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이든이가 태어나고 3개월, 완전한 겨울이 찾아왔다. 세상 빛에 익숙해진 아기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거실 유리창에 앞발을 긁으며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이리저리 갸웃거리는 자그만 머리통을 바라보던 최서율이 뒷다리에 끼워 놓은 수인 아기 전용 기저귀를 만져보았다.
“우리 아들 쉬야 많이 했네?”
물컹한 기저귀를 만져보곤 갈아줄 준비를 하는데 흩날리는 눈송이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호랑이 아기는 손에 잡혀주질 않았다. 위로 치솟아 살랑거리는 짤막한 꼬리를 잡고 슬쩍 잡아당기자 꺄!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지른다.
“이리와 기저귀만 갈고 또 놀아도 되잖아.”
앞발을 허공에 휘두르며 버둥거리는 이든이를 잡아 기저귀를 벗겨낸 최서율이 능숙한 동작으로 재빠르게 새 기저귀를 뒷다리에 끼워주고 꼬리를 뺐다. 배를 긁어주는 손길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언제 반항했냐는 듯이 배가 보이게 드러눕곤 장난치는 어미의 손을 잡아보려 버둥거리는 게 여간 귀여운 모습이 아니었다.
“오구, 오구 잘하네, 우리 이든이.”
갸릉갸릉. 신나게 소리를 내던 이든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집에는 절대 일을 가지고 오지 않던 강무혁이 요즘은 종종 집에서 일하는데 서재에 한참 틀어 박혀있다가 밖으로 나오는 소리에 반응한 것이었다.
“밖에 눈 오네?”
“네, 눈송이가 굵어지는 거 보니까 많이 오려나 봐요.”
처음에는 토끼 최서율이 대리석 바닥을 밟고 꽈당 넘어지는 바람에 깔아두었던 매트였는데 이제는 이든이 차지가 되었다.
면적이 더 넓어진 매트를 밟고 호랑이 아기가 제 아빠에게 달려갔다. 발치 아래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반가움을 표현하는 이든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강무혁이 폭신한 이불 위에 앉아 있는 최서율에게 다가가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그래. 이리 와.”
절대 쉽게 안아주는 법이 없는 강무혁은 대부분 소리나 손짓으로 아기를 불렀다. 최서율은 용케 알아듣고 강무혁을 따르는 이든이를 볼 때마다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일은 끝났어요?”
“이렇게 단번에 끝날 일은 아니지. 월요일에 다시 얘기하기로 했어.”
고개를 끄덕인 최서율이 어느새 제게 다가와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깨물며 장난치는 이든이의 코를 톡톡 두드렸다. 새끼 호랑이의 동그란 눈을 볼 때마다 너무 예뻐 가슴이 벅찼다.
“피곤해?”
“…좀 졸려요. 어젯밤에 이든이가 자꾸 깨서 잠이 모자랐나 봐요.”
“그럼 들어가서 좀 자. 애는 내가 볼게.”
시간에 맞춰 수유하는 일도 큰일이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빽빽 울어대는 이든이를 달래느라 항상 밤마다 전쟁이었다. 통잠 자는 날까지 힘내보겠다고 다짐했건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덜미 뒤를 잡아 부드럽게 쓰다듬고 주무르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목을 기댄 최서율이 스르륵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하고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만 자고 나올게요… 30분 후에 밥 먹여주셔야 하는데….”
“그것도 할게. 걱정하지 말고 자.”
일어나 침실로 향하는 뒤꽁무니를 쫓아가던 이든이가 강무혁의 손에 붙잡혔다. 갸릉갸릉. 강한 손길에 반항하듯 울어대는 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고 얼른 돌아와 복슬복슬 작은 머리통에 쪽쪽 뽀뽀했다.
“아빠 조금만 자고 올게. 우리 이든이 호랑이 아빠랑 재밌게 놀고 있어?”
말랑한 목덜미를 조물조물 만져주자 갸르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린다. 새끼 호랑이에게서 손을 떼지 못하는 최서율의 턱을 잡아 들어 올린 강무혁이 곧바로 입을 맞춰왔다.
으읍…! 뒤로 한발 물러나는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아 당기자 강무혁의 팔에 걸쳐 있던 이든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낑낑- 아픈 소리를 냈다. 아기가 신경 쓰여 집중하지 못하고 고개를 틀면 그 길을 따라 입술을 내린 강무혁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입안을 파고들었다. 깊어지는 키스에 이번에는 최서율이 낑낑 앓았다.
쪽쪽.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오고 갔다. 이든이의 목덜미를 만지고 있던 손이 어느새 강무혁의 뺨으로 옮겨 가 있었다. 아기와 비슷한 체온을 가진 강무혁의 볼을 만지작거린 최서율이 얼굴을 붉혔다.
* * *
호랑이 아기는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 정도의 성장이 멈춘 후에도 하루가 다르게 무언가를 습득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아직 돌도 되지 않은 아기의 성장을 알 수 있었다. 최서율은 문득, 제가 토끼라 이든이가 호랑이의 습성을 제대로 배우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그때마다 강무혁은 말하지 않아도 이든이를 데리고 마당에 나가 실컷 뛰어놀았다.
호랑이가 가져야 할 위엄에 대해서도 가르치듯 한참 동안 마당을 빙글빙글 돌기도 했고 등이며 머리로 올라타는 이든이를 앞발로 잡아다가 이로 귀를 깨물기도 했다.
산이 다 울리도록 포효하며 울어대는 아비를 따라 이든이도 작은 입을 쩍 벌렸다. 크아앙. 미약한 소리였지만 호랑이의 울음을 갖춘 것을 칭찬하듯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삭삭 핥아주는 강무혁을 보면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져 자꾸 웃음이 났다.
이든이가 집에 오고 난 뒤로 매번 일찍 퇴근하는 강무혁을 위해 윤 비서가 집에 방문하는 날도 잦아졌다. 새끼 호랑이는 집에 온 손님을 경계하듯 이를 드러냈고, 윤 비서는 벌써 맹수의 티가 난다며 칭찬했다.
윤 비서를 따라 집에 놀러 온 동생 최서현은 집안에 호랑이 냄새가 진동해서 너무 심장 떨린다고 하면서도 호랑이 조카가 예뻐서 참기 힘들다는 듯이 한참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최서현은 봄이 오면 고향인 토끼 마을을 떠나 서울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해주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건만 강무혁이 도움을 주어 작은 카페를 운영할 계획이었다. 더 묻고 싶은 게 많이 있었지만 당장은 이든이를 키우는 일이 벅차 묻지 못했다. 저만큼이나 똑 부러진 동생이 알아서 잘하겠거니 믿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겨울은 끝자락에 닿아있었다.
경칩이 지나면서 고요하던 산에 자그마한 소리가 늘어났다. 땅속에 굴을 파고 잠들었던 동물들이 깨어나고, 멀리 떠났던 새들이 돌아왔다. 꽁꽁 얼었던 골짜기에 물이 졸졸 흐르기 시작하자 그 주변으로 동물들이 종종 모습을 나타내곤 했다.
산군 호랑이 집에 새끼 호랑이가 있다는 소문이 산의 동물들에게 퍼졌는지 마당에는 작은 짐승들이 다녀간 흔적이 매일 매일 새롭게 쌓여갔다. 아직은 추운 날씨에 자주 활동하지 못하지만, 따뜻한 봄이 오면 이든이를 보기 위해 마당에 많은 동물이 오겠다고 생각했다.
최근에는 이 산에서 보기 힘들었던 담비가 나타나 마당을 뛰어다니다가 돌아갔다. 이든이는 담비가 나타나는 날에는 대흥분 상태가 되어 유리창을 박박 긁어대고 갸릉갸릉 목이 터지도록 울어댔다. 함께 놀고 싶다는 뜻이었지만 최서율은 맹수인 담비에게 이든이를 바로 내어줄 수 없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겨우내 멈춰있던 산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강무혁이 산을 오르는 날도 잦아졌다. 함께 가고 싶었지만 돌보아야 할 아기가 있었기에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겨울과 봄의 경계인 날씨는 아직 조금 추웠다. 화려하게 움틀 날을 기다리듯 나무의 몽우리들이 잔뜩 웅크리고 있었고, 꽃자리에 싹이 돋아나다가 매서운 바람에 고개를 숙였다.
“산에 가고 싶어?”
“가고는 싶은데, 아직은 이든이가 어려서 혼자 둘 수가 없어요.”
“잠깐 맡기고 다녀올까? 눈도 다 녹아서 괜찮을 것 같은데.”
“으응, 괜찮아요. 떨어트려 놓고 싶을 만큼은 아니에요.”
최서율은 종종 회사에 나가 일하고 싶어 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강무혁도 그런 최서율을 알기에 아기를 맡겨 놓고 잠시 외출하기를 권했지만, 첫 돌이 되기 전까지는 아기를 품에서 놓지 않는 토끼 수인의 본능대로 모든 외출을 거절했다. 그나마 마당이 넓어 이든이와 함께 뛰어놀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어디가 아프거나, 속상하거나, 힘들거나, 짜증 나고, 울적할 때 나한테 꼭 말하기로 한 거 기억하지?”
“…….”
“서율아.”
“기억해요. …저 지금 좀 그렇게 보여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최서율의 허리로 두 팔을 감은 강무혁이 보드라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아니. 행복해 보여. 강무혁의 입술과 숨결에 목덜미가 간지러워 한쪽 어깨가 절로 치솟았다.
“첫 돌이 지나고, 이든이가 다시 사람의 모습을 하고 걷고, 말하기 시작하면 산에도 같이 가고 쇼핑도 가고, 둘이 데이트해요. 사실은 가끔… 회사가 가고 싶기는 해요. 그런데 당장 복직하겠다는 생각도 없고 이든이 때문에 밖에 못 나가서 속상하지도 않아요. 아직은… 이 행복을 견고하게 다지는 일만 하고 싶어요.”
강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손이 근육이 단단히 자리 잡은 등줄기를 토닥였다. 최서율의 팔 안에 꾸깃꾸깃 커다란 몸을 구겨 넣었던 강무혁이 솜털이 솔솔 올라온 귓가에 입술을 비비고, 보드라운 뺨에 입술을 붙였다. 훅, 차오르는 뜨거운 감정을 누르지 못한 두 손이 조금 다급하게 작은 얼굴을 붙잡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아 잘게 입 맞췄다.
슬금슬금 올라가는 어여쁜 입꼬리에도 입술을 눌렀다.
“최서율 대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좀 많아서. 내가 마음이 급했나 봐.”
“부사장님이 제일 기다리는 건 아니고요?”
“…그럴지도 모르지.”
어쩐지 요즘 퇴근이 너무 이르다고 했다며 짧게 타박한 최서율이 얼른 강무혁의 목을 끌어안았다. 곤히 잠든 이든이는 꿈에서도 마당을 신나게 뛰어다니는지 허공으로 뒷발을 차대며 그릉그릉 제법 맹수다운 소리를 냈다.
* * *
야행성 동물답게 밤에는 잘 안 자고 낮에 늘어지도록 자는 이든이를 강무혁에게 맡기고 샤워하면서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린 최서율이 괜히 민망한 마음에 일부러 크게 헛기침했다. 아직 아기가 깨기에는 이른 시간 같아 느긋하게 머리까지 말리고 나오니 거실에는 큰 호랑이와 작은 호랑이가 사이좋게 잠들어 있었다.
“이런….”
밤에 산을 둘러보고 오랜만에 날이 밝아서 돌아온 강무혁은 오늘도 오전 출근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래서 잘 먹고, 잘 살 수는 있겠냐고 타박하는 최서율의 잔소리에 설설 웃는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꼬리를 파닥거리고, 뒷발을 뻥뻥 차대는 작은 엉덩이를 한참 토닥였다. 곁에 앉으니 작은 호랑이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굵은 꼬리가 팔뚝을 살랑살랑 간지럽혔다. 자기도 쓰다듬어 달리는 무언의 메시지를 읽은 최서율이 터지는 웃음을 꾹 참고 큰 호랑이의 꼬리를 살살 쓸어올렸다.
처음 호랑이를 마주했던 날, 오금이 저려 덜덜 떨었던 걸 생각하면 호랑이를 두 마리나 앞에 두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지금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일을 함께 겪으며 변화의 순간마다 사랑을 확인했던 강무혁은 최서율 인생에 가장 큰 도전이자, 기적이었다.
“부사장님.”
“…….”
“저 처음 만나던 날 기억하세요?”
범진그룹에 합격하고 첫 출근을 하던 날, 부사장 지원실 문을 열고 마주한 강무혁을 보고 울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새록새록 한 그 감정에 웃어버린 최서율이 큰 호랑이의 보드라운 털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잠이 가득 담긴 눈과 시선을 맞췄다.
토끼인 걸 들키고도 회사에 출근할 수 있다고 말해주던 목소리도 정식으로 방문한 부사장의 집에서 만난 다람쥐 부부도 떠올랐다. 그들이 낳은 새끼 다람쥐들도 생각났고, 함께 거닐었던 고급스러운 리조트의 멋진 정원도 떠올랐다. 그날 밤 보았던 달이 얼마나 밝았는지, 심장이 입 밖으로 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던 시간이 어떤 일을 만들어 냈는지도 떠올랐다.
손을 잡고 걸었던 고향 마을 축제의 등불 길도, 능선을 따라 신나게 산을 내달리는 토끼의 뒤를 바짝 따라붙던 호랑이도, 첫 출장의 쌉쌀하지만 뜨거웠던 기억도 차례대로 스쳐 지나갔다. 손으로 꼽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 순간마다 흔들리지 않고 제 손을 잡아준 호랑이가 좋아 실없이 웃음이 났다.
“기억나는 순간들이 너무 많은데….”
“…….”
“모든 기억이 하나 같이 다 행복해요.”
“…….”
“지금, 이 순간도 내일 떠올리면 행복한 기억으로 남겠죠?”
최서율의 말을 듣던 호랑이가 벌떡 일어나 거실을 한 바퀴 어슬렁거렸다. 그릉그릉. 호랑이의 굵직한 울대를 치고 나오는 낮은 소리와 하늘로 치솟아 살랑거리는 꼬리. 둥그렇고 커다란 앞발이 아기용 매트를 밟을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귀여운 소리가 났다.
이든이가 깊게 잠든 걸 확인한 최서율이 호랑이를 향해 방긋 웃었다. 순식간에 아래로 꺼져 내린 옷가지를 헤치고 나오려고 버둥거리는 토끼의 귀가 하늘을 향해 한껏 치솟아 마구 쫑긋거렸다. 호랑이가 다가와 옷을 밀어주자 자그마한 얼굴이 볼록, 튀어나왔다.
“삐!”
분홍빛 코를 움찔거리자 그 위에 까맣고 촉촉한 코가 닿았다. 토끼가 자그마한 앞발로 호랑이의 얼굴을 잡고 코끝을 비벼댔다.
혀를 내어 호랑이의 얼굴을 삭삭 핥아주자 호랑이가 소파 아래에 육중한 몸을 뉘며 앞발을 벌렸다. 귀를 뒤로 젖히고 뒷발을 길게 늘여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토끼가 망설임 없이 호랑이의 품으로 몸을 날렸다.
빛나도록 하얗고, 부드러운 호랑이의 배에 토끼가 제 몸을 신나게 비벼대더니 삐! 삐! 소리내어 울었다. 호랑이가 대답하듯 그르렁거렸다. 포근한 앞발에 턱을 괴고 작은 호랑이를 바라보는 토끼가 색색 숨을 쉴 때마다 호랑이의 혀가 머리부터 꼬리까지 부드럽게 털을 핥아 올렸다. 토끼에게서 맹수의 냄새가 났다.
사랑을 속삭이듯 삐이- 삐이 울어대는 토끼를 바라보던 호랑이가 앞발 위에서 토끼의 몸을 뒤집었다. 벌러덩 넘어간 토끼가 뒷발을 팍팍 허공으로 차댔다. 앞으로 모아 뻗은 네 발을 코로 헤치고 거칠한 혀가 볼록한 배 위에 닿았다. 삐이이! 넘어갈 듯한 토끼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품으로 굴러들어온 토끼에게 사랑을 말하듯 호랑이가 크르릉. 길게 울었다.
<굴러들어온 토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