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64)

46.

해가 넘어갈 즘이 돼서야 눈을 뜬 최서율이 저를 꼭 껴안고 잠든 강무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침실은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켜두어 습한 기운 없이 보송보송하고 시원했다. 태국까지 와서 기억에 남는 게 섹스밖에 없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몸을 섞어대서 그런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침을 발라준다더니 정말 침을 잔뜩 발라 놓은 귀두가 언제 아팠냐는 듯이 멀쩡해져 있었다. 이래서 호랑이 연고라는 게 생긴 건가. 아랫배를 더듬어대며 이상한 생각을 하다가 제 옆에 곤히 누워 잠들어 있는 강무혁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호랑이의 습성이 강한 강무혁은 야행성으로 밤에는 짧게 잤고, 자주 낮잠을 즐겼다. 회사에서 눈을 감고 있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깊게 잠들지는 않아도 얕은 잠으로 수면욕을 채운다는 걸 함께 살면서 알게 되었다. 회사도 아니고, 출장 일정에 포함되지 않는 휴식이니 지금은 깊게 잠들었다는 걸 알기에 조심스럽게 품에서 벗어났다.

묵직한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려 몸을 쏙 빼낸 최서율이 눈썹을 찡그리는 강무혁의 미간을 살살 문질러 달래 놓고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으으….”

뻣뻣하게 굳은 근육을 쭉쭉 늘이며 기지개 켰다. 엉덩이 안쪽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놀라 허리를 움찔 떨며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발끝을 쭉 늘이며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욕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강무혁을 받아들였을 때는 성기도 망가진 것 같았고, 엉덩이도 더 견디기 어려울 만큼 아팠다. 자존심이고 뭐고 코가 빨개질 때까지 울었던 기억이 떠올라 괜히 민망해졌다. 얼른 가운을 걸쳐 몸을 가리곤 침실을 나섰다.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이 휘돌아 나가는 다이닝룸에는 아무렇게나 풀어 헤쳐진 짐가방이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정사의 흔적을 품은 소파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물티슈로 민망한 흔적을 얼른 닦아내고 풀장과 연결된 테라스 앞에 섰다.

낮은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어 먼 바다가 잘 보였다. 햇살이 반짝이던 푸른 바다에 연보랏빛 노을이 내려앉았다. 수평선에 자리를 잡은 하얀 구름과 서서히 색이 덧입혀지는 하늘을 바라보는 최서율의 눈동자가 노을과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은 머나먼 타국에서도 괜스러운 그리움을 만들어 냈다. 집이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노을에 쓸쓸해지는 가슴을 채우려 강무혁을 떠올린 최서율의 어깨와 허리로 두툼한 팔뚝이 느리게 휘감겼다.

은은하게 풍기는 호랑이 냄새에 코를 꿈질거린 최서율이 매끄러운 팔뚝에 손을 올리며 가슴팍에 등을 기댔다. 그의 턱 아래에 정수리를 밀어 넣고 몸을 기댄 최서율이 멀리 어둠을 몰고 오며 가장 짙은 색을 뿜어내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예뻐요….”

“그러네.”

잔잔한 바다가 어둠을 머금고 색을 잃어갔다. 세상에 단둘만 남은 듯한 고요함에 숨을 크게 들이킨 최서율이 고개를 돌려, 바다 너머 수평선에 시선을 고정한 강무혁을 올려다보았다.

굵고, 짙은 얼굴선이 잠결에 유하게 풀린 얼굴은 최서율이 가장 좋아하는 강무혁의 얼굴이기도 했다. 회사가 아닌 곳에서, 유일하게 저만 볼 수 있는 얼굴이라 더욱 좋았다.

시선을 느낀 강무혁이 눈을 아래로 내렸다.

“왜?”

“그냥요… 지금 자기 얼굴도 예뻐서요.”

피식, 짧은 웃음을 터트린 강무혁이 품에 안은 최서율의 가슴팍과 배를 커다란 손으로 슬슬 쓰다듬었다. 가운에 감싸인 몸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배는 안 아파?”

“네. 괜찮아요.”

강무혁의 손등에 얹은 작은 손이 그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허리에 단단히 동여맨 허리끈 안쪽으로 손가락이 밀려 들어갔다. 곧바로 맨살을 더듬는 손길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하지 말라는 듯이 손등을 힘주어 잡았다.

정수리에 입술을 비비고, 귀 뒤로 내려온 입술이 귓불을 얕게 물었다 놓으며 뜨거운 숨을 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깨를 움찔 튄 최서율이 두 손으로 강무혁의 팔뚝을 내려 잡고 몸을 움츠렸다.

“배고프다. 곧 식사 준비하러 사람들 올 거야.”

“저기 있는 거로 저희가 만들어 먹는 게 아니고요?”

“선택할 수 있는데, 굳이… 뭐하러 만들어 먹어. 둘 다 실력도 별론데.”

최서율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는 있지만, 실력이 별로라는 말이 딱 맞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보트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뜬 최서율이 왔다! 하며 손뼉을 쳤다. 편하게 움직였지만, 이동 거리가 꽤 멀었고, 체력소모도 심하게 했는데 간식 하나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허기가 질만 했다.

얼른 강무혁의 품에서 빠져나온 최서율이 침실로 쏙 모습을 감췄다. 티셔츠까지 갖춰 입은 강무혁과 달리 가운만 입고 있는 모습을 직원들에게 보이는 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리빙룸이 아닌 바다가 잘 보이는 사이드 테라스에 식사가 차려졌다. 낮에 팁을 두둑하게 받은 직원들이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최서율이 강무혁과 함께 식전에 제공된 음료를 마시며 한가로이 몸을 늘였다.

옆에서 직접 고기를 굽고, 음식을 조리하는 디너 코스는 만족을 넘어서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직원들이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허벅지를 주무르는 강무혁의 손을 밀어내느라 괜히 진을 뺀 최서율이 마지막 남은 샐러드를 삭삭 긁어 입에 밀어 넣고 오물거리며 눈을 흘겼다.

가족, 회사 얘기를 하며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이 직원들이 테이블을 정리하는 동안 바닷가로 내려왔다. 미리 팁을 쥐여주고 마무리되는 대로 돌아가도 좋다는 강무혁의 말에 함박웃음을 짓는 직원들을 보며 최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돈이면 다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이만큼 고생했는데 저 정도는 챙겨야지 싶은 마음도 들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를 한두 캔 마셨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술기운에 빨개진 최서율의 얼굴을 붙잡고 몸을 붙여대던 강무혁이 직원들이 탄 보트가 선착장을 출발하기 무섭게 최서율을 들어 올렸다.

오늘은 절대로 또 못 한다고 울상지은 최서율을 커다란 침대 위에 던져두고 능숙하게 달랬다. 넣지는 않겠다고 구슬리는 호랑이의 품에 끌려 들어가 밤이 깊어질 때까지 시달렸다.

* * *

날이 밝은지도 모르고 이불 속에 파묻혀있던 최서율을 억지로 깨워 아침밥을 먹이려는 강무혁이었다. 다행히 2박 일정이라 이튿날은 좀 쉴 수 있었는데 한국 컵라면으로 유혹하는 통에 결국 비몽사몽 일어나 식탁에 앉아야 했다.

호랑이보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토끼는 천근만근인 몸 때문에 너무 좋아해 마지않던 라면을 앞에 두고도 꾸벅꾸벅 졸아야 했다.

강무혁이 뭘 하는지 리빙룸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바람이 솔솔 부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태국에 도착해 이틀 동안 제게 일어난 일을 생각하다가 미간을 좁혔다. 차라리 연차를 내고 여행을 가자고 하지. 생각보다 더 많이, 짙은 음욕이 가미된 일정을 되새기다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런 강무혁에게 결국엔 휩쓸려버리는 저도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니 불만도, 심술도 사그라들어 버렸다.

목덜미, 어깨, 가슴, 배, 허벅지 할 것 없이 토끼의 작은 몸에 자기 흔적을 잔뜩 만들어 놓은 호랑이는 뭐가 그렇게 개운한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보트 타고 나갈 거야.”

“잘래요.”

“내가 운전할 건데?”

“부사장님, 보트도 운전도 할 줄 아세요?”

“최서율 대리님 태워드리려고 10년 전부터 준비 좀 해봤죠.”

장난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헝클이는 강무혁의 손을 밀어낸 최서율이 불퉁해진 볼을 씰룩거렸다. 더 자고 싶은데 보트라니…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삐걱거리는 몸을 열심히 움직여 준비를 서두른 최서율을 붙잡은 강무혁이 짧은 바지를 입은 다리에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라주었다.

“타면 아파. 이리 와. 얼굴도 바르자.”

끈적거려서 싫다고 밀어내고 싶었지만, 어제 잠깐 볕 아래 있었다고 볼이 발갛게 익은 걸 생각하면 바르는 게 낫지, 싶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선착장에 보트 한 대가 놓여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간 강무혁이 구명조끼를 꺼내어 최서율의 팔에 끼워 주었다. 선착장 아래로 물속이 훤히 내다보일 만큼 맑고, 투명한 바닷물이 넘실거렸다. 작은 물고기가 돌아다니는 걸 보고 눈이 동그래진 최서율이 보트에 타프를 치는 강무혁을 기다리며 쭈그려 앉아 저 아래 바다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속도를 내기 딱 좋아 보이는 보트는 매우 날렵하고, 세련되게 생겼다. 보트에 무지한 최서율은 이 보트의 이름도, 가격도 모르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모르지만, 마음만은 설레었다.

멋들어진 보트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강무혁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편한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도 선글라스 하나로 저렇게 멋있어지는 건 반칙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것 또한 자기면서 말이다.

자리를 잡고 앉기 무섭게 시동을 건 강무혁이 최서율을 돌아봤다.

“어때, 신나게 달려 볼까?”

“천천히요…! 다치면 어떡해요. 저는 몰라도 부사장님은 다치면 안 됩니다.”

“내가 지금 일을 하는 건지, 연애를 하는 건지 헷갈리네.”

“둘 다. 라고 생각하세요. 천천히! 무조건 천천히요!”

“네, 네.”

고개를 끄덕인 강무혁이 최서율의 요구대로 천천히 방향을 잡았다. 선착장을 출발한 보트의 선미가 바다를 향해 돌아섰다. 머물던 섬을 등지고 너른 바다를 향해 달려 나가자 두근두근 심장이 빠르게 요동쳐댔다. 점점 더 빨라지는 속도에 놀란 최서율이 손잡이를 꼭 잡고, 강무혁의 옷자락도 잡아 쥐었다.

“무서워?”

바람이 스치는 요란한 소음에도 강무혁의 목소리만큼은 정확하게 들렸다.

최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가로 저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확실히 재밌었다. 속도에 몸을 실은 기분에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엉덩이를 조금 떼자 강무혁이 손을 잡아끌어 서서도 잡을 수 있는 안전바에 올려주었다.

“꽉 잡아. 크게 한 바퀴 돌자.”

“네.”

얼굴을 마구 때리며 스치는 바닷바람과 옆으로 화려하게 부서지는 물보라.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까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용감하네. 우리 토끼.”

엉덩이를 툭툭 쳐주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호랑이랑 지내다 보니 간이 커진 건가 싶을 만큼 보트 위에서 바람과 속도를 만끽한 최서율이 되돌아가는 길에는 가만히 앉아 능숙하게 보트를 운전하는 강무혁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용기를 낸 토끼 덕분에 바다를 신나게 달린 보트가 다시 선착장에 도착했다. 내리는 게 아쉬워 우물쭈물했지만, 한국에도 보트가 있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표정이 밝아져 버렸다.

좋아할 줄 알았으면 여름에 진작 다녀올 걸 그랬다는 말에 자연스럽게 내년 여름을 기약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을 약속할 수 있어서 좋았다. 최서율이 웃으며 강무혁의 손을 잡고 빌라로 돌아왔다. 바람에 이리저리 치인 두 사람 모두 머리카락이 엉망이었다.

나름 고요하고, 한가한 오후를 보냈다. 어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감정도 체력도 소모가 큰 하루였는데 오늘은 그저 휴식, 휴식, 휴식뿐이었다.

풀장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호랑이를 구경하고,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전화를 걸어온 윤 비서와 또 강무혁을 대신해 잠깐 통화를 했다. 내일로 예정된 오찬은 조금 늦은 점심으로 하자는 말레이호랑이 측의 요청에 따라 방콕 현지 시각 오후 2시로 변경되었다는 연락이었다.

체크아웃 후에 방콕으로 돌아가는 시간까지 미리 계산해 두었기에 계획대로 움직이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한 번 더 리조트 측에 체크아웃 시간을 확인하고, 말레이호랑이 가문에서 강무혁 개인에게 제공한 전용기의 시간까지 재차 확인했다.

명색이 출장인데 그래도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함까지 느끼는 중이었다.

수영을 마친 호랑이의 털을 함께 말려주고,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토끼가 되어버려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맞은편에 앉아 책을 보던 강무혁도 놀라게 하고, 저 자신도 놀라 펄쩍 뛰어올라 낑낑 울었다.

얼른 토끼를 안아 든 강무혁이 자그마한 등을 두드리며 달래기 시작했다. 흡사, 아기를 달래는 모양새였지만 토끼는 잠에 취한 듯 다시 눈을 감고 고른 숨을 쉬기 시작했다.

체온이 높은 토끼를 위해 침실에 에어컨을 조절한 강무혁이 털 뭉치를 이불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소파에서 떨어지면서 다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지만, 귀를 축 늘이고 곯아떨어진 토끼를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앞발과 뒷발을 잡아 주무르듯 꾹꾹 누르며 반응이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삐유-”

거친 숨을 내쉬며 잠꼬대하듯 앞발을 파바바박 허공에 구르는 토끼가 웃기고, 귀여웠다. 한참 동안 토끼 귀를 만지작거리던 강무혁도 깜빡 잠이 들었다.

현실과 수면을 헤매던 찰나, 가슴께가 뜨거워 눈을 떴는데 어느새 가슴팍으로 올라와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눈을 감고 있던 토끼가 비슷하게 눈을 뜨며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코를 톡톡 두드리자 곰실곰실 열심히도 움직이던 콧방울이 턱에 와서 닿았다. 보드라운 토끼를 끌어안고 자그마한 얼굴에 뽀뽀를 퍼부었다. 삐! 삐! 난리를 치다가 품에서 폴짝 뛰어내려 이불을 파고 들어간 토끼의 앙증맞은 부피가 순식간에 커졌다.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최서율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얼굴을 부여잡고 이번에는 키스를 퍼부었다. 푹, 잘 자 눈두덩이가 붓고, 느슨하게 풀린 말랑말랑 하얀 얼굴이 강무혁의 손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저녁 먹자, 오늘은 간단히 부탁했어.”

고개를 끄덕인 최서율이 저녁 식사가 차려진 식탁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간단히 부탁했다고 하더니 식탁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최서율과 강무혁 모두가 좋아하는 과일샐러드가 먹음직스러운 모양으로 커다란 볼에 담겨있었다.

향신료가 들어가지 않은 태국 전통 음식을 먹으며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게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니 이미 해가 바다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길 기다리던 직원들에게 테이블 정리를 맡겨 놓고 빌라를 나섰다.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니 어둠을 머금고도 투명하게 빛나는 바다가 두 사람을 반겼다. 개인 비치라 앉아 쉴만한 테이블과 의자도 잘 정리되어 있어 시간을 보내기에 좋았다.

계획에 없던 짧은 휴식이었지만 아름다운 곳에서 편하게 쉬어서 그런지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내일이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니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와 바다를 바라보는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다시 올 수 있을까… 좋은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상상. 발을 딛고 있는 현실보다 더 먼 언젠가를 떠올리다가 말고 괜스레 아득해지는 기분에 제 콧등을 살살 긁어보았다.

“나중에… 우리한테 가족이 더 생기면, 여기 또 오고 싶어요.”

“가족?”

“네, 우리 둘만 말고….”

자연이 만들어 낸 소음 뒤에 목소리를 숨기듯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내놓는 말에 기분이 쑥 치솟은 강무혁이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리며 최서율의 손을 잡았다.

“둘이든 셋이든 낳아만 준다면야. 싫다고 할 때까지 올 수 있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웃어버린 최서율이 든든한 팔뚝으로 고개를 기울여 기댔다. 바다 너머로 별이 떠올랐다. 반짝거리며 빛을 뿜어내는 촘촘한 별들이 호랑이에게 기대어 봤던 산속의 별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부사장님.”

“…….”

이리저리 오가는 호칭이었지만, 이렇게 진지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면 평소처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냐는 듯이 눈을 맞추자 단단한 눈동자가 시선을 곧게 맞춰왔다.

“때로는… 부사장님이 하는 선택이 저를 속상하게 하고, 슬프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옳다고 생각했던 일이 부사장님을 속상하게 만든 일도 있었으니 제 선택과 판단으로 인해 부사장님이 속상해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압니다.”

강무혁의 한쪽 눈썹이 치솟았다. 꼬박꼬박 부사장이라 하며 깍듯이 내놓는 말이 듣기 싫어서 일 수도 있고, 늑대 수인과 관련됐던 일이 떠올라 그럴 수도 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마주한 눈을 접으며 사르르 웃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속상하게 하는 날이 또 있더라도 그런 날들이 쌓여 혹시… 조금 화가 나는 날이 있더라도… 너무 쉽게 이 손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진화한 수인이라는 제 존재를 인지하고부턴 절대 아기는 낳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가끔 저 자신이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때로는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으니까요.”

“…….”

“토끼 수인이 아닌 호랑이에게 제가 직접 말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부사장님에게만큼은 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니까요.”

맞잡은 손등으로 강무혁의 단단한 손끝이 천천히 둥글려졌다.

“서율아.”

“그러니까 너무 쉽게 서로를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가족을 늘리고 싶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어 놓으셨으니까. 되도록 오래, 영원히. 같이 있어 주세요.”

최초의 고백을 시작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더 깊고, 커다래진 최서율의 마음을 받은 강무혁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을 다 채우고도 모자랄 만큼 흘러넘치는 마음은 강무혁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예전에 말했지. 용기 내서 내게 와준 만큼 더 노력하고, 더 사랑하겠다고. 그 마음에 한치의 변함도 없어. 여전히 너를 위해 노력하고, 더 사랑할 거야.”

“…….”

“내 선택이 때로는 너를 불안하게 하고, 섭섭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네가 말한 것처럼 되도록 오래, 영원히. 너를 위해 최고의 선택하고, 너를 위해 살아갈 거야.”

시선을 아래로 뚝 떨어트렸다가 들어 올린 최서율이 저를 향해 쏟아지는 감정을 바로 마주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요. 홀린 듯 뱉어낸 말에 화답하듯 얕고, 따뜻한 키스가 내려앉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