이 재미있고 귀엽기까지 해서 에르하르트는 그 후로 의혹에 찬 레아의 시선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달콤한 쿠키나 케이크를 요구했다.
물론 순순히 그가 좋아하는 것만을 가져다준 건 아니다. 왜인지 라얀에게 장난을 치고 싶어서 씁쓸한 맛이 강한 과일을 모르는 척 준 적도 있었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너, 인간. 이게 뭐야?’
그때는 불신 어린 눈을 한 라얀이 퍼붓는 물세례를 피하지 못했다. 손부채질도 해주지 않아서 결국 에르하르트가 사과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을 해야만 했다.
가장 믿을 수 없고, 믿어서는 안 되는 게 어떠한 증명도 없는 맹세인데,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또 제가 주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먹는 라얀을 보고 있으니 문득 염려되었다.
“깔끔하게 좀 먹지.”
아껴먹느라 야금야금 먹는 그를 보다 손을 뻗어 부스러기가 묻은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이제는 그의 손이 닿아도 움찔 멀어지긴커녕 더 갖다 대는 것을 보면서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러니까, 새삼스럽기는 한데 기쁜 것도 같았다. 유치한 감정이었다.
“엘.”
기껏 털어줬는데도 그새 다시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힌 라얀이 그를 불렀다. 애칭을 알려줬는데 라얀은 그것을 또 짧게 줄여 엘이라고 불렀다. 사교계에 데뷔하지도 못했을 어린 공녀들을 부를 법한 애칭인 터라 영 간지러워서 에리히라고 부르라고도 몇 번 말했지만 라얀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제 기분대로 엘이라고 불렀다가, 에리히라고 불렀다가 반복하기에 이제는 반쯤은 체념한 차였다.
“왜.”
이제 그렇게 부르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고 입가의 부스러기를 떼어주며 대꾸했다. 아무리 부황에게 핍박당해 무늬뿐인 황자라고 해도 시중드는 것보다 시중받는 것에 익숙한 그가 남을 챙기는 모습은 이제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무슨 일 있어?”
“…….”
“응?”
천진한 빛을 띤 녹안이 그를 보았다.
에르하르트는 눈만 깜빡거렸다. 그는 오늘 외관상 아무렇지 않아 보였고, 레아조차도 그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해 내지 못했다. 순진해 빠진 줄로만 알았던 인어는 의외로 눈치가 빨랐다.
그러나 감탄한 것과 별개로 에르하르트는 라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던 행간에 여전히 황제가 그를 눈여겨보고 있으니 몸가짐을 삼가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애달픈 걱정과 부질없는 기약이 적혀진 암어가 그를 심란하게 했다고 해야 하나. 라얀과 만나며 하루하루에 즐거움이 깃들면서 희석된 감정들이 잠시 잠깐 선명한 빛으로 되살아나서 다시 바래지지 않는다고 말해줘야 하나.
“이상하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그냥 모르는 척 구는 쪽을 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비가 아들을 죽이려 하는 내용은 아름답지가 않았다. 인간을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을 품고 있는 천진난만한 인어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깃거리는 아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 없는 라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따라 음식의 맛을 묘사하는 것도 영 간결한 게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아 보여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는데 없다고 하니, 이상했다.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인간은 원래 거짓말도 잘하고 나빠요. 라얀. 부디 그들이 사는 세상을 궁금해하지 말아요.’
그가 한참 바깥 세계에 호기심이 왕성할 때 문득 알레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신신당부하던 게 생각났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인간과 마주할 일이 생기면 경계를 허물고 다가갈 라얀의 모습을 예지한 것처럼.
하지만 한참 동안 살펴본 에리히는 나빠 보이진 않았다. 때때로 성격도 까칠하고―이상한 것도 줄 때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맛있는 것도 가져다주고, 설명도 잘 해줬다. 그렇다면 거짓말은.
“…….”
잘하느냐면, 그건 모르겠다. 라얀은 살면서 거짓말을 해본 게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고 그나마도 허술해서 그를 아는 이라면 금세 눈치챘다. 알레나 유리, 아일라 역시 거짓을 입에 담는 종족은 아니었다.
“우리 인어께서 매일 이렇게 늦은 밤에만 날 찾아주니 피곤해서 그렇게 보였나.”
“피곤해?”
“인간은 이 시간이면 자야 한다.”
아. 라얀은 곧 수긍했다.
“그래야 크니까? 참, 에리히는 어리고 작은 인간이지.”
“…….”
“그럼 앞으로는 두 밤 자고 올까?”
에리히는 라얀을 바라봤다. 눈빛을 정확히 정의 내릴 수는 없었으나 조금 기가 막혀 보였다.
“그건 괜찮은데, …그보다 라얀, 대체 누가 누구한테 어리다는 거야.”
“하지만 에리히는 어린걸.”
작고 연약하지. 라얀은 거침없이 말했다. 약간의 주저함도 없는 단언에 에리히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불만이 있는 게 뻔히 보였다. 며칠 전 서로 나이를 밝힌 이후로 종종 이런 반응이었다.
‘너는 몇 살이야?’
에리히는 물었고,
‘50살.’
‘거짓말하지 마.’
단위를 신중하게 헤아리던 라얀은 대답했다. 그때의 불신 어린 눈빛이란. 라얀은 단순히 사실을 적시했을 뿐인데 드러나는 불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에리히는 어려. 작고.”
실제로 자신보다 작은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다시 못 박자 에리히의 이마에 금이 그어졌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라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린 인간한테 어리다고 했을 뿐인데, 그는 라얀이 어린애로 취급하면 내켜 하지 않는 기색을 보였다. 원래 인간은 어린 취급을 하면 싫어하느냐는 질문은 누구에게도 할 수 없으니 궁금증은 라얀의 생각 안에만 고여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으니 달래주는 게 좋을까. 아일라는 토라졌을 때 풀어주지 않으면 오래갔다. 알레도 제게 화가 난 게 있을 때 풀어주지 않으면 아닌 척해도 쪼잔해졌다. 가령, 바깥에 나가는 일에 좀처럼 협조해 주질 않았다.
그러니까 에리히도 저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그렇게 귀결되자 덜컥 아쉬움이 들고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세계의 음식은 신기한 게 많았고, 그것을 한 번이라도 놓치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었다.
어떤 것으로 풀어주지. 라얀은 고민에 빠졌다. 에리히는 할 줄 아는 게 많았다. 작은 수정구에 인간 세계를 구현화할 수 있었고, 맛있는 것도 가져다줬다. 그리고 아는 것도 많았다.
반면 라얀이 할 수 있는 거라곤.
“…….”
있나.
라얀은 하나하나 짚어보다가 순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라얀?”
“…….”
“라얀.”
라얀이 곰곰이 생각에 잠기자 에리히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라얀은 생각에 잠겨 있어 부름이 잘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라얀의 얼굴이 점점 심각하게 물들자 에리히도 덩달아 그를 심각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
참다못한 에리히의 입술이 달싹거리려는 찰나 라얀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라얀은 휙 고개를 돌려 에리히를 바라봤다. 물기를 담은 초록빛의 눈은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그가 잘하는 게 하나 있었다.
“에리히. 에리히. 바다 구경할래?”
“바다는 지금도 충분히 잘 보여.”
“아니. 바닷속.”
라얀의 목소리가 한 음 높아졌다. 반면 에리히의 얼굴엔 난처함이 어렸다.
“하지만 난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어.”
“알아.”
“그런데 어떻게 하려고.”
바위에 기대어 서 있던 라얀은 그를 잡아당겨 바닷속으로 끌어들였다. 중심을 잃은 에리히의 몸이 무너져 바다로 낙하했다. 풍덩, 소리가 나고 그의 몸이 물에 잠겼다.
“난 수영을 못.”
몸을 라얀에게 반쯤 걸친 채 에리히가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라얀은 양손을 뻗어 에리히의 뺨을 쥐어 제 쪽으로 당겼다. 바다를 담은 색과 풀숲을 닮은 색이 맞물려 섞였다.
에리히의 눈이 깜빡이는 찰나 라얀은 그의 얼굴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추고 숨을 불어 넣었다. 촉촉하지만, 조금은 까칠한 입술의 촉감이 느껴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에리히는 황급히 입술을 떼며 말했다. 귀 끝이 붉었다.
“뭐가?”
라얀은 의아했다. 인간에게 바다에서의 숨결을 허락하는 유일한 수단은 인어가 숨을 불어 넣어주는 것뿐이다. 그래서 숨을 불어 넣어줬을 뿐인데, 에리히의 반응은 과민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입을 맞추는 건, …아니. 아니다.”
입을 달싹거리던 에리히는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물에 빠져 당황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해소되지 않은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린 라얀은 어차피 그가 설명을 해줄 것 같지도 않아서 제가 하려던 일을 행했다.
에리히를 물속으로 끌어당겨 깊숙이 들어갔다. 갑자기 머리까지 물에 잠긴 에리히는 무의식적으로 코와 입술을 움켜쥐었다. 수면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을 차올리던 에리히의 몸이 멈칫거렸다. 그는 코와 입술을 막고 있던 손을 떼며 중얼거렸다.
“숨이 쉬어져.”
“당연하지. 내가 방금 호흡을 불어 넣어줬는걸.”
하지만 잠깐이다. 기껏해야 한 시간 남짓. 모자라면 그때 또 숨을 불어 넣어주면 될 일이고, 어차피 오래 있을 수도 없었다. 인간인 에리히는 바닷속에 오래 있기엔 연약하니까.
“아 그래서…….”
방금 전의 행위를 이해하고 납득하는 소리엔 조금의 민망함이 내재되어 있었다.
대체 뭐지. 고개를 갸웃거린 라얀은 물속으로 몸을 온전하게 담갔다. 목가에 작은 아가미가 도로 생기는 것을 느끼며 에리히에게 손을 뻗었다. 검푸른 물 아래에서도 반짝거리는 금발의 에리히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에리히. 너의 세계를 구경시켜준 것처럼, 나도 네게 내 세계를 보여줄게.”
그는 조금 경황없어 보이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라얀의 손을 맞잡았다. 물속에서 그의 체온은 적당한 온기라 맞잡고 있는 게 가능했다. 바깥에서는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 잡고 있기에는 영 뜨거워서.
손가락 사이사이에 갈퀴가 없이 마디마디가 매끈한 인간의 손이란 여전히 신기해서 만지작거리던 라얀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 그를 천천히 이끌었다.
물속을 유영하는 건 라얀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호흡하는 순간부터 그는 바다에 속한 존재였고, 바다는 그들의 수호자인 인어에게 친화적이었으므로 쉬이 물길을 열어주었다. 하여 지느러미를 하느작거리면서 쭉쭉 뻗어 나가는데 에리히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리를 허둥지둥 움직여보다가 뻣뻣하게 움직이지 않기를 반복했다. 슬쩍 뒤돌아본 라얀은 웃음을 터트렸다. 말간 웃음이 기포로 방울방울 터져 나갔다.
“왜 웃어.”
에리히는 그의 웃음이 상당히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투가 뚱했다. 속도를 늦추다가 이내는 멈춘 라얀은 그를 돌아보았다.
“그냥.”
그가 바깥세상의 낮이 담긴 수정구를 보여줬을 때 보인 자신의 반응이 문득 생각났을 뿐이다. 그리고 되짚어 보면 그때 에리히는 웃었다. 한마디로 둘이 다를 것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진 않았다.
“아, 그래. 엘한테는 너무 어둡지.”
라얀은 이 어둠에 익숙하지만 그는 아닐 테니까. 두리번거리던 라얀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슬쩍슬쩍 주변을 배회하며 기웃거리던 것들이 손짓에 부름을 받듯 다가왔다. 그들은 아티사의 시들지 않는 빛을 책임져 주는 존재로, 어디든 잘 흘러 다녔다. 라얀이 그들에게 속삭이자 주변이 빛으로 밝아졌다. 점점이 깜빡거리는 금색 빛은 바로 앞을 식별하기엔 나쁘지 않았다.
주변이 잘 보이는 덕분인지 에리히의 시선이 이리저리 옮겨졌다.
아티사에 비할 바 아니지만 수초와 산호가 넘실거리는 바다는 아름다웠다.
“저건, 반딧불이 같군.”
“반딧불이?”
“지상에 있는 것이다. 어두운 밤 허공을 떠다니며 저렇게 빛을 발하지.”
바깥에도 비슷한 게 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아쉬움을 삼키며 라얀은 여태 잡고 있던 에리히의 손을 놓았다. 그는 갑자기 놓이는 손에 다리를 흔들다가 쉬이 가라앉지도 않고, 물속에서 헤엄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중심을 바로잡았다.
다소 버둥거리긴 했지만 요령을 숙지하는 몸은 자연스럽게 바다에 부유했다. 혹시라도 계속 헤매거든 다시 잡아주려 손을 움찔거리던 게 소용없어졌다.
조금은 못 해도 괜찮을 텐데. 라얀이 아쉬움을 느끼고 있을 때, 에리히가 그를 보며 물었다.
“왜. 나중에 만날 땐 반딧불이라도 잡아다 줄까?”
그는 아쉬움의 원인을 반딧불이를 보지 못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바깥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신기해하고 갈망하니 타당하다면 타당한 추론이었다.
“아니. 괜찮아.”
고개를 저으며 구경하라고 등을 떠밀자 에리히는 슬쩍슬쩍 주변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그의 바다를 경탄하는 모습은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때?”
“…아름다워. 하나 거짓 없이 진심으로.”
미사여구는 없었으나, 진심이 전해져서 괜히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바닷속에서 나풀거리는 에리히를 데리고 이리저리 구경시켜주는 건 상당히 재미있었다. 에리히는 산호를 손으로 쿡 찔러보기도 했고, 불가사리를 손에 올려놓은 채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누가 더 빨리 헤엄치나 시합도 했다.
‘내게 상당히 불리하지 않나?’
에리히는 영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면서 최선을 다해 임했다. 물론 라얀의 승리였다. 봐주려고 했는데 절대 봐주지 말라는 으름장이 있기도 했고, 그럼에도 흘끔거리면서 조금 속도를 늦춰주면 바로 눈이 세모꼴이 되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한 시간이 생각보다 짧아서 라얀은 에리히에게 한 번 더 숨을 불어 넣어주어야만 했다. 또 입을 맞대자 에리히는 몸을 움찔거렸다. 잠깐이었고 금세 숨겼다. 어쨌든 한 번 더 숨을 불어 넣은 시간만큼 그들은 바다를 더 유영했다.
그러고 보니 금세 헤어질 시간이었다. 헤어짐은 아쉽다. 에리히를 바다 위, 그들이 만나는 장소인 동굴의 뭍으로 올려보낸 라얀은 미적거리다가 조금 더 머물 핑계를 찾아냈다.
“에리히. 아까는 왜 그렇게 펄쩍펄쩍 뛰었어? 너 좀 미꾸라지 같았어.”
“그거야.”
그는 다시 기억을 떠올리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이런 것을 네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입맞춤은… 연인들끼리 하는 거다.”
오. 라얀은 호응하듯이 바람 빠진 소리를 흘렸다.
“인간은 입을 맞춰?”
“너희는 다른가.”
“우리는 꼬리를 얽지. 서로의 비늘을 정표로 건네고.”
인어에게 반려와의 애정 표현은 서로의 꼬리를 얽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끼리는 꼬리를 짧게 맞대어 치는 정도로 친밀감을 표현했다. 하지만 인간은 꼬리가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는 모양이었다. 입을 맞추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하다니.
“그러면 우리는 입을 맞춘 거야?”
“아니. 또 그렇다고 키스라고 하기에는 다르긴 하지만…….”
“달라? 키스는 어떻게 하는 건데?”
“…….”
“왜 그런 눈으로 봐?”
에리히는 꼭 그가 사고 친 직후 알레가 떠오르는 눈빛으로 봤다. 키스는, 하고 입을 달싹이던 에리히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넌 몰라도 돼.”
어린애 취급이다, 저건. 결론을 내린 라얀의 눈이 가늘어져서 따져 물었다.
“엘은 해봤어?”
“그건, …아니.”
“아직 어려서?”
에리히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이제 한참 봤다고 무슨 기분인지 짐작되었다. 저건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다. 씰룩쌜룩 입꼬리를 올리던 라얀의 표정은 금세 다시 시무룩해졌다.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지어.”
생각해 보니 뭐가 됐든 그가 숨을 불어 넣는 행위가 인간에겐 애정의 표현이라면 에리히에게 해선 안 됐다. 그렇다면 그의 연인이 싫어할 테니까.
“라얀.”
하지만 라얀은 그에게 이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직 보여주고 싶은 곳이 많았다. 그리고 온몸에 힘을 푼 채 잠겨 있으면 얼마나 아늑한지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럼 이제 바다 보여주면 안 돼?”
라얀의 눈썹이 팔자로 늘어지자 에르하르트가 멈칫거리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네 뜻대로 해라.”
“정말?”
“나도, …았고.”
“에리히.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어.”
기쁨에 젖어 있던 라얀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입 모양으로만 웅얼거린 탓도 있었다. 응? 하고 한 번 더 재촉하자 에리히는 괜히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차며 말했다.
“나도 좋았다고. 신기했어.”
저게 저렇게 부끄러울 일일까. 에리히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사방을 눈에 담느라 정신없었던 것을 전부 본 라얀은 왜 저렇게 쑥스러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라얀이 빤한 시선으로 고개만 갸웃거리자 에리히는 무릎을 땅에 대고 몸을 낮추어 시선을 가까이 좁혔다.
“…너는, 정말로 이상해. 라얀.”
자꾸 너랑 있으면 물러져.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에리히의 말은 이해할 수 없게 난해했다. 콧잔등을 찡긋거리자 그는 신경 쓸 필요 없다며 콧방울을 툭 치며 몸을 도로 일으켰다.
이제 정말로 작별이었다.
내일도 만날 건데 왜 이렇게 아쉬울까. 아. 참, 그는 이렇게 밤에 만나는 게 피곤하다고 했으니 만남의 횟수를 줄여야 할 것이다. 어린 인간은 무럭무럭 커야 하니까.
“에리히는 푹 쉬어야 하니까 두 밤 후에 봐.”
“라.”
바로 말을 정정하고 싶을까 봐 라얀은 그의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몸을 휙 돌려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에리히가 황당한 얼굴로 손짓하며 뭐라고 하는 듯도 했지만 이미 그의 말은 수면 사이에 갇혀 전해지지 않았다.
손을 작게 흔들어준 라얀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조금 전 에리히와 놀 때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날랬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를 찾는 이라곤 아일라나 유리뿐으로 아직 그들이 들르기엔 늦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조금의 상식이 있는 아일라와 달리 유리는 그의 수호자라는 핑계로 늦은 밤에도 불쑥불쑥 찾아들었다. 그렇게 찾아와 바깥의 이야기를 전해주었으니 기껍지 않은 적 없지만 오늘은 곤란했다.
“…….”
아래로 내려갈수록 수온이 내려갔다.
이것을 춥다 느낀 적 없던 라얀이 서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따뜻한 위의 기온에 그새 익숙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렇게 하나씩 바깥의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혹시 새로운 시 메르의 탄생으로 그를 위해 아티사에서 떠나야 한다면, 육지와 가까운 곳에 둥지를 틀까. 예전에야 엄두도 못 내던 생각이지만 이제는 에리히가 있었다. 그 애라면 자신과 오래오래 머물러줄 것이다. 그를 버리지도, 외면하지도 않으며.
정말 언제 이렇게까지 그 어린 인간을 신뢰하게 되었을까. 그러나 나쁘지만은 않았다. 라얀의 입꼬리가 흐물흐물 풀렸다.
그래서였다. 항상 귀를 기울이며 멀리서 나는 소리라 해도 경계하던 라얀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은.
쉬익. 쉬익―.
물살을 가르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떼 지은 무리가 그를 향해 날래게 유영하는 게 보였다. 상어였다. 생각보다 몸이 앞섰다. 라얀은 빠르게 헤엄쳤다. 제발 저들이 자신을 발견한 게 아니라 지나가던 길이길. 만약 정확히 그를 표적으로 노리고 접근하던 중이었다면, 생각만으로도 침이 말랐다.
성체도 수 마리의 상어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당해내지 못하는데 하물며 성체가 되지 못한 라얀은 날카로운 상어의 이빨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살점이 찢기고, 운 좋아 살아봐야 형체가 온전할 수 있을까. 그는 살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은.
라얀은 입술을 깨물고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모든 힘을 쥐어 짜냈다. 그러나 그의 기도와 노력이 무색하게도 상어들이 그를 쫓는 게 느껴졌다. 조금 전 있었던 즐거웠던 기억들이 희미해지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꿈 같았다.
“…….”
아티사까지는 얼마나 가야 하지. 아티사가 보이는 곳까지만 가도 저들은 사냥을 포기할 것이다. 수호 결계가 쳐져 있을뿐더러 그곳에서 인어를 물어뜯는 건, 그야말로 선전포고였으므로.
문제는 아직 아티사가 보이려면 한참이었다. 아티사를 밝히는 빛은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물살을 가르는 손이 바빴다. 바다가 단 한 번도 그에게 친화적이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게 버거웠다. 힘껏 흔드는 꼬리는 당장 마비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저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낄낄거리며 그르릉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지느러미를 거칠게 움직여 물살을 흔들어 라얀을 더 앞으로 혹은 옆쪽으로 떠밀었다.
아무래도 유희 삼아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라얀을 쫓는 것 같았다. 라얀은 지금 철저하리만치 피식자였고, 그러므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사냥감이 되어 쫓기며 잡힐 듯 말 듯한 상황이 반복되니 슬슬 힘이 빠졌다. 자꾸만 손이 물살을 헛짚었다. 그렇게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도망가던 라얀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가 점점 흑해의 경계로 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때였다. 물빛이 바뀌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사력을 다한 도망을 즐기기만 한 것이 아니다. 흑해로 유인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대로 흑해의 경계를 넘는다면 자신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아예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게 된다. 또한 거기서 죽는 것은, 자신의 잘못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하지만 흑해가 가까워진다는 건 다른 말로 아티사가 그리 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일단은 지친 몸을 조금이나마 쉬게 해줘야 했다. 흑해의 경계를 넘어서기 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라얀의 눈에 거대한 그림자처럼 흔들리는 해초가 보였다. 라얀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곳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해초가 상어들의 움직임을 지연시켜 줄 테니 길진 않더라도 아주 조금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해초 사이에 쏙 숨어 호흡조차 죽인 채 가만히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상어들이 지느러미로 해초를 휘적거리며 찾는 소리가 들렸다.
<그 어린 건?>
<깜찍하게도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분명 성체가 아니었지?>
<성체였으면 싸워보려는 시도라도 했을 테고, 작았다.>
<어린 게 아주 겁도 없단 말이야. 꼭 그런 게 한두 번씩 나타나.>
상어들이 낄낄거렸다. 라얀은 더욱 숨을 죽였다. 이대로 흥미를 잃고 그냥 포기해 주면 좋을 텐데 전혀 그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인 점은 그들이 라얀과 멀리 있다는 것이며 반대쪽부터 찾고 있다는 점이었다. 기회라면 지금뿐이다. 그들이 자신을 찾지 못하고 더 멀리 가기를 바라며 살금살금 움직였다. 해초가 뺨을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여린 살이 쓸렸지만 그런 통증은 제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체 이 작은 것은 어디 몸을 꼭꼭 숨긴 거야.>
수초를 헤쳐가며 찾는 상황이 유쾌하지는 않는지 상어의 말투가 사나워졌다. 들키면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모양새였다. 꼴깍 침을 삼킨 라얀은 물방울 몇 개를 만들어 날려 보낸 뒤에 아주 느릿하게, 해서 작은 소리조차 상어의 예민한 귀에 잡히지 않도록 애를 쓰며 움직였다.
“…아.”
신의 장난처럼 해초가 그의 지느러미에 얽혔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라얀은 못내 소리를 터트렸고, 그것은 상어들에게 들리기 충분했다.
라얀은 당황해 어서 해초를 풀려고 했지만 자꾸 손이 미끄러졌다. 해초는 계속 흐느적거리며 그의 꼬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라얀은 다리에 힘을 주며 끙끙거렸으나 전부 소용없는 짓이었다.
<찾았다.>
라얀의 위로 짙은 그림자가 악몽처럼 드리워졌다.
라얀은 금세 몰려든 상어들에게 에워싸였다. 그들이 입을 벌리자 날카롭게 난 이빨이 보였다. 이런 위협이 처음인 라얀은 몸을 움츠렸다. 상어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다가 라얀에게 달려들듯 이빨을 들이밀었다. 눈을 꼭 감았으나 살갗에 박히는 고통은 없었다.
실눈을 뜨자 꼬리에 매여 있던 해초의 단면에 날카로운 이빨 자국이 난 채 끊겨 있었다.
<우리를 재미있게 해보렴. 아가.>
정말로 그들은, 라얀과의 쫓고 쫓기는 행위를 단순히 놀이로 생각하고 있었다. 라얀은 입술을 꾹 깨물다가 등을 돌려 도망갔다.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으나 얼마 있지 않아 상어 하나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웃었다.
도망가라고 등 떠밀었으나 아니었다. 그들은 라얀을 철저하게 막아 세운 채 흑해로 가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그래야 라얀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곧 흑해의 경계였다.
라얀은 도망갈 틈을 찾았지만 앞서 그를 놓칠 뻔한 경험을 한 그들은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정말로 막다른 곳까지 몰렸다.
<아가. 어린 인어야. 벌써 포기한 거니?>
정신적으로 몰리고 지치자 움직임이 느릿해졌다. 그것을 비웃듯 상어가 주둥이로 라얀의 등을 떠밀었다. 뾰족한 주둥이가 찌르자 여린 살갗이 할퀴어져서 따끔거렸다.
“…….”
주변에서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작은 바다 생물들이 숨어 지켜보는 것은 느껴졌지만 그 외에, 그가 바라던 보호는 없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소란일까.”
그때 낮고, 독특한 목소리가 울렸다. 상어들이 기세를 꺾으며 라얀에게서 조금씩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둘러싼 틈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누군가가 보였다.
라얀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칠흑보다도 새까만 머리였다. 라얀의 머리만큼이나 까만 머리는 한데 느슨히 묶인 채 넘실넘실 흔들거렸다. 그다음으로 보인 것은 도드라지는 보랏빛의 눈동자였다. 말간 보랏빛 눈은 자수정 같았다. 라얀보다 한참이나 큰 인어는 입매를 나른하게 끌어당겨 웃었다.
“시끄러워 나와봤는데 꽤나 흥미진진한 장면이구나.”
인어는 미끄러지듯이 그에게 다가왔다.
라얀은 긴장했다. 아까 그는 물방울을 흩어 보냈다. 그것은 인어만의 구조 신호였다. 늦은 시간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 순전히 절박함의 발로였다. 기적적으로 구조 신호를 본 누군가 와주기는 했는데, …처음 보는 존재였다.
아티사에 거주하는 모든 인어의 얼굴을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눈앞에 저 인어는 도무지 모를 수가 없을 존재였다. 잘 갈무리했지만 그럼에도 넘쳐나는 마력이 언뜻언뜻 느껴졌다.
“…누구.”
라얀은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러자 그는 고혹적으로 웃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니?”
라얀이 바라는 대답은 아니었다.
“아가.”
“…라, 라얀이에요.”
라얀은 그의 기세에 압도되어 대답했다. 압박감은 없었는데도 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 라얀.”
새하얀 손이 어깨를 짚었다.
“어쩌다가 여기에 왔을까.”
“…….”
“그것도 홀로.”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배우지 않았니? 나긋하게 달래는 목소리에 긴장이 조금이지만 풀렸다. 라얀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 주었다. 힘들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게, 그냥 어디를 다녀오다가……”
<아샤.>
상어 하나가 조금 불만 어린 표정으로 그를 부르며 라얀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상어가 드러내는 살기에 다시 몸이 바짝 굳었다.
“물러나.”
<…큽!>
그는 두 번 경고를 주는 대신 손을 곧게 뻗었다. 손가락만 튕겼을 뿐인데 조금 전 불만을 드러낸 상어가 멀리 밀려났다. 다른 상어들은 그에 앓는 소리를 흘리더니 완전히 멀어졌다.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싱긋 웃었다. 옆으로 시원하게 트인 눈이 접혔다.
“나의 형제들이 어린 인어에게 실례를 저질렀구나.”
“…형제요?”
“흑해에 터를 잡은 종족이라면 모두 나의 형제라.”
싸늘한 손이 뺨을 움켜쥐듯 쓰다듬었다.
라얀은 처음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천천히 받아들였다. 이해하고 나자 라얀은 다시 긴장해서 몸을 굳혔다. 그에 그는 눈을 맞췄다.
“왜. 갑자기 내가 무서워졌니?”
라얀은 옆으로 눈을 굴려 피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인어가 흑해에 산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아티사에 속하지 않으며 오히려 대척점에 있다는 거니까. 하지만 뭐가 됐든 그는 라얀을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이었다. 은인을 무서워하며 외면해서는 안 됐다.
“…아니요.”
“그거 다행인 일이구나. 어린 내 동족에게 미움을 받는 건 아무래도 슬픈 일이거든.”
그는 라얀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한 라얀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헤매는 동안 머리를 헝클어트리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고개를 들자 그는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곧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아쉽지만 헤어져야 할 시간이구나.”
“저기, 이름이…….”
“아샤.”
아샤.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생각해 보니 아까 상어가 그를 그렇게 불렀던 것도 같았다.
“부디 다시 보자. 나의 어린 동족.”
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툭 친 아샤는 매끄럽고 유연하게 헤엄쳐 사라졌다. 그의 궤적을 좇으며 멍하니 있던 라얀은 멀리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라얀. 라얀. 부르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난 뒤에야 라얀은 입술을 꾹 깨물며 날래게 다가갔다.
“라얀!”
알레였다.
그는 얼마나 경황이 없었는지 본신으로 변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는 라얀이 무사한 것을 보더니 확 끌어안았다가 금방 정신을 차리고 품에서 떨어뜨렸다. 노려보는 눈매가 형형했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알레.”
“내가 얼마나, …라얀?”
긴장이 완전히 풀리면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왜 그래요. 라얀, 라얀?”
라얀을 받쳐 안는 알레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 * *
새까만 심해.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등 뒤를 할퀴는 통증. 가지고 놀려는 것처럼 지느러미로 툭툭 건드리는 것까지. 라얀은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더 도망가보렴. 어린 인어야.’
‘우리를 재미있게 해줘야지.’
등 뒤에서 사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얀은 끙끙거렸다. 그때 몸이 흔들리면서 검푸른 심해가 깨졌다. 라얀은 숨을 거푸 몰아쉬다가 눈앞에 보이는 주둥이에 놀라면서 몸을 뒤로 물렸다.
“쉬. 라얀. 나예요. 알레.”
“…알레?”
알레는 인간화했다. 잿빛 머리에 흰 머리가 뜨문뜨문 섞인 청년이 그를 봤다. 라얀은 그제야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그의 방이었다. 모든 게 익숙했다.
“어떻게, 아니, 언제 왔어?”
“지금 내가 언제 왔는지가 중요해요? 그리고 기억 안 나요? 날 보자마자 정신을 잃었어요. 데려와 눕혀두긴 했는데 영 정신을 못 차리길래 치료사라도 데려와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일어났고.”
“아.”
라얀은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알레는 침대에 앉으며 라얀을 바라봤다. 라얀은 자신을 엄한 눈으로 노려보는 알레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내 눈 똑바로 봐요. 라얀.”
“…….”
“라얀.”
“으응.”
알레는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라얀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그를 바라봤다. 눈꼬리를 내렸는데도 알레의 표정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왜 거기에 있었어요?”
“…….”
“대답 안 해요?”
“그게.”
“너무 늦게 와서 내일 인사하려다가 혹시나 해서 와봤더니 없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는 말을 시작으로 알레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찾으러 돌아다녔는데 없어서 결국 바깥까지 나가야 하나 하는데 갑자기 구조 요청이 들어오고. 혹시나 해서 가봤더니 라얀은 거기에 있고! 등에 상처는 뭐예요? 말 안 해요?”
알레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라얀은 시무룩했다. 반발감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의 잘못이 맞았고, 그를 걱정시킨 것은 사실이니까.
“그게, 등은 상어가…….”
“상어요? 상어?”
알레는 그의 몸을 앞으로 끌어당기더니 등을 다시 한번 살폈다. 따끔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큰 상처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감히 누구를 건드린 거냐며 음산한 목소리로 욕을 읊조리기도 했다. 종종 유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때와는 달랐다. 범고래 일족이 워낙 그런 성정이라고는 들었지만 언제나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사납게 구는 모습을 보니 낯설었다.
라얀이 놀란 눈치에 알레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등을 보며 짙게 드러난 걱정이나 분노는 다시 사라지고 엄한 알레로 돌아가 있었다. 이게 더 무서웠다.
“대체 언제부터 나갔어요?”
“그게 조금 됐는데―.”
“그래서, 몇 번?”
라얀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답했다.
“…열 번.”
알레는 하, 하고 한숨을 뱉어냈다. 골이 아픈지 머리를 짚은 채 눈을 감기도 했다. 라얀은 미안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게 더 미안했다.
“뭘 보러 나간 건가요?”
“응?”
“유리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라얀을 홀로 밖으로 나가게 둘 만큼은 아닐 테고. 이 위험한 외출은 유리조차 모르게 이루어진 것이 분명한데, 고작 바깥만 구경하러 당신이 혼자 나갈 리가 없죠. 그것도 그렇게 수차례를.”
알레의 추론은 제법 예리하고 타당했다. 라얀은 선뜻 답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라얀.”
“…….”
“제가 이대로 메르에게 가 당신이 아티사 바깥으로 영구히 못 나가도록 청하길 바라요?”
“아니. 아니.”
그것만큼은 안 됐다. 메르의 실망이나 처벌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에리히를 만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에리히를 보지 못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거짓말을 잘하지도 못할뿐더러 한다고 하더라도 알레는 금방 눈치챌 것이다. 그리고 설령 거짓말을 잘하더라도 언제나 그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알레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을, …인간을 만났어.”
라얀은 결국 눈을 질끈 감은 채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에리히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의 상황까지 이야기하는 동안 알레는 그의 말을 단 한 순간도 끊지 않았다. 숨을 깊이 몰아쉬거나 간혹 멈출 때도 있었지만 그랬다.
한참을 이어진 설명은 입이 마를 때에서야 끝났다.
라얀은 슬쩍 알레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바로 메르에게 달려간다고 할까 봐 그의 손을 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레는 눈을 내리깐 채 한참 감정을 다스렸다. 그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이 상황을 퍽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을 바깥에 데리고 간 내 잘못이에요. 전부.”
침묵하던 알레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알레.”
“아무리 유리에게 들은 이야기로 호기심이 생겼다고 해도 내가 당신을 달랜답시고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알레. 그게 아니야.”
“그렇다면 아무리 늦었다지만 지금에라도 제 잘못을 바로잡아야죠.”
앞으로는 나갈 생각 하지 마요. 자책하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달싹거리려던 말문이 턱 막혔다. 알레는 옷자락을 쥐고 있던 라얀의 손을 조심스레 떨쳐내며 일어났다.
“오늘 놀랐을 텐데 쉬어요.”
그는 창문을 훌쩍 타 넘어 나갔다.
라얀은 알레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등에서 번지는 쓰라린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