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4/64)

53.

첫눈이 내리고 일주일 뒤, 이례적인 폭설이 서울을 뒤덮었다. 이틀 간격으로 쏟아진 이번 눈은 솜털처럼 날리던 첫눈에 비하면 재난 수준이었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지만, 두 번째 눈은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하며 도시의 교통이 마비되고, 사람들의 발이 꽁꽁 묶였다. 전쟁 같은 퇴근길을 뚫고 꾸역꾸역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같으면 회사 근처에서 자고 가자고 먼저 꼬셨을 강무혁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틀 간격으로 쏟아진 눈에 산의 동물들도 거의 고립이나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먹이가 부족한 겨울에 눈까지 내려 작은 풀조차도 찾기 힘들었으니 사슴, 고라니, 청설모와 같은 동물들은 더욱 힘들어졌을 거란 판단에 얼른 돌아가 산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서율도 동의했다. 그리고 꽉 막힌 도로 위에 혼자가 아닌 둘이라 지루한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들 먹이 찾기 힘들겠죠?”

“그렇겠지.”

따라가고 싶다고 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한 최서율이 조금 튀어나온 입술을 옴쭉거리며 강무혁이 들고 갈 먹이 꾸러미를 만들고 있었다. 거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열심히 손을 움직이는 작은 손을 잡아 한참 만지작거린 강무혁이 뚱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던 눈과 마주했다.

“왜요?”

손을 내어 준 최서율의 이마로 손이 닿았다. 그가 열을 가늠하듯 손바닥으로 손등으로 이마며 볼이며 목덜미를 만져보자 어깨를 옆으로 비튼 최서율이 고개를 저었다.

“저 안 아파요.”

“체온이 좀 높아. 오늘은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내일 주말인데 일찍 자서 뭐해요… 자기도 없고….”

“이것만 놔주고 바로 올 거야.”

강무혁이 밤에 산을 둘러보러 가면 돌아오는 시각은 제각각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혼자 잠드는 게 싫어 기다리다가 동이 트는 걸 몇 번이나 생눈으로 마주했던 날도 있었다. 산군 호랑이 반려가 되면 감당해야 할 부분 중에 하나라고 호랑이 어머니가 살짝 귀띔해주기는 했지만 자다가 눈을 떴을 때 그가 없으면 괜스레 기분이 가라앉곤 했다.

“일찍 올게.”

“동트기 전에 오세요….”

“알겠어.”

강무혁이 걱정이 담뿍 담긴 최서율의 눈꼬리를 슬며시 쓸어내리곤 뾰족해진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평소보다 높은 체온을 가늠하듯 양손으로 잡은 작은 얼굴을 주물럭거리다가 다시 뽀뽀하더니 얼른 떨어져 나갔다. 잠시 멍해진 최서율을 대신해 묶이다가 만 보자기를 마저 매듭지었다.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이걸 어떻게 다 혼자 옮겨요….”

“몇 번 왔다 갔다가 거리고, 다음에 또 가면 되지.”

곰 아주머니가 농산물 직판장에서 나온 자투리 채소를 가져다 놓았다. 서너 포대 되는 양을 모두 나누고, 여름과 가을에 모아 둔 열매들도 듬뿍듬뿍 담았다. 본래 산군 호랑이가 산의 동물들 먹이활동까지 관여하지는 않지만, 자연재해와 같은 상황에서는 최소한의 도움을 주는 게 미덕이었다. 오늘 밤은 강무혁뿐만 아니라 강무혁의 집안 모든 산군 호랑이와 전국의 다른 집안 산군 호랑이가 너나 할 것 없이 바빠질 예정이었다.

얇은 카디건 하나만 걸치고 따라나서려는 최서율을 제지하려다가 눈꼬리가 처지는 걸 보곤 어쩔 수 없이 커다란 패딩을 입혀주었다. 산과 바로 통하는 뒷문의 오솔길은 이미 눈에 파묻혀 어디가 길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미리 어닝을 쳐둔 부분만 겨우 발을 디딜 수 있을 정도였다.

꾸러미가 꽤 무거워 애를 먹었다. 강무혁과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꽤 힘을 잘 쓰는 최서율도 제가 너무 신나게 담아 무거워진 꾸러미를 들고 끙끙거렸다.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완전히 토라질 것 같아 말하지 않은 강무혁이 최서율보다 더 빠르게 몇 개의 꾸러미를 휙휙 옮겼다.

“남은 건 내가 들고 나갈게.”

“네.”

최서율이 들고 있던 꾸러미를 뒷문 앞에 내려놓았다. 곧바로 보이는 산과 이어진 길 끝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하나는 꿀꺽 집어삼킬 것만 같은 어둠이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저 길로 자주 드나드는 강무혁은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으나 최서율은 덜컥 겁이 났다.

새까만 어둠에 심장이 잔뜩 쪼그라들었는데 별안간 들리는 크르릉. 호랑이의 울음소리에 어깨를 펄떡거렸다. 푹신하게 쌓인 눈 위에서 허둥거린 최서율이 나무로 만들어진 뒷문을 붙잡고 후. 후.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내리고 있는 눈송이가 하얀 손등에 닿아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

호랑이가 입에 물고 온 마지막 꾸러미를 바닥에 툭 내려놓더니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이 너무… 캄캄해요. 진짜 조심하셔야 해요.”

얼른 호랑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은 최서율이 겨울이 되며 더욱 빼곡하고 풍성해진 털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호랑이의 곧은 눈빛, 뜨거운 숨결. 그에게서 피어오르는 강한 맹수의 냄새에 순식간에 정신이 팔린 듯 저도 모르게 한참 손을 꿈지럭거리던 최서율이 새까만 코에 제 코를 맞대고 살살 비벼댔다.

“다녀오세요.”

까슬까슬한 혀가 볼을 간질이듯 쓱, 훑어 올렸다. 앗. 하며 한쪽 눈을 찡그린 최서율이 그제야 심각했던 표정을 지우며 웃었다. 호랑이에게서 한걸음 물러나자 제일 큰 꾸러미를 입에 문 그가 깊은 발자국을 만들며 눈밭 너머로 사라져갔다. 최서율은 허공에 부서지는 하얀 입김 사이로 호랑이의 꼬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눈을 헤치며 산속을 뛰어다닌 호랑이가 다른 때 같으면 정상까지 올라 시간을 보냈겠지만, 발길을 돌려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에 느낀 최서율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호랑이가 뒷문을 넘기 무섭게 매끈한 사람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차갑다 못해 매서운 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맨몸으로 마당을 밟은 그가 집안과 연결된 문에 걸어둔 가운을 걸쳤다. 매듭지지 않은 가운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이내 다급한 발걸음이 단숨에 침실에 닿았다.

“서율아.”

달큼한 토끼의 냄새가 곳곳에 고여있었다. 흐트러진 이불만 남은 침대를 확인하곤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찾듯 토끼의 냄새를 찾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겁 많은 토끼가 제 몸의 변화를 느끼기 무섭게 몸을 숨겼을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괜찮아. 서율아.”

욕실과 드레스룸으로 이어지는 곳까지 다가간 강무혁이 짙게 피어오르는 향긋한 냄새에 미간을 구겼다. 다른 종, 그것도 초식동물인 토끼의 발정기가 제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너무 얕잡아 봤다. 단숨에 성욕이 차올랐다. 성욕과 비슷한 식욕도 일었다. 오감이 예민해지고 입안에 군침이 돌자 혓바늘이 돋았다. 방금까지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지라 숨소리도 거칠었다.

강무혁이 동물적인 감각으로 냄새를 쫓았다. 후각이 발달 된 호랑이라서 이럴 때는 더없이 좋았다. 드레스룸 가장 안쪽을 향해 걸을수록 냄새가 짙어졌다. 아랫배가 뻐근하게 당기고 전에 없이 뜨거운 열기가 등줄기를 달궜다.

“끼잉….”

옷걸이에 단정하게 매달린 옷가지 아래로 하얀 발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서율아.”

“…흐, 부, 부사장, 니임….”

습관처럼 부르는 부사장님이라는 호칭을 버리지 못한 최서율이 달뜬 목소리로 앓았다. 가냘프고 애처로운 목소리에도 아랫도리가 불끈거리며 반응했다. 손바닥으로 발등을 덮어 토닥인 강무혁이 토끼가 놀라지 않도록 느리게 발목을 감싸 쥐고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전에 없이 후끈거리는 몸의 열기를 이기기 힘들었지만, 겁이 많은 토끼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오늘 밤의 마지막 배려나 마찬가지였었기에 인내심을 끌어모았다. 이내 진정한 듯 다리에 힘이 풀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잡아당겼다.

울긋불긋하게 물든 하얀 나신을 드러내며 주르륵 끌려 나온 최서율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추며 늘어졌다.

딱 보아도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용을 쓴 티가 났다. 매번 꼭꼭 걸어 잠가 입고 있던 잠옷도 속옷도 모두 벗어 던진 채였고, 미끈한 체액으로 축축해진 아랫도리가 필사적이었던 노력을 증명하듯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파, 요… 아파….”

“어디가 아파.”

“고추가….”

낮게 웃는 소리에 손가락 사이로 강무혁을 확인한 최서율이 이미 이성이 반쯤 날아간 듯 몽롱해진 눈으로 울상지었다. 얼굴이 벌그죽죽했다. 평소보다 더욱 예민하게 호랑이굴에 밴 냄새를 감지했을 테니 겁을 먹은 것도 이해는 갔다. 단지 지금 남아 있는 이성마저도 휘발되기 일보 직전인 건 토끼뿐만이 아니라는 게 더 큰 문제였다.

크르릉. 굵직한 목울대를 긁은 짐승의 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다리를 바르르 떤 최서율이 힘이 들어가지 않아 나풀거리는 손으로 제 아랫도리를 가렸다. 한참 늦은 감이 있는 보잘것없는 몸짓이라 더욱 구미가 당겼다. 피식. 작게 웃은 강무혁이 제 아래를 붙잡고 몸을 웅크리는 다리를 잡아 벌리며 더 가까이 당겼다.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을 타고 내려온 등에서 뽀드득 살이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몸을 밀어 넣는 강무혁의 어깨와 팔을 다급하게 잡아 쥐며 당겼다.

“이상, 해요… 이거, 좀….”

커다란 눈에 두려움과 흥분이 가득 차 있었다. 어릴 적 이후로는 발정기를 처음 경험하는 수인이라면 모두 느낄 법한 감정이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흥분과 몸을 가로지르는 쾌감에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기와 사정을 반복하는 괴로움까지. 제가 없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혼자 모든 걸 감당하려니 얼마나 겁이 났을까. 마지막 남은 이성의 틈으로 측은함이 밀려들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해줄 수 있는 모든 말을 동원해 최서율을 달랬다. 무섭고, 아프고, 벌써 힘들다는 징징거림까지도 다 받아주던 강무혁이 빨리 어떻게 좀 해달란 말에 참지 못하고 입술을 겹쳤다.

축축하게 젖은 입술을 벌리기 무섭게 혀가 마중을 나왔다. 작고 곰살맞은 혀를 잡아끌어 게걸스럽게 빨아당기자 품에 안긴 몸이 맨살을 비비적거리며 달라 붙어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가 뇌를 녹여 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지경이 되자 기다란 혀가 목구멍까지 밀려 들어갔다. 숨이 틀어막힌 최서율의 둥그스름한 눈꼬리가 잘게 경련했다.

단단한 팔로 몸을 옭아매고 열기를 앗아가듯 쾌감을 선사하는 뾰족한 혓바늘마저 달콤했다. 생채기 난 여린 살을 덧그리는 부드러운 혀끝을 따라 바삐 숨을 들이 삼켰다. 제가 가진 모든 걸 주고, 그의 모든 걸 가지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벌컥 뒤집히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한 최서율이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강무혁을 잡아끌었다.

“하응, 으… 읏.”

수치심도 잊은 최서율이 허공에 허리를 띄운 채 제 아래를 단단한 허벅지에 비비적거렸다. 손을 아래로 내린 강무혁이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잡아 벌리자 진득한 체액이 입구를 비집고 울컥 흘러내렸다. 강무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미끈한 체액을 가늠하듯 엉덩이 사이를 문지르자 품에 갇혀있던 최서율의 등허리로 바짝바짝 힘이 들어갔다. 보일러가 돌아가 뜨뜻해진 대리석 바닥에 땀에 밴 살갗이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쩍쩍 젖은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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