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상견례를 시작으로 최서율은 처음으로 강무혁의 친구들과 만났다. 잔뜩 얼어있는 최서율을 보곤 친구들은 모두 이마를 짚었다. 어쩌다가 저 호랑이 따위와 엮였냐고 탄식하는 친구들 사이에 익숙한 사람. 윤성연 비서도 끼어있었다. 그나마 낯익은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무리를 지어 친하게 지냈다는 사람들은 모두 동갑내기는 아니었다. 한 살 터울로 위아래로 나뉘었는데 그래도 최서율보다는 모두 나이가 많았다. 이름만 들어도 하나의 기업을 떠올릴 만큼 유명한 사람도 있었고, 카페 사장을 하고 있다는 사람도 있었으며, 평범한 직장인. 유명하진 않지만, TV에서 본 연예인도 있었다. 그들이 어쩌다가 친해졌는지는 오가는 대화를 통해 금세 알 수 있었다.
재치 있고, 예의 있는 사람들. 그 사람을 보면 친구가 보이고,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고 했던가. 어린 그들이 쌓았을 우정을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몽실몽실해지는 기분이었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는 맹수들 사이에서 편하게 식사하고 대화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요즘 시대에 함이라니, 내가 가야겠군.”
“나도. 그날 시간 될 거 같은데.”
반달곰 수인 친구가 넌지시 말하며 강무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일이 바빠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다른 친구는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지 말하라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반달곰과 호랑이, 늑대 수인까지 총 세 명이 함 들이는 날에 함께 해주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오시면 불편하지 않으시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불편하면 어때요. 다 경험이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슬쩍 강무혁의 눈치를 봤다. 옆에 있던 강무혁이 설핏, 웃으며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끝으로 살살 쓸어 정리해주었다.
“신경 쓰지 마. 마당에 멍석 깔아줘도 잘 잘 거야.”
모두의 시선이 제게로 몰리자 최서율이 강무혁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아래로 내렸다.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는데 수줍은 듯, 멋쩍은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걸 바라보는 강무혁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만연해졌다.
친구들의 탄식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왔다. 닭살 돋는다. 적당히 해라. 하는 부러움을 동반한 진심 어린 타박과 함께 자리가 시끌벅적해졌다. 꼿꼿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윤 비서가 고개를 설설 저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니 최측근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최서율은 함이 들어가기 이틀 전 혼자 고향 마을로 향했다. 오랫동안 교류하지 못했던 친구들도 만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강무혁의 멋들어진 외제 차를 끌고 토끼 마을에 들어서자 가족들은 물론이고, 동창들, 마을 어르신들까지 출세했다며 손뼉을 쳐댔다.
내 것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쳐봐도 촌장님 댁 다섯째 아들 최서율이 좋은 곳으로 장가든다는 소문은 토끼 마을에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 * *
“함 사세요!”
“함 들어갑니다!”
“함 사세요!”
조용하던 토끼 마을이 우렁찬 맹수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해졌다.
함이 들어오기 전에 회사에 휴가를 내고 미리 토끼 마을에 내려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최서율은 전통에 따라 유시. 해가 질 무렵 강무혁과 친구들이 도착한다는 소식에 대문을 넘지는 못하고 고개만 쭉 내밀고 그들이 코앞까지 오기를 기다렸다.
마을 어귀에 차를 세운 강무혁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던 산군 호랑이 족과 인사를 나누고 호랑이 부모님이 준비해주신 함과 선물 보따리를 바리바리 짊어 들었다. 하나같이 멀끔하게 꾸미고 온 모습이었는데 구경나온 토끼 수인들이 그들을 보고 수군거렸다.
촌장네 아들이 호랑이한테 장가들긴 하는 모양이라며 친구들도 다들 맹수라고 떠드는 소리가 그들에게도 다 들렸다. 그렇다고 그들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하는 건 아니었기에 큼큼거리며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바로 소문만 무성하던 토끼마을이 아니던가! 요즘 시대에 ‘함’을 들이냐며 웃던 그들이었지만 누가 토끼 마을에 가겠느냐는 말에 바쁜 시간을 쪼개, 어떻게든 토끼 마을에 가보려 노력한 이들이었다.
“촌장님 사위가 아주 늠름하고 멋지구먼! 하하!”
“그러게요. 호랑이 사위 들인다고 잔치도 크게 열었던데, 경사 났네! 경사!”
구경나온 토끼 수인들의 외침에 강무혁을 바라보는 친구 세 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들의 어깨를 툭, 친 강무혁이 민망하다는 듯이 이마를 긁적거렸다.
함은 본래 이미 혼인하고, 아들을 낳은 친구가 짊어지는 게 전통이었지만 아들을 낳은 이도 없을뿐더러 허드렛일에는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무리 중 가장 어린 윤 비서에게 역할을 떠넘겼다.
하기 싫다고 툴툴거릴 때는 언제고 마른오징어를 얼굴에 쓰기 무섭게 돌변해 마중 나온 최서율의 동생, 친구들과 갖은 실랑이를 벌여대는 윤 비서였다. 마을 어르신들이 준비해준 초롱불을 들고 길잡이를 하던 친구들과 강무혁이 한판 거하게 웃어댔다.
“아휴! 함진아비가 고집도 세네! 얼른 들어와요! 고기 다 식겠어요!”
그중에 최서율의 일곱째 여동생 최서현이 곱게 차려입은 한복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곤 고쟁이에서 꺼내든 흰 봉투를 바닥에 냅다 패대기쳤다.
“돈도 많은 양반들이! 이거 들고 얼른 와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대문 너머로 구경하던 토끼 가족들이 박장대소했다. 저 정도면 많이 참은 거라고 웃어댔는데 함을 진 윤 비서는 꿈쩍도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춰버렸다.
“여보세요! 얼른 와서 식사하세요. 다들 기다리고 있잖아요.”
“함진아비한테 이렇게 화내는 신부 측 가족도 있답니까?”
“누가 신부예요! 우리 오빠가 여자야?!”
“누가 여자라고 했습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토끼 마을 청년들과 최서율의 여섯째, 아홉째 남동생들이 이마를 짚었다. 누나 또 왜 그러냐며 최서현을 질질 끌어당기는 여덟째 여동생이 형부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강무혁이 괜찮다며 동생들을 달랬다.
“이만하고 가자. 다들 배고프잖아.”
“아, 이렇게는 못가죠.”
짊어지고 있던 함을 내려놓으려는 듯 무명필에 손을 대고 어깨를 뒤트는 윤 비서의 손을 덥석 잡은 최서현이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함은 중간에 내려놓으면 안 돼요!”
“아….”
커다란 손에 얹어진 작은 손이 절대 함을 내려놓지 말라는 듯 꼼지락꼼지락 움직여댔다. 비린내가 폴폴 풍기는 마른오징어 너머로 눈을 마주한 두 사람이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 윤 비서의 귓가로 피가 몰렸다.
“그, 내려놓으려던 거 아닙니다.”
“알겠으니까, 이, 일단 가시죠. 다들 기다려요. 정말….”
그 꼴을 지켜보던 강무혁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다시 길을 나선 친구들이 ‘함 사세요!’ 큰소리로 외쳤다.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불을 밝힌 한옥이 보였다. 고운 색의 한복을 입은 토끼 여사가 얼른 오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강무혁이 반가운 마음에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반달곰 친구가 그의 어깨를 턱! 하고 잡았다.
“어허, 친구. 체통을 지키시게.”
“왜 이래, 미친놈이.”
“여기 오니까 고어(古語)를 쓰고 싶어지는구려.”
옆에 있던 호랑이 친구도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날인만큼 한복을 입은 가족들이 보이고, 한옥까지 떡하니 자리하고 있으니 그럴 만했다.
“자, 함진아비야. 여기를 따라오너라.”
반달곰 친구가 초롱불은 든 채 한 손을 뒤로 짚으며 발을 팔자로 만들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왜 저러냐며 웃음을 참던 강무혁과 호랑이 친구도 어슬렁어슬렁 그 뒤를 따랐다. 최서현에게 한쪽 팔을 내어준 윤 비서만이 웃지 못하고 그들의 뒤를 따라야 했다.
“자자, 이쪽으로 오세요. 맛있는 음식이 잔뜩입니다.”
최서율의 아홉째 남동생이 인원수에 맞게 술잔과 맛있게 구워진 육전을 들고 와 내려놓았다. 딱 보아도 ‘묘주’였다. 그 위력을 처음 토끼 마을에 왔을 때 제대로 체험한 강무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윤 비서를 비롯한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저를 포함한 총 넷. 모두 내일 멀쩡히 걸어 나가기는 글렀구나 싶었다.
“캬. 이거 진짜 맛있네.”
“그러게, 이렇게 맛있는 술은 외국에서도 못 먹어 본 거 같네.”
“강무혁이 좋겠다. 이거 매일 먹을 수 있잖아.”
달짝지근한 묘주에 기분이 좋아진 친구들이 껄껄거리며 초롱불을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껏 좋아진 기분을 말로 표현한다는 걸 알기에 강무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듯 분위기를 풀어냈다.
그들 중 제일 마지막으로 묘주를 입에 털어 넣은 윤 비서의 입 앞으로 툭, 육전이 닿았다.
“입 벌리세요. 이거라도 먹어야지, 안 그러면 속 버립니다.”
“…고맙습니다.”
최서현은 툴툴거리면서도 함진아비를 이끌기 위해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윤 비서의 근처를 맴돌았다.
술 한잔에 기분이 좋아진 친구들이 다시 우렁차게 외쳤다.
“함 사세요!”
“함 사세요!”
어느새 몇 걸음 안 남은 한옥의 대문 앞에 멈춰선 윤 비서가 마지막으로 객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흰 봉투가 아쉬워서도, 맛있는 음식이 아쉬워서도 아니고, 뒤에서 구경하던 토끼 어르신들이 함진아비가 뭐 저렇게 맥없이 끌려가냐고 한마디를 거든 탓이었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꿀떡을 가지고 나온 최서율의 동창이 그들의 앞에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흔들어댔다. 안에 들어가면 더 맛있는 게 많다는 말에 더 참지 못한 친구들이 윤 비서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래, 이만하고 들어가자.”
“성연아, 적당히 하고 가자.”
대문 너머 담장으로 얼굴을 빼꼼 내민 최서율이 강무혁과 눈을 마주하곤 활짝 웃었다.
방 안에 들어가서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풍습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최서율도 대문만 넘지 않았지, 참지 못하고 담벼락에 매달려 이제나 오시려나 기다리던 중이었다. 드디어 모습을 나타낸 강무혁이 너무 반가워 저도 모르게 입이 찢어질 만큼 환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자자, 이거 밟고 들어오세요!”
대문 앞에 놓인 커다란 박을 대차게 밟아 박살 낸 함진아비가 드디어 최서율 집 대문을 넘어섰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박수와 함성에 괜히 으쓱해진 윤 비서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며 반겨주는 최서율의 아버지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그래요. 고생했어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강무혁의 옆에 서서 팔을 쓰다듬으며 웃고 있는 여인은 최서율 대리와 똑 닮아 있었다. 딱 보아도 그의 어머니인 것이 분명해 보여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가 강무혁의 후배가 아닌, 그냥 비서였다면 절대 보지 못했을 모습이라 지금만큼은 그와의 친분이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서 오세요. 고생하셨습니다.”
최서율이 강무혁의 친구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친구들도 최서율을 보고 반가워했고 오징어를 벗어던진 윤 비서를 보고 웃음이 터진 최서율을 보며 난감하다는 듯이 웃는 윤 비서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