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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은 제국 헤셀러스의 가장 남단에 자리한 황제 직할의 영토로, 모든 날씨가 봄과 여름의 기후에 머물러 추위가 오는 날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을 만큼 짧았다.
바람조차 뺨을 날카롭게 할퀴는 계절이 머물러 있는 수도 제르바와 달리 바다 내음이 실린 짭조름한 공기조차 온화한 탓인지 이곳 사람들은 대개 여유롭고 느긋한 면모가 있었다. 그게 아니면 총성 없는 전쟁이라 불리는 제국의 사교계와 달리 평화롭기 짝이 없는 이곳의 분위기가 그들을 절여둔 것이던가.
“전하.”
성년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냉소적으로 생각하던 에르하르트는 그를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아까 전 자신을 변경백이라 소개한 카나반 백작과 그 옆으로 또래의 여자애가 보였다. 그 애는 예의도 잊고 헤셀러스의 직계 황족이라는 명징한 증거이기도 한 금발만 흘끔흘끔 훔쳐봤다.
“레, 레이나 닐 카나반입니다. 전하.”
시선이 닿자 여자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들짝 입매를 가다듬고 인사했다. 그 뒤로도 흘깃대는 이들의 표정에선 어떻게든 황자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열의가 보였다.
요양을 이유로 1년 내내 온후한 아르헨에 내려온 것이라고 알려진 에르하르트는 어떤 것에든 쉽게 진력내는 황제가 십수 년째 제국 전역에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애정을 퍼붓는 중인 차비 올리비아 윈스턴이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까, 미래가 보장된 황자인 것이다.
에르하르트는 고개를 까딱여 화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에는 왈츠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니 레이나는 에르하르트가 춤을 청하리라 여긴 모양이다. 그녀는 나붓하게 한 발 뒤로 물러났으나 그는 기대에 부응하는 대신 지나쳐 나아갔다.
흐읍. 당혹스럽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그를 궁금해할 거라며 수선을 부리는 레아 때문에 아르헨 영지 내의 귀족들에게 초청장을 보내 이런 연회가 열리게 됐지만 실상 에르하르트는 이런 자리에 전혀 관심 없었다. 아마도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 레아가 봤다면 눈을 새치름하게 떴을 텐데, 제게는 다행히도 그녀는 귀부인들과의 티 타임을 위해 자리를 잠시 비운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대로 귀족들과 연을 맺고, 또래 아이들과 사귀는 게 무슨 소용일까. 어차피, 죽게 될 텐데.
자신의 죽음을 아주 단조로운 톤으로 생각한 에르하르트는 발코니로 나갔다. 아르헨 변경백의 인사도 받아주는 둥 마는 둥, 제멋대로 구는 것에도 황자인 그를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나가자 열흘 새 익숙해진 짠내가 물씬 풍겼다. 파도 소리도. 그는 종종 발코니에 나가 한참을 서서 바깥을 보고는 했다.
바깥 풍경이 대단히 좋아서는 아니었고, 생이 지겨웠다. 에리히, 부디 조금만 기다리렴. 그가 요양을 이유로 수도를 떠나기 전날 밤, 침실에 들른 어머니 올리비아 윈스턴은 가슴께에나 겨우 닿는 어린 아들을 끌어안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조금만 버티라고. 기다리라고. 내가 널 어떻게 해서든 살려서 품에 안을 거라고.
우스운 말이었다.
제 궁에서 한 발짝도 나가본 적 없던 에르하르트가 황제의 명으로 아르헨까지 내려온 이유는 대단히 간단했으며 명확했다. 혹시라도 올리비아의 마음에 사무치지 않게 그녀가 보지 못하는 곳에 가서 죽어버리라고. 단지 그 이유였다.
사교계에서도 그의 존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 아르헨의 사람들은 정말로 날 때부터 잔병치레가 잦은 황자가 걱정되어 예까지 그를 보낸 줄로 믿는 것 같지만, 웬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황제는 에르하르트를 증오하다 못해 언제든 기회만 되면 그의 생명을 앗아가려 안달했다.
태어나면서부터 겪은 일이라 특별히 억울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다만 지겨울 뿐이었다, 차라리 스스로 생을 꺾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며칠 전을 떠올렸다.
그때도 에르하르트는 잠들기 전 버릇처럼 발코니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저문 하루를, 견뎌낸 하루를 흘려보냈다. 쏴아아. 쏴아. 낭떠러지에 파도가 부딪혀 마모되는 소리가 연속해 들렸고, 그것은 에르하르트를 충동질했다.
남들이 잠든 사이 침실에서 조용히 빠져나간 그는, 누군가에게 끝내지기 전 제가 먼저 이생을 끝내리라 결심하면서 충동적으로 절벽 위에서 몸을 던졌고……. 유모의 경악 어린 비명을 들으며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눈을 떠 푸르게 세상에 스며든 새벽을 맞이했다.
어쩌면 파도에 떠밀려 뭍으로 흘러 들어간 것일 수도 있지만, 에르하르트는 아래로 까마득히 내려앉던 감각을 분명히 기억했다.
그리고.
“…….”
이제는 붉은기가 가셔 어떤 흔적조차 남지 않은 뺨을 문질렀다.
“레이디께 춤을 권하지 않으시다니요.”
인기척과 함께 목소리가 정수리로 떨어졌다. 고개를 올리자 그새 전해 들었는지 레아가 새치름한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어린 레이디가 얼마나 민망하셨을까.”
“내가 그것까지 챙겨줄 필요가 있나?”
“제가 전하를 그리 키운 적이 없는데, 이리 레이디를 배려하지 않는 신사로 자라셨을까.”
“여태 배운 걸 써먹을 일이 어디 있었어야지.”
제 답이 그녀의 마음을 할퀼 수 있는 말임을 알면서도 굳이 삼키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 작은 영지의 백작 부인으로 남편과 갓난쟁이 아이를 줄줄이 잃은 뒤 그의 유모로 궁에 들어와 젖먹이 시절부터 길러 어지간한 사정을 알고 있는 레아는 고작 이런 말로 상처 입을 만큼 유약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만하면 에르하르트가 상당히 그녀를 용인하고, 말을 고른다는 것을 모르지도 않을 터였다.
“그래서 부끄럼을 타셔서 거절하신 거고요?”
역시나 레아는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받아쳤다.
“왜 벌써 와서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건지.”
“그렇지 않아도 황자 전하의 고상한 취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안달인 귀부인들의 초청으로 다과를 즐기고 있었지요. 한데 글쎄, 레이디 카나반이 울상이 되어 제 어머니를 찾아와 자초지종을 말하지 뭔가요. 어디 민망하여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어야지요.”
거짓말이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녀는 에르하르트가 혼자 발코니로 나갔다는 말에 반응하여 온 것이 분명했다.
그는 며칠 전의 사건을 바다를 가까이서 보고 싶어 나갔다가 실수로 미끄러진 것이라 얼버무렸고, 레아도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으나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한 번도 죽음을 입에 담아본 적은 없었어도 어찌 보면 자주 볼 수 없는 어머니보다도 더 그와 가까운 사이이니 그녀에게도 느낌이란 게 있기는 할 것이다.
“피곤하세요? 전하. 이만 돌아가 쉬시겠어요?”
연회를 내켜 하지 않아 하던 에르하르트를 기억한 레아가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황제의 총애를 얻어 대단한 권세를 자랑하는 올리비아 윈스턴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미움을 받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황자의 유모가 됐다. 그 바람에 이 변방까지 쫓겨났으면서도 레아는 진심으로 에르하르트를 아끼고 위했다.
“벌써 돌아가 쉴 정도로 어리진 않아.”
“아직 어리시지요. 키도 크셔야 하고.”
레아는 키를 논했다. 에르하르트의 얼굴에 다소 짜증이 어렸다. 에르하르트 위의 형제들이 그의 나이였을 때보다도 에르하르트가 조금 더 큰 편이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그는 키를 논할 때면 이렇게 짜증을 부리곤 했다.
“피곤하시면 쉬세요. 오늘이 아니더라도 날이야 많으니까요.”
말을 돌린 레아는 그의 손을 쥐며 가볍게 끌었다.
“이렇게 활동적인지 미처 몰랐어.”
“기사를 꿈꾸는 공자님들과 로맨스를 꿈꾸는 레이디들의 기대에 마땅히 응해주셔야지요.”
에르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홀에서 멀어지니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에 발소리와 웃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러곤 그의 침실까지 올라갈 때까지 정적이었다. 레아는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았고, 에르하르트 역시 굳이 날카롭게 혀를 놀려 오늘따라 부쩍 즐거워 보이는 레아의 기분을 꺾고 싶지는 않았다.
조용히 걸음만 옮기자 금세 그의 침실 앞이었다. 함께 들어간 레아는 에르하르트가 시종들의 시중을 받아 간단히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발코니에 잠금쇠가 걸려 있는지를 확인하고 침대를 한 번 살폈다.
아직도 어린앤 줄 아느냐고 따져 봐야 성년도 되지 않았다고 맞받아칠 게 그려져서 에르하르트는 입을 대는 대신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어린애 취급하기로 작정한 듯 이불까지 여며주고 이마에 흐트러진 금발을 쓸어넘겨 주었다.
“주무세요, 전하. 저는 나가서 마무릴 할 테니.”
걸리적거린다며 곁에 시종을 두는 걸 딱 질색하는 그를 알기에 레아는 시종들을 손짓해 내보냈다.
“레아.”
곧이어 그들을 뒤따라 나가던 레아는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나가려다 말고 몸을 돌렸다.
“알아봤어?”
명확한 주어는 없었지만 레아가 알아듣지 못할 리는 없는 주제였다.
“알아보기는 했는데, …해가 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 사고가 났던 게 몇 번이라 그쪽으로는 다 큰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걸음 하지 않는답니다. 평민들조차 말이지요. 전하께서 잘못 보신 게 아닐까요?”
며칠 전 에르하르트는 누군가를 봤다며, 그 아이가 나를 구해줬으니 찾으라 명령한 바 있었다. 며칠 동안 기다린 대답치곤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애초 유모는 운 좋게 파도에 떠밀렸다고 생각하지, 누군가 에르하르트를 구했으리라 여기지는 않았다.
밤이었고, 수심이 깊은 바다였다. 아무리 바다를 끼고 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아니, 그렇기에 밤바다가 무서운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니 다가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뺨은?”
에르하르트는 분명 누군가가 그를 구해준 것이라고 확신했다. 맞은 것처럼 얼얼하고 붉게 물든 뺨을 떠나서 다른 기억 때문에. 그러니까, 그를 보던 새순 같던 녹안, …언제나 서늘하고 공허한 가슴 언저리를 채워주는 것 같던 아름답고 청량한 목소리 같은 것들.
그게 어떻게 착각일 수 있지.
“그건 바위에 긁혔을 수도, …더 알아볼게요. 전하. 그러니 얼른 주무셔요.”
실랑이할 시간에 재우는 것을 선택한 유모는 살살 달랜 뒤 그가 눈을 감자 비로소 등을 끄고 나갔다. 사박사박. 치맛자락이 땅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나고, 문이 닫혔다. 그런 뒤에야 에르하르트는 다시 눈을 떴다. 새파란 눈동자에서 잠기운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불을 풀썩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난 에르하르트는 살금살금 발코니의 문을 다시 열었다. 혹시 레아가 다시 들여다보러 오지 않을까 싶어 문가를 살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발코니로 나가자 어둠에 잠긴 바다가 그를 반겼다. 달빛이 내려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바다는 언제 그를 삼키려 했냐는 듯이 잔잔했지만 실은 알고 있다.
광폭하기 짝이 없는 파도는 그가 떨어져 내린다면 흔적도 없이 집어삼켜 끔찍하리만치 고독한 수면 아래로 끌어 내릴 것이며, 저 바다엔 무언가 미지의 존재가 살고 있다는 것도.
후자에 대해 말했을 때 레아는 우리 황자님이 아직 동화책을 읽어드려야 하는 나이인 줄 몰랐다고 깔깔 웃음을 터트렸지만.
아니, 정말로 착각이었나.
그런 것 따위 여태 믿어본 적도, 동화책에 빠져본 적도 없지만 실은 레아가 잠자리에서 읽어준 책이 어떤 환상을 만들어낸.
“…어?”
걸까 하며 집요하리만치 노려보던 때에 바다 표면 위로 뭔가 불쑥 떠오른 게 보였다. 어쩌면 착각일 수 있지만, 이것 역시 그가 생각하던 것이 형상화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에르하르트는 바깥으로 달음박질쳤다.
* * *
‘저런 덜떨어진 것이 시 메르라니.’
본래라면 자랐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작은 몸을 보는 녹빛의 눈은 온기 없이 서늘했다. 자연스레 몸이 위축되어 라얀은 길게 늘어트린 흑발에 숨은 채 차가운 비난을 견뎌야만 했다.
‘실로 한심하구나.’
왕은 심해의 지배자이나, 그러기에 앞서 라얀을 세상에 내어놓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한 톨의 미련도, 하물며 수십 년의 애정조차 드러내지 않으며 등 돌렸다.
“헉.”
라얀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온몸을 더듬거리며, 그를 향한 시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꿈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왜 이런 꿈을. 별로 그날을 마음에 두는 것도 아니면서, 하고 짚어보다가 곧 제 생일임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자 왜 며칠 전부터 제 궁에 들락거리며 재잘거리기 일쑤였던 불가사리나 해마 등이 보이지 않았는지도 헤아리게 됐다.
뻔하다. 알레가 떠나기 전 신신당부했을 테지. 그의 심기를 어지럽힐 만한 일은 만들지 말라고. 급히 가느라 정신없을 텐데, 하여튼 쓸데없이 부지런하기만 했다.
라얀은 나른하게 눈을 몇 번 더 깜빡이다가 조개 침대에서 몸을 박차고 나왔다. 그는 방 한구석에 놓인 유리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추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뽑아낸 것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지닌 서늘한 소년이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첫 번째 성장을 거쳤음에도 자라지 못한 몸은, 여전히 이토록 작았다. 문득 라얀은 3년 전, 열흘 만에 껍질을 깨고 나온 그를 당혹스러운 눈으로 보던 이들을 떠올렸다.
두 번에 걸쳐 성장하는 인어는 첫 성장 때 성체가 되고, 성체가 된 뒤 몇 년 내에 두 번째 성장을 거쳤다. 그때 전투나 치유 등 고유의 능력을 발현하는데, 통상 부모의 기질을 이어받고는 했다.
라얀은 역대 가장 강력한 능력을 지닌 전사라고 평가받는 메르의 아들이었으며, 성장의 전조도 가장 빠르게 나타났으므로 기대가 상당했다. 그가 차대 트라이던트의 주인이 아니리라고 의심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얀은 성체가 되지 못한 채 껍질을 깨트리고 나왔다.
첫 번째 성장 때 성체가 되지 못한 인어는 종종 있었으나, 대개 그 끝이 좋지는 않았다. 낙오되었고, 어느 순간 아티사에서 사라졌다.
‘…아.’
자라지 못한 그를 볼 때마다 기대 어렸던 시선들이 변모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가장 먼저 왕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원래 성정이 그리 다감하진 않았어도 그래도 기본적으로 제 후계자로서는 대우해 주던 메르는 그를 아예 없는 것, 혹은 수치로 취급했다. 왕이 그러하니 다른 인어들도 라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는 사실상 아티사에서 고립된 존재였다.
왕에게 달리 자식이 없고, 성체가 되는 데 실패했다고 해도 두 번째 성장이 남아 있는 만큼 아직 그는 시 메르였지만, 만일 왕이 새로운 후계자를 만든다면… 글쎄, 그때는 어떻게 될까.
메르는 번식기가 올 때마다 새로운 자를 선별해 침소에 들였다. 게다가 첫 번째 성장 이후 두 번째 성장까지는 통상 4년 정도 걸리니 짐작도 가지 않는 끝은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끝이라.
어쩌면 아티사에서 추방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싫거나 사무치지도 않았다. 라얀은 그를 동정하는 시선이나 혹은 그 사이에 숨겨진 조롱을 더 원치 않았으므로.
“…….”
갑자기 별생각이 다 들었다. 자꾸만 가라앉는 속에 라얀은 원인인 거울에서 시선을 떼며 등을 돌렸다. 손을 길게 뻗어 물살을 헤집으며 바깥으로 나갔는데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언제나 그의 곁을 지키며 어울려주던 알레는 제 영역으로 떠난 지 며칠 되었고, 유리는 그의 수호자라는 이름에 무색하게도 아티사에 붙어 있는 경우가 없었다.
원체 자유롭기도 했고 아티사에선 본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다 보니 왕국 바깥에서 노는 것을 더 좋아해 가끔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럴 때마다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니, 그는 유리가 제 옆에 있는 것보다 바깥을 돌아다니는 게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누군가가 옆에 있었으면 했다. 제 행동 하나하나에 잔소리를 하는 알레마저 그리운 걸 보면 결단코 착각이 아니었다.
의미 없이 바깥을 유영하다가 기어이 나부끼는 해초 아래로 가라앉아 몸을 둥그렇게 만 라얀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뭍 위의 인간을 떠올렸다.
인어들 사이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금빛의 머리카락, 심해처럼 푸른 눈동자. …포말을 만들어내며 죽어가던 어린 인간은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 무사히 깨어났을까. 어린 인간은 연약하다던 레탄의 말이 자꾸만 기억 속에 고여서 떨쳐지지 않았다.
인간과의 조우는 없어야 할 일인데. 다시는 그 어린 인간을 보지 말아야 할 텐데. 자꾸 마음이 인간에게 기울었다. 그러니까, 다시 보고 싶었다. 무사한지. 혹시 연약한 어린 인간이 어디 아픈 것은 아닐지.
물론 그런 이유뿐만은 아니다.
구전되는 이야기 속에서나 전해지는 인간을 처음 봤다. 이야기 속의 인간과 달리 흑해의 크라켄처럼 잔혹해 보이지 않았으며, 더 깊은 바다 아래에 움트다가 종종 나타나는 시 서펜트처럼 난폭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단지 제 손바닥을 데게 할 만큼 뜨거운 체온을 가졌고, 연약했으며, 또한 아름다웠고, 마치 이야기에서나 겨우 들어본 태양 같았을 뿐이다.
“…….”
한 번만 보러 갈까.
유리마저 없으니 아티사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했다. 엘레브 해를 지배하는 것은 인어였고, 종 대부분과 영원한 충성의 언약을 나누었으나, 그렇지 못한 존재들도 있었다. 상어 일족이나 크라켄 등이 대표적이었다.
성체라도 전투 능력이 없는 인어가 아티사 바깥으로 나갔다가 변을 당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는데 하물며 라얀은 성장도 하지 못한,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메르의 흠이자 결점이었다.
알레는 물론이거니와, 유리 또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열거하자면 수십 가지가 되는데, 자꾸만 마음은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 체념과 호기심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할 때였다.
물결의 파동이 일었다. 흐느적거리는 해초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티사에 고요가 찾아들었다.
익숙한 긴장감이다.
해초 사이에 파묻혀 모래알을 가지고 장난치던 라얀은 고개를 내밀었다. 저 까마득한 위로 해마를 타고서 귀환하는 이가 보였다. 그의 것처럼 칠흑처럼 새까만 색으로 굽이치는 머리칼. 손에 쥔 서늘한 은빛의 트라이던트.
순찰을 하러 나갔던 메르의 귀환이었다.
까마득한 위에 있는 왕이 해초 더미에 숨어 있는 라얀을 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라얀은 언제라도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그를 차가운 눈으로 쏘아볼 것만 같다는 아득한 착각에 빠져야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해도 가느다랗게 손이 떨렸다.
“…….”
손을 움켜쥔 라얀은 몸을 아래로 바짝 낮추며 수호 결계를 빠져나갔다. 그가 결계를 빠져나갈 때 왕의 시선이 아래로 옮겨졌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은 무심하게 거두어져 올곧게 앞으로 향했다.
* * *
홀로 아티사를 빠져나가 수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생각보다 상당한 긴장을 요구했다. 라얀은 내내 긴장을 감추지 못했는데 잔소리쟁이지만 실은 그를 걱정하는 알레의 존재가 절실해질 정도였다.
겨우 수면 위로 머리를 빼꼼 내밀었을 때에야 긴장으로 경직된 몸을 이완할 수 있었다.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낭떠러지 위를 빤히 올려다봤다. 고개를 쳐들었더니 목이 아팠다.
올려다보던 라얀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성은 여전히 우뚝한 모양으로 서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놀란 이유는 은은한 불빛이 돌았지만 어둠에 잠겨 있던 성이 무슨 일인지 불빛에 휘감긴 것만큼 밝았기 때문이다. 흐릿하게나마 선율이 들리기까지 했다.
새순처럼 유순한 녹안이 연신 깜빡거렸다. 그때마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그러다가 이내 완전히 바깥으로 내민 고개를 반쯤 물속에 밀어 넣었다.
그럼에도 라얀의 시선은 거두어질 줄 몰랐다.
라얀은 인간을 구했고, 그 기억이 선명하지만… 사실은 한순간의 착각이 아닌가 했다. 물론 라얀은 본 적도 없는 인간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만큼 상상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그만큼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성벽을 밝히는 저 밝은 불빛은 라얀의 상상이 결코 상상으로 그친 게 아니라 진짜 현실이었음을 인지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그가 어린 인간을 구한 게 꿈이 아니었다고.
그러자 문득 그 애가 보고 싶어졌다. 자신이 구한 어린 인간이 무사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이 눈으로 보고 싶었으며, 궁금한 것도 많았다.
이름은 뭘까. 여전히 반짝거리는 금빛 머리를 지니고 있을까. 태양이 밝을까. 아니면 그 애의 머리 색이 더 밝게 빛날까. 억눌렀던 호기심이 마구 샘솟았다. 아마도 그 애한테 답을 듣지 않는다면 해소되지 않을 감정이었다.
물론 볼 수도, 봐서도 안 되겠지만.
어쨌든 착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오늘 하향곡선을 찍던 기분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 그것을 증명하듯 수면 아래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저기 있나.”
라얀은 기어이 자신이 정해둔 선을 넘어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무리 다가가도 그 애한테 닿을 일이 없을 텐데도 그랬다.
하지만 어두운 밤이다. 별빛이 반짝이고, 달빛이 바다의 표면을 은색으로 은은히 물들이는. 라얀이 있는 곳을 밝혀주는 빛은 없으니 겨우 이 정도로 들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도 그 애를 구해 뭍에 올려주느라 이것보다 더 가까이 다가갔지만 들키지 않았다.
옆에서 다그치는 이가 없으니 걱정과 경계가 점차 수위를 낮췄다. 라얀은 바윗돌 위에 상체를 반쯤 기대다시피 올린 채 불빛과 음악이 새어 나오는 성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저 위에 올라가 보고 싶었으나 성체가 되지 못한 라얀은 땅 위에서 거닐 수 있는 다리를 허락받지 못했다.
아쉬움이 거듭 쌓여가니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아마도 평생 다리를 허락받지 못할 푸른색의 꼬리로 무의미하게 바위를 내려칠 뿐이었다.
“…너……!”
애먼 바위가 부서져라 꼬리로 내려치던 라얀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바짝 세우고 두리번거렸다.
“네가 날 구한 자인가?”
파도 소리에 묻힌 데다가 주의력이 흐트러져 처음엔 잘 듣지 못했던 목소리는 그가 귀를 기울이자 선명해졌다.
아무리 성체는 아니고 능력도 발현하지 못했지만 인어는 기본적으로 청력은 물론 시력도 좋았다. 조금만 신경을 기울이면 어지간해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은 없었다. 하물며 그가 조금이라도 더 보겠다고 가까이 다가가는 바람에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라얀은 놀라 눈을 돌렸다.
작은 체구가, 어른어른 보였다. 달빛에 부서질 것처럼 반짝거리는 금발은, 라얀이 구한 그 애가 분명했다. 착각이 아닌 현실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얼빠진 것도 잠깐이었다. 도망을 쳐야겠다는 생각만 들어 바위 위에 걸치고 있던 몸을 내려 숨기려 했다. 하지만 몸을 숨기기 전 예민하게 날 세운 귓가에 풍덩,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빠진 소리였고, 무의식적으로 소년이 있던 곳을 바라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처럼 물에 빠졌나.
왜.
연약하기 짝이 없으면서.
“…….”
라얀은 자기가 살린 존재가 죽는 것이 싫었다. 그것도 자신의 영역인 바다에 잠긴 채로.
어차피 어린 인간은 연약하여 또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그런 틈에 다시 뭍에 건져내면 되지 않을까. 라얀은 물살을 휘어잡으며 미끄러지듯 매끄럽게 소년을 향해 유영했다. 역시나, 이 어두운 곳에서도 금발이 반짝거리는 소년은 힘없이 물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소년을 낚아채 수면 위로 올라갔다.
그때처럼 땅 위에 올려둔 라얀은 잠깐만 훔쳐보다가 혹시나 정신을 차리면 곤란하니 몸을 물리려 했다. 그러던 찰나였다. 손목이 갑작스러운 악력에 휘감겼다.
“그대는 누구지?”
소년은 언제 정신을 잃었냐는 듯 또렷하고 새파란 눈으로 라얀을 보며 물었다.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양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는 아름답다는 말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어 지극히 벅차오르게 했다. 의식을 제대로 차리지 못해 흐릿했던 때와는 다른 아름다움이라 잠시 얼빠졌던 라얀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이곳은 파고가 높아 사람이 출입하지 않는 곳이라 했다.”
“…….”
“하지만 그대는 그때도 지금도 이곳에서 헤엄치고 있어.”
이런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구름이 달을 가려 어두워진 탓에 인간은 라얀이 그와 달리 손가락 사이에 작은 갈퀴가 있다는 것도, 바다 아래에 감추어진 꼬리지느러미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대는 누구지? 누구기에 나를 구했지?”
그리고 다행이지 않게도 라얀은 인간에게 존재를 들켰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현명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처럼 꼬리로 뺨을 쳐올리기엔, 이 인간은 너무나도 연약했다. 또한 또렷하고 명료한 눈을 보고 있자니 왜인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게다가 성체가 되지 못한 그의 세이렌의 노래는 고작해야 정신이 흔들리는 정도에 불과해 이토록 정신이 명료할 때는 먹혀들지 않을 게 분명했다. 갑작스러운 난관에 라얀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허우적거렸다. 그때 제게 조언을 해주던 레탄조차 오늘은 보이지 않아 현명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그때도, 오늘도.”
소년은 자꾸만 대답을 요구했다.
“왜…….”
구름 사이에 숨었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고, 새파란 눈동자에는 달빛이 감돌았다. 눈동자가 스윽 아래로 내려갔고, 그 시선은 라얀의 손에 닿았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돋은 투명한 갈퀴가 빛을 받아 산란했다. 라얀은 그제야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손을 재빨리 뒤로 숨겼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인간이 아니야?”
“…….”
소년은 라얀의 존재를 헤아리려는 듯이 그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물에 잠겨 있는 하반신까지도. 뭍과 가까워 유난히 말간 색의 바다는 달빛에 속살을 드러냈다. 아래로는 붉고 푸른 산호초가 넘실넘실 흔들렸고, 그의 눈보다 조금 더 짙은 청록빛 지느러미도 물살을 따라 유영하고 있었다. …인어? 소년이 얼빠져서 중얼거리는 단어는 낯설게만 들렸다.
라얀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인간에게, 인어의 존재를 들킬 수는 없었다. 인어에게 인간이 금기되었듯, 인간 또한 인어의 존재를 몰라야만 했다. 그것이 수백 년째 지켜지는 율법이었으므로. 라얀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그를 너울 치는 바닷속 아래에 빠트려 영영 입을 봉해버려야만 했다.
손이 붙들린 이대로 끌고 들어가 바닷속에서 놓아버리면 연약한 인간은 죽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라얀은 어떤 판단도 내릴 수가 없었다.
몸은 제 말을 듣지 않는데, 머릿속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휩쓸었다. 가령 인어들이 떠들던 말이었다. 인간에게 존재를 들킨 인어는 인어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같잖지도 않은 소문으로 인해 산 채로 살점이 뜯겨 나간다더라, 혹은 인어들은 노래에 치유의 힘을 실을 수도 있으니 목에서 피가 날 때까지 노래를 부르게 한다더라 등등. 과장된 말들임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떨쳐지지가 않았다.
손가락이 까딱거리며 움직였다가 움츠러들기를 반복했다.
“너…….”
“…하! 전하……!”
소년의 말을 가로막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절벽 위로 붉은빛이 일렁거렸다. 소년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움켜쥐고 있던 라얀의 팔목을 놓았다.
“어서 가.”
“…….”
“이틀, 아니, 사흘 후, 이 시간에 여기서 다시 만나.”
라얀의 어깨를 꾹꾹 눌러 바다로 밀어 넣는 소년의 목소리는 어딘가 급박해 보였다. 마치 라얀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이틀 후? 라얀이 인간의 날짜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날을 안다 해도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라얀은 입술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바다 아래로 꼬리지느러미가 하느작 흔들렸다.
“그대가 오지 않는다면.”
라얀의 눈에서 어떠한 뜻을 읽었는지 소년은 설핏 웃으며 말꼬리를 늘렸다.
“나는 그날 다시 바다로 몸을 던질 거야. 그러면 난 헤엄도 못 치니 죽겠군.”
짐짓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이 혹시나 협박이라면 우스웠다. 태양같이 반짝이는 금발이 눈에 띄었기에 구해줬을 뿐, 라얀이 제 눈에 띄지 않는 인간까지, 그것도 인어의 정체를 알게 된 인간을 구할 리가 없지 않은가.
라얀은 흥, 코웃음을 치며 내내 뜨거운 온기에 붙들려 있던 손으로 해수면을 짚으며 안으로 풍덩 들어갔다. 손을 길게 뻗어 흔들수록 소년과의 거리가 벌어졌다. 일렁이는 표면 너머로 소년이 한 점의 덩어리가 되어 멀어지는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라얀은 한 번만 흘끗거리며 돌아보았을 뿐, 돌아가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 * *
창틀의 난간에 엉덩이를 걸쳐 앉아 있는데 쳐다보는 시선이 집요하다. 아무런 말도 건네지는 않았지만 바라보는 이가 삼킨 말 따위라든가, 이유 같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에르하르트는 며칠 전 본인의 실수를 뼈저리게 절감하는 한편 곤란해했다.
저렇게 철통같이 방비를 한다면 저 감시를 어떻게 뚫고 혼자 바깥에 나갈지. 며칠째 얌전하게 굴었더니 곤두선 태도가 조금 가라앉기는 했지만 레아가 밤마다 한 번씩 그의 침실문을 열어보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며칠 전엔 정말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무모한 도박을 했을 뿐이다. 워낙 흐릿해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혹여나 그날 자신을 구한 존재가 맞는 거라면, 이번에도 구하지 않을까 해서.
설령 구하지 않는다면, 아니, 에르하르트가 바다 위 바위를 잘못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면 물론 그 또한 상관없었다. 어차피 크게 미련 없는 생이었다. 누군가의 슬픔과 비탄 또한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뛰어들었는데.
“…….”
무의미하게 책장을 팔락거리던 에르하르트는 덜컥 몸을 일으켰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레아가 몸을 움찔거렸다.
“전하. 어딜 가시어요?”
그래 놓고 그렇지 않은 척,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꾸며냈다.
“서재.”
“서재요?”
되묻는 말엔 또 가느냐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제도, 어제도, 몇 시간 전에도 에르하르트는 서재를 들락거렸다. 서책을 멀리하는 건 아니어도 가까이하지도 않았으니 이런 빈번한 드나듦은 그답지 않은 일이기는 했다.
“요즘 부쩍 자주 가시네요.”
“그래서 싫어?”
“그럴 리가요. 전하께서 이리 배움에 정진하시니 폐하는 물론 올리비아 전하께서 아신다면 기뻐하실 거랍니다.”
어머니라면 모를까 그가 죽어 나자빠지기를 바라는 그, 황제가 기뻐한다고? 갑자기 행보가 수상쩍다며 자객이나 보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기실 여태 그가 살 수 있던 것도 올리비아가 제 목숨을 에르하르트에게 얽어맸으며, 또한 혹시 몰라 거듭 고생해 가며 기어이 구한 고대의 아티팩트 덕분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꼭 한 번씩 이런 식으로라도 황제와 에르하르트 사이의 골을 메워보려 헛된 짓을 했다.
“부디 기뻐해 주시면 좋을 텐데.”
삐딱한 태도에선 한 톨의 진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에르하르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레아를 보다가 따를 필요 없다고 덧붙인 뒤 몸을 휙 돌렸다. 거추장스러운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어헤치며 에르하르트는 성큼성큼 걸었다.
뒤에서 레아가 어물어물 따르는 것을 눈치챘지만 어차피 그럴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한 번 뒤돌아보지 않은 에르하르트는 두꺼운 문을 밀고 들어가, 닫았다.
잠금쇠도 걸까 했으나 내내 불안해하는 레아의 심장이 멎기라도 할까 봐 생각에만 그쳤다. 아마도 저 해가 반 뼘 내려앉기 전에 간식 핑계로 노크하며 에르하르트의 무사함을 확인하려 들 것이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들어오지 않을 테니 그가 무슨 책을 골라 읽든 자유였다.
에르하르트에게 아르헨의 성은 유배지로서, 혹은 죽기 전 마지막 안식의 장소로 기능하였지만 본래 이곳은 정말로 황족이 병을 앓으면 오곤 하는 휴양지이긴 했다.
십여 년 넘게 주인이 없었지만, 황족이 머무르는 성답게 관리가 잘 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함인지 서재엔 온갖 고서가 넘치도록 있었다. 고대 문자부터, 역사서, 수사학, 신학, 어느 심심한 이가 모아뒀는지는 모르겠지만 웬 낯간지러운 로맨스 소설까지.
하지만 에르하르트가 서재에 오는 이유는 열거한 책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빛 가루를 뿌린 것처럼 햇살 아래 둥실거리는 먼지 부스러기 사이에서 서가를 헤매던 눈은 곧 한곳에 고정되었다.
이미 몇 번이고 봐서 익숙한 터라 에르하르트는 능숙한 손길로 외진 구석에 있는 책 하나를 뽑아 들었다. 손에 들린 책은 별로 들여다본 이가 없는지 오래된 것임에도 낡은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사이 에르하르트가 곧잘 본 터라 접힌 자국이 남은, 제목조차 없는 책을 팔랑팔랑 넘겼다.
의미 없이 넘어가던 페이지는 곧 멈췄다.
[인어, 자료가 소실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숨겨 잊힌 터라 수백 년이 흐른 지금 동화책에나 나올 뿐이지만, 그들은 분명히 실존하는 종족이다.
…….
해수 아래 긴 꼬리, 심해 아래서 흔들리는 어두운 머리, 손짓 한 번에 바다 표면을 너울거리게 할 수 있으며, 매혹의 노래로 사람들을 홀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공포의 존재. 혹은 저 광활한 바다의 지배자. …(후략)…….]
이미 수십 번을 봐서 눈에 익은 문장들임에도 마치 처음 접하는 양 신중하게 곱씹어도 새삼스럽고 낯설었다. …인어. 인어. 그가 아무리 까탈을 부려도 레아가 꿋꿋하게 읽어주던 동화책에 나오던 환상의 존재. 이런 것을 보지 않더라도 에르하르트는 레아 덕분에 인어의 생김새 정도는 묘사할 수 있었다.
“…….”
에르하르트는 며칠 전 달빛 아래서 보았던, 성별을 특정하기 모호했던 아름다운 소년을 떠올렸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탄식이 나오게 하는 얼굴이었다.
신이 세상에 내놓기 전 가장 심혈을 기울인 피조물처럼도 여겨졌다. 그렇게나 아름다웠다. 아니, 그 단어조차도 그를 정의하기엔 터무니없이 빈곤했다. 세상 어떤 찬미의 말을 갖다 대어 봐도 이름 모를 존재 앞에서는 볼품없이 초라할 것이다.
어깨를 덮고도 흘러내리던 검은 머리칼, 달빛보다도 창백해 보이던 흰 얼굴, 봄날 새순처럼 부드러울 것 같은 녹빛의 눈동자. 얼빠져 있던 그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다른 것이었다.
가령, 조금 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손가락 사이사이에 인간이라면 마땅히 없어야 할 엷은 수막이나 물 아래에 있어 불분명하지만 분명 인간의 다리로는 보이지 않던 것까지.
인어가, 진짜로 실재하는 존재라고? 동화책에나 나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의 환상이나 채워주던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고? 에르하르트는 인어라는 낯설면서도 낯익은 단어와 달빛 아래 녹안이 부쩍 마음에 와닿던 소년을 겹쳐보았다.
확실히 그 얼굴은,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얼굴이긴 했지만…….
오늘이 명시한 사흘째인데 과연 그자는 올까. 두 번이나 그를 구한 것을 보건대 먹힐 것 같긴 하지만, 바짝 경계하느라 서늘해진 눈빛을 보건대 오지 않을 것도 염두에 둬야 했다. 하지만 염두에 두면 무얼 하나. 이쪽에서 찾을 방법이란 요원했다.
그리하여 초조했다.
레아의 감시가 집요해진 게 문제가 아니라, 그자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따돌릴 방법이야 설마 없을까. 해가 한 뼘씩 기울수록 신경 또한 기울었다. 하지만 그자를 보면 무슨 말을 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붙들려 했을 뿐이니까.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은 에르하르트는 본래 있던 자리에 책을 돌려놨다. 그리고 마치 다른 목적으로 왔다는 양 대강 아무 책이나 잡아 펼쳐 읽는 시늉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아가 진하게 우린 홍차를 양손에 들고 들어왔다.
에르하르트는 제 취향껏 내온 차를 즐기며 무던히 굴었다. 며칠 내내 이런 식으로 구니 예민하게 곤두세우던 레아가 조금씩 안정을 찾는 게 느껴졌다.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미련도 두지 않던 에르하르트가 며칠째 서가에 빈번히 들락거리니 그것을 기꺼워했다.
레아의 안심이 달가워서 슬쩍 표정을 고치고 마저 잔을 비운 에르하르트는 얼른 첨탑 위에 걸쳐진 저 해가 저물고 달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해가 저무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시간의 순행은 절대적이지만, 이럴 때는 상대적으로 느껴졌다. 평소와 똑같을 텐데도 배는 느린 것 같았으니까.
잠옷으로 갈아입고 얌전히 누워 잠든 척한 그는 레아가 발코니의 창이 잠겼는지 확인하고 나서는 것을 본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무게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푹신한 침대에서 일어나 대강 베개로 이불 아래를 부풀려놨다. 그런 다음 침대 아래 숨겨둔 로브를 뒤집어쓰고 조심스럽게 발을 떼 벽을 더듬었다.
아무리 황가의 요양지라지만 비밀통로가 없을 리 없다. 과연. 오목하게 튀어나온 곳을 밀자 무언가 우웅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안으로 들어가 통로 입구의 오목하게 솟아오른 것을 누르니 언제 열렸냐는 양 문이 닫혔다. 스륵. 문이 닫히자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두움이 그를 덮쳤다. 등불이 걸린 벽을 더듬어 봤지만, 빛을 내는 데 사용할 마정석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어두움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깜깜해서야 나가는 데만 한참 걸릴 것이다.
조금이라면.
엄한 얼굴로 당부하던 올리비아의 얼굴이 아주 잠깐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손바닥에 진을 그렸다. 힘이 빨려 나가는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작은 빛이 손바닥 위로 둥실거렸다. 가까스로 제 발아래가 보일 정도의 미약한 빛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에르하르트는 빛에 의지해 미로처럼 구불거리는 길을 더듬어 걸었다. 불을 밝혔는데도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중간에 갈림길도 있어서 벽을 더듬어보면서 길을 잡았다. 겨우 바깥으로 나갔을 때 스며드는 달빛이 환했다. 에르하르트는 손을 한 번 털었다. 둥실거리던 불빛은 언제 존재했냐는 양 사그라들었다.
머리칼이 삐져 나가지 않도록 로브를 더 여미며 발을 놀렸다. 제대로 닦이지 않은 비탈길은 울퉁불퉁해서 걷는 내내 발끝에 힘을 줘야만 했다. 겨우 내려가자 흰 포말을 일으키며 출렁이는 파도 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달빛이 비치는 바다는 은은하게 빛을 발했지만 에르하르트의 눈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곳에서 불쑥 떠올라 있는 형상을 찾으려는 데에만 관심이 기울어졌다.
하지만 한참 동안 기다려봐도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역시 오지 않았나. 올 이유가 없지만, 그래도…….
오늘 내내 초조하고 긴장됐던 마음이 풀리자 허탈해졌다. 아쉽기도 했고 그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 돌려보낸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
발아래로 물결이 일었다. 그 사이를 헤치고 보이는 것은 어깨를 덮어 가슴까지 닿는 새까만 머리와 흰 피부, 그리고 에르하르트를 바라보는 유리알 같은 녹안이었다.
“빠지겠다고 했으면서.”
붉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움직이자 뒷골이 당길 정도로 맑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명화 속 화폭이나 조각상 같던 이가 말을 하자 신에게 숨결을 허락받은, 살아 있는 존재로 보였다.
“내가 빠지면 구해주려고?”
묻는 말에 인어는 대답하는 대신 물에 반쯤 잠겨서 눈으로만 에르하르트를 올려다봤다.
“그러지 않아도 언제 뛰어들어야 하나 가늠하고 있었어.”
“…….”
“별로 미련이 없거든.”
담담히 말하며 에르하르트는 몸을 낮추고 천천히 가까이 다가갔다. 혹시라도 빠르게 다가가면 그가 도망갈까 봐 조바심이 났다. 신중하게 다가가자 소년은 몸을 물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저 빤한 눈으로, 에르하르트의 머리를 바라볼 뿐이다.
홀린 것처럼.
부러 로브를 벗고 살짝 움직여보자 시선의 궤적이 그대로 그 움직임을 따라나섰다.
수백 년 전 여덟 개의 왕국을 하나로 점령해 제국을 세운 알베르 1세는 황금룡이 유희 중 본 혼혈이었고, 그 피가 이어져 헤셀러스 황가의 직계들은 대대로 금발을 타고났다. 예외는 없었다. 바깥에 알려지진 않았으나 금발을 타고나지 않은 이는 부정한 핏줄이라 내쳤으니 없을 수밖에.
여하간 지금이야 피가 많이 희석되어 금발 빼고는 볼 것도 없지만 과거엔 그렇지 않았다. 대마법사였던 알베르 1세의 피를 물려받은 까닭에 황족 중엔 마정석을 사용하지 않고도 마나에 친화적인 마법사가 부쩍 많았다. 그들은 헤셀러스를 마법제국이라 불리게 할 만큼 눈부시게 발전시켰고,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마나를 다룰 줄 아는 황손만이 황위 계승이 가능하다는 법을 성문화했을 정도였다.
이런 역사가 있다 보니 황가의 금발을 보는 뭇 사람들의 선망 어린 시선은 강렬했다. 제도에서는 시선에 노출될 일 없다가 아르헨에 와서 그것을 직접적으로 겪은 에르하르트는 관심이 퍽 짜증 나고 거슬렸다.
그랬는데 저 인어가 제 머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건 그다지 신경을 날 서게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그를 끌어들인 요인이 아닌가 싶어 족쇄 같던 제 금발이 처음으로 달갑게 여겨졌다.
“내 머리가 마음에 드나?”
“…….”
정 마음에 들면 몇 가닥 잘라줄 생각에 물어본 건데 그는 갈피를 못 잡던 시선을 바로 했다. 괜히 물었다. 늦은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어차피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소년은 다시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갈까 말까 하는 고민과 혹은 약간의 후회가 보였다. 속내를 읽는 능력은 없지만, 태어날 적부터 눈칫밥을 먹으면서 산 터라 그의 감정이 훤히 읽혔다.
“나를 왜 불렀어?”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가 물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정말로 고대 문헌에나 나오는, 혹은 동화책에나 나오는 인어가 맞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은 게 가장 우선이었고, 왜 이리도 경계하면서 그날 제 목숨을 살린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은 게 그다음이었다.
하지만 그를 빤히 바라보는 녹안을 보고 있으니 수일간 내내 곱씹었던 질문들 대신 다른 문장이 튀어 나갔다.
“에리히.”
“…….”
“내 이름은, 에리히다.”
“…에리히?”
“그대의 이름은 뭐지?”
올리비아 외엔 누구도 허락받지 못한 애칭을 알려준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
이름? 라얀은 다짜고짜 이름을 묻는 것에 눈을 깜빡거리며 곱씹어야 했다.
아무래도 스스로를 에리히라고 이른 소년은 모르는 것 같지만 라얀은 벌써 세 번째 나와서 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인간과 같은 언어를 쓰지만 교류가 단절된 지 긴 시간이 지났다. 라얀은 사흘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매일매일 비슷한 시간대에 그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폈다.
물속에서 숨도 못 쉬고, 헤엄도 못 치는 연약한 인간이 정말 물에 빠질까 봐 두려웠다. 인어의 존재를 알게 된 인간 따위, 없애야 하는 게 순리인데도 불구하고. 그냥 그날 그를 숨기려던 인간의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 어딘가에 맺혀서.
“…라얀.”
보아하니 물에 빠지겠다는 말이 거짓말인 게 분명했는데도 라얀은 제게 거짓말을 한 괘씸한 인간을 향해 꼬리를 휘둘러 물을 잔뜩 먹게 하는 대신 순순히 이름을 말해줬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라얀은 자꾸만 저 인간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물러졌다.
“라얀.”
에리히는 곱씹듯 라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곧잘 불리는 이름이었다. 알레는 물론 유리나 그 외 이들도 라얀을 이름으로 불렀다. 라얀. 라얀 님. 혹은 몇 년 전의 과거이긴 하지만 시 메르 라얀까지. 하여튼 라얀은 제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크게 어색함을 느껴본 적도, 낯설게 느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인지 인간이 낮고 맑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를 땐, 제 이름이 아닌 양 생소했다.
“라얀.”
“그만, 그만 불러.”
“왜?”
“…….”
“나는 부르고 싶은데,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어?”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막아 세웠다.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까닭을 묻는다. 마땅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대답할 말이 없었다.
“에리히.”
“응.”
혹여 자신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꾸했다. 전의를 상실한 라얀은 입술을 삐쭉거리며 눈가 아래까지 물에 담갔다.
“가지 마. 정말로 뛰어내려서 붙잡고 싶어지니까.”
그것을 떠나려고 하는 것이라고 여겼는지 성큼 거리를 좁힌 에리히가 그를 붙드는 말을 했다.
어떻게 온 길인데. 벌써 갈 생각도 없었고, 갈 생각이 있었다 한들 저 표정을 보자니 쉬이 등지기도 힘들었다. 라얀은 제 뜻을 보여주기 위해 아주 살짝,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반짝거리는 금발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잘라 줄까?”
“…….”
“아까부터 계속 시선을 떼질 못하기에.”
그에게 들켜서 더 쳐다보지 않기로 결심한 게 고작 몇 분 전의 일인데 또 제가 그의 머리에 시선을 둔 모양이다. 라얀이 채 대꾸하기 전에 에리히는 지니고 있던 날카로운 칼로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잘라 손을 뻗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머리카락 몇 개만 뽑고 싶어 했던 라얀은 조금 고민하다가 머뭇머뭇 다가가 손을 펼쳐 내밀었다. 금실로 빚은 것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손바닥 위에서도 빛났지만, 역시 잘리기 전의 온전한 모습보다는 못했다.
그래도 준 거니까…….
혹시 뺏어가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펼친 손을 꼭 말아 쥐며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게 왜 신기해? 그쪽도 금발을 선망하기라도 하나?”
라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으로 기울이자 머리가 그쪽으로 쏠려 흐트러졌다. 다소 삐딱한 표정으로 묻는 인간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니. 태양을 닮았을 것 같아서.”
“태양?”
“응. 태양. 저기, 인간.”
“에리히. 에리히라고 불러. 기껏 이름까지 허락했잖아.”
“이름을 부르는데 왜 허락이 필요해?”
고작해야 이름을 부르는 일인데 왜 허락이 필요한 건지 알 수 없다. 되묻자 그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혼자 뭔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문제는 넘기고, 내가 너를 인어라고 부르면 좋겠나?”
“상관없는데.”
“라얀.”
“…….”
“그렇게 불리는 게 더 좋잖아.”
눈꼬리를 내려 사르르 웃으며 얼렀다. 유리가 그를 꼬여내곤 할 때 곧잘 쓰는 말투였다. 하지만 의식해서 부르려니 어색해서 입만 뻐끔거렸다.
“그래서 태양은 왜 물어봤어?”
다행히도 에리히가 주제를 원래의 것으로 돌렸다.
“인간은 태양을 본 적 있어? 태양은 당신의 머리를 닮았어? 반짝거려? 그렇게 빛이 나? 눈이 부셔?”
라얀은 언제 낯설었다는 양 말을 쏟아냈다. 유리에게 닳도록 들었다. 거듭 물을 때면 유리는 또 물어보는 거냐고 콧잔등으로 라얀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치면서도 질린 기색 없이 대답해 주곤 했다. 그것으로 갈증을 풀었으나, 근본적인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게 궁금해?”
쏟아지는 질문의 홍수를 가만히 듣던 에리히는 몸을 조금 더 라얀 쪽으로 낮추며 시선을 맞췄다. 그의 몸이 제 쪽으로 기울자 달빛이 가려졌다. 하지만 그의 금발이 달빛을 머금어 빛의 입자처럼 산란했다. 그것을 보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 내일도 나를 보러 와.”
“…왜?”
라얀이 인간을 보러 올라오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했다. 정말로 바다에 빠지려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라얀은 오늘 이후로 정말로 그를 볼 생각이 없었다.
“그때 대답해 줄 생각이니까.”
태양을 닮은 소년은 생각보다 심술궂은 모양이다. 라얀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꼬리로 툭 치자니 연약한 인간에게 그럴 수는 없었고. 대신 라얀은 머리칼을 쥐지 않은 손으로 물을 찰박여 가볍게 끼얹었다. 아주 가까이 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멀리 있지도 않은 에리히의 뺨에 물방울이 튀었다. 머리카락에도 닿은 물방울은 대롱대롱 매달렸다.
갑작스러운 물세례는 생각지 못했는지 에리히는 얼빠져서 라얀을 내려다봤다. 내가 심했나. 저 인간이 화라도 내면 어떡하지. 라얀은 그제야 살살 눈치를 봤다.
“…….”
에르하르트는 제 눈치를 보는 라얀이 귀여워 순간 웃음을 터트릴 뻔했지만 참았다.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자 미간을 모으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정말로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을 만큼 아름답지만 찌르면 푸른 피가 나올 것같이 서늘해 보이는 주제에 정작 짓는 표정은 다채로웠고, 하나하나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닿고 싶다.
희다 못해 투명할 것 같은 뺨으로 손이 뻗어 나간 것은 무의식의 작용이었다. 젖어 보이는 뺨은 부들거렸다. 화들짝 놀란 몸이 퍼드득거렸다. 그의 당혹을 모르는 척하며 에르하르트는 물었다.
“올 거지?”
그는 살며 처음으로 내일이, 혹은 다음이라는 게 기다려졌다.
“기다릴게.”
길게 뻗은 속눈썹이 깜빡깜빡 너울졌다.
“인간.”
“에리히.”
“인간은, …몰랐는데 조금 얄미운 것도 같아.”
한참 머뭇거리던 라얀은 새초롬히 말하곤 물속으로 첨벙 들어갔다. 청록빛의 형상이 흔들흔들 사라졌다. 에르하르트는 여전히 촉감이 남은 손을 움켜쥐었다가, 아까 제 머리칼을 쥔 손을 끝내 펼치지 않던 라얀을 생각하며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지만, 언제 올지 기약도 없지만 이번에는 며칠이든 지난 사흘처럼 초조하게 기다리진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