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이거 맛있네. 먹을래요?”
“아니요.”
윤 비서는 지금 이 상황을 매우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저녁,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로비로 내려온 강무혁은 참석자 중 단연 돋보일 정도로 멀끔하고, 멋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물론 최서율 대리는 동행하지 않은 채였다.
‘서율이는 취임식 참석 안 할 거야.’
‘최 대리님도 동의한 일입니까?’
‘아니.’
각자 방으로 올라가기 전 귓가에 속삭인 말을 그대로 이행한 강무혁을 짐승 보듯 바라본 윤 비서가 신랄한 말로 강무혁을 비난했다. 어깨를 으쓱이던 부사장이 지금 매우 좌불안석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났다.
조식을 먹기 위해 만난 세 사람의 테이블에 태국 기후와 맞지 않는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식사하는 내내 무표정으로 채소 쪼가리만 집어 먹던 최서율이 결국 제대로 먹지도 않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강무혁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고, 윤 비서의 눈길도 최서율의 접시 위에 닿았다.
“최 대리님, 오늘 이동 구간이 좀 깁니다. 많이 먹어두세요.”
“아니요. 속이 좋지 않아서… 이따가 간식으로 적당히 때우겠습니다.”
“하….”
강무혁의 깊은 한숨을 들었으면서도 최서율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한곳을 응시했다. 두 손을 가지런히 허벅지 위에 올려 두고 남은 두 사람이 식사하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최서율이 원숭이 수인 아기가 야외 테이블을 뛰어다니는 걸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맛있게 구워진 소시지를 쿡 찍어 들어 올리던 윤 비서와 강무혁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왜, 뭐. 하는 입 모양에 쌤통이다. 라고 읊조리자 강무혁의 눈썹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내 저럴 줄 알았지. 고개를 설설 저은 윤 비서가 축 늘어진 토끼의 어깨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어쩌다 저런 짐승 중에 상 짐승한테 걸려서….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평소 행실로 짐작하자면 최서율이 이 상황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건 뻔했다. 순하고, 잘 웃는 사람이었지만 업무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책임감이 넘쳤으며 열정적이었다. 첫 출장이라고 신경 써서 준비하고 몇 번이나 제가 해야 하는 일을 꼼꼼하게 확인하던 최서율이었다.
사람들 시선을 걱정해서 한숨짓던 모습도 보았고, 매우 중요한 사안을 가지고 떠나는 출장이 아니기에 편안히 즐겨도 된다는 조언에도 그래도 제 역할은 제대로 해내고 싶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제 첫 일정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매우 불순했으니 화가 단단히 날만 했다.
“윤 비서.”
“네.”
“내일 오찬 일정 미룰 수 있는지 확인해 보지.”
“네?”
“못 들었나?”
최서율이 잠시 야외 정원을 둘러보려 몸을 돌린 사이 윤 비서의 귓가에 속삭인 강무혁이 어서 알아보라며 채근했다.
“새로 취임하신 사장님입니다. 우리 쪽 말고도 만나야 할 사람이 많으실 텐데 일정을 어떻게 미룹니까.”
“그러니까 알아보라고 하는 말이잖아.”
“부사장님.”
“그리고 오늘 일정은 찢어져서 진행하는 게 좋겠어. 윤 비서가 방콕에서 멀지 않은 리조트에 다녀와. 오찬 일정이 미뤄지면 약속이 잡히는 날까지 여기서 쉬고 있으면 되겠네.”
“제가 지금 부사장님 멱살을 잡는다고 해도 괜찮으시다면 정말로 그렇게 진행하시죠.”
“주먹다짐해서 내가 이기면 그렇게 결정되는 건가?”
진심이라는 듯 손목에 걸린 시계를 만지작거린 강무혁이 부드럽게 웃었다. 윤 비서가 진짜 미친놈이라고 속으로 욕을 씹으며 핸드폰과 태블릿을 챙겨 일어났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이를 부드득 갈며 말하는 윤 비서를 올려본 강무혁 커피가 가득 담긴 잔을 입에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잔을 툭 쳐서 커피를 쏟아버리는 상상을 하던 윤 비서가 강무혁을 지나쳐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윤 비서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일정이 변경될지도 몰라서 알아보러 갔습니다. 최 대리도 앉아서 차라도 한잔 마시죠. 식사도 제대로 안 했는데.”
“…괜찮습니다.”
다리를 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댄 강무혁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최서율이 제게 닿는 시선을 느끼며 볼 안쪽의 살을 씹어 물었다. 움찔, 어젯밤 혹사당한 입안이 만신창이였다. 점막이 벗겨져 건드리기만 해도 아픈데 씹기까지 했으니 저도 모르게 놀라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최서율을 바라보던 강무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구보다 최서율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제가 미워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입안이 아파 음식을 넣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국이라면 죽이라도 떠서 먹일 텐데 싶어 골이 당겼다.
“부사장님, 변경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날짜는 내일모레로 잡았고 시간은 같습니다.”
“잘됐네요. 그럼 오늘은 계획한 대로 진행하죠.”
자리에서 일어난 강무혁이 제일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그의 뒤를 따르던 윤 비서가 제 옆으로 바짝 붙어 서는 최서율에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최 대리님. 일정이 변경됐는데 가면서 설명하겠습니다.”
“네.”
부사장의 연애를 위해 태국에서까지 고군분투하고 있는 저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우습다고 생각하는 윤 비서였다.
* * *
변경된 일정에 맞춰 2박 치의 짐을 꾸린 최서율이 가방을 들고 침실을 나섰다. 출발까지 시간이 조금 남은 걸 확인하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강무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후. 어깨가 위로 솟았다가 내려올 만큼 크게 한숨을 쉬곤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일정… 저 때문에 바뀐 겁니까?”
“…….”
관자놀이를 기대고 있던 손을 내린 강무혁이 아래로 늘어진 최서율의 손을 잡았다.
“부사장님.”
“언제까지 화낼 건데.”
단단한 손에 붙잡힌 최서율의 손가락이 통통 튀어댔다. 불만으로 퉁퉁 부은 볼이 씰룩거리고 입술이 톡 하고 튀어나왔다. 눈썹을 팔자로 내리는 최서율을 올려보던 강무혁이 잡은 손을 끌어당겼다. 버티려던 발이 고급 카펫에 끌렸다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으아!”
그대로 강무혁의 허벅지 위에 모로 앉혀진 최서율이 습관처럼 강무혁의 어깨로 팔을 감고 눈을 뾰족하게 치떴다.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그런 최서율과 눈을 맞춘 강무혁이 응? 하며 대답을 종용했다.
다정한 눈빛과 말투였지만 어깨와 허벅지를 잡은 손에 들어간 힘으로 보아 그의 인내심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사과도 하지 않았으면서… 화만 풀라고 하십니까….”
“어젯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미안하다고 말한 거 같은데.”
“그건 제가 말하지 않고 있으니까 겉치레로 한 거잖아요.”
“네가 어떻게 알아. 그게 겉치레인지.”
“…….”
강무혁이 한 손에 다 잡히는 허벅지를 주무르고 손을 올려 고집스럽게 당겨진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단추가 서너 개 풀린 강무혁의 셔츠 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최서율이 마주한 눈망울을 일렁였다.
최서율이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던 강무혁이 정말 한계를 느낄 즘, 작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100% 부사장님의 사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그래서 어제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하, 할 때도… 싫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맞추고 있던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 최서율을 나무라듯 잡은 턱을 짧게 흔든 강무혁이 다시 저를 향해 돌아오는 시선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에 최서율의 볼이 조금 더 부풀어 오르고, 입술은 불만으로 뾰족해졌다.
“취임식은 공식적인 일정임에도 당연하게 저를 두고 나가신 건… 너무 했다고 생각합니다.”
“…….”
“물론, 일이니까… 제가 알아서 일어나는 게 맞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잖아요.”
퉁퉁거리는 목소리마저도 듣기 좋았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걸 생각하면 이편이 나았다. 강무혁이 불만에 볼록 올라온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냥 쉬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고 너한테 의견을 물어보지 않은 거 사과할게.”
“…….”
“인제 그만하고 화 풀어.”
강무혁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술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부풀어 올랐던 볼도 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최서율을 보며 웃었다. 작은 턱이 긍정하듯 끄덕여지자 두 팔 안에 가둬놓고 가슴을 맞붙여 끌어안았다. 그제야 최서율이 강무혁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또 그러지 말라고 칭얼거렸다. 두 팔로 감싸도 모자란 강무혁의 어깨를 안고 등을 토닥이는 작은 손이 곰살맞게 움직여댔다.
강무혁이 순하게 풀린 최서율의 눈꼬리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이제 마음 푼 거지? 오전 내내 가시방석에 앉아 있었더니 나도 속이 말이 아닌데.”
“가시방석이라뇨….”
“가시방석이지. 네가 눈도 안 마주치고 말도 안 하고 밥도 제대로 안 먹는데, 내 속이 편했겠어?”
“밥은….”
머뭇거리던 최서율이 제 손으로 제 입술을 살살 더듬었다. 눈도 안 마주치고 말도 하지 않은 건 강무혁을 향한 일종의 시위였지만 식사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음식이 들어갈 때마다 아파서… 못 씹겠어요.”
강무혁이 제 어깨에 기대어 편하게 몸을 늘인 최서율의 입술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여린 입꼬리가 발갛게 부어있었다. 찢어진 게 아니어서 잘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걸 이제야 발견하다니 싶어 굳어버린 강무혁의 얼굴로 난감함이 차올랐다.
“아 해봐.”
“아….”
입꼬리가 아픈지 크게 벌리지 못하고 중간에 멈춰버린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적게 벌어졌지만 안을 들여다보는 건 가능했다. 붉은 점막 위로 군데군데 생채기가 보였고, 목 안쪽까지 빨갛게 부어있었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흉기 같은 성기와 호랑이의 거친 혓바늘에 찔리고 쓸린 곳곳에 핏자국이 선명한 상처가 보였다. 예상보다 조금 더 심한 상태였다. 입 안이 말 그대로 넝마 쪼가리 같았다.
안쪽을 살펴보다 말고 고개를 내린 강무혁이 혀를 길게 내어 입술 바로 안쪽의 살부터 살살 핥아 올렸다.
“으응….”
느리고, 조심스러운 접촉에 흠칫 떨리는 어깨를 감싼 커다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강무혁의 타액이 입안을 척척하게 만들었다. 생채기를 달래듯 그 위로 혀끝이 닿을 때마다 움찔. 몸이 떨렸다.
최서율이 낑낑. 앓으며 강무혁의 가슴팍에 매달렸다. 본능적으로 아래로 당겨지는 턱을 잡아 들어 올린 손이 한 손으로도 으스러트릴 수 있을 것만 같은 턱을 단단히 고정했다.
입안에 가득 차오른 타액을 반은 삼키고 반은 입술 옆으로 흘려냈다. 젖은 입술을 입술로 훔치고 부은 입꼬리에까지 혀를 굴린 강무혁이 흘러내린 타액을 핥아 올려 다시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후으, 응….”
“아파?”
“…조금, 아파요.”
“괜찮아질 거야.”
“으응….”
혀가 반쯤 입에 들어간 상태로 대화를 나누려니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감을 수도 없고, 뜰 수도 없는 상태로 집중한 강무혁을 바라보던 최서율이 제 턱을 잡은 강무혁의 손등을 간질이듯 만져댔다.
쪽, 쪽.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와 타액에 젖은 턱으로 혀를 굴리는 축축한 소리에 미간을 구긴 최서율이 가쁜 숨을 뱉어냈다. 강무혁이 후들거리는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얇은 슬랙스로 감싼 허벅지 안쪽을 주무른 커다란 손이 등허리를 받치고 반쯤 늘어진 최서율의 몸을 쑥 일으켰다.
“더 하면 출발도 못 할 것 같네.”
순식간에 바닥을 딛고 일어난 최서율이 휘청거렸다. 그 앞에 선 강무혁이 흐느적거리는 몸을 가슴으로 받아내며 흰 뺨을 잡아 쥐었다. 몽롱한 눈을 깜빡거리던 최서율이 쑥 올라가는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걱정스러운 듯 저를 바라보고 있는 눈과 마주하니 가슴이 일정한 속도를 벗어나 동동 뛰어댔다. 아침에는 그렇게 얄밉더니 마주한 눈이 또 너무 좋아서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몸을 바로 일으킨 최서율이 흐트러진 제 차이나 카라 셔츠를 툭툭 털어냈다.
“얼른 가요. 제가 수행하는 첫 일정입니다.”
들뜬 목소리가 울렸다. 겨우 반나절 듣지 못했을 뿐인데 그리웠던 기분까지 들었다. 제가 이 토끼에게 얼마나 푹 빠졌는지 다시 깨닫는 강무혁이었다. 사랑 앞에 속절없이 약해지는 저 자신이 싫지 않았다. 최서율에 한해서라면 몇 번이고 져줄 각오가 되어있었다. 마찬가지로 구겨진 강무혁의 셔츠를 붙잡고 탁탁 털어 구김을 펴고 있는 최서율의 입술에 다시 짧은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럼 가볼까. 최 비서?”
“하핫.”
최서율이 부끄러운 듯 입가를 가렸다. 미처 삼키지 못한 웃음소리와 함께 눈꼬리가 사르르 접혔다. 그 위를 부드럽게 쓸어 올린 강무혁이 최서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최서율이 누가 비서랑 손을 잡느냐고 잠시 발끈했지만 싫지 않은 듯 그 위로 제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얽힌 사이로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울렸다.
다정하게 손을 잡은 두 사람이 말레이호랑이 집안에서 야심차게 준비하고 오픈한 파타야 지역의 개인 섬 리조트를 향해 출발했다. 국내선으로 이동해야 하는 두 사람을 위해 마련된 전용기를 보고 최서율의 턱이 빠질 뻔한 건 조금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