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긴 겨울 모진 바람을 이겨낸 산에는 다시 생명이 움트고, 나무마다 새순이 돋아났다. 얼어있던 꽃자리에 수줍게 고개를 내민 꽃망울이 삭막했던 산을 고운 빛으로 물들이고 따뜻한 기운에 녹은 땅을 밀고 힘껏 솟아난 샘물이 골짜기를 따라 흘러 청아한 소리가 산을 가득 채웠다.
새로운 다람쥐 식구들이 산군 호랑이 집 마당에 놀러 왔다가 배가 부른 최서율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토끼가 찾아오는 날도 있었고, 오소리가 오는 날도 있었다. 담벼락 아래 구멍으로 들어오지 못한 고라니가 담장 아래를 서성이다가 돌아가는 날도 있었다.
종달새가 아침마다 인사하듯 마당 나무에 앉아 노래를 불렀고, 밤이면 나이 많은 올빼미가 산군 호랑이 집 근처에서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돌아갔다. 좀처럼 보기 힘든 삵이 마당에 모습을 드러낸 날에는 밖으로 나오지 못한 최서율이 사진을 찍어 강무혁에게 보내어 고양이인지 삵인지 열띤 토론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좋은 날도 많았지만 힘든 날도 그만큼 오래 지속되었다. 배 속에 아기가 자리를 잡으면서 배가 당겨 아픈 날에는 제아무리 산군 호랑이라도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끙끙 앓는 최서율의 곁에서 그저 배를 문질러주는 일밖에 하지 못했으니 오롯이 최서율 혼자서만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었다. 아기를 품는 일도, 낳는 일도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다시 계절이 바뀌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에는 내내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있던 호랑이가 출렁이며 밖으로 나와 작은 바가지에 발을 담그고 있는 최서율의 종아리를 살뜰하게 핥았다.
배가 불러 걷기 힘들었지만 뒷문과 연결된 산길을 조금씩 걸었다.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오기 힘들었기에 완만한 언덕 정도만 올라갔는데 항상 호랑이와 함께였다. 풀숲을 부스럭거리며 두 사람을 따라오는 너구리가 정체를 숨기지 못해 최서율을 웃게 했다. 호랑이는 무서운데 아마도 저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면 빼꼼, 주둥이를 먼저 내밀어 냄새를 맡는 너구리였다.
“이쪽으로 올 거야?”
묻는다고 알아듣는 건 아니었지만 최서율은 항상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앞서 걷던 호랑이가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몸을 한껏 낮춘 너구리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최서율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 아직 아기구나?”
그제야 너구리가 왜 저를 따라왔는지 알게 된 최서율이 낑낑거리는 새끼 너구리의 목덜미를 잡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 둥그렇게 솟은 배 때문에 허리를 숙일 수 없어 고안한 방법인데 너구리에게 손이 닿기도 전에 다가온 호랑이가 이마로 최서율의 손을 밀어냈다.
“그래도….”
크르릉. 호랑이의 울음에 잔뜩 긴장한 너구리가 발발 떨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던 최서율도 덩달아 울상 지었는데 새끼 너구리의 목덜미를 덥석 문 호랑이가 가던 방향이 아닌 집 쪽으로 방향을 트는 걸 보곤 얼른 따라나섰다.
뒷문을 넘자마자 너구리를 내려두고 사람의 모습으로 몸을 바꾼 강무혁이 문에 걸어두었던 가운을 바로 걸쳤다. 잔뜩 긴장한 너구리가 흙바닥에 턱이 닿을 정도로 몸을 웅크리고 낑낑거리자 뒤에서 지켜보다가 다시 손을 뻗었다.
“만지지 마.”
“어떡해요… 아직 아기 같은데….”
“어미가 올 때까지 여기에 두면 돼. 금방 찾으러 올 거야.”
수건을 가져와 너구리의 등을 감싸 들어 올린 강무혁이 새끼 너구리의 배를 만져보며 무언가를 가늠하듯 꾹꾹 눌러보았다. 삐- 삐- 너구리가 미약한 소리를 내며 다리를 바동거렸다.
“어미가 안 오면요?”
“올 거야. 배가 빵빵한 걸 보니까 뭘 먹은 거 같은데. 우리가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면 진짜로 어미를 잃어버리는 거야.”
“…그건 알지만….”
“이틀만 기다리자. 그 후에도 못 가고 있으면 보호센터에 보내면 돼.”
배 속에 아기를 품고 있어서인지 최서율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울상지었다. 어미를 잃어버린 새끼가 지금 얼마나 두렵고, 무서울지 걱정되었다. 게다가 새끼를 잃어버린 어미는 지금쯤 얼마나 슬플까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눈가가 시큰거렸다.
“울어?”
“길 잃은 동물을 처음 본 거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안 좋은지 모르겠어요.”
어릴 적부터 산과 가깝게 살았기에 여러 가지 이유로 어미와 헤어져 헤매는 어린 개체를 자주 보았다. 이 사회는 야생 동물의 보호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은 유난히 감정이 동했다. 아무래도 제게 아기가 생겨서인 것 같았다.
강무혁이 그런 최서율의 볼을 쓰다듬고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살뜰한 위로에 삐죽거리던 입술이 진정된 듯 다시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달싹거리는 입술에 짧게 입 맞춘 강무혁이 웃었다. 길 잃은 새끼 너구리가 안타까워 눈물이 고인 최서율이 어여뻐 보였기 때문이었다.
최서율은 그날 밤, 자다가도 한 번씩 일어나 뒷문을 살폈다. 그만하고 편하게 자라는 말에 침대에 누우면서도 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귀를 쫑긋쫑긋 세웠다. 배가 불러 자세를 잘 잡지 않으면 잠들기 힘들었는데 막 잠이 들려던 찰나, 뽀스락거리는 소리가 뒷마당에서 들리는 듯했다.
어미 너구리가 바구니 속에 있는 새끼 너구리를 찾아가는 소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갑자기 편해진 마음에 눈을 감은 최서율이 단숨에 깊게 잠들었고 새끼 너구리가 있던 텅 빈 바구니는 아침이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 * *
더위로 고생하던 짧은 여름도 어느덧 저 멀리 물러나고 시원한 바람이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지막 달에는 양말도 혼자 신지 못할 만큼이 되어 항상 같은 시각에 일어나 준비하고 출근하던 강무혁의 시간이 더뎌졌다.
최서율이 온종일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해놓고 출근하려다 보니 아침에는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만큼 바쁜 강무혁이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불편해 거절하던 최서율도 혼자서는 씻기도 불편해진 몸을 감당하기 힘들어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는 일에 익숙해졌다.
처음 보는 아기용품을 하나씩 다 정리해놓고, 태교다 뭐다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예정일이 성큼 다가왔다. 미리 토끼 마을에 가서 병원도 가고 조산원의 시스템도 익히기로 했다.
“엄마, 저 이제 출발해요.”
-그래. 조심히 와. 다들 기다리고 있어.
“으응, 얼른 갈게요.”
-강 서방한테 운전 조심하라고 해. 빨리 올 필요 없으니까, 천천히. 응?
“어휴, 알겠어요. 도착할 즘 다시 연락할게요.”
차는 이미 도심을 벗어났다. 최서율이 조용히 창밖을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볼록 솟은 배를 밀며 호끼가 움직였다. 요즘 들어 더욱 활발해진 녀석은 배 속에서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움직여댔다.
처음에는 태동이 너무 신기해 멍하니 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종종 그만 좀 하라며 배를 통통 두드려 주기도 했다.
“움직여?”
“네, 이제 곧 나올 시간이라는 걸 아는 걸까요? 엄청나게 신났어요.”
“그래?”
한 손으로 운전대를 단단히 잡은 강무혁이 다른 손을 조수석으로 뻗었다. 둥그렇게 부푼 배 위에 손을 대어주자 아빠의 손길을 피하듯 옆으로 움직인 호끼의 발이 배 한 쪽을 뻥! 하고 걷어찼다. 아야. 소리를 낸 최서율이 콧등을 구기자 강무혁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진짜 신났네.”
“우리 아들 축구선수 시켜야겠어요. 왜 이렇게 발로 뻥뻥 차는지….”
호끼의 성별은 아들이었다. 다리를 겹치고 있어 8개월 차가 될 때까지 성별을 알기가 어려웠는데 정기검진을 갔을 때 배를 내밀고 누워있어서 성별을 알 수 있었다. 특별히 원하는 성별이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그저 신기했다.
토끼 마을에 도착하고부터는 내내 정신이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산하는 동창들이 있어서 자주 친구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최서율과 같은 진화한 수컷 수인인 동창도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서울에서는 아무래도 밖에 나가기가 꺼려졌었는데 당당하게 배를 내밀고 다녀도 아무도 개의치 않아 하니 좋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최서율이 어떤 종을 낳을지 궁금해했다. 도시에서야 다른 종과 만나 결혼하는 일이 흔해졌다고는 하지만 토끼 마을에서는 거의 처음 있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었기 때문에 모두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처음에는 그런 시선이 무척 부담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곧 즐기게 되었다. 어떤 종을 낳을지 내기하겠냐고 물었다가 옆에 있던 토끼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는 일도 있었다.
강무혁은 토끼 마을에서도 종종 회사 일을 했다. 서울에서 오는 연락을 받고 내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최서율은 그 내용이 궁금해 미치겠다는 듯이 어깨 너머를 힐끗거리며 모니터를 훔쳐보았다. 휴직 상태였기 때문에 딱히 비밀도 아닌데 꼭 보면 안 되는 걸 보는 사람처럼 굴어 강무혁을 즐겁게 만들었다.
호끼가 나오기 위해 준비를 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밤에 자다가 말고 눈을 떠 배를 움켜쥔 최서율이 강무혁의 품을 파고들었다. 끙끙거리는 작은 등을 토닥이고 천천히 배를 문질러준 강무혁이 제 가슴팍에 콧대가 구겨지도록 얼굴을 박고 있는 최서율의 정수리에 쉼 없이 입을 맞췄다.
진통은 아니고 아기가 밖으로 나오기 위해 수컷의 몸에 산도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했다. 장기가 기이하게 뒤틀리는 감각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숨죽이고 우는 최서율을 붙잡고 지금이라도 서울에 가서 수술하겠냐고 묻는 강무혁의 눈빛이 매우 진지했다. 그때마다 깊은 고뇌에 빠졌지만, 가족이 있는 고향이 더 나았기에 고개를 저었다.
고향에 온 지 일주일하고 나흘 만에 진통이 시작되었다. 예정일에 딱 맞춰 진통이 오다니 호끼가 효자라고 토끼 어머니는 좋아했지만 최서율은 웃을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어제 회사에 일이 있어 서울에 간 강무혁 때문이었다.
“지금 오고 있단다. 조금만 힘내자, 서율아. 응?”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울지도 못하고 떨고 있는 몸을 쉼 없이 주물러주었다. 진통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사장님을 찾아대는 최서율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출발해서 여기로 오고 있다던 강무혁은 진통이 시작되었다는 말에 아마도 더 다급하게 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호랑이가 무사히 도착하길 바라는 마음과 손을 꼭 움켜쥐고 있는 아직도 아기 같은 토끼가 덜 아프길 바라는 마음으로 빌고 또 빌었다.
“엄마아….”
“그래, 어미 여기 있어. 아파?”
“으응… 부사장님, 어디래? 얼른 오라고 해….”
끙끙 앓으면서도 울지 않으려고 커다란 눈을 부릅뜬 최서율은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기 충분했다. 같은 층의 다른 방에서는 다른 토끼 수인 하나가 남편의 머리를 죄다 뜯어 놓고 있는지 두 사람의 비명이 복도를 광광 울려대고 있는데 최서율이 있는 방에서는 신음 하나 나오질 않고 있으니 안쓰러운 마음이 배로 커졌다.
“금방 도착한다고 했어.”
다 비틀어진 베개에 얼굴을 묻은 최서율이 몸을 뒤틀었다. 이제 정말 호끼를 만날 시간이 임박했음이 느껴졌다. 하늘이 노래지는 순간 아기가 나온다고 했던가. 정말 눈앞이 깜깜해지도록 엄청난 통증이 몸을 덮쳐왔다.
몇 번이나 눈물을 쏟을 뻔한 위기를 넘긴 최서율이 곧 넘어갈 듯 숨을 헐떡거리며 입술을 꼭꼭 씹어 물었다. 그러면 안 된다며 얇은 수건을 입에 물려주었지만, 그것마저도 뱉어내고 강무혁을 찾아댔다.
“부사장, 님….”
“아이고, 얘가 진짜. 아기 낳고 나오면 와 있을 거야. 서율아. 정신 차려. 응?”
토끼 어머니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들의 손을 놓지 않고 꽉 잡아주었다. 진통은 무척 길고, 지루하게 몸을 괴롭혔다. 밖으로 나오려고 노력하는 호끼를 달래도 보고 빌어도 보았지만, 점점 더 거세지기만 하는 진통 속에서 가장 보고 싶은 건 강무혁이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눈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최서율이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문을 빤하게 바라보았다. 성큼성큼 남들보다 배는 넓은 보폭으로 걷는 익숙한 걸음이 복도를 박차고 제게 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억지로 힘을 주고 부릅뜬 눈에 강무혁이 담기는 순간 꾹꾹 눌러 참고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흉흉한 기세로 문을 연 호랑이가 크르릉. 낮게 울었다. 출산 준비를 하던 조산원의 토끼 수인들과 다른 방의 산모와 산모 가족, 밖에서 대기하던 토끼 가족들이 순식간에 퍼지는 맹수의 기운에 화들짝 놀랐지만, 강무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흐트러진 넥타이며 와이셔츠를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강무혁이 땀에 젖은 최서율의 얼굴을 부여잡고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바득바득 깨물어 상처가 남은 입술을 쓸어주고 상체를 낮춰주기 무섭게 두 팔로 강무혁을 꽉 끌어안고 호랑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허겁지겁 제 호랑이의 냄새를 들이마시는 최서율의 숨이 다급했다.
“…서율아.”
급격하게 빨라진 진통 주기에 바삐 출산이 가능한 방으로 옮기는 찰나에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와 강무혁만 방에 들어왔고, 이제 모든 것은 호끼와 최서율에게 달린 마지막 순간이었다.
한참 비명을 지르고 헐떡이던 최서율이 강무혁의 머리카락이며 옷가지를 쥐어뜯어 놓았다. 눈이 까드득 뒤집히는 걸 보고 놀란 강무혁이 아무래도 서울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다고 난리를 치다가 토끼 어머니에게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정신이 없어 보이는 최서율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자 강무혁이 엄청난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마침내 호끼를 만나는 순간, 마지막 남은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가쁜 숨소리만 오고 가던 방안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생했어. 강무혁이 최서율보다 더 지친 얼굴로 웃었다. 커다란 손으로 땀에 젖은 얼굴을 쓸어주고, 이마에 입 맞추었다.
안녕, 반가워. 빨갛고 쪼글쪼글한 아기가 보드라운 강보에 싸였다. 버둥거리며 응애, 응애. 우렁차게 울어대는 아기에게 닿은 두 사람의 눈에 웃음이 서리고, 눈물이 고였다. 가장 엉망인 채 마주하는 가장 완전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