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51.
3박 4일의 일정으로 떠났던 강무혁이 근 엿새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은 동생 덕분에 그럭저럭 지냈지만, 그가 없이 출퇴근하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았다. 혼자 잠드는 커다란 침대도 불편했고, 차고 넘칠 만큼 큰 집도 불안했다. 호랑이굴에 덩그러니 남겨진 토끼가 오매불망 호랑이가 오기만을 기다렸으니 이제는 그 마음을 마음껏 표출해낼 때였다.
차가운 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문 앞까지 나가 서성거리던 최서율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수행비서인 이주성 비서가 운전하는 차가 대문 앞에 다다랐다.
매일 회사에서 보는 사이라고 생각하면 출장길에 동행한 이 비서도, 윤 비서도 모두 오랜만에 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괜히 눈치가 보여 강무혁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이 비서와 윤 비서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하자 강무혁이 으르렁거렸다. 피곤이 더해진 호랑이가 매우 예민해진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어 얼른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광경에 헛기침하며 이만 가보겠다고 인사하는 그들에게 대충 눈짓한 강무혁이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최서율을 반쯤 안아 들고 대문으로 쑥 들어갔다.
입 맞추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키스가 깊어질 즘, 최서율이 먼저 뒤로 물러났다. 얼른 씻으라는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무혁이 솔솔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방향을 따라 젖은 머리를 말리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직접 만든 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지만, 저를 위해 열심히 상을 차리고 있는 작은 뒷모습을 보던 강무혁이 소리 없이 다가가 뒤에서 어깨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서 놀란 토끼가 파닥거리자 집에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처제는 잘 있다가 갔어?”
“네, 하룻밤 자고 바로 갔어요.”
“왜 온 건지 말은 했고?”
“아니요. 그냥 누구 만나러 와서 재밌게 놀았다고만 하고 다른 말은 안 했어요.”
다 큰, 이제 서른을 코앞에 둔 동생이 누구를 만나 무얼 하는지 캐묻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물어는 봤지만, 순순히 대답해주지도 않았을뿐더러 뭘 그렇게 묻냐며 괜한 짜증만 되받아야 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그냥 놀러 간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최서율은 어머니의 반응에서 모든 것이 정말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놀러 간다며 외지로 나가는 일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이제는 가고 싶을 땐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부모님도 허락하셨는데 제가 뭐라고 하겠어요. 제 말을 잘 듣는 애도 아니고….”
“똑 부러지고, 당차고, 배포도 큰 처제를 왜 걱정해. 원한다면 서울에서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으니까 말만 하라고 해.”
“어휴, 안 그래도 카페 보면서 돈 빌려달라고 해서 식겁했어요.”
“카페 하고 싶대?”
“그냥 하는 말이에요.”
강무혁이 당장이라도 카페를 차려줄 것처럼 관심 보이는 게 불안하여 얼른 말을 잘라버리고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를 식탁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거절 없이 단번에 냄비를 식탁으로 옮겨 놓은 강무혁의 손을 잡아 쥐었다.
오랜만에 찬거리로 가득 채운 식탁 앞에 서서 그의 손을 바짝 끌어당긴 최서율이 커다랗고, 까슬거리는 손을 제 볼에 비벼댔다. 저도 모르게 낑낑거리는 소리가 목울대에서 징징 울렸다. 뭐가 힘들어서는 아니고 더 닿고 싶은 마음을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고 앓으려니 자연스럽게 나오는 소리였다.
“그렇게 반가워?”
“자기는 안 반가워요? 저는 너무너무… 너무 보고 싶었는데.”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귀엽게 구는 최서율을 바라보던 강무혁이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바로 닿아오는 시선을 마주하며 최서율이 눈을 깜빡였다.
“나도 보고 싶었지. 그런데 나 없는 동안 라면만 먹었을 거 생각하면 일단 밥부터 먹는 게 좋겠는데?”
“라면만 먹지 않았어요!”
“짜장라면, 비빔라면도 라면이라고 했다.”
뺨에 닿은 손을 안으로 접어 말랑거리는 살을 잡아 쥔 강무혁이 최서율의 콧등에 입 맞췄다. 아야. 아프지도 않으면서 괜히 엄살을 부린 최서율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가 펴내며 다시 동동거렸다.
“진짜예요. 아주머니가 해주신 반찬으로 꼬박꼬박 밥 먹었어요.”
“그래?”
의자에 앉히는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으면서도 조잘조잘. 며칠 동안 뭘 먹었고, 어떻게 해서 먹었는지 설명했다. 구구절절 늘어놓는 말에도 일일이 대답해준 강무혁이 라면을 모아 놓은 찬장을 열었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강무혁의 눈동자를 따라 괜히 제 눈도 몇 번 굴린 최서율이 마치 숙제를 검사받듯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칭찬을 기대하는 눈빛을 마구 쏘아댔다.
“두 개 먹었네?”
“두 개면 완전히 적게 먹은 거 아시죠?”
찬장 문을 닫고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강무혁을 바라보는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 잘했어. 칭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최서율이 뿌듯한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강무혁이 집을 비울 때면 곰 아주머니께 식사 준비를 더욱 신경 써 달라고 당부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혼자 있어도 끼니를 잘 챙겨 먹으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의 결과를 칭찬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곰 아주머니의 밥을 야무지게 싹싹 비운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설거지했다. 혼자 살았던 기간이 길어 둘 다 집안일에는 익숙한 편이라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깔끔한 성격답게 주방의 물기를 정리하는 강무혁을 뒤로 하고 생강차 두 잔을 준비해 거실로 나온 최서율이 소파에 기대앉으며 TV를 켰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몸이 자주 으슬으슬했는데 이럴 때는 생강차가 딱 맞았다. 집이 아닌 곳에서 며칠 지낸 강무혁이 몸을 따뜻하게 풀고 밤에 편하게 잠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준비해 놓은 차였다.
발정기 억제제를 먹지 않은 지 일주일이 넘어갔다. 몸에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지만 언제 험한 꼴을 보일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자꾸만 쌓였다. 겨우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심신이 조금 지쳤다고나 할까…. 최서율이 강무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기는 우리한테 아기가 생긴다면 호랑이였으면 좋겠어요?”
미지근하게 식은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신 강무혁이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종이 무슨 상관이야. 우리 아기라는 게 중요하지.”
최서율은 갑자기 편안해진 마음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임신한 것도 아닌데 벌써 종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누구도 제게 호랑이를 낳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는데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부끄러웠다.
“나는 장손도 아니고, 우리 가문에 내 뒤를 이어 산을 지켜줄 호랑이 조카들이 수두룩해. 걱정할 필요도 없고, 신경 쓸 필요도 없어.”
최서율의 눈동자와 얼굴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챈 강무혁이 소리 없이 웃었다. 호랑이랑 살면서 많이 용감해진 제 토끼는 생각지도 못한 때에 겁을 내곤 했다. 제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을 걸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걱정하고 신경 써야 하는 일은 내가 다 할게. 진화한 수컷이 어떻게 임신기간을 보내야 하고, 출산을 준비하는지. 내가 더 공부할게. 너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나한테 하나씩 가르쳐 주면 돼.”
묘하게 굳었던 얼굴이 서서히 풀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자꾸 웃음이 샜다. 작은 머리통에 저도 모르게 가득 차 있었을 쓸데없는 걱정들이 하나같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강무혁이 최서율을 번쩍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모로 앉아 강무혁의 몸에 기댄 최서율이 괜히 빨개지는 얼굴을 그의 목덜미로 감췄다. 그러고도 훤히 드러난 제 귓가가 뜨거워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임신이나 출산에 관련된 얘기는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부부 사이에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좀처럼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주제였다. 아무래도 발정기 억제제를 먹지 않은 부작용 같다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물씬 풍겨오는 맹수의 짙은 내음이 익숙했다.
가슴이 짜르르 울려 콧방울이 구겨지도록 맨살에 비벼댔다. 제가 선택하고, 이루어낸 사랑이 이토록 단단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을 때마다 마치 처음 그때처럼 감정이 솟구쳐 가슴을 그득하게 채웠다. 발가락 사이사이가 간지러워 꼼지락꼼지락 열심히도 움직여댔다.
* * *
“윤 비서님 오늘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십니다.”
“아, 그런데 요즘 윤 비서님 연애하십니까? 오늘만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요.”
복사기 앞에 서 있던 윤 비서가 큼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박 부장과 유 대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갔고, 지원실 사원들과 고 비서, 이 비서가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미 유부남인 박 부장은 남의 연애에 매우 흥미를 느꼈다. 자기는 이제 느낄 수 없는 종류의 설렘이라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런 거 아닙니다.”
“에이, 뭘 감추고 그러세요. 우리 사이에.”
연애 상대가 자주 바뀌는 유 대리는 강무혁과 최서율이 결혼할 때, 가장 부러워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최서율에게 하루가 멀다고 부사장님과의 연애는 어떤 느낌이냐고 묻곤 했다. 이제는 결혼 생활은 어떻냐고 자주 물어봤다. 그 나이 또래의 관심사가 연애와 결혼이라고는 하지만 정도가 지나친 것 같아 선 과장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했을 정도였다.
“윤 비서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에 이거 좀 다시 검토하는 게 좋겠는데?”
눈을 빛내며 윤 비서를 복사기로 밀어붙이던 두 사람이 갑자기 등장한 부사장을 보곤 화들짝 놀라 서너 걸음 물러났다. 코너로 몰렸던 윤 비서가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강무혁이 내민 서류를 받아 들었다.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굉장히 멋쩍어하는 박 부장과 유 대리에게 대충 윙크한 윤 비서가 강무혁을 따라 부사장실로 모습을 감췄다. 탄식을 터트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큭큭 거리던 윤 비서가 부사장실 한가운데에서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강무혁을 보곤 목을 가다듬었다.
“이런 건 혼자서도 충분히 보실 수 있으시면서 꼭 저를 찾으십니까.”
“윤 비서가 하도 곤란해 보여서 도와준 거지. 나한테 고마워하라고.”
“네, 네. 감사합니다.”
받았던 서류를 다시 강무혁의 책상에 올려놓은 윤 비서가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강무혁을 향해 눈썹을 세웠다가 내렸다.
“다른 하실 말씀이라도?”
“있지.”
“…….”
“우리 처제랑 일주일 동안 뭐 했는지?”
“…….”
“우리 처제가 어제 또 서울에 왔던데, 윤 비서 집 근처에는 왜 있었는지.”
“…….”
“하고 싶은 말이라기보단, 듣고 싶은 말이 많네? 성연아.”
윤 비서가 굉장히 난처해진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이마를 긁적였다.
“제 뒷조사하십니까?”
“네가 아니지. 우리 처제지.”
“아무리 처제라고 해도 뒷조사는 좀….”
“토끼 어르신께서 직접 부탁하셔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네.”
어깨를 으쓱거린 강무혁이 능구렁이를 백 마리 삶아 먹은 것처럼 느른한 표정을 지으며 윤 비서에게 다가갔다. 심히 기분 나쁘다는 듯이 뒷걸음질 티던 윤 비서가 강무혁을 향해 손바닥을 내보이며 그를 제지했다.
“시간이 좀 지나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테니 처제랑 상의해보고 내일 저녁 같이해. 그전까지 어르신께 알리지 않을 테니까.”
“하….”
“내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비밀연애가 가당키나 하겠냐.”
최서현과 연애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결론까지 다 내려버린 강무혁이 윤 비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토끼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최서현의 행적을 조사했다. 갑자기 서울에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몇 주 상간으로 서울까지 떠나는 딸이 걱정되는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최서율도 모르게 조용히 일을 진행 시켰다. 그 과정에 윤성연의 등장은 강무혁에게도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보다 깊은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곧이곧대로 토끼 아버지께 보고하기도, 최서율에게 끝까지 비밀로 할 자신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이 친구와 만나더라. 라고 거짓말하면 그만이지만 또 그러고는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늑대와 한 가족이 될지도 모른다는 강한 예감이 강무혁을 잡아끌었다.
아버지의 코앞은 잠시 가릴 수 있었지만 최서율에게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딱 하루의 말미를 주고,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 당황스러움에 입만 벙긋거리는 윤성연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딱히 나쁜 감정이 쌓인 것도 아닌데 저자가 곤란해하는 걸 보니 재밌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와 찐한 우정을 나누어 가진 진짜 친구가 확실했다.
“최서율 대리님께는….”
“아직 말 안 했어. 두 사람이 직접 말한다고 하면 기다릴 거고, 아니라고 하면 내가 내일쯤 말하게 되겠지.”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추측해보자면 아마도 토끼 마을에 함을 팔러 갔던 때에 처음 만났으리라. 어느 정도는 예상되었지만, 자세한 건 두 사람 입을 통해 직접 들을 작정이었다. 원래 연애란 당사자들 외에는 알 수 없으니 말이다.
“현명한 판단하길 바라. 윤 비서.”
가볍게 인사하고 부사장실을 나선 윤 비서의 표정이 매우 심각하여 직속 후배인 고 비서만 남은 일과를 잔뜩 긴장한 채 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