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무거운 침묵을 견디지 못한 최서현이 추운 날씨와 맞지 않게 얼음이 가득 담긴 커피잔을 쾅. 내려놓았다. 강무혁과 최서율 그리고 윤 비서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너는 네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성질부터 내지?”
“내가 지금 성질 안 나게 생겼어? 사람 불러 놓고 이게 뭐 하는 거야? 평생 비밀로 하려고 한 것도 아니야. 아직 서로 알아가는 단계라고 하는데 죄지은 사람처럼 앉혀 놓고 심각하게 이러고 있을 일이야, 이게?”
최서율이 이마를 짚었다. 두 사람이 좋은 감정을 가지고 만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가족들에게 제대로 말하지도 않고 서울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냈다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서울에 사는 제게는 사실대로 말해도 되지 않았을까. 갑자기 오빠라는 사명감이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누구랑 뭘 하는지는 말했어야 할 거 아니야. 아버지가 오죽 걱정이 됐으면 이 사람한테 연락을 했겠어?”
“솔직하게 말했으면? 내가 여기까지 혼자 올 수 있었겠어? 오빠는 오빠 마음대로 살아 놓고 왜 나는 고작 연애하나 해본다고 하는데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몰아붙이려고 해?”
“야 최서현.”
“왜! 뭐!”
평소에는 순하기 짝이 없던 토끼들이 서로를 향해 아르르 거렸다. 감정이 격해지자 강무혁이 얼른 최서율의 어깨를 잡아 토닥였다. 윤 비서도 최서현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씩씩거리는 두 토끼가 조금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던 강무혁이 열을 받아서 그런지 붉어진 최서율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우리 토끼 쓰러지겠네. 진정 좀 해봐. 얘기는 더 들어봐야지.”
“두 사람이 만나는 걸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쟤 말하는 본새가 너무 짜증 나잖아요.”
어쩔 수 없이 가족 앞에서는 가장 깊숙이 내재한 성격까지 다 나오는 모양인지 최서율이 드물게 극도로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요지는 이해했지만 이렇게 화낼 일도 아니라고 판단한 강무혁이 그래그래. 최서율에게 적당히 맞장구치며 씩씩거리는 등허리를 살살 두드렸다.
“최 대리님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어르신들께 제일 먼저 말씀드리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만, 저희 둘이 관계를 정의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최대한 빨리 최 대리님께도 알리려고 했습니다.”
윤 비서가 움찔움찔하는 최서현의 손을 눌러 잡고 차분히 말했다. 평소에도 이성적이고 냉철하기까지 한 윤 비서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최서율이 저절로 튀어나오려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그렇다고 비죽거리는 입을 다 감출 수가 없어서 주둥이가 앞으로 툭 튀어나온 모양새가 되었는데 최서현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 함 들어갈 때, 그날 만난 건가?”
“네.”
“다들 고주망태가 돼서 떠날 때까지 정신이 없었는데 언제 그렇게 된 건지. 신기하네.”
어제 강무혁의 제안을 듣고 곧바로 최서현에게 알린 윤성연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뾰족하게 구는 최서현을 최대한 둥글게 구슬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여기까지 따라와 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제가 곤란하지 않도록, 주변 사람을 걱정시키지 않고 앞으로도 이 만남을 이어가고자 하는 그녀의 노력이 윤 비서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 * *
함이 들어가던 날, 유독 윤 비서에게만 까칠하게 굴던 최서현은 처음에는 배가 고픈데 함진아비가 늑장을 부리니 화가 나서였다지만, 말끔하게 세수한 늑대의 얼굴과 마주하고는 수줍게 볼을 붉혔다. 윤 비서는 그 얼굴이 자꾸만 잔상처럼 눈앞에 남아 식사를 하는 중에도 본격적으로 술상이 차려진 후에도 자꾸만 눈길이 최서현을 향해 움직였다.
어르신들이 자리를 비우고, 아기들은 모두 잠든 늦은 밤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 토끼 형제들이 생각보다 호탕하고, 술도 잘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더욱 흥미가 돋았다. 강무혁 옆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최서율 대리의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지원실 식구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 나중에 보여주려는 심산이었다.
토끼 형제들과 웃고 떠들며 술잔을 기울였다. 최서현도 반달곰과 다른 호랑이 수인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 와중에도 종종 눈이 마주쳤다. 최서현이 윤 비서를 보고 있어서 그랬던 건지, 윤 비서가 최서현을 보고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묘주를 두 항아리 비웠을 즘, 패잔병처럼 늘어진 식구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강무혁이 헛소리를 읊어대는 반달곰 친구를 손님방으로 옮겨 놓고, 그 옆으로 호랑이 친구도 눕혀 놓기 무섭게 최서율과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럴 인간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 북새통에도 그래야 하나 싶어 고개가 설설 저어졌다.
‘들어가서 쉬세요.’
비슷하게 마신 것 같은데 멀쩡한 얼굴을 한 최서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최서율과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묘하게 다른 그녀의 얼굴이 취한 와중에도 가슴에 쿡쿡 박혀 들었다. 엉망이 된 대청마루를 대충 정리하고 나머지는 아침에 형제들과 치우겠다고 말한 최서현이 윤 비서가 움직이길 기다리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어깨선을 겨우 넘은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선선한 가을바람에 살랑거렸다. 이전의 연애는 어땠더라….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떻게 말을 걸고, 어떻게 시작했더라….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리자 몸이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렸다.
‘많이 취하셨어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아닌 거 같은데….’
미심쩍다는 듯이 저를 살펴보는 최서현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크릉. 맹수의 소리를 감추지 못한 윤 비서가 자기가 더 놀라 허둥거렸다. 놀란 토끼의 눈이 동그래졌다. 목을 가다듬던 윤 비서가 백열등 아래, 반질반질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했다. 저렇게 쳐다보면 없던 감정도 생길 것 같았다. 이미 가슴께가 간질거리는데 제대로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에 얼른 눈을 피해 대청마루를 나섰다.
다음 날,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형들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왔다. 출발하는 강무혁의 친구들에게 간식거리며, 물을 챙겨주던 토끼 여사가 또 오라며 윤 비서의 손을 꼭 잡고 토닥였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이런 정에 대해 그립다고도 생각해 보지 못하고 살았던 윤 비서의 가슴이 덜컥 흔들렸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최서현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또 봬요.’
맞잡은 손바닥 사이에서 매우 익숙한 종이의 질감이 느껴졌다. 눈을 마주하자 최서현이 방긋 웃었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사이에 클로즈업되던 동그스름하고 하얀 얼굴. 풀벌레 소리. 선선해진 바람, 짙은 풀 내음. 서울에 돌아와서도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에 참지 못하고 밤잠을 몇 번이나 설친 후에야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를 펼 수 있었다.
‘하도 연락이 안 와서 저만 김칫국 마신 줄 알았어요.’
‘그런 게 아니라….’
마음은 힘껏 내달리는데 나이 차이가 마음에 걸렸다. 7살이나 차이가 나는 여동생 같은 그녀를 이성으로 받아들이려니 양심이 아우성을 쳐댔다. 조심스럽게 꺼내놓은 고민에 최서현은 오히려 코웃음 쳤다. 나이 차이 크게 나보이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농담에도 같이 웃지 못한 윤 비서는 한동안 매우 심각해진 채로 지내야 했다.
양심은 그렇게 정신 차리라며 스스로 다그쳤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한번 시작한 마음을 다잡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제 마음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토끼 마을 근처 도시까지 내려갔다. 가르치는 아이들의 재료를 사겠다고 핑계를 댄 그녀를 그곳에서 다시 만났다. 저를 보며 환하게 웃는 토끼의 얼굴에 단단히 먹었던 마음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형부한테는 말했어요?’
‘아직 안 했습니다. 아직 그럴 단계도 아니고….’
‘그럼 어느 단계가 되어야 말해요?’
시작하고 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저질러버렸다. 최서율과 강무혁의 결혼식장에서는 북새통을 틈타 손을 잡았다. 비상계단으로 끌려 들어간 건 계획에 없는 일이었지만 사람들 눈을 피해 몰래 나누는 키스는 그만큼 달콤하고, 짜릿했다.
최서현이 큰마음을 먹고 서울에 올라왔다. 결혼식 때문에 올라와서 구경했던 서울을 보고 어서 토끼 마을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말에 며칠이라도 올라와서 지내보고 그런 말을 하라고 웃은 늑대를 골탕 먹일 생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남짓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혼자 살던 집의 작은 방을 내어주었다가 마음이 불편해 제 침실을 내어준 윤 비서였다. 윤 비서가 출근하면 최서현은 서울을 구경했다. 정말 관광객의 마음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서울로 거주지를 옮긴 친구도 오랜만에 만났고, 큰 쇼핑몰도 가고 유명한 시내도 마구 돌아다녔다. 고궁이며 박물관도 다녀오고 한강에서 치킨도 한 마리 뜯었다.
저녁에는 퇴근한 윤 비서와 외식하고, 영화도 보며 데이트도 했다. 최서현은 그 과정을 통해 서울에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왜 다섯째 오빠가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지냈는지도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문제의 ‘그날’. 주말까지만 지내고 내려가야 한다는 최서현과 주말 데이트를 위해 일찍 일어나 준비하다가 받은 전화는 지방 리조트에 문제가 생겼다는 연락이었다. 자연스럽게 일터로 끌려 나가야 하는 윤 비서를 보며 기분이 완전히 구겨진 최서현이 연신 툴툴거렸다.
사장도 있고 회장도 있는데 왜 부사장이 가야 하느냐며 팔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이 귀여워 웃어버렸다. 다음에 한 번 더 오라는 말로 잔뜩 뿔난 최서현을 달랬다. 꼭 다시 올 거라며 매달리는 토끼가 귀여워 가슴 한쪽이 다 녹아내렸다.
제 오빠를 만나고 가겠다는 말에 강무혁의 집 근처에서 내려주었다. 똑소리 나도록 꼼꼼한 최서현은 이미 가보고 싶던 카페도 검색해 둔 모양이었다. 연락하겠다는 인사로 헤어지는 마음이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그날’ 윤 비서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였다.
* * *
“하….”
“오빠. 내가 좋다는데 왜 오빠가 죽을상을 하고 그래.”
“그래, 네 말이 맞아. 네가 좋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그냥 축하한다고 해주면 안 돼?”
막상 그 말은 쉽게 나오질 않는 최서율이었다. 평소에 너무도 좋은 사람은 윤 비서님과 아끼는 여동생이 만난다는데 당연히 축하할 일이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져서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집 안에 맹수 사위가 둘이나 되는 거였다. 마치 모든 게 제 탓 같이 느껴져서 기분이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최서현은 제 오빠가 왜 그러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강무혁과 윤 비서에게 눈짓하자 눈치 빠른 맹수들이 자리를 비워주었다. 강무혁이 일어나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던 최서율은 할 말이 있다는 듯 바라보는 최서현을 보고 우물거렸다.
“오빠 걱정하지 않게 잘할게. 당장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일단 만나는 봐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거 아니야. 지켜만 봐줘. 응? 이제 짜증도 안 내고 오빠한테도 잘할 테니까….”
“다 좋은데… 서현아….”
“응?”
“나이 차이가 너무 나지 않니. 7살이었나….”
목소리를 확 줄인 최서율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속삭였다.
“서너 살 정도 차이 나는 정도로 보이지 않아?”
같이 목소리를 죽인 최서현이 속삭였다.
“아버지가 아시면 가만있지 않을 거 같은데?”
“내 말은 코로 들었어? 당장 결혼하는 거 아니라고…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최서현이 제 앞가림도 못할 정도로 바보도 아니고 세상 물정 모를 만큼 순진하지도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가 처음 서울에 와서 전전긍긍한 것에 비하면 최서현은 아주 탄탄대로를 밟고 있으니 그것도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걱정거리가 다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제 동생을 믿기로 했다.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평소에 오빠 노릇도 제대로 하지 않던 오빠가 갑자기 생긴 의무감에 무조건 가르치려 드는 것보단 축복하고, 지지한다고 해주는 게 더 긍정적일 거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께는 당분간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오빠도 그렇게 알아줘. 말해야 할 때. 내가 직접 말할게.”
“…그래, 그렇게 해.”
마음에 다 차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한결 편해진 동생의 얼굴을 보니 그제야 조금 웃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편해진 얼굴을 보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반응하는 강무혁과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윤 비서와 마주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부모님께 알리는 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이것 또한 최서현의 의견에 따라 주기로 했다. 이왕지사 마음 편하게 해주는 김에 뭐든지 다 처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다는 강무혁의 말 한마디 덕분이었다.
어쩌다가 저렇게 성경 괴팍한 애한테 코가 꿰였냐고 묻는 말에 최서현이 한 번 더 성질을 냈다. 그런 최서현의 손을 잡은 윤 비서가 그 모습까지 다 좋다고 말해 최서율을 박장대소하게 했다. 짚신도 짝이 있다더니 옛말이 틀린 게 없다는 걸 실감했다.
강무혁은 윤 비서의 말 하나하나에 공감했다. 제가 토끼와 사랑에 빠지던 순간을 그대로 복습하고 있는 가장 친한 동생이자, 유능한 비서인 윤성연이 자랑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내 마음 좀 알겠냐?”
“네, 아주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회사에서는 조금 자제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건 생각 좀 해볼게.”
최서율이 민망함에 볼을 긁적거렸다.
비록 만남의 시작은 무겁고, 차가웠지만 마무리는 훈훈하게 해낸 두 커플이 다음을 기약했다. 서울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 오라고 말하는 강무혁의 두 손을 꼭 붙잡은 최서현이 사실 처음에는 형부가 호랑이라는 생각에 너무 어색하고 이상하고 조금 싫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형부처럼 돈 많고 잘생기고 착하고 멋진 사람이라면 그런 형부가 다섯 트럭은 있어도 상관없겠다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았다.
형부가 다섯 트럭이면 어떡하냐고 허허 웃어댄 강무혁이 최서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곧바로 윤 비서의 손에 제지당했지만 어쨌든 당차고 밝은 최서현 덕분에 웃으며 인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을 배웅하고 돌아선 최서율의 콧잔등에 하얀 눈송이 하나가 내려앉았다.
“어? 눈 와요.”
“그러게. 눈 온다는 소식이 있었나?”
차가운 감촉에 제 코를 문지른 최서율이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입김이 부서지고 그 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하늘에서 커다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밤에 산에 좀 다녀와야겠다.”
“눈 오는데… 꼭 오늘 가야 해요?”
“눈이 오니까 더 신경 써서 둘러봐야지.”
야행성인 호랑이가 밤에 산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눈이 쌓인 산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 때문에 걱정되었다. 아래로 뚝 떨어진 최서율의 눈썹 위에 잘게 입 맞춘 강무혁이 벌어진 패딩 앞섬을 여며주었다.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펼쳐 그 위로 떨어지는 눈을 보던 최서율의 손 위로 두툼한 손이 얹어졌다.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마주 잡은 최서율이 그가 이끄는 대로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집안 공기 때문인지, 갑자기 깊게 입 맞춰오는 강무혁 때문인지 볼이 터질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겨울바람에 잔뜩 움츠린 색바랜 잔디 위로 첫눈이 소복소복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