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부쩍 예민해진 최서율이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강무혁이 고개를 비스듬히 내리고 뚱해진 얼굴을 확인했다. 가방끈을 잡아 쥔 손이 망설이듯 이리저리 까딱거리는 걸 본 그가 손등에 제 손을 포갰다.
“정말 말 안 할 거야?”
“그게….”
최서율은 어제도 퇴근 후에 침대에 들어가 누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런 그를 채근하지 않은 이유는 최서율이 지금 임신 6주 차로 매우 조심해야 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입술이 톡 삐져나온 것만 봐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출근하는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이전과 비교하면 아침에도 움직이는 듯 마는 듯 돌아다니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요 며칠은 그야말로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
아프면 아프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항상 자기 기분을 표현하는 데 숨김이 없던 최서율이 왜 이러는지 오늘은 꼭 이유를 알 아야 했다.
“일단 올라가요. 시간이….”
“아니. 너도 내리지 마. 출근하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알아야겠으니까.”
“싫어요. 출근할래요.”
“서율아.”
“부사장님.”
“…….”
강무혁이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얼굴 전체에는 좋지 않은 기분을 표현하듯 음울한 기운이 가득한데 눈을 출근에 대한 강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최서율이 제 일에 얼마나 큰 자부심과 긍지를 가졌는지는 강무혁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출근하지 말고 개인적인 일을 먼저 해결하자고 했으니 반감을 사는 건 당연했다.
“그래. 가자.”
차에서 먼저 내린 강무혁이 조심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고 내리는 최서율의 곁으로 곧장 다가갔다. 손을 잡아주는 강무혁에게 의지해 완전히 바닥에 발을 디딘 최서율이 그제야 미안하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아침부터 출근하는 사람 기분을 망쳐놓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몸 안 좋으면 바로 말해. 나 같은 남편 두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치… 권력남용이 뭐가 그렇게 좋은 거라고 자꾸 말하래요. 회사에는 다 절차가 있는 건데.”
“회사에는 절차가 있어도 너는 다르지.”
강무혁이 엘리베이터에 기댄 최서율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도 타지 않은 엘리베이터에서 나누는 입맞춤은 두 사람만이 즐기는 짧은 재미 중의 하나였다. 꾹 닿았다가 아쉽게 떨어지는 입술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최서율이 띵동. 소리를 내며 1층에 멈춰서는 엘리베이터에 놀라 얼른 강무혁의 뒤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얼마 전부터 이렇게 행동하는 최서율을 눈치채곤 고개를 갸웃거리는 강무혁이었다.
범진그룹에는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임원들도 사원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사용했는데 사람들이 부사장인 강무혁을 보며 가볍게 인사하며 엘리베이터에 차곡차곡 쌓이듯 올라타기 시작했다. 구석으로 몸을 물리는 최서율을 따라 뒤로 물러난 강무혁이 제 등에 코를 박고 가만히 숨 쉬고 있는 토끼를 느끼며 희미하게 웃었다.
층마다 사람들이 내리고 고층에 자리한 부사장실까지 무사히 도착한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내렸다. 그사이에 조금 구겨진 서로의 옷을 털어 정리해주며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시작했다.
* * *
“어머, 최 대리님.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요? 아파 보이는데… 정말 괜찮아요?”
걱정을 가득 담고 묻는 기획 2팀의 한지연 과장이 회의 테이블에 자료를 올려놓으며 걱정스러운 듯 최서율의 얼굴을 살폈다. 미리 내려와 회의 진행 상황을 꼼꼼히 정리하고 있던 최서율이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며 웃었다.
이마에 땀까지 맺힌 게 훤히 보이는데도 괜찮다고 하는 최서율에게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진 한 과장이 아프면 언제든지 말하고 올라가라는 말을 덧붙였다. 회의 내용은 자기가 정리해주겠다는 말이었다. 따뜻한 배려에 웃음이 났다.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하다고 말하기 무섭게 기획팀 사람들이 회의실로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휴….”
회의가 한창 중반에 다다를 즘, 매스껍던 속이 금방이라도 뭔가를 쏟아 낼 듯 울렁거렸다. 이 회의실 안에 너무 많은 이유가 존재했는데 여러 사람의 향수 냄새와 외래종 불곰 수인의 냄새가 역하게 느껴진 탓이 가장 컸다. 바로 지난주까지만 해도 얼굴을 맞대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었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고 자신을 다독이던 최서율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머리가 아픈 것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거덕거리는 소리에 몇몇 사람의 시선이 최서율에게 닿았다.
“…죄송, 합니다….”
죽어가는 소리로 죄송하다고 말한 최서율이 빠르게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토끼 수인은 청각이 예민한 동물이었다. 그러니 후각에 휘둘리는 지금이 괴로운 건 당연했다. 배를 쓰다듬으며 발을 동동거린 최서율이 입을 틀어막고 제일 가까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변기 커버를 뒤집어 열기 무섭게 묽은 토사물이 쏟아져 나왔다. 위를 뒤집어 씻어내고 싶을 만큼 강한 울렁거림에 한참 토악질해대다가 화장실 바닥으로 쭈그려 앉아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힘이 풀린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 일어섰는데 복도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얼른 세면대로 가 손을 씻고 입을 헹궜다.
점심시간에 잠시 쉬고 또 다른 회의에 들어가야 했다. 원래는 선수미 과장의 담당이었는데 연차를 내고 쉬는 중이라 제가 대신 들어가기로 했다. 괜히 간다고 했나 싶어 후회가 밀려들었다.
지금이라도 지원실에 올라가 바꿔 달라고 하면 유 대리가 바꿔 줄 것 같은데… 어떡할지 생각하는 찰나, 불곰 수인 부장과 얘기를 나누던 한지연 과장이 최서율의 태블릿을 내보이며 허공에 흔들거렸다.
“아, 감사합니다. 과장님.”
“뭘 이런 거로… 근데 너무 안 좋아 보여요. 오늘은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걱정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요.”
“얼굴도 하얗게 떴어요.”
평소 다정한 성격답게 지원실 직원까지 살뜰하게 챙기는 한 과장의 손에서 풀려난 최서율이 비상계단을 밟았다. 엘리베이터는 여러 사람과 함께 사용해야 하는데 숨쉬기가 너무 힘든 고역인지라 차라리 걷는 게 더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겨우 다섯 층 걸어 올라가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걷기 힘들어서 숨이 막히는 건 괜찮았는데 다들 비상계단에서 뭐를 하는지 개, 고양이, 너구리 같은 수인의 체취가 가끔 강하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만 피하면 될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이마를 짚었던 최서율이 겨우 밀폐된 곳을 탈출했다 하는 마음으로 비상계단 문을 힘껏 밀었다.
“어? 최 대리님? 왜 걸어와요?”
“잉? 왜 거기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박 부장과 유 대리가 비상계단 문을 열고 나오는 최서율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회의 다녀오겠다고 나가더니 곧 죽을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모습을 드러낸 최서율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키우는 두 사람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두어 시간 만에 웃을 기운도 쭉 빠져버린 최서율이 같이 점심 먹자는 말에 괜찮다며 대충 손을 흔들고 자리에 와 앉았다.
식사하러 모두 떠난 텅 빈 지원실을 둘러보다가 강무혁의 일정을 확인했다. 외부 미팅 후 오찬. 돌아오는 예상 시간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후였다. 손끝으로 모니터를 톡톡 두드린 최서율이 조심스럽게 일어나 빠르고, 정확한 걸음으로 부사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회사에서 가장 숨쉬기 편한 곳은 아마도 이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무혁의 냄새가 짙게 밴 부사장실은 울렁거리던 속을 빠르게 진정시켜주었다. 거짓말처럼 진정된 속을 느끼며 헛웃음을 삼킨 최서율이 오전 내내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소파 테이블 밑에 자리한 담요를 하나 꺼내어 덮고 조심스럽게 몸을 늘였다. 푹신하고 커다란 소파에 몸을 뉘기 무섭게 익숙한 호랑이의 냄새가 덮쳐왔다. 기분이 좋았다.
엊그제부터 갑자기 변한, 제 행동을 걱정하는 그를 알면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건 혹시나 그가 회사에 못 나오게 할까 봐서였다. 어제도 그에게 말해야지 생각하다가 몸이 급격하게 무거워져 잠시 누웠을 뿐인데 그대로 아침이 되어버리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숨길 수는 없는 일이지만 최대한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나가고 싶었다. 모든 게 다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결국엔 제가 원하는 대로 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슬퍼졌다. 그런 마음이 혹시나 아기에게 영향이 가는 않을까 얼른 생각을 끊어낸 최서율이 작게 뒤척였다. 할 수 있는 만큼은 버티고 싶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가야. 너는 나를 얼마나 버티게 해줄 거야?
아직 티도 나지 않는 아랫배를 설설 문지르다가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타닥타닥. 일정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에 반짝 눈을 뜬 최서율이 놀란 듯 펄떡 튀어 올랐다. 이내 헉! 소리를 내며 잽싸게 밖으로 나가려는 최서율을 단번에 붙잡은 강무혁이 놀라 쿵쿵거리는 자그마한 심장을 진정시키듯 가슴께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아, 부, 부사장, 님….”
“피곤했어?”
“그게… 그러니까….”
“서율아. 나 엊그제부터 많이 참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네 상태를 다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아….”
“뭐가 불편한지, 어디가 아픈지. 내가 꼭 그걸 다른 사람들한테 들어야겠어?”
회사에는 눈도 입도 귀도 너무 많았다. 부사장의 반려인 최서율이 복도만 걸어 다녀도 어디에서 뭘 했더라. 뭘 먹더라.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하물며 오늘은 아침부터 다른 층 화장실에서 토악질해댔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강무혁에 관한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먼저 들으면 제 기분은 어떨까. 바꿔놓고 생각하니 당연히 기분 나쁠 상황이었다. 어제 하지 못했다면 오늘 아침에라도 말해야 했다. 하루아침에 바뀐 제 상태를 보고 걱정했을 강무혁에게 미안한 마음이 터질 듯 커다래졌다.
최서율이 강무혁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입덧이… 너무 심해요….”
“…뭐?”
“아무 냄새도 못 맡겠어요. 회사는 너무 나오고 싶은데, 엘리베이터부터 회의실까지. 오늘은 비상계단도 전부 다 이상한 냄새로 가득 차 있어요. 여기만… 자기 냄새만 괜찮아요. 물도 못 마시겠고, 음식도 못 먹겠어요.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른 데… 회사에서는 아무것도 못 해요….”
“언제부터 그랬어.”
“이번 주… 월요일부터요.”
오늘이 목요일이었으니 벌써 나흘 전부터 그랬다는 거였다. 예민한 시기이니 최대한 건드리지 말고 그냥 두어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을 지켰다가 가장 중요한 걸 놓친 기분이었다.
“내가 회사에 못 나오게 할까 봐 말 못 한 거야?”
“…….”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걸 보니 그게 정답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강무혁이 최서율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이마를 짚었다. 이 쪼그만 게 힘들게 회사에 입사해서 나름의 자부심을 느끼며 일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혼나야지. 집에다가 꽁꽁 묶어 둘까?”
“힝….”
으름장을 놓는 목소리에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더 바짝 안겨드는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병원부터 가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지. 우리 어머니랑 장모님께도 물어보고.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다 알아볼게. 그냥 가만히만 있어.”
출근은 하고 싶은데 냄새는 역해서 아침부터 볼이 퉁퉁 부었던 걸 생각하면 괘씸하다가도 귀여워 죽을 지경이었다. 얼굴을 감추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자그마한 머리통에 쪽쪽 입을 맞췄다. 부사장실에 들어오면 살 것 같다는 말도 퍽 마음에 들었다. 제 새끼를 품은 토끼가 사랑스러워 오늘도 가슴이 남아나질 않는 호랑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