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8/64)

47.

토끼 수인의 등장은 한동안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매체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최서율처럼 이미 사회에 나와 생활하고 있던 토끼 수인들의 커밍아웃이 이어졌다. 특히 SNS가 뜨거웠는데 알고 보니 회사 동료가 토끼! 우리 학교 선배가 토끼였네. 같은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학교에 토끼 수인이 전학 왔다는 글이 심심치 않게 보이곤 했다.

토끼 수인과 함께 진화한 수컷 수인에 관한 관심도 높아졌다. 조상들의 무지함과 이기심으로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졌던 진화한 수컷 수인의 등장에 학계는 초흥분 상태였다. 하지만 개인의 인권과 어린 토끼 수인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누가 진화한 수컷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일을 시작으로 각 도시와 지역의 산군 호랑이들의 일이 늘어났다. 토끼 수인을 보호하던 토끼 마을의 산군 호랑이가 특별히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한반도의 큰 산과 대도시를 지키는 산군 호랑이 족의 도움이 있어 토끼 수인들이 사회로 나오는 일련의 과정을 수월하게 만들 수 있었다.

토끼 마을을 떠나 다른 지역 산군 호랑이와 가까운 산자락이나 근처 동네에 자리를 잡은 토끼 수인들은 사회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사회에는 토끼 수인을 공격하거나 하대(下待)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예상보다 높은 관심을 받았지만, 세상은 토끼 수인에게 쏠린 관심을 쉽게 거두어냈다. 젊은 정치인 L의 비리 사건과 유명 연예인 K의 이혼설까지 겹쳤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들뜬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 모두 안정을 찾아갔고, 토끼 수인 또한 적응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시간을 보냈다.

산을 지키는 산군 호랑이가 가장 바쁜 가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동면에 들기 전, 먹이를 한껏 끌어모으던 동물들이 산군 호랑이의 마당에 얼굴을 드러내면 최서율은 너무 반가워 버선발로 뛰쳐나가 애틋한 인사를 나누었다. 무사히 겨울을 보내고 다시 만나길 바라는 마음에 낑낑거리는 토끼에게 인사한 동물들이 더는 찾아오지 않았을 때,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긴 겨울, 호랑이의 품에서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포근한 겨울을 보낸 최서율은 풍족하고, 행복했지만 봄이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겨울의 산은 심심해 몸부림칠 만큼 고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최서율에게 겨울잠을 자지 않는 동물들을 위해 산에 가자고 할까 고민하던 강무혁이 녹지 않은 눈이 얼어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는 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겨우내 산에 가지 못한 토끼는 환장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긴 기다림의 끝에 봄이 찾아왔다. 새 생명이 움트는 봄의 산은 가장 싱그럽고 어여쁜 색으로 몸을 단장했다. 동물들과 다시 만난 최서율은 신나게 산을 뛰어다녔고, 그 뒤를 따르는 호랑이는 변함없이 토끼의 안위를 살피느라 분주했다.

함께 보내는 두 번째 여름에는 토끼 수인 마을에 새로운 도로가 완성되었다. 인근 도시로 나가는 길이 더욱 수월해졌지만, 여전히 마을로 들어가려면 산군 호랑이 족의 영역을 거쳐야 출입할 수 있었다.

새로운 세상에 도전하기 위해 마을을 떠난 젊은 토끼들과는 다르게 걱정이 많은 노인들을 위한 처사였다. 부족했던 관공서가 세워지고, 그동안 토끼 마을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던 지역의 공무원과 정치인에 대한 감사패도 전달되었다.

여전히 마을 안에는 회의적인 시선이 존재했지만, 촌장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적극적인 행동력으로 토끼 마을 또한 안정을 찾아갔다.

* * *

가을이 시작될 무렵, 특별한 일로 토끼마을에 갔다가 돌아오던 최서율이 운전하는 강무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다는 듯 망설이는 눈을 알아챈 강무혁이 한적한 도로를 확인하곤 고개를 돌려 짧게 눈을 맞추곤 얌전히 늘어진 손을 잡아 운전석 쪽으로 가져왔다.

“왜 그래. 뭐 할 말 있는 사람처럼.”

“…할 말이, 있긴 해요.”

맞잡은 강무혁의 손등으로 손끝을 굴린 최서율이 아예 몸을 운전석 쪽으로 돌리며 시트에 기대어 앉았다.

연애 1년, 최서율은 이제 강무혁의 비싼 외제 차를 제 차처럼 끌고 나가기도 했고, 회사에서 제게 쏟아지는 시선에도 익숙해졌다. 북악산의 호랑이굴에도 떨지 않고 찾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호랑이가 크르릉. 울어도 펄쩍 뛰며 놀라지 않았다.

호랑이와 더 크고, 행복한 미래를 그렸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겠다 싶을 즘, 강무혁에게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받았다. 익숙한 공간에서 평범한 저녁 시간을 보내다가 말고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강무혁을 끌어안은 채 아주 조금, 울었다.

교제는 얼렁뚱땅 허락을 받았지만, 결혼을 허락받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는 아들이 원한다면 뭐든 괜찮다고 해주었지만, 어머니가 망설였기 때문이었다. 슬하에 많은 자식을 두었지만 최서율은 토끼 여사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머니가 고민하는 이유를 알기에 강무혁과 최서율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다.

형제들의 도움과 아버지의 노력으로 겨우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어제, 최서율은 어릴 적 뛰어놀던 토끼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 강무혁과 함께 별똥별을 보았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가슴 벅차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무슨 말인데 그렇게 뜸을 들여?”

“그게…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함을 들여야 한다고.”

“함?”

강무혁이 운전에 집중하던 눈을 다시 최서율에게로 돌렸다.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문 최서율이 더욱 빤하고, 동그래진 눈으로 시선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면으로 다시 시선을 옮긴 강무혁의 턱이 이리저리 비틀렸다.

“함이라고….”

“자기, 혹시… 뭔지 몰라요?”

“아니, 알지. 어릴 적에 들어보긴 했지만, 직접 본 적은 없어서….”

최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에서는 사라져가는 전통이었기에 생소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께서는 최서율도 아들이니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귀띔해주었지만, 어머니가 원하시면 해드리고 싶었다. 또, 최서율 저 자신도 토끼 수인으로서 마을의 풍습을 이어가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원래는 신랑 집안에서 신부 집안으로 보내는 거니까… 남자와 여자로 따지자면 우리 두 사람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어머니는 저를 시집보내는 마음이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제가 아이를 낳을 수 있기도 하고, 작은형도, 그렇게 했고… 또….”

장황하게 설명하고자 말을 고르는 최서율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이 손을 꼭 잡아준 강무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함을 받아야 한다고 해도 괜찮았을 거야. 나는 잘 모르니까, 천천히 설명해주면 돼.”

“음… 친한 친구 분 한 분만 오시면 돼요…. 원래는 결혼식 전날에 하는 게 전통이지만 우리는 날 잡는 대로 아무 때나 해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아직 정확한 걸 말한 건 아니지만….”

슬쩍 눈치를 보는 최서율의 손을 다시 고쳐 잡은 강무혁이 웃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내가 하기 싫다고 할까 봐?”

“그건 아니지만… 좀, 너무 구식이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걱정했어요.”

“구식이면 어때. 토끼한테 장가드는 덕분에 경험해보는 거지.”

최서율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강무혁의 손을 맞잡았다. 운전석으로 휙 넘어갔던 손을 조수석으로 끌어와 두툼한 손등에 입술을 문질렀다. 날아갈 듯 가벼워진 기분을 그대로 표출하는 토끼가 귀여워 운전대를 꽉 붙잡는 강무혁이었다.

“함을 보내려면 친구들이 있어야겠네.”

“아, 혹시… 친구가 없는 건….”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 최서율의 눈에 걱정이 담겨있었다. 강무혁이 가볍게 코웃음 쳤다. 사는데 바빠 그렇지 이런 일이라면 신나서 달려올 친구는 여럿이었다. TV에서 보면 함이 들어오는 날 친구들이 와르르 몰려와 난동을 부리던데 설마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싶어 잠깐 사이에 고민이 깊어졌다.

“친구 없어 보여?”

“윤 비서님 말고는 따로 만나는 분들도 있지 않고….”

함께 1년을 보내면서 강무혁은 회사, 산, 집, 최서율 곁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회의가 길어져 늦게 귀가하거나, 출장 때문에 집을 아예 비우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면 누구를 만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기에 고개를 갸웃거릴 만했다.

“내 친구들이 토끼 마을에 가면 이번에야말로 가족들이 다 기절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아….”

“윤 비서는 늑대고, 제일 친한 친구는 반달곰, 늑대, 호랑이. 괜찮겠어?”

생각해보면 강무혁에게 친구가 없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고, 그의 친구들이 꼭 인간이라는 법은 없었다. 멀뚱히 눈을 굴리던 최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차차 얘기해요.”

강무혁이 긍정의 뜻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을 향하는 고속도로로 진입한 차가 두 사람의 탄탄대로를 보여주듯 뻥 뚫려있었다. 차가 막히지 않아서 좋다고 종알거리던 최서율이 강무혁의 손을 잡은 채로 까무룩 잠들었고, 틈틈이 최서율을 살피던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토끼 부모님에게 결혼을 허락받아 기분이 좋았다.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그르렁거림이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듯 눈이 동그래진 최서율의 손등을 토닥인 강무혁이 운전에 집중하며 그답지 않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호랑이가 귀여워서였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 * *

서울로 돌아온 뒤에 두 사람은 회사 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일을 처리하는 것 또한 중요했기에 연애만큼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호랑이 회장님의 은퇴 시기가 증권가 찌라시로 돌면서 더욱 정신이 없었다. 회사의 주가가 오르락내리락, 매일 다이내믹한 하루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 공식적으로 발표가 난 범진그룹 둘째 아들의 결혼 소식은 세간에 화제가 될 만했다.

지금 세상을 움직이는 모든 것이 그들에게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토끼 수인의 등장과 그런 그의 옆을 지키는 호랑이로 한동안 유명세를 치렀으니 말이다. 그들의 결혼 소식에 회사부터, 사회 전반이 떠들썩했다.

이런 관심을 바랐던 건 아니었기에 최서율은 어쩔 줄 몰라 했고, 강무혁은 앞으로 자주 겪게 될 일이라며 안심시키듯 천천히 토끼를 달래주었다.

“어머, 함을 들이려면 준비해야 할 게 진짜 많은데, 가만있어보자. 뭐부터 해야 하니….”

바쁜 일정을 쪼개 국토를 종단한 강무혁은 백두산 산군 호랑이에게 결혼식 날짜를 받아왔다. 영험하기로 유명한 호랑이 어르신은 강무혁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 무섭게 배필이 복덩이라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강무혁이 어르신과 즐기지도 않는 술을 퍼마시느라 이틀을 날려버려 최서율의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결혼 날짜까지 받아왔으니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하면 되는데 호랑이 부모님은 ‘함’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최근에는 간소하게 하는 일이 더 많았는데 아무래도 전통을 고수해온 토끼 마을로 함을 보낸다고 하니 정석으로 해야 할 것 같다며 어머니는 잘 사용하지도 않던 태블릿까지 꺼내 들고 와 강무혁의 말도 제대로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결혼식 전날 하기는 너무 힘들어서 식전에 아무 때나 날 잡아서 하자고 하셨어요.”

“그래, 함은 우리 쪽에서 잘 준비해서 보낼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최서율의 걱정과 달리 ‘함’에 대해 긍정적인 호랑이 부모님 덕분에 일이 빠르게 해결되었다. 상견례 날에도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허락하고 나니 호랑이 사위만 한 사람이 없다며 온 동네에 자랑하고 다닌 토끼 여사는 호랑이 부부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사위 자랑, 아들 자랑을 하느라 들뜬 모습이었다. 호랑이 부모님도 지지 않고 아들 자랑과 토끼 사위 자랑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