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2. 최고의 선물
“할무니!”
“아이고, 우리 이든이!”
호랑이 어머니는 이든이를 무척이나 아꼈다. 눈에 넣어 안 아픈 손자가 없다며 먼저 태어난 이든이의 사촌들도 예뻐했지만, 아직 아기인 이든이를 더 예뻐한다는 건 어머니의 행동만으로도 알 수 있는 터라 머쓱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호랑이 부모님이 사는 북악산에 예쁜 꽃이 만발했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최서율은 거대한 저택의 대문을 넘다가 말고 혼자 웃어버리기도 했다. 뒷좌석 카시트에 앉아 있던 이든이가 왜? 엄마 왜 그래? 하고 물을 정도로 소리내어 웃어버린 터라 민망하기도 했지만 이미 터진 웃음을 다잡기는 힘들었다.
처음 이곳에 올 때는 회장님 부부를 만날 생각에 어찌나 떨었던지 손이 차가워져 강무혁이 걱정하던 게 생각이 났다. 처음 만났던 그 날의 호랑이 부모님과 처음 먹었던 진수성찬, 뒷마당에서 마신 맛 좋은 차까지 모든 것이 다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데 이제는 이곳에 오는 일이 어렵지 않고, 혼자서도 척척 알아서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당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를 보곤 활짝 웃은 최서율이 동그란 귀를 펄럭거리며 꼬리를 바짝 치켜세우곤 우다다닥 달려 나가는 이든이를 잡지 못해 다급해졌다.
“이든아, 할머니 힘드니까 내려와.”
“놔둬라. 힘 있을 때나 안아주지, 시간 지나면 이렇게 안아주지도 못해요.”
“할모니.”
“오구, 그래. 우리 이든이.”
곱게 차려입은 원피스가 다 구겨지도록 바둥바둥 매달리는 호랑이 손주를 끌어안은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던 집사를 지나쳐 걸었다. 눈이 마주친 집사님에게도 인사를 한 최서율이 뒤에서 어머니, 아버지의 건강과 집안의 소소한 일을 설명하는 집사님과 걸으며 집안으로 향했다.
“뒤뜰에 장미와 백일홍이 활짝 피어서 아주 예쁩니다.”
“안 그래도 꽃이 많다고 해서 이든이 보여주려고 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여름이 시작되는 문턱에서 뜨거운 해를 받은 꽃은 봄꽃이 지나간 자리를 채우기에 충분했다. 장미와 백일홍을 시작으로 여름꽃이 만발한 저택의 정원은 이든이가 좋아하는 수영장도 있고, 연못도 있어서 아이에게는 최고의 놀이터였다.
요즘 들어 물만 보면 호랑이로 변해버리는 이든이가 혹시나 수영장에서 신나게 놀다가 수선화를 망가트리지는 않을까 싶어 출발하기 전에 꽃 사진을 보여주며 절대 밟거나 물어뜯지 않도록 교육했다. 얼마나 효과를 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만 2세가 되면서 어느 정도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기 시작했으니 잘해주리라 믿었다.
“아이구, 수영도 잘하네. 우리 이든이.”
“어머니, 이거 좀 드세요.”
여름이면 호랑이 족이 즐겨 마시는 냉차를 가져나온 최서율이 얼음이 가득 담긴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벌써 호랑이가 되어 발발거리며 수영장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이든이는 조금 자라 있었다. 성체만큼 크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고 하여 크기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부모가 되고 보니 아이가 조금만 더디게 자라도 걱정이 커졌다.
“어머니, 저희 이든이 좀 작은가요?”
“무슨 소리니, 저 정도면 아주 잘 크고 있는데.”
“다른 호랑이를 본 적이 없어서 어느 정도 커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토끼 수인이 낳은 호랑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태어난 이든이가 걱정되는 최서율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려주고, 다독여준 호랑이 어머니는 차가운 차가 가득 담긴 찻잔을 최서율의 잔에 챙. 소리가 나도록 부딪치며 웃었다.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라.”
“어린이집 보내고 나니까, 좀 걱정이 돼서요.”
“왜, 선생님이 뭐라고 하든?”
“아뇨. 그렇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저희 상황이 좀 특수하잖아요.”
“특수하긴 무슨….”
호랑이와 토끼의 조합은 조금 신선하긴 했지만, 이종과 결혼해 다른 종을 낳는 일은 이미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작은 일에도 걱정이 많은 최서율을 이미 많이 겪어본 어머니는 차분하게 그를 다독였다. 첨벙거리는 소리와 이든이를 쫓아다니는 직원들의 발걸음이 다급해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수영장에서 나와 만발한 백일홍을 보려고 뛰어다니던 이든이는 어느새 꼬리만 남긴 채 흰 궁둥이만 내놓고 잔디를 밟으며 뛰어다녔다. 호랑이 어머니는 너무 귀엽다며 손뼉을 치며 웃었고 최서율은 커다란 수건을 들고 아이를 잡으려 잔디를 뛸 수밖에 없었다.
“엄마! 꽃! 꽃!”
“그래, 꽃이야. 이 꽃은 백일홍이라고 해.”
“이건 모야?”
“이건 팬지꽃이야.”
이든이의 몸에 모자가 있는 수건을 입혀 놓고 번쩍 들어 올리자 꽃을 바라보던 아이가 눈을 맞추며 해맑게 웃었다. 여름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찹쌀떡처럼 말랑거리는 볼에 뽀뽀하자 까르르 넘어가는 웃음소리를 냈다.
젖은 꼬리를 수건으로 감싸 꾹꾹 말려주자 제 꼬리를 잡아당겨 제 손으로 꾹꾹 물을 짜낸다. 호랑이 어머니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최서율은 잘한다며 아낌없이 칭찬해주었다.
“아가, 혹시 토끼 아기는 못 보려나?”
“네?”
“아니, 다들 네가 오면서 혹시 우리 집안에 토끼 아기가 생기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혹시 둘째 계획이….”
“아, 그게….”
아직 정확한 계획을 얘기한 건 아니었지만 이든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니 둘째 욕심이 생기긴 했다. 부사장과 결혼하는 바람에 위치가 애매해져 복직을 미루다 보니 이제는 복직도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 김에 차라리 둘째를 낳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이가 토끼든, 호랑이든 다 상관없으니 그냥 낳고 싶었다. 자식 욕심이 많은 토끼 수인이라 둘째 생각은 이든이를 낳자마자 하긴 했지만 당장은 이든이를 키우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서 생각만 했지, 이제는 슬슬 계획해봐도 되지 않을까…. 물론 강무혁과 협의가 이뤄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든이 아비가 둘째 낳지 말자고 하든?”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아직 얘기해보지 않아서요.”
“그래, 너희 자식이니까 너희가 알아서 하겠지.”
“혹시, 또 호랑이면 어떡하죠? 토끼를 원하시는 건….”
호랑이 어머니는 냉큼 손사래를 쳤다. 절대 그런 거 아니니까 절대 부담 갖지 말라는 말이었다. 최서율은 어머니의 의도도 마음도 다 알았지만 어쩐지 걱정도 되긴 했다. 내심 토끼 수인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그건 마음대로 결정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에 혹시나 실망하시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어머니는 자기가 괜한 말을 했다며 미안해하셨다. 최서율은 괜찮다며 웃었다. 강무혁이 재택근무를 하는 날 이든이를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얘기를 꺼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여름은 짧게 지나갔다. 그 사이 아기는 더 많이 자라 큰 호랑이를 따라 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었고, 최서율이 토끼로 변했을 때 장난을 치지 않게 되었다. 작은 동물들과 어울리는 법을 익혔고, 귀를 한쪽만 없애버려 두 사람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아기 때부터 가진 습관으로 꼬리를 잡고 잠이 드는데 어느 날 아침에 엉엉 울어 가보니 꼬리가 없어졌다고 슬퍼하기도 했다. 며칠 후에 친구와 다투다가 꼬리가 튀어나와 또 모두를 당황하게 하기도 했지만, 선생님이 어린이집에서는 매우 흔한 일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주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호랑이가 된 틈을 타서 산에 가거나, 수영하거나, 털을 정리했지만, 이제는 ‘산에 가자.’ 하는 말에 반응하는 이든이를 볼 수 있었다. 몸을 비비 꼬거나 힘을 주는 걸 보며 최서율은 기특하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아이를 응원했다.
그래, 그렇게! 그렇게 하는 거야. 코가 거뭇하게 변하고 몸 주변에 호랑이 줄무늬가 비쳤다. 같이 힘을 주다가 머리에 토끼 귀가 튀어나와 옆에 있던 강무혁을 쓰러지게 만들기도 했다. 웃음이 끊이질 않는 여름이었다.
찬 바람이 설설 불어올 때쯤에는 제법 발음도 정확해지고,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많이 늘어난 이든이가 정수기에서 직접 물을 뽑아 먹기도 했다. 동그스름하고 통통한 발끝에 힘을 주고 까치발을 들어 버튼을 누르는 걸 본 최서율이 정수기를 안전하게 사용하는 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빨간불이 들어오면 뜨거운 물이 나온다고 알려주었더니 절대 그 부분은 누르지 않는 아주 똑똑한 아이였다.
어린이집에서도 친구와 다투는 일이 줄어들었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다가 혼나는 일이 아주, 아주, 아주… 조금 줄어들었다. 강무혁은 이든이에게 무서울 때는 가차 없는 아빠였지만 또 그만큼 많이 놀아주고, 안아주는 좋은 아빠였다. 그래도 이든이에게는 엄마가 최고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부부의 침대로 뛰어들어 최서율의 품을 파고들었다. 어느 날, 매일 엄마를 독차지하는 아빠 때문에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괜히 짜증을 부렸는데 강무혁은 그날 아주 냉정하게 이든이를 차에 태워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다.
“이든이를 너무 빨리 혼자 재운 건 아닐까요.”
“호랑이가 독립심이 얼마나 강한데 지금까지 잘했으니까 앞으로도 잘할 거야.”
“그런 뜻이 아니라… 이든이가 좀 섭섭해하는 것 같아서요.”
“그래도 우리가 정한 원칙을 바꾸지는 않을 거야.”
이든이를 데려다주고 회사로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강무혁이 최서율을 품에 끌어안고 다시 침실로 밀어붙였다. 이든이가 없건 있건 애정 표현을 하는 강무혁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요즘들어 제게 집착하며 아빠를 질투하기 시작한 이든이가 걱정되었다.
“호랑이들은 소유욕이 강해. 지금은 눈앞에 엄마밖에 없으니까 그걸 표현하는 거지만 곧 알게 될 거야. 네가 누구 건지.”
“…그렇지만 저는 이든이 엄마니까, 이든이… 으악!”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으으… 아파요…!”
침대에 매다 꽂힌 최서율이 얼른 버둥거렸다. 크르릉거리며 힘으로 몸을 누르는 강무혁의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몇 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아주 정확히 파악한 건 호랑이는 소유욕이 강한데 그 강하다는 의미가 정말, 아주, 많이, 매우. 강하다는 뜻이라는 것이었다. 함부로 도발했다가는 큰코다칠 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들인데….”
“아들이라도 내걸 넘보면 안 되지.”
“누가 넘본다고 그래요….”
강무혁이 내리누르던 손목을 놓아주자 최서율이 얼른 강무혁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른 아침,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나누는 밀회 같은 시간은 최서율이 요즘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밤에도 당연히 강무혁의 품에 안겨 잠들기는 하지만 이든이가 집에 있으니 늘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밤에 영 집중하지 못하는 최서율을 몇 번 지적한 강무혁이었다.
“그래서 너는 누구 거야.”
“아이, 참….”
이런 식의 질문은 낯부끄러웠다. 애도 아니고 꼭 그렇게 네 것과 내 것을 나누는 말을 꼭 저를 두고 하는 강무혁은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붉어진 흰 뺨에 열 오른 입술이 닿았다. 볼을 다 빨아 먹을 듯이 달게 핥아대는 강무혁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린 최서율이 입술을 달싹였다.
“…거요.”
“응?”
“부사장님, 거요….”
오랜만에 찾아온 부사장님이라는 단어에 강무혁이 피식, 웃었다. 그를 따라 봉긋하게 올라간 광대뼈를 아프지 않게 이로 긁어내리곤 다시 그 위에 입술을 슬슬 문질러댔다.
“왜 갑자기 부사장님이야?”
“그냥, 갑자기 불러보고 싶어서…?”
눈치를 보듯 커다란 눈을 도르륵 굴리는 최서율은 여전히 그 언젠가의 모습 그대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콧대와 콧방울에 입술을 내리던 강무혁이 벙긋하게 벌어진 입술을 단숨에 파고들었다.
까슬해진 혀가 입안으로 밀려들어 오자 몸에 힘이 들어갔다. 부드럽게 혀를 감쌌다가 입안을 긁듯 생채기를 내는 혀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로 물러난 몸이 완전히 침대에 파묻혔다. 짙은 키스에 숨이 차오를 즘, 손끝이 티셔츠 밑단을 파고들었다.
집에서만 지내느라 산에도 제대로 오르지 못해서인지 근육은 하나도 없고 말랑하기만 한 살을 가늠하듯 움직이는 손길에 허리가 절로 비틀렸다.
“으응…! 으, 읍….”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더 깊게 키스하는 강무혁의 어깨를 잡아 쥔 최서율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가슴팍까지 올라온 손이 전보다 더 봉긋해진 가슴을 잡아 주무르자 등허리가 펄쩍 튀어 올랐다.
“아…!”
고개를 비틀며 겨우 떨어진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한 움큼 튀어나왔다. 헐떡이며 뱉어낸 뜨거워진 숨결까지 집어삼킬 듯 엄청난 기세로 다시 입술을 맞붙이는 강무혁의 손이 제멋대로 몸을 타고 내렸다.
강무혁의 품에 꼭 안긴 최서율이 몸에 감긴 든든한 팔을 쓰다듬었다. 어린이집에 간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온전히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어 좋았다.
* * *
“엄마, 그런데 수경이는 동생이 태어난대.”
“동생?”
“응. 동생….”
호랑이 그림이 그려진 유아용 식판에 볶음밥을 한가득 담아 놓고 혼자서 열심히 퍼먹던 이든이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어주며 웃은 최서율이 테이블에 두 팔을 기대며 아이와 눈을 맞췄다.
“수경이 동생이 태어난다는데 우리 이든이 표정은 왜 그래? 속상한 일 있었어?”
“으응… 그런데 동생은 어디서 가져와?”
“응?”
“동생은 어디 가면 가져올 수 있어?”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주는 게 현명한지에 대해 아직 준비하지 못한 최서율이 입만 벙긋거렸다. 열심히 기도하라고 할까. 때가 되면 황새가 물어다 준다고 할까. 인터넷 유머 같은 생각을 하다가 그냥 웃어버렸다.
“이든이 동생 있었으면 좋겠어?”
“응! 이든이도 동생 있어?”
“아니, 아직 없어.”
“왜?”
아이가 몸을 크게 들썩이자 자그마한 호랑이 식판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곧 엎어질 것 같은 식판을 손으로 붙잡은 최서율이 어쩌나 싶은 마음에 맞추고 있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아, 엄마아! 질문에 원하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물고 늘어질 이든이를 알기에 얼른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무턱대고 곧 만날 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동생은 없다고 다짜고짜 못 박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난감했다.
“어?! 아빠다!”
“이든아! 천천히!”
때마침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숟가락을 냅다 던져버린 이든이가 이제는 혼자서도 잘 오르내리는 영유아용 식탁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기 무섭게 현관을 향해 돌진했다. 어젯밤 갑자기 튀어나온 꼬리가 아직도 들어가질 못하고 허공에서 팔랑팔랑 흔들렸다.
“아빠아!”
현관문을 닫고 돌아서던 강무혁이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펄쩍 뛰어오른 이든이를 안정적으로 받아냈다. 어이쿠. 하는 소리가 덤으로 들렸지만 이든이는 그저 좋은지 제 아빠의 목을 짤막한 두 팔로 꼭 끌어안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평소와 비교하자면 매우 격렬한 환영이었다.
“왜 이래?”
의아하다는 듯이 묻는 말에 최서율이 고개를 설설 저었다. 바짝 매달려 아빠의 목을 타고 오를 듯이 구는 아이를 떼어 놓지 못한 강무혁이 구두를 벗고 슬리퍼를 신으며 버둥거리는 엉덩이를 툭툭 쳐주었다.
“아빠, 나도 동생 가져다줘!”
“뭐?”
“동! 생!”
“갑자기 무슨 동생이야.”
강무혁이 대충 눈치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트러진 호랑이 식판을 정리하던 최서율이 어설프게 웃었다. 다시 유아용 식탁에 이든이를 앉혀둔 강무혁이 아이의 숟가락을 쥐고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최서율의 허리를 감싸 안고 볼에 입 맞췄다.
“아아! 하지 마!”
“이런 걸 해야 동생이 생기는 거야. 쪼끄만 게 알지도 못하면서.”
“여보!”
다급하게 말리는 최서율이었지만 강무혁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던 이든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이는 거침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두 사람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4살 인생 이든이에게는 엄마가 1번이라 아빠와 하는 애정 표현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아이를 다 받아주지 않고 더 무섭게 쳐내기만 하는 강무혁을 알기에 최서율이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의 팔을 잡아 토닥였다.
“진짜?”
신선한 반응과 대답에 최서율과 강무혁이 오히려 당황한 듯 눈을 키웠다.
“그렇게 하면 동생 가져올 수 있어?”
“이든아, 동생은….”
강무혁이 날씨에 맞게 제법 도톰해진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이든이 옆자리의 의자를 빼내며 앉았다. 최서율이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도 가져와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강이든 동생이 가지고 싶어?”
“응.”
“왜?”
“나만 없어… 수경이도 있고 재희도 있고 시우도 있는데 나만 없어.”
“동생은 네가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장난감 같은 게 아니야.”
“…….”
“네가 가진 걸 나눠주고, 양보하고 미워도 사랑해주고, 예쁘지 않아도 사랑해줘야 하는 거야. 너 그거 할 수 있겠어? 잘 돌봐주고, 예뻐해 줄 수 있어? 장난감도 나눠주고, 엄마도 나눠서 가져야 하고 아빠도 나눠서 가져야 해.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빠, 이모 삼촌들도 다 동생이랑 나눠 가져야 해. 동생만 예뻐한다고 화내고 짜증 내고 네 멋대로 굴면 안 돼.”
“할 수 있어. 나도 동생 할 수 있어.”
“동생이 생긴다는 건 네가 형이나 오빠로서 준비가 돼야 한다는 말이야.”
“…….”
이든이는 이 말의 20%는 알아들었고 80%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동그란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며 아빠인 강무혁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들었는데 무슨 말을 들었는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강무혁은 이 표정만큼은 제 엄마를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든이 어린이집 가서 친구들한테 물어봐. 아빠 말이 맞는지 아닌지. 그리고 다시 얘기해 동생 데려오면 네가 얼마나 잘해줄지 생각해보고. 못하겠으면 다시는 동생 얘기는 꺼내지도 마.”
“그만 하세요. 이든이가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이제 말도 막 배우는 중인데.”
“알아듣지 못해도 해줄 말은 해줘야지.”
급하게 울적해진 이든이의 자그마한 눈썹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내심 충격이 큰지 숟가락을 잡고 있던 고사리 같은 손에 힘이 쭉 빠진 모습이라 최서율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이든이의 손에 다시 숟가락을 꼭 쥐여주고 일어난 강무혁이 옆에서 아이와 같은 표정으로 서 있는 최서율을 보곤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왜 네가 표정이 그래.”
“…얼른 손 씻고 오세요. 저녁 먹게.”
최서율이 의자에 걸쳐 놓은 코트를 집어 들어 강무혁의 가슴팍으로 툭 밀어주었다. 볼에 입 맞추려다 뒤로 밀린 강무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입술을 말아 문 최서율이 자기도 놀란 듯이 눈을 키우며 바라보자 강무혁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이따 얘기하자.”
“…….”
“엄마…?”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를 눈치챈 이든이가 숟가락을 꽉 쥔 채 최서율을 바라보았다. 밥은 거의 다 먹었기에 더 먹으라고 종용하지 않고 엉성한 모양이지만 정성스럽게 손질해둔 과일을 그릇에 담아 주었다.
호랑이라고 해도 토끼인 최서율의 영향도 있는지 아기 때부터 과일과 채소를 잘 먹는 이든이었다. 식사 후에는 과일을 조금씩 챙겨 먹였는데 이제는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당연히 과일을 먹어야 한다는 듯이 굴었다.
식사 후에 과일을 먹는 게 좋은 습관은 아니라는 말을 어디선가 보긴 했지만, 아이가 좋아하고 잘 먹는다면 뭐든 먹이고 싶은 마음에 항상 챙겨주었다.
“엄마, 나 진짜 잘해줄 건데… 동생….”
“이든아. 아빠가 말씀하신 것처럼 동생은 아무 데서나 막 가져오고 그러는 게 아니야. 그렇지만 이든이가 원한다면 엄마랑 아빠가 잘 생각해 볼 테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
“아빠가 말을 밉게 했어.”
“그랬어?”
“응. 무섭게.”
사과가 꽂혀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제 눈 끝을 잡은 이든이가 무서운 표정이라는 듯이 눈꼬리를 억지로 잡아 올렸다. 최서율이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쓰게 웃었다. 가슴에 갑자기 무거운 바위가 얹어진 것처럼 답답하고, 쑤시고, 아팠다. 그런 기운을 덩달아 느꼈는지 이든이도 괜히 삐죽거렸다.
“엄마, 아파?”
“안 아파. 그냥 갑자기 힘이 빠져서 그래. 이든이 아빠랑 사이좋게 지내기로 약속한 거 잊지 않았지?”
“응. 약속은! 지켜요!”
사과 조각을 입에 넣어 볼록해진 볼을 오물거리며 외치는 귀여운 말에 무거워진 마음과는 다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엄마.”
“응?”
“아빠 밥….”
“아! 그래, 우리 이든이 과일 먹고 있어.”
손뼉을 짝 치며 일어난 최서율이 서둘러 낮에 곰 아주머니와 함께 준비한 저녁 식사를 차려냈다. 이미 만들어진 음식을 그릇에 담아 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손이 마음을 따라 주지 않고 더디게 움직였다. 두툼한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를 보는데 자꾸만 목구멍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다.
왜, 무엇 때문에 제 기분이 삽시간에 이렇게 가라앉은 건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이든이가 이런 제 감정의 변화에 심하게 동요하는 것 같아 티 내지 않으려고 꾹꾹 참으며 노력했다. 그렇게 조용하고 어색한 저녁 시간이 지나갔다.
* * *
이따 얘기하자고 하더니 이든이를 재우는 사이 산에 다녀오겠다며 나선 강무혁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항상 비슷한 시간에 돌아오니 이쯤이겠다고 느꼈다. 이런저런 잡생각이 많아지니 잠들지 못하고 깊은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결국 벌떡 일어나 앉았다. 마른세수하고는 침대를 벗어났다.
침실을 나서 제일 먼저 이든이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든 아이는 어느새 또 꼬리가 사라져 손이 허전한지 토끼 인형의 귀를 꽉 쥐고 잠들어 있었다. 이불을 덮어 자리를 봐주고 온습도계를 확인했다. 곤하게 잠든 천사 같은 얼굴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주방에서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마시고 잠시 앉아 있었다. 이든이를 가르치려 했던 말인 걸 알면서도 어쩐지 강무혁은 둘째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아 섭섭했다. 아이를 가르치는 말에 제가 섭섭해져 버린 이 상황이 그도 당황스럽겠지….
말도 붙이지 않고 고요하기만 했던 저녁 시간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항상 넓은 마음으로 저를 받아주는 그를 생각하면 저의 좁고, 성숙하지 못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도톰한 카디건을 걸치고 주방과 연결된 다용도실 통해 뒷마당과 연결된 문까지 나서자 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쳤다.
생각보다 차가운 바람에 놀라 몸을 부르르 떨렸다. 나름 도톰한 걸로 골라 입었는데도 산바람은 생각보다 더 매서워 무척 추웠다. 뒷문에 걸어 둔 강무혁의 가운을 어깨에 걸쳤다. 호랑이 냄새가 물씬 풍겨 마치 그에게 안겨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익숙한 호랑이 냄새를 맡고 있자니 캄캄한 산길을 바라보는데도 두렵지 않았다. 이렇게 제게 안정감을 주는 그를 향한 애정이 여전히 깊고, 뜨겁게 살아 숨 쉬고 있는데 작은 일에 꽁해있던 게 미안했다. 어서 그에게 이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다.
한여름의 푸르고, 풍성했던 나뭇가지는 어느새 마른 나뭇잎을 하나둘 떨어내기 시작했고, 그 앙상함 너머로 맛 좋고, 빛깔 좋은 열매를 맺어냈다. 산의 동물들이 가장 배부르고 풍족한 시기라고 하지만 그만큼 자기들끼리 다툼도 많은 시기라 강무혁은 이맘때쯤이면 거의 매일 산에 올라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산을 누비며 다닐 산군 호랑이가 제 반려라니 알 수 없는 벅참이 밀려왔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제 모습이 우스워 헛웃음이 터졌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풀벌레도 울지 않는 고요한 산에 마른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이제 막 떨어져 쌓이기 시작한 낙엽을 밟으며 걸어오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뒷마당의 조명등을 켜자 멀리서 형형한 두 눈동자가 번쩍이는 게 보였다. 맹수를 두려워하는 본능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최서율이 천천히 산길과 연결된 뒷문을 열었다.
커다란 호랑이가 갑자기 등장한 최서율의 모습을 보고 놀란 듯 멈춰 서서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들어오세요. 할 말이 있어서 기다렸어요.”
자리를 만들어주자 호랑이가 천천히 어둠을 헤치고 불이 밝혀진 뒷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덮고 있던 가운을 벗어 품에 안았다. 가까이 다가온 호랑이는 최서율의 다리에 제 몸을 비비며 한 바퀴 돌다가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듯 자리를 잡고 서서 최서율을 올려 보았다.
“그… 그러니까….”
그가 저녁 시간 내내 말이 없던 저를 다그치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만큼 마음이 많이 풀렸고, 정신이 돌아오니 미안한 마음에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크르릉….”
호랑이와 대화하는 재주는 없었는데 어쩐지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해 가슴이 왈칵왈칵 흔들렸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평온하게 저를 다 받아주는 걸까. 한 번쯤은 화내고 다그칠 만도 한데 그러지 않고 항상 기다려주는 변함없는 모습에 갑자기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저는 이든이 동생… 있었으면 좋겠어요. 천천히 말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자기가 이든이한테 너무 단호하게 하는 말에 괜히 혼자 속상했나 봐요. 혹시 당신은 원하지 않는데 나만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닐까. 섭섭하기도 했고… 더 낳을 수 있으면 낳고 싶은데… 그건 제 욕심만으로 되는 건 아니니까.”
최서율이 호랑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쭈그려 앉았다.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호랑이가 가까이 다가와 이마를 들이댔다. 그 위에 제 코를 비비며 입 맞추고 목덜미의 부드러운 털을 슬슬 문질렀다. 정상까지 올라갔다 왔는지 뜨겁게 열이 올라있는 호랑이의 체온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냥, 그랬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런 이유로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요. 생각 정리할 시간 줘서 고맙고요….”
호랑이가 다시 크르릉. 울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아이를 낳고 나면 어른이 되는 건가 싶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 보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이렇게 정처 없이 마음이 휘둘리고 꽁해있다니… 그래도 하루를 넘기지 않고 빨리 말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실없이 웃음이 났다. 호랑이를 앞에 두고 고해성사하고 나니 한결 가벼웠다.
“들어오세요. 바람이 너무 차가워요.”
품에 안고 있던 가운을 다시 뒷문에 걸어두었다. 강무혁이 제게 해주는 것처럼 수인으로서 지켜야 할 선이 있기에 얼른 집안으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섰다. 곧바로 뒤따라 들어올 그를 알기에 문은 닫지 않았다. 다용도실에서 주방으로 통하는 문턱을 넘기 무섭게 팔이 잡혔다.
“으…!”
거칠게 돌아 세워진 몸이 강하게 틀어쥔 손아귀 안에서 휘청였다. 눈을 제대로 뜨기도 전에 입술이 덮쳐왔다. 등이 벽에 닿았다.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당기는 그의 품에 갇힌 채 쏟아지는 키스를 받아냈다. 거칠어진 숨결이 바싹 붙은 두 사람의 콧대 사이를 뜨겁게 만들었다.
혀가 엉기고 서로의 타액을 넘겨받으면서도 뭐가 부족한지 점점 더 짙어지는 키스에 가슴팍이 두서없이 부풀었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겹쳐졌던 콧대가 떨어지고 이마가 맞붙었다. 위에서 찍어 내리듯 고개를 내린 강무혁과 눈을 마주한 최서율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하아… 하….”
“둘, 셋. 나는 다 좋은데. 아까는 내가….”
“알아요…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그리고… 자기도 원한다는 거 알아요. 우리 형제들만큼 따라잡자고… 예전에 그랬잖아요.”
“그래. 맞아. 그거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지.”
손끝으로 강무혁의 젖은 입술을 톡톡 건드리던 최서율이 웃었다. 예쁘게 호선을 그리는 토끼의 입술에 다시 입술이 내려앉았다.
사실 강무혁은 토끼 형제들만큼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었다. 최서율이 원한다고 해도 둘째 정도까지만 생각했다. 자식 욕심이 많은 토끼라고는 하지만 최서율은 사회생활을 해야 했다.
아이를 낳고 이든이만큼 키우려면 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으니 현실적으로 범진그룹 부사장 지원실로 복직하는 건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어떤 식으로든 최서율의 사회생활을 지원할 생각이었다. 가진 재력이나 권력으로 되도록 기량을 발휘할 일을 찾아보자고 제안할 계획이었다.
가족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언제 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차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든이를 가르치려 했던 말에 섭섭해했다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었지만 아직 콩깍지가 벗겨지진 않았는지 그 모습까지도 다 안아주고 싶을 만큼 그저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같이 씻을래?”
“…네.”
최서율이 느슨하게 묶인 강무혁의 가운 끈을 잡아 빼며 수줍게 웃었다. 꼭 콩깍지가 아니어도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반려였다.
* * *
그해 겨울, 이든이는 소원을 이뤘고 두 사람은 또 하나의 결실을 만들어 냈다. 기쁨을 표현하듯 마당을 뛰어다니며 꺅꺅 소리를 지르는 이든이를 보며 최서율과 강무혁도 허리를 젖혀가며 웃었다.
그렇게 좋아? 묻는 말에 네!! 소리치던 아이는 어느새 호랑이가 되어 펄펄 날아다녔다. 눈 때문에 젖은 땅에 넝마가 되어버린 옷을 집어 든 강무혁이 제게 뛰어들며 갸릉갸릉 울어대는 작은 호랑이를 열정적으로 쓰다듬어주었다.
해가 바뀌고 5살. 만 3세가 된 이든이는 이제 제법 꼬리를 감출 줄도 알고, 귀를 올렸다가 내리기도 했다. 호랑이가 되면 아직은 어린 개체에 불과했지만 제법 호랑이답게 으르렁거리고 나무를 타기도 했으며 빠르게 산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50%의 확률로 어쩌면 동생이 ‘토끼’일 수도 있다는 말은 둘째의 성별이 ‘여자’라는 걸 알게 된 어느 봄날에 알려주었다. 이든이는 생각보다 빨리 이 말을 이해했다. 엄마가 ‘토끼’라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니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이든이 뭐해?”
“이거 토랑이 줄 거야.”
마당 구석에 털썩 주저앉아 한참 일어나지 않기에 다가간 최서율의 코앞에 토끼풀로 만든 작은 다발이 내밀어졌다.
“이거 줄 거야?”
“응. 우리 토랑이가 토끼일 수도 있다며. 그럼 토끼풀 좋아할 거니까.”
“토랑이는 호랑이일 수도 있어.”
“호랑이여도 이거 좋아해.”
이든이가 활짝 웃으며 최서율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내가 좋아하니까. 이든이도 호랑이잖아.”
“그래, 그렇네. 우리 이든이도 토끼풀 좋아하지.”
새로운 걸 잘 받아들이고, 항상 예쁜 눈으로 바라보는 이든이가 기특했다. 종종 아빠인 강무혁과 이를 드러내고 다투기도 하고 어린이집에서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아 혼나기도 하고, 친구 누구와 왜, 어떻게 싸웠는지도 스스로 실토하는 개구쟁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이 세상의 예쁘고, 좋은 걸 하나씩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모습이 대견하고 예뻤다.
무엇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동생을 무척 아끼는 모습이 대견했다. 막상 동생이 태어나면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있으니 부모가 잘해야 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은 터라 걱정도 되지만 당장은 이든이를 믿기로 했다.
“엄마 안 힘들어? 괜찮아?”
“그럼, 괜찮지. 안 힘들어.”
이든이가 이렇게 걱정스러운 눈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왜 둘 다 나와 있어.”
수척해진 얼굴로 마당을 가로지르며 걸어오는 강무혁은 지금까지 본 얼굴 중에 가장 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아빠에게 달려가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며 반가운 마음을 표현했다. 강무혁은 그런 이든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밥은요? 먹었어요?”
“아니.”
“어떡해요. 오이 김밥 싸줄까요?”
“그럴까? 오이 김밥이라니. 내 평생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강무혁이 최서율 대신 아주 요란한 입덧 중이었다. 덕분에 이든이는 아빠와 엄마의 건강 상태에 매우 예민해져 있었다.
“아빠. 이제 괜찮아? 아직도 아파?”
“괜찮아. 우리 이든이, 아빠 걱정했어?”
“응! 아빠 빨리 나아서 나랑 산에 가야지.”
“그래. 금방 괜찮아질 거야.”
다른 건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이상하게 평소에는 잘 먹지 않던 채소들이 잘 먹혔다. 호랑이 부모님은 이 소식에 박장대소했고 토끼 부모님은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얼마나 금실이 좋으면 강 서방이 입덧하냐며 토끼 형제들도 난리가 났다.
부사장 지원실도 들썩였고, 강무혁의 친구들도 그런 강무혁을 구경하러 집에 방문할 정도였다. 시끄럽고 짜증 난다며 대문 앞에서 문전박대당해야 했지만, 친구들은 너무 재밌어 죽겠다고 좋아하며 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어댔다.
“회사에서는 어땠어요? 괜찮으셨어요?”
“응. 괜찮았어. 그래도 집이 제일 편하네.”
“어떡해요. 진짜….”
다행히 냄새에 아주 예민한 편은 아니어서 출근하지 못할 지경까지는 아니었다. 확실히 전보다 주변의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매 끼니 챙겨 먹던 고기가 먹히지 않는다는 게 제일 큰일이었다. 이 덩치를 감당하려면 영양소가 그만큼 받쳐줘야 하는데 매일 채소나 과일 따위만 먹어대고 있으니 수척해질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소파에 흐물거리며 녹아있던 강무혁이 옆에 와서 걱정스러운 듯 얼굴을 만져주는 최서율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수척해졌다고는 하지만 본래 가지고 있던 골격 자체가 큰 강무혁을 전부 다 안아줄 수는 없어 어정쩡하게 앉아야 했다.
“이러고 잠깐만 자도 돼?”
“그럼요. 이대로 좀 자요.”
아주 조금 볼록해진 배를 만지작거리던 강무혁이 손을 떼고 최서율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배가 더 부르면 못하는 일이라는 걸 경험을 통해 배웠으니 지금, 조금이라도 더 즐겨야 했다. 게다가 토랑이를 가지면서 짙어진 토끼 냄새가 속을 편하게 해주었다. 토끼의 옆에 있을 때가 가장 편했다.
역지사지라고 했던가. 이든이를 가지고 입덧할 때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조금 더 잘 이해해주고, 알아주고 잘해줄걸.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호끼 때문에 고생할 때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더 잘했어야 했는데.”
“무슨 소리예요. 자기만큼 잘해준 사람이 어딨다고.”
거의 하루에 한 번씩 이 말을 하는 강무혁의 마음을 알기에 너른 가슴팍을 천천히 토닥였다.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조금이라도 편하게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든이에게 방에 들어가서 놀라고 말했다. 이제는 혼자서도 제법 잘 노는 이든이는 이 상황을 이해한다는 듯이 장난감을 한가득 챙기곤 소파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엄마. 엄마가 필요하면 불러도 돼?”
“당연하지. 엄마 필요하면 불러. 알겠지?”
“응. 뽀뽀.”
입술을 쭉 내미는 이든이의 입술에 쪽. 뽀뽀해주자 강무혁이 귀신같이 눈을 번쩍 떴다.
“나도 해줘.”
“아빠는 해주지 마.”
“아니. 해줘.”
“아니. 해주지 마.”
“이든이는 들어가서 놀고, 자기는 좀 가만히…!”
조용히 하라는 듯 강무혁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최서율이 흥! 하며 방으로 들어가는 이든이의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나도 해줘.”
대답도 안 했는데 팔을 뻗어 뒷머리를 잡은 강무혁이 저를 향해 내리눌렀다. 허리를 잔뜩 굽혀야 하는 이 자세도 배가 많이 부르면 꿈도 못 꿀 일이니 지금 많이 해두어야 했다. 쪽. 쪽. 간지러운 소리가 너른 거실을 울렸다.
힘없이 웃는 강무혁이 안쓰러우면서도 웃기고, 재밌고, 사랑스러웠다. 대신 입덧해주는 반려는 소문으로만 들었었는데 제가 얻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 웃음이 날 만도 했다.
* * *
한여름이 되면서 배가 제법 불렀고, 강무혁의 입덧도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생각날 때마다 웃을 수 있는 엄청난 에피소드가 생긴 것 같았다. 강무혁은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자 매일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최서율도 호랑이와 살기 시작하더니 고기를 제법 많이 먹을 수 있게 되어 매일 저녁 포식 중이었다. 작은 호랑이인 이든이는 고기도 실컷 먹고 신선한 채소도 실컷 먹을 수 있어서 매일 즐거워했다.
배가 무거운 것 말고는 평소와 같은 컨디션이라고 생각했는데 정기 검진을 갔다가 이번에는 토끼 마을에서 출산하지 말고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낳아야겠다는 말을 들었다.
수컷 수인이 아기를 낳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산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이든이를 낳을 때 많이 손상되어 자연 분만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이었다. 토끼 마을의 다른 진화한 수인들은 둘 셋, 넷, 다섯까지도 잘만 낳는데 왜 제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아무런 대답도 못 하는 최서율을 대신해 강무혁이 산모와 아기의 건강에는 이상이 없는지 수술은 언제쯤이면 되는지 어떤 걸 준비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제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최서율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강무혁은 최대한 침착하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확인했다.
“서율아.”
“토랑이한테 큰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니까. 저 괜찮아요.”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도 돼. 누가 뭐라고 한다고 괜찮은 척해.”
“그게….”
두 손을 맞잡고 꾹꾹 주무르던 최서율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는 강무혁을 향해 힘없이 웃었다. 축 늘어진 어깨를 쓰다듬고 안아주는 강무혁의 품으로 들어간 최서율이 잘게 어깨를 떨었다. 당장 토랑이를 낳는 건 겁나지 않았다. 셋, 넷까지도 생각했던 큰 포부를 접어야 한다니 그게 제일 속상했다.
“회사에 복직하지 않고 더 많이 낳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토랑이 낳으면 아무래도….”
“더 낳을 생각이었다고?”
“네.”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는 최서율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얀 피부에 붉게 달아오른 눈꼬리를 쓰다듬으며 웃은 강무혁이 이마에 입 맞추고 다시 끌어안아 토닥였다.
“우리 토끼 욕심도 많네. 토랑이 좀 크고 나면 다시 일해 보는 건 어때? 네 능력이면 시간이 조금 걸려도 회사 일에 금방 적응할 텐데.”
“…벌써 시간도 많이 지났고, 애들 걱정도 되고.”
“토랑이가 지금 이든이만큼 크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건 그때 다시 생각할래요. 지금은… 당장 눈앞에 있는 일만 생각하는 게 좋겠어요.”
“그래. 그때 다시 얘기하자.”
오랜만에 둘이 외식을 했다. 배가 부른 최서율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제는 진화한 수컷 수인. 토끼 수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는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어색했지만 나쁘지 않은 외출이었다.
가족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당연히 토끼 부모님은 난리가 났다. 마을의 여러 사례를 찾아 들어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병원에서 제왕절개로 아기를 낳는 게 제일 좋다는 말을 듣고는 의사는 어떤 사람인지, 병원은 믿을 만한지 물어보았다. 형제들도 모두 걱정해주었지만, 그중에서도 같은 진화한 수컷 수인인 작은형이 제일 걱정이 많았다.
호랑이 가족들은 당연히 더 좋은 병원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의견을 냈지만 이든이 때부터 다녔던 병원이라 그대로 다니기로 했다. 의사 선생님이 워낙 베타랑 이기도 했고, 외국에서 수컷 수인의 출산을 경험했던 분이라 더욱 믿음이 갔다.
새로운 식구를 맞이할 준비에 호랑이 굴은 정신이 없었다.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말이 리모델링이지 거의 새로 짓는 거나 마찬가지인 수준에 최서율은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강무혁 전에 이 산에 살았던 작은 아버지도 가족이 몇 없어 방이 많지 않았는데 아이가 두 명이나 생긴 마당에 증축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참에 수영장도 넓힐 계획까지 하는 강무혁을 말리느라 고생이었다.
완공될 때까지 북악산 호랑이 부모님의 저택에서 지냈다. 부족함도 없었고 오히려 편해서 아예 들어와 살 생각까지 했지만, 산을 떠날 수 없는 산군 호랑이를 생각하면 돌아가는 게 맞았다. 이든이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잔뜩 받는 게 싫지 않은 눈치였으나 산에 사는 동물들이 그리운지 종종 물어보곤 했다. 산의 작은 주인다운 모습이라며 칭찬을 받았다.
집을 새로 단장하고 나니 새로운 식구를 맞이할 때가 다가왔다. 여름이 끝날 무렵. 제법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미리 입원한 최서율은 부쩍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건 강무혁도 마찬가지였다.
“부사장님.”
“응?”
“저 만나고 후회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강무혁이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투에 소리 없이 웃었다. 보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고 가지런히 내려져 있던 최서율의 손을 잡았다.
“있지. 내 말은 안 믿고 그 토끼 새끼 따라갔을 때. 내가 어쩌다 이렇게 말 안 듣는 녀석을 만나서 마음고생을 하나 싶어서.”
“치….”
아주 오래된 일이 되어버린 그 사건은 최서율 고구마 답답 사건으로 두 사람 사이에 자주 회자하는 일이었다. 이제 그러지 않는다고 말해도 강무혁은 종종 먼저 얘기를 꺼냈다. 이제는 절대. 나 외의 누구도 믿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임을 알고 있었다.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춘 강무혁이 손가락 하나하나를 잡아 정성스럽게 주물렀다.
“나는 물어보지 않겠습니다. 후회한다 해도 물러줄 생각도 없고, 물러줄 수도 없으니까.”
“그게 뭐예요.”
“사랑한다는 뜻이지.”
갑작스러운 고백에 입술을 꿀렁이며 웃어버린 최서율이 강무혁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한 손으로 다 잡지도 못할 만큼 커다란 손이 저를 만져줄 때, 제게 사랑을 얘기할 때 얼마나 다정해지고 따뜻해지는지 알기에 마음이 든든했다.
후회한 적 없어요. 단 한 번도. 수줍게 속살거리자 잡고 있던 손이 부드럽게 허공을 유영해 솜털이 보송보송 올라온 귓가에 닿았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 귓불을 건드리고 내려온 손이 다시 손등에 닿았다. 여전히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에 활짝 웃었다.
“여기 있어 주실 거죠…?”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
“…….”
“가라고 해도 절대 가지 않을 텐데. 아직도 나를 몰라?”
침대에 누워 이동하던 최서율이 긴장감을 날려버리고 까르르. 소리내어 웃었다. 배가 조금 당겼지만 괜찮았다. 후회한다고 해도 물러줄 생각이 없다는 호랑이와 만들어 낸 두 번째 열매를 만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