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7/64)

56.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걸 보던 최서율이 오독오독 씹고 있던 오이를 집어 던지고 굳게 닫힌 폴딩도어를 열어젖혔다. 육중한 문이 스르륵 열리고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랑곳하지 않고 카디건을 조금 더 여미고 문 앞에 가지런히 놓아둔 털신에 하얀 발을 밀어 넣었다. 세차게 불어대는 눈보라를 맞으며 얼어붙은 잔디를 밟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고, 오늘은 눈까지 내리는데 뺨을 스치는 매서운 바람에 섞여든 겨울 냄새가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차분해진 것 같아 몸이 꽁꽁 얼어붙도록 한참 마당을 쏘다녔다.

눈발을 헤치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본래 청각이 예민한 최서율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겨울 산을 휘젓고 다니던 여우가 담벼락 아래 뚫린 구멍 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여우와 눈을 마주치곤 화들짝 놀랐지만, 산군 호랑이의 아기를 밴 토끼를 여우는 절대 공격하지 못할 걸 알기에 얼른 자세를 가다듬고 여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딱 보아도 겨우내 굶주린 태가 나는 몸이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마음이 조급해졌다.

“기다릴래? 먹을 게 좀 있을 것 같은데….”

수인도 아닌 여우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대뜸 말을 걸어오는 최서율을 경계한 여우가 구멍으로 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헛발질을 해대더니 그대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배고픔에 지쳐 산군 호랑이 집에 찾아왔다가 봉변을 당한 꼴이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입덧에 시달려 지친 몸도 잊어버리곤 창고에서 먹이 주머니를 가져와 주변에 뭐라도 뿌려놓을 생각으로 바삐 움직였다.

눈이 쌓이기 시작한 담벼락 아래에 겨울에 산에서 찾기 힘든 열매와 채소를 수북하게 쌓아 놓았다. 추웠지만 속을 가라앉힐 수 있어서 좋았다.

“또 왜 나와 있어.”

주차장과 연결된 돌계단을 밟고 올라오던 강무혁의 미간이 구겨지는 걸 확인한 최서율이 멋쩍게 웃었다. 단숨에 다가와 빨갛게 얼어 버린 볼을 잡은 강무혁이 심각한 눈빛으로 담벼락 아래 수북하게 쌓인 먹이를 보곤 혀를 찼다.

“자기는 먹지도 못하면서 누구 먹이를 챙기는 거야.”

“여우가 배가 고파서 왔었는데… 저랑 마주치곤 그냥 가버렸어요.”

“그런 것까지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집에만 있으면 오히려 속이 안 좋아요. 나와서 있으면 편해요.”

제 마음도 모르고 잔소리를 쏟아내려고 시동을 거는 강무혁을 단칼에 잘라버린 최서율이 코트 깃을 열어 품으로 당기는 강무혁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해도 지지 않았는데 집에 온 강무혁이 왜 지금 시간에 여기 와 있는지 알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

입덧이 시작되면서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약도 먹어 봤고, 효과가 좋다는 쿠키, 껌까지 모두 동원했다. 그나마 숨쉬기 편한 부사장실에서 업무를 보기도 했고, 종종 재택근무를 하기도 했다.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몇 가지 찾아서 기분 좋은 날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렇게 못 먹으면 배 속의 아기에게도 영양분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한다는 말을 듣기 무섭게 먼저 항복을 외쳤다. 이대로는 동료들에게도 민폐고 아기의 건강도 지키지 못하겠다는 판단에서 선택한 일이었다. 조금만 더 버텼으면 강제로 축객령이 떨어질 뻔했는데 스스로 휴직을 선택했으니 불화는 막을 수 있어서 강무혁의 입장에서도 다행인 일이었다.

“오늘은 어땠어?”

“똑같았어요. 아주머니가 이것저것 해주셨는데 다 못 먹고 오이만 조금 먹었어요.”

강무혁이 돌아오면 가장 안정적인 시간이 찾아왔다. 어미의 젖 냄새를 쫓아 주둥이를 내미는 아기처럼 강무혁의 목덜미에 얼굴을 틀어박고 속을 진정시켰다.

강무혁은 그런 최서율이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토끼 주제에 호랑이 냄새를 맡기 위해 코를 꼼지락거릴 때마다 콧방울을 물어 주고 싶은 욕구를 꾹꾹 눌러 참았다.

따뜻한 품에 코를 문지르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차가운 눈송이가 얼굴로 내려앉았다. 그 위로 강무혁의 입술이 닿았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체온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치솟은 입꼬리를 따라 입 맞췄다. 마침내 입술이 닿아 포개졌을 때.

“으응….”

사박사박, 최서율이 제자리에서 발을 구를 때마다 눈 쌓인 잔디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입술이 흡 빨리고,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틈으로 산 내음이 가득 담긴 찬바람이 닿았다. 치켜올린 턱으로 입술을 내린 강무혁이 눈송이다 닿는 곳을 따라 입 맞췄다. 눈을 가늘게 뜬 최서율이 그의 어깨 너머로 제법 굵어진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 * *

걱정을 잔뜩 늘어놓고 퇴근한 곰 아주머니는 강무혁이 먹을 몇 가지 반찬을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혼자 식사하는 일에 이골이 난 강무혁이지만 요즘은 어쩐지 밥이 먹히질 않았다. 침실이나 서재에서 멀뚱히 기다리고 있을 최서율을 생각하면 혼자 맛있게 식사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영 밥 생각이 나질 않아 냉장고 문을 닫아 버린 강무혁이 최근 최서율이 가장 맛있게 먹는 사과주스 한 잔을 가지고 침실로 돌아왔다.

“어…?”

“대충 먹었어.”

“…거짓말. 다 티 납니다.”

“그래?”

여상하게 웃은 강무혁이 주스가 담긴 잔을 내밀었다. 딱히 먹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냉큼 잔을 받아 꼴깍꼴깍 넘긴 최서율이 반 정도 비운 잔을 만지작거렸다.

오후 내내 내린 눈은 세상을 하얗게 만들어 버릴 정도로 쌓였다. 일부러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아 마당이 훤히 보이는 침실에서 가만히 눈 내린 풍경을 바라보다가 태블릿을 들고 침대로 걸어오는 강무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거 필요한 건 없고?”

“…….”

“서율아?”

“…냉면.”

“응?”

안 그래도 동그란 토끼의 눈이 크기를 키웠다. 저러다가 눈알이 뚝 하고 떨어질 것 같다는 착각이 일어 저도 모르게 얼른 손을 뻗은 강무혁이 조금 멍해진 최서율의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뭐라고?”

“냉면이요… 살얼음 있는… 냉면이 먹고 싶어요.”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눈이 내렸다. 산은 그렇다 쳐도 도시로 내려가면 지금쯤 발이 묶인 차들이 도로를 꽉 채우고 있을 건 불 보듯 뻔했다. 종종 뭐가 먹고 싶다고 말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난감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사 올게.”

“…아니! 아니에요! 눈도 왔고, 괜찮아요. 내일 아주머니께 말해서….”

“조금만 기다려. 우리 자주 가던 가게 가서 사 올까? 거기 육수가 맛있지?”

아는 맛이 무섭다고 했던가. 그 가게의 육수를 떠올리기 무섭게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꼴깍 침을 삼킨 최서율이 부정도 긍정도 못 하고 강무혁을 바라보자 그가 웃었다.

“기다릴 수 있겠어?”

“그런데… 사 왔는데 또 못 먹으면 어떡해요.”

“내가 먹으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그래도….”

몇 번 이런 일이 있었다. 어디에 뭐가 먹고 싶다고 말해서 사 오면 잘 먹는 날도 있었지만, 막상 음식을 눈앞에 두고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덜컥 걱정이 앞서 급하게 후드티를 꿰입는 강무혁의 옷자락을 잡아 쥐었다.

“같이 가면….”

“밖에 추워. 눈 와서 차에만 앉아 있을 텐데 힘들면 어떡하려고.”

“계속 집에만 있었잖아요. 차 안에서라도 바깥 구경할래요.”

폭신하게 내린 눈이 도로 위에서 얼마나 쓰레기 같이 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30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한 시간, 두 시간이 걸려서 가는 일도 허다하게 만들었다. 제설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는 해도 출근길 차들과 섞이면 답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가고 싶었다. 집에 앉아서 멀뚱히 그가 오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제발 같이 가자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바라보는 토끼의 눈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강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냉면이 얼른 먹고 싶어 그러는 건지, 밖에 나가는 게 좋아서인지 한껏 기분이 좋아진 최서율이 드레스룸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간 강무혁이 너무 두껍지 않은 옷을 입혀주었다. 차 안이 충분히 따뜻할 테니 작은 담요 하나만 가지고 나가도 충분할 것 같았다.

“우와….”

“생각보다 더 엉망인데. 어쩌지?”

“우리 저기 가서 그냥 사 올까요?”

집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째. 아직 목적지까지는 반도 가지 못한 상황인데 도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퇴근 시간은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집에 도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뒤섞이느라 정신없었으니 강무혁의 신경도 바짝 올라설 수밖에 없었다. 혼자 타고 있어도 예민해질 상황이었는데 임신한 최서율까지 옆에 있으니 자꾸만 기운이 사나워졌다.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겠어?”

“네, 그냥 냉면 육수가 먹고 싶은 건데….”

다시 쓰읍. 침을 삼킨 최서율이 다급한 손길로 강무혁의 손등을 두드렸다. 그냥 저기서 먹어요. 네? 얼른. 좀처럼 채근하는 일이 없던 최서율이 저 앞 갈빗집 간판에 커다랗게 쓰여 있는 냉면. 이라는 글자에 반응했다.

강무혁이 자주 가던 가게의 냉면은 다음에 사주겠다고 하며 핸들을 꺾었다. 눈이 와서 오히려 한가한 식당에는 강무혁 혼자만 들어갔다. 이런저런 냄새에 예민해지고 힘들어하는 최서율을 위해 포장하기로 했으니 두 사람 다 가게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조수석 창문에 코를 박고 냉면을 주문하는 강무혁을 바라보던 최서율이 제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빠가 고생한다. 너도 보이지? 근데 너… 냉면 진짜 먹고 싶은 거 맞지?”

아기에게 하는 말인데 자꾸만 혀 밑으로 군침이 고였다. 아기보다는 아무래도 제가 먹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았다. 어제부터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게 없었다. 며칠 사이에 김치볶음밥이 입에 맞아서 몇 번 먹은 거 말고는 더 먹은 음식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냉면 한 그릇 먹고 나면 내일부터는 밥도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주인장이 강무혁에게 비닐봉지를 건네는 모습을 확인하기 무섭게 어깨가 치솟았다. 너무 좋아 얼른 먹고 싶었지만, 품위를 지키기 위해 집까지 참아야 한다니 없는 토끼 귀가 아래로 축 늘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집까지 가는 시간도 비슷하게 걸릴 텐데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강무혁이 묻히고 온 갈비 냄새에 놀란 최서율이 미간을 좁혔지만, 창문을 잠시 열어 환기하는 바람에 그 냄새는 훌훌 날아가고 호랑이 냄새만 남았다. 창문을 통해 찬바람이 쌩쌩 들이닥치는데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최서율이 고개를 까닥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생기 도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강무혁이 전신주를 모조리 뽑아버리고 싶을 만큼 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도로 한복판에서 창문을 다 열어 놓은 채 뽀뽀를 퍼부었다.

호랑이 손에 붙잡힌 토끼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뛰뛰빵빵 자동차가 얽히고설켜 복잡한 도로 위에 간지럽게 내리깔렸다.

깊은 밤이 되자 다시 흰 눈이 펄펄 날리기 시작했다. 예보에도 없던 폭설에 시민들의 불편함에 대해 토로하는 뉴스를 보며 어깨를 붙이고 앉아 살얼음이 떠 있는 냉면을 호로록, 맛있게도 먹었다. 물냉면, 비빔냉면을 사이좋게 곱빼기로 사 왔는데 최서율이 배를 두드리며 더는 못 먹겠다며 소파로 몸을 뉘었다.

“그래, 더 먹으면 탈 나겠다.”

강무혁은 몇 젓가락 먹지 못하고 모조리 최서율의 입으로 들어갔지만, 강무혁이 흐뭇한 눈으로 배를 두드리고 있는 토끼를 바라보았다. 괜스레 민망해진 토끼가 볼을 봉긋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아빠 잘 먹었습니다. 해야지.”

“허, 참.”

“왜요? 우리 아기가 냉면 먹고 싶다고 한 거예요.”

강무혁이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웃었다. 최서율이 민망한 듯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강무혁이 최서율의 배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도톰한 라운드티 아래에 아직은 판판한 배가 간지러운 듯 꿈질거렸다.

“그럼 어쩌나, 우리 서율이는 아직 뭘 못 먹어서.”

“…아잇, 자기도 참….”

티셔츠 아래를 벌리고 불쑥 들어온 손이 맨살을 쓰다듬었다. 분홍빛으로 물든 뺨을 씰룩거리자 그 위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신경을 아프게 찌르는 다른 냄새도 없고 오로지 호랑이 냄새로만 가득한 포근한 공간에서 만끽하는 아주 오랜만에 배부르고, 포근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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