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50/64)

49.

대청마루에 올라와서 함을 내려놓으려던 윤 비서의 팔을 다시 잡은 최서현이 함은 시루떡 위에 올려 두는 거라고 귀띔했다. 아아. 고개를 끄덕인 윤 비서가 시루의 위치를 확인했다. 홍천에 덮인 시루 위에 함 상자를 내려놓으니 친구들이 저마다 들고 있던 선물꾸러미를 그 주변에 내려놓았다.

“고생했네. 앉으시게나.”

최서율의 아버지와 함께 있던 산군 호랑이 어르신이 허허 웃으며 자리를 잡아주었다. 윤 비서를 비롯한 친구들과 강무혁, 최서율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까지 함께 와준 친구들과 강무혁에게 인사를 마친 최서율의 어머니가 나팔꽃 색의 고운 천으로 감싸인 봉투를 함진아비 윤 비서에게 전달했다. 총각인 윤 비서에게 어떤 덕담이 좋을까 고민하던 토끼 여사는 좋은 배필을 만나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라고 인사했다. 오묘하고 아름다운 색의 비단을 만지작거린 윤 비서가 멋쩍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넙죽 절을 올렸다. 친구들과 강무혁, 최서율. 그리고 토끼 가족의 웃음소리가 대청마루를 가득 채웠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모두 토끼 수인들인 게 신기한지 반달곰과 호랑이, 늑대 수인 윤 비서까지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최서율의 가족들이 함 상자를 열기 위해 비단을 해치는 아버지의 손에 집중했다.

남청색의 두루마기를 입은 토끼 아버지가 정성스럽게 포장된 비단을 풀자 함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일 위의 뚜껑을 열자 가장 먼저 혼서지가 드러났다.

상중하로 근봉(謹封)한 혼서지는 네 귀에 금전지를 단 붉은색 비단에 싸여 있었는데 혼서지를 처음 보는 강무혁 친구들의 시선이 모두 그 위로 모였다. 조심스럽게 혼서지를 들어 아홉 칸으로 접힌 백지를 펼치자 필묵으로 정성껏 써 내려간 위엄있는 글씨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한 아들을 보내주어 감사하다는 맺음까지 읽어내려간 최서율의 아버지가 눈시울을 붉혔다. 아빠 또 저런다며 쑥덕거리는 형제들과 달리 최서율만이 그런 아버지를 따라 훌쩍거렸다.

다시 혼서지를 곱게 접어 제 모양을 갖추어 최서율에게 건넨 아버지가 크흡. 울음을 삼키자 이 양반이 왜 이러냐며 타박한 어머니께서 기다리지 못하고 상자의 속 뚜껑을 마저 열어 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 된 예단과 예물, 오방주머니가 정갈하게 담겨있었다.

남자인 최서율을 위해 차 한 대값은 하는 시계가 패물과 예물을 대신했고, 옷감을 보내는 채단은 두 벌의 계절별 한복이 대신했다. 예나 지금이나 금실이 좋은 부부를 상징하는 기러기 한 쌍은 청색 천에 붉은색으로 자수 놓인 보자기에 싸여 떨어지지 않게 딱 붙어 있었고, 부부의 앞날을 훤히 밝히라는 의미의 거울에는 나비와 꽃이 곱게 수 놓여있었다.

가장 아래에 옥명주 천으로 만들어진 오방주머니에는 금실 좋은 부부가 되라는 뜻의 찹쌀, 액운을 막아주는 팥, 절개와 순결을 지키며 사랑하라는 뜻을 가진 향나무, 자손과 가문의 번창을 바라는 목화씨, 부드러운 성품을 지니라는 뜻의 노란 콩이 들어 있었다.

그 외에도 사돈 부부에게 전하는 질 좋은 비단과 딱 보아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목걸이 귀걸이 세트, 한우 한 마리는 족히 들어갔을 고기 세트, 각종 과일, 유명 떡집에서 맞춤 주문한 떡이 대청마루를 가득 채웠다.

다 열어본 함 상자를 아래로 내린 최서율의 어머니는 최서율이 집에서 즐겨 사용하던 접시를 가져와 시루떡을 먹기 좋게 잘랐다. 한입에 쏙 들어갈 만큼 잘라 강무혁의 입에 넣어주고는 옆에서 아기새처럼 입을 벌리는 제 아들의 입에도 쏙 넣어주었다.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구나….”

“감사합니다. 어머님.”

“시장할 텐데 일단 식사부터 하면서 얘기 나눕시다.”

“그래그래, 그럽시다.”

선물을 구경하느라 웅성거리는 토끼 가족을 진정시킨 산군 호랑이 어르신이 자리를 정돈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토끼 가족들이 순식간에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의 음식을 차려냈다. 강무혁 장가 잘 간다며 껄껄 웃은 반달곰 친구가 최서율의 아버지와 호랑이 어르신이 먼저 한술 뜨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어른들의 입으로 음식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진정한 축제가 시작되었다. 항아리에 담겨 상 바로 옆에 놓인 묘주에 홀려버린 친구 녀석들이 토끼 촌장이 주는 잔을 마다하지 않고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맛이 너무 좋다며 이걸로 사업하고 부추기는 반달곰 친구의 말을 무시한 다른 호랑이 친구가 예쁜 모양으로 부쳐진 전을 입에 넣으며 껄껄 웃었다.

정신없이 시끄러워지는 상을 둘러보던 강무혁이 묘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제 친구들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최서율을 향해 작게 눈짓했다.

최서율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북적거리는 마루를 나서는 최서율을 확인한 강무혁이 뒤이어 슬쩍 눈치를 보며 일어났다. 자기들끼리 떠들고 먹고 마시느라 두 사람이 일어나는 걸 신경 쓰지 않아 다행이었다.

대청마루가 있는 안채를 휘돌아 사랑채로 가는 길목에서 눈을 마주한 두 사람이 겨우 이틀 보지 못했다고 쌓인 그리움을 풀어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 없이 좋았어? 얼굴이 왜 이렇게 폈지?”

“제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밤마다 울면서 잤다고요.”

“거짓말하네.”

자그마한 얼굴을 한 손에 쥐어 잡고 이리저리 문질러보던 강무혁이 주변을 둘러보곤 얼른 입을 맞췄다.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이 아쉬워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간 최서율이 병아리 부리 같은 입술을 앞으로 삐죽삐죽 내밀었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다시 입술이 붙으려던 찰나, 흠흠. 거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린 강무혁의 미간이 와그작. 구겨졌다.

“넌 여기서 뭐 하냐.”

“오징어 냄새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흥이 안 나서 세수 좀 하려고요.”

“아… 윤 비서님, 여기서 씻으시면 돼요.”

얼른 강무혁의 품에서 떨어져나와 뒷마당에 자리한 수돗가로 윤 비서를 안내했다. 하여튼 분위기 깬다고 한마디 하려는 강무혁의 팔을 두드리며 끌어 후다닥 자리를 떴다. 강무혁을 질질 끌고 가는 뒷모습을 보던 윤 비서가 고개를 설설 저었다.

갈수록 팔불출이 되어간다고 생각하니 괜히 재밌었다. 연애해도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결혼까지 가려는 인연이 되려면 저 정도는 콩깍지가 씌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던져 놓고 와이셔츠 소매를 동동 걷어 올렸다. 그냥 씻어서는 냄새가 가시질 않을 거 같아 손에 집히는 비누를 주워드는 순간, 작은 튜브 형태의 클렌징폼이 불쑥 내밀어졌다.

“그거 빨랫비누예요.”

클렌징폼을 내민 최서현은 한복은 진작에 벗어 던졌는지 편한 바지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수돗가에 허리를 숙이고 있는 윤 비서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늑대예요?”

“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최서현이 거품을 내어 세수하는 윤 비서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수돗가 턱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어색하게 몸을 구부렸던 윤 비서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헹궈내고 물기를 털었다. 수건을 따로 챙기지 않아 재킷을 잡아들자 윤 비서의 얼굴 앞에 향긋한 냄새가 나는 수건이 내밀어졌다.

호랑이만큼 매서운 늑대의 눈이 자그마한 토끼에게 힐끗 닿았다. 오래 머물지 못하고 시선을 후다닥 걷어가는 걸 느낀 최서현이 코웃음을 쳤다.

“형부랑은 친구예요?”

“아닙니다.”

“그럼, 동생?”

“비서요.”

“아아.”

그럴 줄은 몰랐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인 최서현이 물기 남은 앞머리를 탁탁 털어대는 윤 비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할 말 있으십니까?”

“아뇨. 아까는 미안했어요. 배는 고픈데, 자꾸 안 온다고 버텨서 짜증이 좀 나서….”

“괜찮습니다. 그런 재미로 하는 거죠.”

최서율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최서현은 동글동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볼이 볼록한 게 한번 찔러보고 싶다는 충동을 가져왔는데 윤 비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상대를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에 그마저도 얼른 털어내 버렸다.

“수건 잘 썼습니다.”

듬성듬성 젖은 수건을 어쩔 수 없이 다시 건네는 찰나, 보드랍고 동그란 손끝에 손이 닿았다. 두근두근, 매일 뛰어대는 심장이 방향을 틀어 생소한 울림을 만들어 냈다. 눈을 둥그렇게 뜬 윤 비서와 시선을 마주한 최서현이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녀의 볼이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여기서 뭐 하고 있냐는 막내 쌍둥이 동생들의 등장이 아니었으면 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계하지 못했을 정도로 숨 막히는 정적이 지속되었다.

후다닥 몸을 돌려 사랑채 안으로 들어가는 최서현을 보지도 못한 윤 비서가 아까부터 계속 뜨거운 귓가를 차갑게 식은 손으로 주물럭거렸다.

* * *

결혼식은 말 그대로 현실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꾸 배가 아팠다. 최서율이 불안해하니 강무혁은 그걸 달래다가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비공개로 소소하게 진행하려고 계획했던 결혼식은 누구보다 크고 성대하게 치러졌다. 범진그룹 차남과 토끼 촌장 다섯째 아들의 결혼식인데 일이 커지는 건 당연했다. 각 가문에서 초대받아 온 친인척만 해도 식장을 빼곡하게 채울 정도였고, 언론에는 비공개로 진행하겠다고 했지만, 토끼 수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호텔 앞에는 대규모 취재진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는 자리였지만 결혼식의 가장 큰 이슈는 최서율의 조카들이었다. 아직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어린 토끼들의 머리에 보송보송한 토끼 귀가 솟아 있었는데 호랑이 측 하객들은 모두 그 모습을 한 번이라도 생눈에 담으려 갖은 노력을 해야 했다.

심지어 범진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큰 회사의 소유주들도 그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토끼 가족들 자리까지 찾아와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 잘 키운 아들 하나 덕분에 기업 총수에게 인사도 받았다며 껄껄거리는 최서율의 아버지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내일 산에 들렀다가 가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결혼식이 진행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고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방에 들어와서야 겨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앉은 최서율이 다리를 들어 올려 종아리를 통통 두드렸다. 거의 몇 시간을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인사만 한 탓에 다리가 욱신거렸다.

“다리가 엄청 아파요. 자기도 여기에 좀 앉아요.”

“이리 내봐. 주물러 줄게.”

“아이, 괜찮아요.”

발목을 잡아 쥐는 손을 밀어낸 최서율이 강무혁의 팔을 잡아끌어 제 옆에 앉히고 같은 모양의 반지가 끼워진 강무혁의 왼손을 주물럭거렸다.

“이제 산에 있는 동물들한테만 알리면 끝이네요.”

“왜 끝이야. 시작이지.”

“아니, 이… 긴… 행사 같은 거요.”

결혼식 준비까지는 그래도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식이 진행된 오늘은 하루를 통째로 없애버린 듯 기억이 드문드문했다. 긴장하기도 했고, 워낙 사람이 많아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다가 보니 하루가 끝나가는 중이었다.

멀리서 한달음에 달려와 축하해준 토끼 식구들에게 인사하고, 부모님과 애틋하게 인사하고 나니 이번에는 호랑이 가족들과도 인사해야 했다. 꾸벅꾸벅 인사만 몇 번을 한 건지 허리도 뻐근했다.

강무혁이 최서율의 손가락에 자리 잡은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크기부터 확연히 차이가 나는 두 손이 이리저리 엉겨 붙었다. 이제야 피가 제대로 통하는 것 같은 다리를 강무혁의 허벅지에 올리고 너른 어깨로 이마를 붙였다. 강무혁이 소파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자 최서율의 몸도 자연스럽게 기울었다. 말하진 않았지만 이른 새벽부터 신경을 썼던지라 강무혁도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이 고요한 순간이 무척이나 달콤했다.

“좋다….”

저도 모르게 뱉어낸 말에 쿡쿡거리며 웃는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편해?”

“네.”

“나도.”

해가 저물자 방 안으로 어둠이 스며들었다. 멀어지는 노을 자락이 스르륵 움직여 방 귀퉁이를 밝혔다. 빛이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던 최서율이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강무혁의 가슴팍이 천천히 부풀었다 내릴 때마다 호랑이의 그르렁거림이 선명히 들려왔다. 기대고 있던 고개를 비틀자 부드럽게 풀어진 턱선이 눈에 걸렸다.

“여보….”

잽싸게 얼굴을 감춘 최서율이 입안에서 혀를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심장이 법석을 떨어대느라 정신이 사나워진 토끼가 끙끙거리자 기다란 팔이 몸을 당겨왔다.

“다시 불러 봐.”

잠이 가득 묻는 목소리에 최서율이 어깨를 비틀었다. 순순히 물러나 주는 팔에서 벗어나 강무혁의 허벅지 위로 완전히 올라앉아 몽롱하게 풀린 눈가를 쓰다듬었다.

“여보.”

피식, 기분 좋게 휘어지는 입꼬리 위에 입 맞춘 최서율이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흰 이마를 입술에 누르곤 강무혁의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비로소 하나가 된 첫날밤은 달콤했고,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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