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3.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64/64)

외전3.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회사 앞에 도착하자마자 검은 옷을 입은 가드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최서율은 익숙하지 않은 극진한 의전을 받을 때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불편했다. 범진그룹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에게 맞게 어깨 펴고, 당당하게 대응하라는 호랑이 부모님의 말씀을 상기하며 최대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여유로워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운전석에서 내려 뒷자리 카시트에 앉아 있던 이든이를 내려 주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회장님 은퇴 후 사장이 된 강무혁의 아들이라는 걸 모르는 사원은 없을 테니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이든이는 꼬리뼈가 근지러운지 엉덩이를 벅벅 긁어댔다.

“이든아, 왜? 꼬리 나올 거 같아?”

“응, 엄… 아니, 아빠. 꼬리가….”

“괜찮아. 아빠가 빼줄게.”

조수석에 있던 자그마한 바구니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품에 안았다. 바구니 안쪽을 살피다가 뭐가 불안한지 발을 동동 구르는 이든이를 챙겼다.

“사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올라가시죠.”

사원으로 있을 때는 이름만 알고, 얼굴은 모르던 보안팀장이었다. 반달곰 수인이라고 하던데 큰 키는 아니었지만 듬직한 풍채가 그의 성품을 보여주는 듯 우직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회장님께서 굉장히 신뢰하는 분이라고 하더니 볼 때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호랑이 아버지인 강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강무혁의 형인 강무선이 회장 자리에 올랐다. 대기업 세습 문화에 대해 꼬집는 비판도 있었지만, 실력으로 잠재우겠다는 포부 하나는 마음에 든다며 칭찬을 받았다. 이제는 범진그룹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런 부분까지 너무 사회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 제 가정을 꾸리고 건사하기도 힘든 지경이라 어쩔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사장 자리에 앉은 강무혁은 최서율이 사원으로 있을 때 시작했던 리조트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오너로 이름을 떨쳤다. 이제는 뉴스에서도 종종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토끼 가족들이 매우 신기해하며 즐거워했다.

“엄, 아니, 아빠.”

“응?”

“나 꼬리….”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라서던 보안팀장과 팀원의 시선이 이든이의 엉덩이로 향했다. 뒤이어 강무혁을 닮아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의 머리 위로 둥그런 귀가 솟아올랐다. 최서율이 얼른 이든이의 어깨를 감싸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감사합니다. 제가 잘 찾아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네. 그럼 이만.”

최서율이 회사 사원이었다는 걸 알고 있는 두 직원은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던 몸을 물렸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는 사이, 바구니를 내려놓고 울상짓고 있는 이든이의 바지를 정리하고 꼬리를 빼주었다.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귀여운 귀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괜찮아, 이든아. 이든이는 아직 몸이 변하는 걸 배우는 중이라 이렇게 귀랑 꼬리가 나올 수도 있어. 너무 속상해하지 않아도 돼.”

동생이 태어나면서 무언가를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종종 모습이 변하는 걸 조절하지 못할 때 무척 속상해하는 아이였다. 기특하고, 대견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이제 겨우 다섯 살. 스트레스를 받기에는 이른 나이였기에 다그치기보단 달래는 방향으로 아이의 마음을 만져주었다.

“으응, 근데 엄마… 아니, 아빠… 아니….”

“이든아. 너무 힘들면 편하게 불러. 다 괜찮아.”

팔랑거리는 귀를 만져주자 아이가 활짝 웃었다. 엄마, 아빠와 약속한 걸 지키기 위해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밖에 나올 때마다 헷갈리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당장이라고 깨물어 주고 싶었다.

부사장실보다 한층 더 위인 사장실이 있는 층에 내리자마자 갑자기 긴장감에 가슴이 조여왔다. 아이 둘을 데리고 뭐를 사려니 너무 힘들어 빈손으로 왔는데 너무 염치없었나 싶기도 하고 별생각이 다 들었다.

“어머! 최 대리!!”

“아!”

조심스럽게 사장 부속실에 들어서자마자 최서율을 발견한 선수미 차장이 꽥!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얼른 다리 뒤로 숨어버린 이든이가 꼬리를 바짝 치켜세우며 우르르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놀랐을 아이가 걱정되어 손을 뻗어 등을 토닥였다.

“어머, 웬일이니. 이든이가 이렇게 컸어?”

“이든아, 인사해야지. 집에도 오셔서 만났던 거 기억나지?”

“네… 안녕하세요.”

허벅지 뒤에 딱 붙어 있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허리를 꾸벅 숙이자 선수미 차장이 환하게 웃었다. 덕담하듯 인사를 건네곤 곧바로 최서율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회사에서 보니까 더 반갑다. 그렇지?”

“그러게요. 잘 지내셨죠?”

이든이 돌잔치 이후로 집에 초대되었던 부사장 지원실 식구 중에 사장 부속실로 함께 이동한 사람은 선수미 차장과 유재영 과장, 두 사람이 전부였다. 박경석 부장은 해외 지사로 발령이 나면서 아이들 유학까지 단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며 콧노래를 부르며 떠났고, 막내였던 황유진 사원은 대리 직급을 달고 여전히 부사장 지원실에서 열심히 근무 중이었다.

“최 대리님!”

“고 비서님!”

이제는 나름 경력이 쌓인 비서로 사장의 업무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고경훈 비서였지만 이전과 다름없이 해맑은 미소로 최서율을 반기며 뛰쳐나왔다.

“여기가 애들 놀이텁니까? 왜 자꾸 뛰어다닙니까?”

익숙한 윤 비서의 목소리에 최서율이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지난 주말에도 만났는데 회사에서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지난해 최서현과 백년가약을 맺은 윤 비서는 아직도 제게 토끼 가족이 생겼다는 걸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서도 누구보다 토끼 가족들에게 진심인 사람이라 평이 무척 좋았다. 그런 그를 두고 강무혁이 이상하게 경쟁심이 든다며 구시렁거렸지만, 좋은 친구에서 능력 있는 비서로. 이제는 가족으로 그와 함께하는 인생에 무척 만족하는 눈치였다.

“왔으면 나부터 찾아야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

“아빠!”

인원이 꽤 늘어난 사장 부속실 사원들과 이런저런 인사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 다가오는 강무혁을 향해 이든이가 잽싸게 날아올랐다. 언제 보아도 놀라운 점프력이라며 윤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림 없이 저를 받아주는 아빠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린 아이가 얼굴을 감추며 부끄러워했다.

갑작스러운 사장님의 등장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기류를 단번에 눈치챈 최서율이 어색하게 웃으며 강무혁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선 차장에게 다음에 연락하겠다는 듯이 눈짓하곤 얼른 들어가자며 재촉하려는 찰나, 용기를 낸 선 차장이 조심스럽게 두 사람을 붙잡았다.

“사장님, 저희도… 해든이 보면 안 되겠습니까?”

이든이의 동생 이름은 ‘강해든’으로 정해졌다. 해가 드는 자리. 라는 뜻으로 해처럼 밝은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토끼 할아버지가 지어주었다. 해든이는 2.8kg으로 평균보다 아주 조금 작게 태어났지만, 누구보다 건강한 여자아이였고, 호랑이 가족들이 그렇게나 바라던 ‘토끼’였다.

해든이는 수술 후 회복하는 최서율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일주일이 지나도록 모습이 변하질 않아 강무혁을 애끓게 만들더니 퇴원하던 날 밤, 최서율을 똑 닮은 자그마한 갈색 토끼로 변해 두 사람을 놀라게 했다.

세상에 나온 지 이제 5개월. 작지만 옹골찬 아기는 호랑이인 제 오빠를 잡아먹을 듯 엄청난 운동량을 자랑하며 잠잘 때 빼고는 대부분 여기저기 움직이고, 뛰어다녔다. 목청 또한 너무 좋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삐! 삐! 삐! 열심히도 울어대는데 자그마한 몸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눈을 빛내며 제발. 제발. 제발. 간절함을 내보이는 선 차장을 보던 최서율이 설핏 웃었다. 강무혁이 안 된다고 말하지도 않을 테지만, 보면 안 될 이유도 없기에 먼저 나서서 바구니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분유 먹이고 차에 태웠더니 잠이 들었어요.”

보드라운 보자기를 걷어내자 인형처럼 잠들어 있는 갈색 토끼 해든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헙.”

“으흑.”

“큽….”

잠든 아기를 깨울까 봐 숨죽이고 있던 부속실 식구들이 저마다 탄성을 집어삼키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강무혁에게 안겨 있던 이든이가 크게 버둥거렸다.

“내 동생! 안 돼요! 그만! 아빠! 그만 보라고 해!”

“이든아, 쉿.”

이든이는 제 동생을 바라보는 낯선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꼬리를 바짝 치켜들고 크르릉. 크르릉. 열심히 울어댔다. 강무혁이 그런 이든이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쉬. 괜찮아. 바짝 끌어안고 토닥여주는 아빠의 품에서도 진정하지 못하는 아이를 보던 최서율이 모두의 시선이 닿아 있던 바구니를 정리하고 물러났다.

“우리 이든이 이러다가 넘어가겠다. 이만 들어갈게요.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시간을 뺏긴. 우리도 반가웠지. 너무 귀엽다 진짜.”

“과장, 아니 차장님 또 놀러 오세요. 언제든지.”

“그래요. 연락할게요.”

오빠가 오빠 노릇을 잘한다며 칭찬했지만 이든이는 기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릉그릉. 씩씩거리며 강무혁의 목에 매달려있었다.

“바로 출발하자.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시간을 확인한 강무혁이 윤 비서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곤 밖으로 걸음을 이끌었다. 인사를 받으며 꾸벅꾸벅 허리를 숙이던 최서율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서야 휴우- 긴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와서 정신없지?”

“좀 그렇네요. 인사만 하다가 시간 다 갔어요. 사장실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싫어. 다음에는 또 안 올 거야.”

두 사람의 대화에 툭 끼어든 이든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바구니를 달라는 듯 손을 뻗길래 조심스럽게 품에 안겨주자 수건을 걷어내고 여전히 곤하게 자는 해든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내 동생인데….”

“사람들이 해든이 보는 거 싫어?”

“응.”

굳이 왜냐고 묻지 않은 강무혁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든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보드라운 털에 감싸인 호랑이 귀가 쫑긋쫑긋 움직이다가 제 방향을 찾으며 멈췄다. 최서율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강무혁을 바라보았고 강무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바구니를 꼭 끌어안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이든이를 칭찬하듯 등을 두드려 주었다. 강무혁은 아직 어려도 호랑이 그 자체라며 뿌듯해했고, 최서율은 두 호랑이의 소유욕을 다 이해하지 못해 조금 어려웠다.

“아빠 차 타고 가?”

“응. 할아버지네 갈 거니까. 아빠 차 타고 가자.”

“뒤에 같이 타.”

무조건 조수석에 앉아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던 걸 생각하면 아이가 둘이 되면서 강무혁이 많은 발전을 거듭한 셈이었다. 최서율이 이든이의 안전띠를 확인하고 그 옆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자리를 잡았다.

끌어안고 가면 편하겠지만 이든이가 해든이를 옆에 두고 싶어 하기에 가운데 벨트로 바구니를 고정했다. 덮어두었던 보자기를 밀고 자그마한 토끼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엄마. 해든이 깼어.”

“그래? 잘 잤냐고 물어 봐줘.”

막 출발하려던 차를 멈춘 강무혁이 뒷좌석으로 고개를 쭉 내밀고 해든이를 바라보았다. 매일 보아도 매일 신기하다고 말하는 강무혁의 눈에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우리 해든이 잘 잤어?”

“삐!”

“내가 물어보려고 했는데!”

“삐이! 삐!”

“해든아. 아빠 밉지. 그렇지?”

강무혁이 선수 치는 바람에 할 말을 잃은 이든이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서율이 그 작은 주먹을 손으로 잡아 내리고 운전석 시트를 툭툭 두드렸다.

“이든아.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고 했지? 당신도 그만하고 이제 출발해요. 본가 가서도 둘이 이러면 나랑 해든이랑 토끼 마을로 가버릴 거예요.”

“이이이이! 나 이제 안 그래에!”

“쉬. 강이든. 그만.”

최서율의 각 잡힌 낮은 저음에 앙증맞은 주먹에서 힘을 푼 이든이가 코를 쭉 내밀며 제 오빠를 바라보는 해든이를 보며 뜨거운 콧김만 훅훅 뱉어냈다. 강무혁도 얼른 자세를 바로잡으며 전방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너 자꾸 그런 거로 나 협박하는데. …아주 잘 먹혔어. 일단 가자.”

혼잣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는 강무혁의 목소리에 최서율이 터지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잊을 만하면 작은 일로 괜히 투덕거리는 부자 사이를 중재하다가 지친 최서율이 토끼는 토끼끼리, 호랑이는 호랑이끼리 살자고 폭탄선언을 했던 날부터 두 사람에게 아주 잘 먹히는 협박이었다.

“엄마… 진짜 갈 거야?”

물론 부작용이 있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이든이가 불안해했다.

“엄마가 이든이 두고 어딜 가. 아빠랑 이든이랑 서로 미운 말 하면 그런다는 거지. 이제 안 그럴 거잖아.”

“이제 안 그럴게요….”

비죽비죽 튀어나온 호랑이 아기의 입술이 너무 귀여웠다. 참지 못한 최서율이 얼른 아이의 얼굴을 부여잡고 입술 위에 쪽쪽 뽀뽀했다. 차 안에 뽀뽀하는 간지러운 소리가 울렸다.

“나는 더 큰 거로 받을 거야.”

“무슨….”

최서율이 룸미러로 마주한 눈에 시선을 고정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무혁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의미를 눈치채기 무섭게 뜨거워지는 귓가에 놀란 최서율이 앞으로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붉어진 볼을 확인한 강무혁이 대답 대신 큰 소리로 웃었다.

* * *

가족 모임은 예상대로 무척 정신이 없었다. 해든이를 보기 위해 멀리서 한달음에 달려온 작은 아버지 가족 덕분에 평소보다 더욱 북적거리고 사람이 많은 모임이 되었다. 호랑이 아버지는 해든이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뭐가 그렇게 좋은지 껄껄 웃어댔다.

해든이는 태어날 때부터 곁에 있던 호랑이 덕분인지 호랑이 가족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덕분에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는데 너무 요란스럽게 토끼 아기를 예뻐해 주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멋쩍어진 최서율이 어색하게 웃어야 할 정도였다.

“힘들었어?”

“아뇨. 재밌었어요.”

“이제 호랑이들 사이에서도 잘 있네.”

오랜만에 사촌들을 만나 신났는지 해가 질 때까지 뛰어놀던 이든이는 집에 돌아와 씻기 무섭게 침대에서 혼자 잠이 들어 버렸다. 해든이도 종일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느라 피곤했는지 분유 한 통을 뚝딱 비우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이들이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자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여유가 생겼다.

이든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도 이제는 해든이가 있어서 둘만 있을 시간이 없었는데 그게 내심 아쉬웠는지 강무혁은 고요한 시간이 무척 만족스럽다는 듯 표정마저 편안해 보였다.

“이리 와.”

“잠깐만요. 해든이 이거….”

아직 혼자 재우지 못해 침실에서 함께 지내는 해든이의 바구니 안을 정리하던 최서율이 뒤에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는 뜨끈한 손길에 어깨를 비틀었다.

“에어컨 때문에 코가 마르면 안 돼서 덮어 줘야 한다니까요?”

“해. 누가 하지 말래?”

“그럼 이거 좀 놓고….”

해든이를 향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최서율의 목 뒤에 입술이 닿았다.

“좀….”

“하라니까?”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기분이 이상해 자꾸만 허리가 바짝바짝 일어났다. 노골적으로 움직이는 손이 아랫배를 더듬고 배꼽 부근을 누르고 가슴께로 올라왔다. 아예 티셔츠 밑으로 손을 밀어 넣는 강무혁의 손등을 잡아 쥔 최서율이 고개를 뒤로 돌리며 눈을 맞췄다.

“아기 감기 걸리면 책임지실 거죠?”

“나는 가끔 서운한 거 알지?”

“…….”

강무혁이 자그마한 콧등에 입 맞추며 중얼거렸다. 최서율이 눈썹을 내리며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아직도 허리에 감겨있는 강무혁의 손등을 토닥이며 곤하게 잠든 해든이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바구니 위에 얇은 수건을 덮었다. 바구니를 조심스럽게 아기 침대 안에 넣어 두고 나서야 잠시 멈췄던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허리에 둘린 팔을 억지로 풀어내지 않고 그 안에서 몸을 빙글 돌렸다. 온전히 제게 닿아 있는 눈과 시선을 맞춰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올려 강무혁의 얼굴을 잡아 쥐었다.

“서운해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우리 애들한테는 내가 엄마고, 당신이 아빤데… 우리가 아니면 우리 애들은 누가 챙겨요.”

“그래도 이런 날이 얼마나 있다고… 나한테도 신경 좀 써주면 안 되는 건가?”

곤란해하며 눈썹을 뚝 떨어트리는 최서율의 눈빛이 금세 땅에 닿을 듯 가라앉았다. 부러 더 섭섭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강무혁과 시선을 나누다가 손을 내려 허리에 감긴 왼손을 제 앞으로 가져왔다.

“항상 신경 쓰고 있어요.”

약지에 끼워진 반지 위에 입술을 조심스럽게 비비자 강무혁이 허탈하게 웃었다.

“빠져나가는 기술만 좋아졌지.”

“누구 덕분에요.”

배시시 웃는 최서율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얼른 허리에 다리를 감고 두 팔로 목을 꼭 끌어안았다.

“농담도 못 하고, 장난도 못 치겠네.”

“그런 장난은 치지 마세요….”

낑낑. 떨어지지 않으려고 바짝 매달린 최서율이 강무혁의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헤집고, 목덜미를 간질이듯 만지작거렸다.

“안 떨어트린다니까.”

“깜짝 놀라서….”

등을 길게 쓸어 주자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던 몸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침실의 불을 끄며 혼자 있을 아기토끼를 위해 조명등을 밝혔다. 곧바로 침대로 갈 거라고 예상했는지 품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최서율의 귓가에 입 맞춘 강무혁이 침실 문을 열고 문을 반쯤 열어 둔 채 거실로 향했다.

한동안 정신없이 거실을 채우던 이든이의 물건이 모두 이든이 방에 들어가고, 해든이의 물건도 해든이의 방에 정리되었다. 예전의 깔끔한 모습을 되찾은 거실은 보기에는 좋았으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아서인지 초여름임에도 스산한 느낌을 가져왔다.

최서율을 안은 채 소파에 앉은 강무혁이 높아진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무릎이 강무혁의 다리 옆으로 떨어져 고정됐다.

“나는 더 크게 받겠다고 했잖아. 그거 해줘. 그럼 마음 풀게.”

“그게 무슨….”

“다 알아들었으면서 모른 척할 거야?”

낮에 이든이에게 뽀뽀하고 난 후에 자기는 더 크게 받겠다던 강무혁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기에 괜히 민망해져 볼을 붉혔었다. 최서율이 강무혁이 그 일을 다시 끄집어낼 줄은 몰랐다는 듯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줘.”

“그럼 투정 안 부릴 거예요?”

“응.”

“…거짓말.”

“거짓말이라도 해줄 거잖아.”

호랑이의 귓가를 만지작거리던 최서율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렸다.

“맞아요.”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지자 서로의 숨결이 가감 없이 전해졌다. 뜨겁고, 눅눅한 숨이 허공에서 엉겨 붙었다. 한참, 가까운 곳에서 눈을 맞추고 있던 최서율이 입술 위에 살포시 입술을 내렸다. 소리도 내지 않고 아주 잠깐 붙었다가 멀어지는 입술이 아쉬운 듯 강무혁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그 위로 잘게 입 맞춘 최서율이 조용히 웃었다. 바스락거리는 옷가지 소리와 소파 가죽이 밀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크르릉. 범의 기운이 사나워지는 찰나 벌어진 입술 틈으로 제 숨을 불어 넣듯 냅다 입술을 들이미는 최서율의 뒷머리로 커다란 손이 감겼다.

정신이 아득해지도록 진하고, 달콤한 키스에 숨이 찼다. 틈을 놓치지 않고 티셔츠 밑단을 밀고 들어와 맨살을 쓰다듬는 손을 잡아 쥔 최서율이 얼른 고개를 뒤로 물렸다.

“아직 멀었어.”

“애들 깨요….”

“잠든 지 얼마나 됐다고 깬대.”

그래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젓는 토끼를 바짝 끌어안고 눕혀버린 강무혁이 갈색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숨을 헐떡이는 최서율을 지그시 내려보았다. 어깨에 닿은 손을 잡아 손가락 끝부터 사이사이 여린 살갗에 혀를 밀어 넣자 하얀 손등이 바르르 떨렸다.

“서율아.”

“…네.”

“우리 토끼.”

최서율이 얼른 강무혁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마음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여전히 그 자리인지 확인할 수 있는 이런 순간에는 부모가 된 기억은 아득해지고 오로지 그의 앞에 사랑이고자 하는 마음만 덩그러니 남았다. 여전히 애정이 가득한 강무혁의 눈을 마주한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벅차올랐다.

그의 다정하고 나지막한 목소리에 매일 생활하는 공간인데도 마치 다른 곳에 와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깊은 산속 어딘가에 있는 것도 같았고, 푸르른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도 같았다. 별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을 마주하고 있는 것도 같았고, 꽃내음이 가득한 들판에 있는 것도 같았다. 모두 그와 함께 마주했던 어떤 장소의 어떤 풍경들이었다.

“사랑해요.”

“…….”

“우리한테 또 다른 2번 3번이 생겨도… 항상 1번은 당신이에요.”

“듣기 좋네. 더 해줘.”

강무혁이 동그란 콧방울에 입 맞췄다.

크르릉. 범이 울자 토끼가 숨죽여 웃었다.

호랑이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오래도록 사랑을 속삭였다. 말처럼, 노래처럼 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오래도록 서로에게 남아있을 고백을 밤이 새도록 읊었다.

산등선을 타고 올라온 아침 해가 스멀스멀 거실 한구석을 비췄다. 간밤의 스산함이 가신 너른 공간에 따뜻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두툼한 앞다리 사이에 보송보송 갈색 토끼를 꼭 끌어안고 오늘 제일 먼저 세상을 비춘 햇살을 맞이했다.

<굴러들어온 토끼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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