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의 난파 1권-1화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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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색 지느러미가 하느작거리며 움직였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검푸른 수면을 가로지르던 라얀은 저 멀리 수면에 반사되는 은빛에 설핏 웃음을 지었다.

<메르께서 아시면 노하실 거예요.>

라얀이 태어난 순간부터 그의 수호자로 이름을 올린 범고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라얀을 말렸다. 이 은밀한 일탈이 한두 번의 일이 아닌데도 그랬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범고래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듯 왕궁으로 돌아가기를 종용했다.

<들키면 어떡해요?>

“다들 잠들었는걸.”

<메르가 라얀을 찾을지도 몰라요.>

“알레. 메르는 날 찾지 않을 거야.”

알면서. 덧붙이는 말에 범고래, 알레는 앓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조그마하게 투덜거렸다. 투정 어린 불만에 웃으며 라얀은 비로소 보이는 수면의 경계를 깨트리고 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하늘은 심해처럼 새까맣지만 다른 것도 많았다. 가령 어두운 하늘을 밝히는 달이 그랬고, 별이 그랬다. 그리고 라얀은 그런 것들이 좋았다.

<약속해요, 라얀. 잠깐만 보고 가기로.>

“알았어.”

3년 전, 성년이 되는 생일을 맞이한 날 이후로 이렇게 나온 횟수만 차고 넘친다. 한 번도 들킨 적 없는데도 알레는 매일이 걱정이고 근심이었다.

“알레. 보여? 달이 둥그레.”

라얀의 탄성에 알레는 시큰둥하게 꼬리로 바다의 표면을 툭툭 쳤다. 물방울이 빛에 산란했다. 제 나름의 심술이다. 저런 게 뭐가 그렇게 특별하여 볼 때마다 감탄하느냐는.

라얀은 해사하게 웃으며 알레의 매끈한 머리를 둥글둥글하게 문질렀다. 그 손길이 좋은지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인어들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며 비웃었지만 라얀이야말로 왜 알 수 없다는 건지가 의문이었다. 제가 느낀 게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조금 전까진 거셌던 꼬리질이 살랑살랑해졌다. 손이 닿는 머리도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은 양 비벼댔다. 이럴 때 보면 사납기로 유명한 범고래의 일족이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알레.”

<네, 라얀.>

“너는 태양을 본 적 있어?”

<안 돼요.>

그는 아주 단호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알레가 할 잔소리란 뻔했다. 세상에. 수십 번을 들었더니 이제는 그가 어떤 단어를 강조할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느 마디에서 한숨 쉬듯 숨을 고를지까지 훤히 그려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인간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결국 알레의 말을 가로챈 라얀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는 그냥 태양을 본 적 있는지를 묻는 거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행동에 제약이 있었던 라얀과 달리 알레는 자유로운 편이었다. 한데도 그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라얀에게 낮의 하늘이 어떤지를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것이 혹여 라얀의 호기심을 일깨울까 봐 두렵기라도 하다는 양 말이다.

<밤과 다르지 않아요.>

“하지만 유리는 태양이 무척 아름다운 금빛이랬어. 수면은 햇살에 파랗게 반짝인다고 했어.”

알레가 낮은 목소리로 유리의 욕을 읊조리는 게 들렸다.

‘친애하는 왕자님. 태양은 금빛으로 반짝거려요. 아주 아름답고, 찬란하죠. 눈이 부실 만큼.’

심해를 유영하다가도 곧잘 수면 위로 올라 숨을 쉬어야 해서 바깥세상에 해박한 돌고래족의 유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보호를 명 받았음에도 심해의 왕궁 외엔 아무것도 모르던 라얀에게 바깥의 세상을 알려준 이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기어이 바깥에 동경을 품게 했으니 알레는 유리에게 유감이 상당했다.

알레는 라얀을 흘끔 살폈다.

빛이 들지 않은 심해만큼이나 새까만 흑발은 창백한 피부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상심에 찬 녹빛의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물에 젖은 속눈썹이 하느작거리며 흔들렸다.

범고래의 일족인 그는 인어의 미추에 큰 관심도 없고 이해할 생각도 하지 않았으나, 그런 그조차도 라얀이 완전하게 성장한다면 왕궁의 어떤 인어도 그와 견줄 수는 없으리라는 말엔 내심 동의하는 바였다. 제 반 틈도 오지 않을 라얀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태양을 보고 싶다던 소망도 들어주고 싶었으므로.

마음을 애써 추스른 그는 태어날 적부터 메르의 명으로 살피게 된 어린 주인을 주둥이로 쿡 밀었다.

딴에는 위로였다.

“간지러워. 알레.”

꼬물거리면서 몸을 뒤튼 라얀이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 웃음이 많았다. 다정했고, 사려 깊었다. 한 손에는 트라이던트를, 다른 한 손에는 왕홀을 쥐고 냉엄한 낯으로 바다를 지배하는 메르와는 사뭇 달라 때론 라얀이 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부조화가 올 때도 있었다.

<돌아갈까요?>

“벌써? 아직 이렇게 어두운걸.”

<인간들은 간혹 밤에도 배 위에서 연회를 열어요.>

무심코 한 말에 라얀의 녹빛 눈이 반짝 빛났다. 재촉하려고 했을 뿐인데, 그의 호기심에 불을 붙이는 실수를 했다.

“정말로? 그러면 인간들을.”

<라얀.>

“…….”

<정말로 메르께서 노하실지도 몰라요.>

알레는 마뜩잖음을 감추지 못했던 아까와 달리 차분한 투로 담담하게 말했다. 웬만한 일엔 눈을 감아주던 알레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온다는 것은 정말로 해서는 안 될 말이기 때문이다.

“알았어. 미안해, 알레. 정말로 그러려던 게 아니야.”

순순히 수긍하자 알레는 금방 표정을 풀며 꼬리로 수면을 철썩 내려쳐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물방울이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그러면, 음, 조금만 더 있다가 아티사로 돌아가도록 하죠.>

그럼에도 라얀의 표정이 아까만큼 빛나지 않자 알레는 그가 기뻐할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말해놓고도 혀를 깨물고 싶었지만 물릴 수 없었다.

“정말로?”

예상했던 대로 라얀의 얼굴에 화색이 번져서.

<저는 여기에 있을 테니 둘러보고 오세요. 너무 멀리는 가시면 안 돼요. 라얀.>

“응응.”

라얀은 밝게 웃으며 그가 말이라도 번복할세라 머리에 입만 가볍게 맞춰주곤 살랑살랑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다시 한번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알레의 외침이 들렸지만 듣지 못한 척하며 거푸 앞으로 나아갔다.

“…….”

풍랑이 일지 않는 바다는 고요했다. 항상 옆에서 돌아가자고 재촉하던 알레가 없어서 그런지 고요함이 더욱 선명하게 인지되었다.

쏴아아.

그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바닷물에 반쯤 잠긴 채 라얀은 몸을 뒤집었다. 새까만 하늘을 밝히는 별들이 총총 박혀 찬연히 빛났다. 라얀은 잡지 못할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불투명하게 보이는 갈퀴에 맺힌 물방울이 빛처럼 반짝거렸다.

한참을 즐기던 라얀은 금세 다른 생각에 빠졌다. 가령 알레의 당부라던가. 그는 조금만 둘러보고 오라고 했지만, 그가 생각하고 있는 때까지 오지 않으면 찾으러 올 것이다. 그렇다면 알레가 그를 찾기 전까지 조금 더 이 바깥의 세상을 담고 싶었다.

그리고 어두우니까.

조금 더 가깝게 맞닿는다고 해도 알아채는 이는 없지 않을까.

자기합리화를 마친 라얀은 행동에 나섰다. 연한 청록색의 지느러미는 그의 의지를 품고 힘차게 움직였다. 물살은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니 자연스레 뺨이 씰룩거렸다. 평소 하느작거리던 것과 달리 그는 퍽 재빨랐다. 뒤늦게 알아차린 알레가 쫓아와도 바로 붙잡지 못할 만큼.

꼬리로 수면을 내려치면서까지 속도를 붙이던 라얀은 깎아지른 절벽이 멀리 점처럼 보일 즈음에서야 멈췄다. 이 이상은 아무리 어둠이 내려앉았다고 해도 정말 위험했고, 어쩌면 화가 난 알레가 그의 밤 나들이를 막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가 그가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선이었다. 그러니 딱 이 정도가 적당했다.

혹시 몰라 눈만 빼꼼 내민 라얀은 깎아지른 절벽 위의 뾰족한 첨탑을 보았다.

인간 세상과 관련한 거라면 알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알레와 달리 유리는 심심해하는 제게 인간 세상의 지식을 전해주곤 했는데―그래 봐야 별거 없었다―, 그가 전해준 단편적인 지식으로 저것이 성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성에는 사람이 산다는 것도.

하지만 라얀은 성에 인간이 산다는 유리의 말이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절벽 위 성이 보이는 이곳에 처음으로 온 게 3년 전이었다. 올 수 있던 것은 다섯 번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3년간 한 번도 성에 불이 켜진 것을 본 적이 없다면 그런 의심을 할 법도 했다. 물론 유리는 밤이 오면 인간들은 불을 끄고 잔다고 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우연으로라도 불이 밝혀져야 하지 않는가.

“…어?”

그런데 오늘은 다른 날과 달랐다. 어둠에 잠겨 있던 성에서 희끄무레하지만 빛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달빛이나 별빛보다도 희미했다. 하지만 라얀의 눈에는 그 빛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곧 희끄무레해진 빛이 아주 조금 더 밝아지고, 어둠에 잠긴 형상이 조그맣게 보였다. 인간이다. 본능적으로 직감한 라얀이 홀린 것처럼 지느러미를 유영하려 할 때였다.

<시 메르.>

뒤에서 그를 부르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라얀은 내심 찔끔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3년 전, 그는 후계의 자리를 박탈당했다. 공식적인 박탈은 아니었고, 그러므로 호칭이 거두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메르가 더 이상 그를 후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때문에 라얀 역시 그날 이후로 그렇게 불리는 것을 질색했고 알레는 그를 이해하며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데도 그를 ‘시 메르’라 불렀다는 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돌아가시죠.>

“…….”

라얀은 미련이 남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시 메르, 라얀.>

알레는 다시 한번 그를 재촉했다. 아. 당분간은 나오지 못하겠네. 알레의 목소리에서 그런 기미를 읽었다. 그러니 더욱 움직이기 싫었지만, 아니,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지만 라얀은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자.”

알레가 원하는 대로 그의 세계로 돌아가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 * *

빛이 시들지 않는 왕궁.

엘레브 해의 주인이 머무르는 아티사는 종종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 수호 결계로 둘러싸여 오로지 허락받은 일족의 출입만이 허락된 아티사는 과연 그 말이 허명이 아니라는 것처럼 티 없이 아름다웠다.

마력을 담은 진주는 은은하게 빛을 밝혔고, 산호는 붉은빛을 띠었으며, 해초는 수만 년의 역사를 간직한 석벽을 감싸고 물결을 따라 유유히 흔들렸다.

왕성의 정중앙에는 바다를 호령하듯이 한 손에는 트라이던트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왕홀을 쥐고 고고한 표정을 짓는 메르의 석상이 아주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아티사를 드나드는 자들의 얼굴엔 한 점 수심이 드리우지 않았고, 어린 인어들은 왕을 찬양하는 찬가를 낭랑하게 불렀다.

한때는 저 대열에 껴서 이 바다를 다스리며 평화를 일구는 제 왕을 찬양하고는 했던 라얀은 조개 안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턱을 괴고 넋을 놓고 있었다.

그가 이러는 것은 벌써 며칠째의 일이었다. 몇 년 전의 일에도 주눅 들지 않고 매사 활기찼던 라얀이 몇 날 며칠을 조개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넋만 빼놓고 있자 인어들은 내심 안 그런 척 관심을 기울였다. 모처럼의 관심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라얀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얀.>

제가 본 형상은 정말 인간이 맞을까. 3년 동안 기척이라곤 없던 그 성에 인간이 살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라얀은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을 본 셈이었다.

인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인어도, 인간도 신의 피조물이며 그를 닮은 모습으로 조형되었다. 하여 인간이 인어 일족과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것 정도는 단편적인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청록빛의 꼬리가 없을 것이고, 갈퀴가 없을 것이며, 또한 귀 옆에 작게 아가미도 나 있지도 않을 것 같았다.

<라얀.>

머리도 그들처럼 새까맣거나 혹은 짙푸른 색일까. 호기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끝이 없었다. 알레가 없었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라얀?>

“…….”

<시 메르, 라얀.>

“그렇게 부르, …유리?”

그가 싫어하는 이름으로 호칭한 이는 돌고래족의 유리였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거기다가 아티사에서는 본신 말고…….”

<알아요. 알아요. 그건 잠깐 넘겨두고 제가 라얀을 몇 번을 불렀는지는 아세요?>

흘기며 하는 말에 유리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

“불렀어?”

<몇 번이나요. 그런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어요?>

“몰라도 돼.”

<어디 아파 보이는 건 아니니 뻔하죠.>

짓궂게 웃은 유리가 몸을 바짝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알레에게 혼났거나, 아니면 바깥세상을 생각하고 있었거나.>

라얀은 곧장 눈을 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듣기라면 하면 큰일이었다. 게다가 아티사에는 어디든 메르의 눈과 귀가 있었다. 가령 무장하고 지나가는 저 수호 인어들이라던가.

그가 아무리 제멋대로 바다 바깥을 구경하러 가고 있기는 하다지만, 메르의 직속 부대로 아티사를 순찰 중인 저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들리는 건 곤란했다. 그랬다간 메르의 귀에까지 닿을 테고 라얀은 다시는 수호 결계를 지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라얀은 며칠 전의 일로 단단히 화가 난 알레의 강경한 태도 때문에 나가지 못하고 있기는 했다. 그 때문에 심통을 부리는 중이었다지만 일시적으로 막히는 것과 영원히 속박되는 것은 같은 선상에 둘 수 없는 문제였다.

“조용히 좀 말해.”

<이 정도는 못 들어요. 그래서요. 무슨 생각 중이었는데요?>

제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유리는 얼른 호기심을 풀어달라 재촉하기 바빴다. 주둥이로 어깨를 비비는 유리의 새까만 눈은 흥미로 반짝거렸다.

“유리.”

내가 인간을 본 것 같아. 귓가에 대고 자그맣게 속삭이는 말에 유리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곧 하얀 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본신을 거두고 인간화한 그는 까맣고 하얀 머리카락을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털어내며 라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더 말해보라고 재촉하는 게 분명했다. 그는 조금도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이 라얀을 안으로 구겨 넣다시피 하며 조개를 닫았다.

낭랑하게 울리던 찬송가가 완전히 끊겼다.

“정말이에요? 라얀. 진짜 인간을 봤어요?”

“응.”

바깥의 소리가 차단되자마자 유리는 곧장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인간일 것이다. 까맣고, 자그마한 형상은 분명 움직였으니.

“봤다니, 어떻게요?”

알레가 그걸 내버려두었을 리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리를 보며 라얀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생각하던 바를 언어로 내뱉자 조금 더 그날의 기억이 뚜렷해져서 말이 점점 빨라지고 어조는 높아졌다.

“어쩐지. 요즘 알레가 저를 죽일 듯이 살벌한 눈으로 쳐다보더라니.”

가볍게 동조해 주며 한참을 듣던 유리는 그제야 지난 일들이 이해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은 알아주는 앙숙이고, 알레가 유리를 쳐다볼 때면 매번 못마땅하다는 듯이 주둥이를 씰룩거린다는 것을 알기에 그게 새삼스러운 일인가 싶어 바라보자 아무 일도 아니란 듯 손을 내저었다.

“유리. 너는 인간을 본 적 있겠지?”

“그럼요. 잡힐 뻔한 적도 있는데요.”

유리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끼친다며 과장스럽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말은 저렇게 해도 돌고래 일족에서 후계로 거론되는 유리가 쉬이 누군가에게 잡힐 확률은 희박했다.

“내가 인간을 본 게 맞을까?”

“글쎄요. 궁금해요?”

유리는 아주 당연한 것을 물었다. 오히려 반문하는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다시 보러 가면 되죠.”

꺼낸 말이란 어이가 없어 라얀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걸 누가 몰라서 며칠째 아티사에 처박혀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만약 가능했더라면 진작에 확인하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알레는 그것을 경계했다. 혹여 라얀이 인간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될까 봐.

“오며 가며 들었는데 범고래 일족에 무슨 일이 생겼다나 봐요.”

“범고래 일족에?”

알레가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어서 전혀 몰랐다.

“쉬쉬하는 분위기라 아마 라얀도 몰랐을 거예요. 저도 조금 전에 막 들은 거니까.”

“별일은 아니어야 할 텐데.”

별일이야 있겠느냐며 대수롭지 않아 하는 유리를 보자 라얀도 금방 염려를 거두었다. 생각해 보니 이제 이름뿐인 시 메르라고는 해도, 만약 범고래 일족에 어떤 일이 생겼더라면 그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다.

염려가 가시고 나자 왜 유리가 난데없이 이런 말을 꺼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알레는 범고래 일족의 후계자였다. 어떤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족에 생긴 문제로 범고래 일족의 장로들은 알레를 소환할 터였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당분간 범고래의 영역에 발이 묶이게 될 것이었다.

유리를 바라보자 그는 길게 굽실거리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마치 제 것인 양 배배 꼬면서 몸을 가까이 붙였다.

“라얀. 그러면 확인하러 갈래요?”

그는 짓궂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 *

그리하여 라얀은 다시 밤이 되었을 때, 바다 위로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알레의 감시로 인해 한참을 아티사에 묶여 있다가 며칠 만에 나온 탓인지 동글동글했던 달은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흩어지는 달빛과 별빛은 여전히 어둠을 삼킨 것처럼 어두운 바다의 표면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것에 찬탄하는 대신 라얀은 미끄러지듯 절벽의 해안가로 향했다. 눈만 반쯤 내밀어 모습을 드러낸 라얀은 절벽 위의 성을 살폈다. 그날 그가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성에서는 빛이 희끄무레하게 번져 나왔다.

<정말로 인간이 사나 봐요.>

라얀의 주변을 맴돌며 가볍게 물을 뿌리고 장난치던 유리는 제 생각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저 불빛은 정말로 인간의 흔적인 것이다. 마음이 벅찼다. 하지만 선뜻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감시자인 알레는 없었지만 그는 아주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저 없는 동안 절대 말썽부리면 안 돼요. 라얀. 그랬다간 앞으로 당신을 계속 시 메르라고 부를 겁니다. 아시겠어요?’

―라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하던 범고래 알레가 무서워서만은 아니었다.

유리에게 바깥세상을 전해 들은 뒤로 라얀은 언제나 인간을 궁금해했고, 호기심을 가졌으나 막상 인간을 정말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어쩌면 아주 어릴 적부터 지겹게 들은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무의식적인 기억에 새겨진 탓일지도 모른다.

<라얀. 저는 그럼 올라온 김에 좀 쉴게요.>

어쩔 수 없이 종종 수면 위로는 올라오지만 인간에겐 큰 호감이 없던 유리는 금방 흥미를 잃었다. 라얀은 아무래도 제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은 것 같지만, 잡혀서 큰일이 날 뻔한 것은 사실이었다. 어쨌든 저렇게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것을 보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라얀에게 바깥세상을 알려주었지만, 원래의 의도는 억눌린 채 살아가는 어린 주인이 가여워 뭔가 흥밋거리를 던져주고 싶었을 뿐이고, 지금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보는 게 귀여워서 그랬다. 유리는 아티사의 하나뿐인 왕자가 인간에게 호의를 품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저 없다고 말썽부리지 말아요.>

“너 누구야? 유리 맞아?”

알레가 할 법한 잔소리를 늘어놓는 유리라니. 이거 혹시 자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 알레가 유리로 변신한 것은 아니겠지.

<알레한테 죽기 싫거든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 라얀이 눈을 흘기자 유리가 웃으며 농담을 건네더니 금방 저 멀리 사라졌다. 아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몸통을 눕히고 여유를 즐길 것이다.

옆에서 부산스럽게 굴던 유리까지 사라지고 나자 라얀은 조금 어색해졌다. 그도 그럴 게 라얀의 일탈은 언제나 알레가 함께였다. 그런데 이 온전한 자유라니. 라얀은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굴리며 조금 앞으로 나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역시 더 가까이는 못 가겠다.

여기서 조금만 더 구경하다가 유리에게로 돌아가야지, 하고 결정을 내린 라얀의 주변으로 레탄(LETAN, 엘레브 해의 연안에 사는 열대어 일종)떼가 몰려들었다.

바다에 사는 모든 종족이 아티사의 출입을 허락받지는 못했지만, 바다에 사는 대부분의 것은 지배자 일족인 인어를 경외하고 사랑했다. 라얀은 꼬리를 흔들어 인사하며 눈을 찡긋거렸다. 작은 인어의 호감 표시에 레탄은 꼬리지느러미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라얀은 레탄들과 함께 가벼운 장난을 치면서도 한편으로는 흘끗흘끗 성을 살폈다.

그러곤 이내 멈칫했다.

불빛이 성이 아니라 바로 절벽 위에서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안녕. 나중에 봐.”

그와 놀고 싶어서 주위로 몰려들던 레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라얀은 절벽 쪽으로 미끄러지듯 유영했다. 가까워질수록 일렁이는 불빛이 선명해지고 그것을 든 이도 아주 어렴풋하게 보였다. 고개를 바짝 올려 시선을 위에 고정한 라얀은 생각했다.

인간이다. 저것이.

마음이 벅차올랐다.

“…….”

그때 인간의 손이 포물선을 그리자 빛을 내던 것이 돌연 아래로 추락했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낙하하는 것에 놀라 라얀은 몸을 움칠거렸다. 인간의 손에 있을 때 빛나던 것은 물에 닿자마자 금세 새까맣게 빛을 잃었다. 왜지. 인간의 손에 닿아야만 빛나는 마법구일까. 호기심이 생긴 라얀이 그것을 향해 조심히 다가서려 할 때였다.

태양이 추락했다.

아니, 그것은 태양을 닮은 어린 소년이었다.

처음부터 인어와 인간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친 그물망에 우연히 인어 하나가 걸리면서 그들의 존재가 알려졌다.

인간은 새로운 종족에 호기심을 보였고, 인어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인어는 인간에게 바닷길을 허락하였고, 인간들은 그렇게 연 바닷길을 통해 자유롭게 오가며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러는 사이 종종 인간과 사랑에 빠져 지상 위로 올라가 터를 잡은 인어도 존재했다. 인간들의 세상에 인어의 이야기가 동화로 꾸며졌고, 아티사엔 인간과 사랑에 빠진 인어 이야기가 전해졌다.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문명을 발전시킨 인간은 이기적이게도 기어이 바다와 거칠게 격랑이 이는 바다 아래 잠긴 수많은 보물을 손에 쥐어 삼키고자 했다. 어쩌면 인어마저 탐나 제 아래 두고 싶어 했던 건지도 모른다.

수년 동안 포탄이 떨어졌다.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가시지를 않았다. 많은 인어가 인간들의 날 선 창에 꿰뚫려 죽고, 기어이 선두에 나서 싸우던 메르마저 살해당했다.

새로운 트라이던트의 주인은 전대 메르를 살해한 인간을 잔인하게 찢은 뒤 아티사를 심해로 끌어내리고 수호 결계를 쳤다. 인간과 연을 맺어 지상에 올라간 인어들은 영구 추방되어 다시는 아티사로 돌아오지 못했고, 그 뒤로 아티사에서 인간과 인어의 사랑 이야기가 전부 사라졌다.

그리하여 피비린내 나는 역사 이후에 태어난 인어들에게 인간이란 미지의 생물 같은 존재였다.

“…….”

그것은 라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러운 추락에 라얀이 어찌할 바 모르는 동안 인간이 떨어진 자리에 포말이 잘게 일어났다가 거세게 일렁이는 파도에 삼켜졌다. 눈을 깜빡이며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라얀은 제가 본 것을 확인하기 위해 수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떨어지면서 의식을 잃었는지 인간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반짝반짝한 금빛의 머리카락은 어두운 바닷속인데도 빛이 났다. 빛이 시들지 않는 그의 아티사처럼. 어쩌면 들어서만 알고 있는 태양처럼.

라얀은 인간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홀린 듯이 그것을 바라봤다.

이미 의식을 잃었던 작은 인간이 온몸을 괴롭게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라얀은 정신을 차리고 주춤주춤 가까이 다가갔다. 다가감엔 머뭇거림은 있었지만 다시 뒤로 물러나지도 않았다.

“커, 억……!”

양손으로 목을 부여잡으며 버거워하던 인간의 입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보글보글 기포가 생겼다. 찌푸려졌던 미간이 반듯하게 펴지고 몸이 힘없이 늘어지는 것에 뒤늦게 인간은 물속에서 숨을 못 쉬는 건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아. 생각해 보니 예전에 꽤 호전적인 성향을 가진 나이 든 인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인간들이 탄 배가 지나가기에 노래를 불러 꼬여낸 다음 배를 좌초시켜 인간들을 전부 다 수장시켜 버렸다고,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 태양을 닮은 어린 인간은 물속에서 숨도 못 쉬는 주제에 왜 떨어진 거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라얀은 조심조심 다가가 가라앉는 몸을 일단 붙잡았다.

하지만 그 후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인간을 보는 건 처음이었고, 바다에서 숨을 못 쉬는 생물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고귀한 어린 인어시여. 인간에게 입을 맞추고 숨을 불어 넣어보세요.>

주변을 빙빙 돌며 구경하던 레탄 중 하나가 속삭이며 참견을 했다. 그의 말대로 말랑한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고 호흡을 불어 넣자 인간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그제야 조금 경황없던 정신이 수습되어서, 라얀은 인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에 작은 갈퀴가 없다.

귀 뒤에 아가미도 없고, 상체 아래로 지느러미도 없었다.

“와.”

신기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라얀은 인간의 손가락을 붙잡고 조물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작은 인간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그런 짓을 했을까?”

인간이란 불완전한 성장으로 아직 어린 인어처럼 보이는 라얀과 외형도 비슷하고, 바닷속에서 숨도 쉬지 못하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생물이다. 그런데 이들은 수백 년 전 어떻게 아름다운 바다를 붉게 물들일 정도로 많은 인어를 잔인하게 학살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직 자라지 않은 어린 인간이에요. 다 자란 인간은 그보다 훨씬 크답니다. 인어님.>

제 혼잣말을 들은 레탄이 조잘조잘 말을 보탰다. 이렇게 작은 게 성장을 마친 인어만큼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또다시 갈퀴 없이 매끈한 손가락 사이를 조물조물 만졌다.

<그리고 인간은 호흡할 수 있다고 해도, 너무 오래 물에 있으면 추워서 죽고야 말 거예요.>

고작 그걸로? 역시 연약한 것 같은데.

라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까만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흔들리며 제가 붙잡고 있는 인간의 몸에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아쉽지만 이제 올려보내야지. 뭍에 올려두면 되는 건가.

“으…….”

레탄에게 다시 질문하려던 찰나 어린 인간의 입술이 열리며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얀은 소리에 집중했다.

인간의 눈두덩이가 움찔거리며 눈꺼풀이 위로 말려 올라갔다. 바다만큼 파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초점이 잡히지 않아 몽롱하던 인간의 눈이 깜빡거릴 때마다 또렷해져 갔다. 처음엔 라얀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어린 인간이 눈을 부릅떴다. 뻐끔뻐끔. 입술이 열렸다가 붙기를 반복했다. 기포가 방울방울 맺혔다. 그러나 인간은 물속에서 말을 할 수 없기에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인간의 새파란 눈에 제 모습이 맺혔다.

새까만 머리칼에, 녹색의 눈동자가 상이 되어 보였다. 눈동자 속의 인어는, 그러니까 라얀은 미처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

인어의 존재를 인간에게 들켜선 안 된다. 알레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메르의 냉엄한 낯도. 그리고 아티사의 수호 결계 속에 갇히게 될 제 미래까지도.

인간에게 제 모습을 더 보여선 안 된다는 생각에 라얀은 저도 모르게 꼬리를 휘둘렀다.

찰싹! 갑작스럽게 얻어맞은 충격에 어린 인간의 눈이 감기고 몸은 다시 축 늘어졌다. 놀라서 손을 놓는 바람에 인간의 몸은 다시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기절시키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당혹스러움에 눈을 데구루루 굴린 라얀은 일단 가라앉는 몸을 붙잡아 수면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끌어당겨 땅바닥에 올렸다. 인간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

레탄은 이 인간은 덜 자랐을 뿐, 다 자란 인간은 훨씬 크다고 했다. 거짓말인 것 같긴 하지만 유리도 인간에게 죽을 뻔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처음 본 인간이 이 어린 인간이라서 그럴까. 라얀은 마냥 의구심만 들었다.

모두가 잘못 알고 있던 게 아닐까.

인간은 사실, 이렇게 다들 태양처럼 반짝거리는 존재가 아닐까 하고.

“…….”

라얀은 상체를 뭍 위에 기대다시피 올린 채 인간을 보았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늘어진 인간의 금빛 머리카락에 가닥가닥 얽혔다.

제 머리를 쓸어 올리려던 라얀은 무심코 손을 뻗어 어린 인간의 가슴께에 얹었다. 물에서 건져낸 인간의 살갗은 제 체온보다 뜨거웠다.

예기치 못한 온도에 손을 움츠리며 떨어트렸다가 다시 손을 올렸다. 뜨거운 살갗 아래로 쿵, 쿵. 미약하지만 심장이 뛰었다. 물속에서와 달리 숨도 쌕쌕 내쉬기도 했다.

살아 있는 것의 생생한 감각에 라얀은 손을 떼기 싫어 미적거렸다. 한편으로는 다시 눈을 뜰까 봐 라얀은 어린 인간의 얼굴을 몇 번이고 살폈다. 인간은 눈가는 찌푸렸지만 결코 뜨진 않았다.

“…아픈가?”

자세히 살펴보니 꼬리에 얻어맞은 뺨이 발갰다.

“인간, 아파?”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불쑥 미안한 마음이 치밀었다. 젖어서 이마에 달라붙은 금색 머리를 쓸어 넘긴 라얀은 그의 뺨을 약하게 문지르는 한편, 조심히 말을 걸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의식을 잃은 인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손바닥에 감기는 뺨은 보드라웠다. 미안한 마음은 금세 호기심 아래로 잠겼다. 그 김에 라얀은 인간의 얼굴을 굴곡을 따라 만져보며 자세히 살폈다. 금빛 머리칼은 바다 안에 잠겨 있을 때도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는데, 달빛에 비치니 더욱 아름다웠다.

구해준 값으로 몇 가닥 가져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으며 이번에는 눈가를 살살 문질렀다. 지금은 비록 눈을 감고 있지만 가닥가닥 길게 늘어진 속눈썹 아래로 어떤 색의 눈동자를 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파란색이다. 이 바다처럼 아름다운.

“…….”

다시 보고 싶어서 슬쩍 눈을 까뒤집었다가 뒤척임에 몸을 움찔하며 얼른 손을 떼고 기척을 살폈다. 다행히 깨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라얀은 마음 놓고 다시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어리고 연약한 인간.

라얀이 구해준 인간.

어렵기만 했던 존재는 자꾸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헉!”

인간이 제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라얀의 손을 붙들었다. 또 놀라서 꼬리로 칠 뻔했지만 발개진 얼굴을 보니까 마음이 약해졌다. 겨우 이 정도로 자국이 남을 만큼 약한 인간이지 않은가.

붙들린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위로 말려 올라갔다. 아까 눈꺼풀을 까뒤집어가며 보려 했던 새파란 눈동자가 달빛 아래서 드러났다.

“…허, 허억, 헉……!”

인간은 몸을 돌려 한참을 콜록거렸다. 그때까지도 라얀은 얼어붙어 있었다.

“…누, 누구?”

인간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리며 라얀을 향해 말했다. 깨끗한 미성이었다.

처음 듣는 인간의 목소리에 넋을 놓았던 라얀은 얼른 그에게서 멀어지며 겨우 손을 떨쳤다. 혹시 인간의 손이 부러지기라도 할까 봐 힘은 주지 않았다. 아.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기력이 전부 소진된 인간의 손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작은 손가락이 닿고 싶은 양 움찔거리며 튀었다.

라얀은 뭍에 반쯤 올린 몸을 뒤로 물렸다.

<어린 인어님. 돌고래의 후계자가 인어님을 찾아 이곳으로 오고 계세요.>

그의 근처에서 뱅글뱅글 돌던 레탄이 꺼낸 말에야 까마득히 잊고 있던 유리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유리가 알레보다 유하다고는 해도 그가 인간을 구하고, 심지어 모습을 들켰다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을 터였다. 얼른 그에게 돌아가서 시치미를 떼야만 했다. 라얀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를 보는 인간에게서 시선을 떼지도, 몸을 뒤로 물리지도 못했다.

인간은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린 상태는 아니었다. 여전히 의식이 반쯤은 저 아래 잠겨 있었다.

“왜, 나를…….”

중얼거리는 인간의 눈에 손을 올리며, 라얀은 입을 열었다.

<ɮהז……תעמ…הװש…ת……תװש…….>

모호하지만 귀를 기울이게 하는 아름다운 선율이 라얀의 입술 사이에서 따뜻한 음으로 흘러나왔다. 가려진 시야에 답답한지 움찔거리던 인간의 몸이 느슨히 이완되었고, 손바닥 아래에서 파르르 떨리던 맥동도 가라앉았다.

잠든 인간을 내려다보며 이어지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아주 잠깐 궁금해했다가, 곧 미련을 주워 삼키며 몸을 돌려세웠다. 잔잔하게 일어난 포말 외에 달빛 아래에는 어린 인간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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