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8/64)

57.

따뜻한 남풍이 불어오기 시작하면서 배가 조금씩 불러왔다. 겨우내 최서율을 괴롭히던 입덧도 잦아들었고, 앙상하던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아날 즘에는 제법 많은 양의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평소에는 잘 찾지 않던 고기를 끼니마다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었다. 식탁에 아예 턱을 괴고 최서율의 입으로 순식간에 사라져가는 고깃덩어리를 지켜보던 강무혁이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단속하지 못하고 헤벌쭉 웃어버렸다.

“어, 음. 흡. 제가 너무, 저만 먹었죠?”

“무슨 소리야. 너 먹으라고 해놓은 건데. 더 먹어. 이거 다 먹어.”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고기를 최서율의 그릇 위에 올려 준 강무혁이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간간이 채소를 먹기는 하지만 전에 먹던 양에 비하면 눈에 띄게 줄어든 걸 알 수 있었다. 두 볼이 빵빵해지도록 고기를 밀어 넣고 작은 입을 열심히 오물거리고 있는 최서율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자기도 좀 드세요… 저만 먹는 것 같아요.”

“나야 알아서 잘 먹지. 더 먹을래? 더 구울까?”

“아뇨. 배불러요. 진짜로…!”

행동이 빠른 강무혁이 혹시나 불판에 고기를 올릴까 싶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이미 제 양을 넘어설 만큼 먹어 더부룩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사실 입은 자꾸만 더 먹고 싶다고 음식을 당기는데 배는 그 양을 다 받아낼 만큼이 아니었기에 여기서 멈추는 게 좋았다.

“너무 정신없이 먹었죠? 자기 먹는 거는 못 본 거 같아요.”

“알아서 먹었다니까. 네가 잘 먹는데 내가 못 먹을 이유가 뭐가 있어.”

누군가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데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는 허무맹랑한 말은 믿지도 않았고, 믿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강무혁이건만 그 말을 아주 제대로 체험 중이었다. 최서율의 입으로 쏙쏙 사라지는 고기를 볼 때마다 배가 불렀다. 조금이라도 더 먹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정말 아무것도 먹지 않은 건 아니었기에 슬쩍 웃은 강무혁이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텅 비어버린 식탁을 바라보는 최서율을 애정이 듬뿍 담긴 눈길로 바라보았다.

“거실에 가 있어. 여기 정리만 하고 차 가져다줄게.”

최근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는 최서율이 탈이 나진 않을까 싶어 식사 후에는 꼭 뜨거운 차를 마시도록 했다. 호랑이 부모님께서 추천해주신 방법이라 잊지 않고 챙겼다. 많이 먹어 불편한 속을 달랠 수 있어서 최서율도 차 마시는 시간을 꽤 좋아했다.

배 속의 아기는 ‘호끼’라는 태명을 얻었다. 너무 적나라한 최서율의 작명 솜씨에 마시던 커피를 뿜었던 강무혁이었지만 제법 입에 붙어 자주 불러주곤 했다. 호랑이 부모님도 토끼 부모님도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호끼’는 잘 있냐고 물어보았다. 태명을 짓는 일에 진심인 토끼 가족들은 도대체 누가 지은 이름이냐고 호되게 굴었지만, 태명 없이 아기를 낳는 일이 허다한 호랑이 가족들은 태명마저 너무 귀엽다며 좋아했다.

“어머니가 내일 또 고기를 보내신다고 하는데, 먹을 수 있겠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잘 우려진 차를 손에 쥐여주며 조심히 마시라고 당부하던 강무혁이 피식. 웃었다. 호랑이 어머니는 입덧을 끝내고 잘 먹기 시작한 최서율이 고기를 찾는다는 말에 일주일에도 두어 번 질 좋은 고기를 종류별로 보내곤 했다. 제가 사서 먹이겠다고 했지만 해주고 싶어서 그런다는 말에 보내주시는 음식을 거절할 수가 없는 강무혁이었다.

“고기가 당기는 걸 보니까 우리 호끼는 호랑이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너무 속단하지 말자.”

호끼의 성별은 다음 달이면 알 수 있었다. 다만 종은 태어나고 삼일에서 일주일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 수 있으니 그때까지는 어떤 종일지 기대하거나 속단하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도 최서율은 아주 강하게 호끼가 호랑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고기가 맛있었던 적이 없었다.

토끼 마을도 몸이 허하거나 호되게 아프고 난 후에는 삼계탕이나 백숙 같은 보양식으로 몸을 회복하는 문화가 있다. 그럴 때도 음식을 약으로 먹었지, 맛있어서 먹었던 적은 없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입덧으로 허해진 기를 채우기 위해 찾는다고 하기에는 너무 맛있고 자꾸만 생각나고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특히 소고기가 그랬고, 가끔 돼지갈비 같은 것도 먹고 싶어 곰 아주머니께 부탁하는 일도 있었다.

“엄마도 이상하다고 했어요. 제가 배 속에 있었을 때는 철 지난 과일이 먹고 싶어서 고생했다고 하셨거든요.”

“그러고 보니까 요즘 과일이랑 채소는 많이 안 먹나?”

“먹기는 먹는데… 예전에 비하면 적게 먹긴 해요.”

미지근해진 차를 호로록 마신 최서율이 겨울이 물러나고 있는 마당으로 시선을 옮겼다. 듬성듬성 쌓여있던 눈이 녹은 곳에 아마도 자그마한 새싹이 돋아날지도 모르겠다. 아직 봄이 오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지만 새봄을 맞이하고, 더위와 싸우다가 보면 호끼를 만날 시간이 성큼 다가온다. 호랑이든 토끼든 얼른 아기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기대와 설렘으로 행복한 날들이었다.

* * *

호랑이 어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강무혁의 호랑이굴은 대대적인 보수 공사에 들어갔다. 강무혁이 출근한 낮 동안에 혼자 있는 최서율이 불편하지 않도록 공사가 시작되는 시간부터는 계속 최서율과 함께 지낸 호랑이 어머니가 새끼 호랑이의 습성에 대해 토끼에게 자세하게 가르쳐주었다.

호끼가 호랑이일지도 모르겠다고 주절주절 늘어놓는 최서율의 걱정거리를 단번에 간파한 호랑이 어머니는 강무혁보다 더 효과 좋게 최서율을 달랬다. 토끼인 네가 호랑이를 낳아도 너를 도와줄 사람이 이 집안에 이렇게나 많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다정한 말에 비로소 최서율은 아주 조금이지만 마음에 남아 있던 걱정거리를 완전히 털어낼 수 있었다.

사용하지 않던 방 하나를 정리하여 손님방으로 만들었고, 침실과 가까운 곳에 있던 손님방을 아기방으로 탈바꿈했다. 도배를 새로 하고, 대리석 바닥 위에 포근하고, 따뜻해 보이는 장판을 깔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방의 크기에 맞춰 폭신한 매트까지 깔아두었다. 보일러가 잘 돌아가는지 확인했고, 미리 사 두었던 아기 가구와 용품을 들여놓아 방을 채웠다.

여기저기서 선물 받은 물건이 벌써 산더미처럼 쌓였고, 두 사람이 함께 사다 모은 물건까지 합쳐지니 아기방은 이미 꽉 차버린 상태였다. 아기 침대 위에 모빌을 걸어두던 강무혁의 어머니는 공중을 떠다니는 모빌을 만져보다가 너무 귀엽다며 호들갑을 떨어 토끼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왕 시작한 공사를 완벽하게 마무리해보자는 말에 삐걱거리던 침실의 폴딩도어를 손보고 수영장과 연결된 나무 데크의 들뜸 현상도 보수했다. 곧 봄이 시작되고 볕이 뜨거워지면 강무혁과 거의 한 몸이 되는 수영장은 최서율이 나서서 보수 공사에 공을 들였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동물들의 먹이를 보관해두는 창고는 문과 창문을 보수하고 보관함을 새로 들였다. 산과 연결된 뒷문도 겨울에 눈이 많이 쌓이면서 고장이 났는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는데 이참에 아예 교체해 버렸다.

주방과 화장실, 욕실의 찌든 때도 제거했고, 안 쓰는 물건은 솎아내 버리기도 했다. 거실과 부부침실에 있는 화장실과 욕실도 불편함 없도록 새로 손 보았는데 몇 년 전 강무혁이 입주하면서 싹 고친 상태라 바꿀 부분이 많지는 않았다.

집안일 전반적인 부분을 도맡아 해주시는 곰 아주머니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고용인도 두지 않고 있는 둘째 아들은 늘 호랑이 어머니의 걱정거리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라도 직접 집을 고쳐주고 봐줄 수 있어서 좋은지 공사가 모두 마무리된 오늘은 호랑이 어머니의 기분이 다른 날보다 더욱 좋아 보였다.

“집은 얼추 잘 마무리된 거 같은데… 무혁아, 혹시 고용인이 더 필요하면….”

“집에 저희 말고 다른 사람 있는 거 불편합니다. 어머니도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그거야 그렇지만, 이 큰 집을 네가 혼자서 관리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니.”

“지금까지도 잘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겁니다. 필요하면 그때 제가 직접 고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강무혁의 단호한 대답에 호랑이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아버지에게 산을 물려받고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을 때부터 집안일을 맡아줄 아주머니 한 분을 제외하고 다른 고용인은 필요 없다고 단단히 못 박아두었기에 더 말을 덧붙일 수도 없었다.

“서율이는? 불편한 건 없고?”

“그럼요. 엄청 편하게 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네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렴.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 수 있으니까.”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호랑이 어머니를 보곤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최서율이었다. 아기방을 꾸미자고 하더니 집을 싹 갈아엎어 고쳐 놓는 추진력을 옆에서 지켜보았으니 뭐라도 하나 필요하다고 말하면 단숨에 달려와 다 해결해 줄 것 같다는 믿음이 치솟았다. 부담스러운 마음은 뒷전이고 그저 감사하고 좋았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사이 주방에서 갈비찜이 맛있게 익어가는 냄새가 났다. 뭐가 먹고 싶냐고 묻는 말에 괜찮다고 거절하는 강무혁을 밀어내고 전화를 빼앗은 최서율이 어머님이 해주신 갈비찜이 먹고 싶다고 말해 집에 올 때 바리바리 챙겨온 어머니였다. 직접 양념한 갈비찜을 여기까지 동행한 본가의 고용인들이 조리하고, 상을 차렸다.

야들야들하게 익은 갈비찜을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도 먹는 최서율을 보는 어머니의 눈이 하트로 변해있었다. 공사하는 동안 단둘이 오붓하게 보낸 시간이 무척 즐거웠었는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토끼 좋아.’의 마음이 배로 치솟은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자기도 더 드세요.”

“많이 먹었어. 너 많이 먹어.”

“그래 서율아. 엄마가 너 먹으라고 해온 건데 쟤는 신경 쓰지 말고 너 많이 먹으렴.”

“아… 그래도….”

괜히 민망한지 볼록해진 볼을 꼼지락거리며 갈빗대를 열심히 뜯다가 눈을 도르륵 굴렸다. 어머니는 물티슈를 한 장 건네며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최서율을 바라보았다. 호랑이 집안에 장가온 토끼가 여전히 신기하고, 안쓰럽고, 무척 귀하다는 눈빛이었다.

“아, 참! 그건 어떻게 하기로 했니? 엄마 생각에는 그래도 전문 병원에서 아기를 낳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토끼 가족들은 아무래도 토끼 마을에 수컷 수인을 전문으로 봐주시는 곳에서 낳는 게 더 좋지 않겠냐고 하시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쪽 의료진 실력이야 당연히 최고지만, 수컷 수인은 경험이 없으니 차라리 고향에서 낳는 게 좋을 듯하고요.”

“어휴… 토끼 마을이면 너무 멀잖니. 나도 우리 손주보고 싶은데….”

“아기 낳고 바로 올 거라 어머님도 금방 보실 수 있어요. 건강하게 잘 낳고 빨리 올게요.”

다니고 있는 병원에서 아기를 낳으면 좋겠지만 수컷 수인은 경험이 없는 의사에게 최서율을 맡길 수 없다는 강무혁의 마음과 서울의 의료시스템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토끼 가족들의 마음이 잘 맞아떨어졌다. 서울에서 아기를 낳았으면 하는 호랑이 집안의 바람과는 다르게 고향에 내려가 아기를 낳는 것으로 결정했다.

아직 한참 후의 일이었지만 둘 다 미리미리 계획을 세워두는 성격이라 이미 토끼 마을의 유명한 조산원 예약까지 끝내둔 상태였다. 이런 부분은 참 잘 맞아 다행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두 사람이 보내는 시간을 지금이라도 더 많이 즐겨.”

“그렇게 할게요. 감사해요. 어머니.”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어머니는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쉽게 떼지 못했다. 언제든 놀러 오시라고 말하며 자기도 더 자주 가겠다고 하는 최서율의 손을 한참 쓰다듬다가 겨우 차가 출발했다. 어머니를 배웅한 최서율이 차가운 밤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어깨를 들썩였다. 푹신한 패딩 위로 손을 얹은 강무혁이 퉁퉁해진 최서율을 한가득 끌어안았다.

“그동안 어머니랑 지내느라 고생했어.”

“저는 너무 좋았는데… 어머니한테 자기 어릴 적 얘기도 많이 듣고, 호랑이 아기는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도 배우고… 정말 좋았어요.”

“그러다가 호끼가 토끼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면 또 우리 엄마가 도와주겠지.”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에 강무혁이 실소를 터트리자 최서율이 강무혁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품으로 안겨들었다.

“봄이 오려나 봐요. 바람 냄새가 달라졌어요.”

“그런가?”

“네. 저 멀리서 봄이 오는 냄새가 나요.”

“우리 서율이가 나랑 살더니 호랑이가 됐나? 멀리서 나는 계절 냄새도 다 맡고.”

강무혁이 저를 바라보느라 한껏 들어 올린 최서율의 하얀 이마 위로 입술을 누르곤 살살 비벼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두 사람은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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