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3/64)

42.

태국에 기반을 잡은 말레이호랑이 가문은 기후 특성상 휴양이 발달한 지역답게 리조트와 호텔을 운영하는 기업으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크게 얻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말레이호랑이 가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강무혁의 아버지는 리조트사업을 시작하면서 말레이호랑이 가문을 좋은 예로 삼고, 그들과 협력하는 일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출장은 그 기업의 새 사장 취임식 참석을 시작으로 새로 오픈한 리조트 방문 및 사장과의 오찬 일정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최서율은 사실 이번 출장에 제 역할이 크게 필요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입사 3년 차. 부사장 지원실에서 부사장의 모든 일을 백업하는 역할을 해왔기에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저를 출장 수행 명단에 올린 건 순전히 강무혁의 욕심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였기에 지원실 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이 커다란 집에 혼자 남아 있는 그 며칠이 걱정되기도 했고, 강무혁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은 아주 작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하….”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던 최서율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모레 출발을 하는데, 요 며칠 출근하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지원실 식구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면목이 없어서였다. 이대로라면 출장에 다녀와서도 웃으면서 이 사람들을 바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최 대리. 무슨 고민 있어? 땅 꺼지겠어.”

“아, 과장님… 고민은요 무슨, 이미 고민은 다 털어놓았는데요.”

“근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걱정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선 과장은 입사 때부터 지금까지 사람은 참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조언하고 격려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인데 그 일을 매번 잘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타 부서에서도 모두 탐내는 인재 중의 인재였다. 최서율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닮고 싶은 선배였다.

“사실은요. 과장님….”

선수미 과장 앞에 서면 어릴 적 잘못까지도 고백하게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최서율도 피해 가지 못했다. 속을 꿰뚫어 보듯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선 과장의 앞에 서니 내내 무겁게 저를 짓누르던 고민을 술술 털어놓게 되었다.

“아, 뭐야. 그걸로 지금 이렇게 축 늘어져 있던 거야?”

얘기를 다 들은 선 과장이 잔뜩 걱정하고 있던 표정을 풀며 가볍게 웃었다. 그 가벼운 웃음에 최서율도 울상 지었던 표정을 겨우 풀 수 있었다.

“그런 생각하지 말고 잘 다녀와.”

“사람들이 얼마나 흉보겠어요. 별일도 아닌데 출장까지 따라가는 애인이라니… 저는 부사장님이 정말 좋은데 이런 부분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 눈 생각하면서 연애하는 사람이 어딨어. 어쩌다 보니 좋아한 사람이 부사장님일 뿐이지 출장 가고 싶어서 부사장님이랑 사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런 거까지 걱정하고 고민해?”

“그런가요….”

“그래. 그리고 우리가 최 대리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그런 오해할 사람도 없거니와 그런 오해를 가질 만큼 최 대리가 뭘 잘못하고 있지 않으니까. 제발 그런 쓸데없는 걱정 하느라 이렇게 힘 빼고 있지 마. 어휴! 나는 네 한숨에 건물 무너지는 줄 알고 걱정했다. 야.”

컵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커피를 내리던 선 과장이 다시 생각해도 웃긴 지 피식피식 웃었다. 심각한 표정을 다 지우지 못한 최서율이 민망한 듯 물이 담긴 제 컵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도 과장님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그래요. 고마우면 다음에 밥 사요. 맛있는 걸로.”

“네. 제가 크게 한턱낼게요.”

“기대할게요.”

커피가 담긴 컵을 최서율의 컵에 통, 하고 부딪친 선 과장이 깔깔 웃으며 탕비실을 나섰다. 최 대리가 출장 다녀와서 한턱낸대요! 쩌렁쩌렁하게 떠드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최서율이 얼른 선 과장을 따라 밖으로 뛰어나왔다.

황유진 사원이 벌떡 일어나 우렁차게 손뼉을 쳐댔다.

“최 대리님, 저 맛있는 거 사주기로 하셨던 거 아직 기억합니다.”

“오, 이번 출장 끝나고 우리끼리 한잔? 응?”

술잔을 넘기는 제스처를 취한 박 부장이 기분 좋게 웃었다. 허. 저도 모르게 숨을 터트리는 최서율을 보고 윙크한 선 과장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한바탕 왁자지껄해진 지원실을 둘러본 최서율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다녀와서 우리끼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제가 애인 카드 가져와서라도 크게 한 번 쏘겠습니다.”

“대박이네!”

“고기 먹어요. 고기.”

“그럼 그럼. 뭉치면 고기지. 소고기.”

어쩌면 정말 제 카드가 아닌 강무혁의 카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파티션 위로 엄지를 척! 하고 치켜든 선 과장이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비싸고 좋은 좌석에 앉혀 놓았더니 쉬지는 못하고 내내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이 없는 최서율이었다. 그만하고 좀 자라는 말에 알겠다고 해놓고는 눈을 말똥말똥 뜨곤 기체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바로 강무혁의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소풍 전날 잠이 오지 않는 것처럼 어젯밤부터 잠을 설친 최서율이 피곤할 법도 한데 버티고 있는 게 걱정되어 억지로라도 재우려던 강무혁은 잠들 생각이 없다는 듯 몸을 늘인 채 제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최서율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았다.

중간부터는 아예 포기하고 손을 만지작거리며 간간이 대화를 나누고, 기내에서 제공되는 식사를 하고, 모든 걸 다 신기해하는 최서율에게 하나하나 설명해주며 그의 첫 비행을 지켜보았다. 이륙할 때는 들떠서 무서움도 잘 못 느끼더니 착륙하는 순간에는 바짝 긴장하곤 옆에 있는 강무혁의 손을 꼭 붙잡고 숨을 참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강무혁은 입꼬리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무사히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나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의전팀과 합류한 최서율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방콕 도심으로 이동하는 30분 정도의 시간 동안 꾸벅꾸벅 졸았다.

말레이호랑이 집안에서 강무혁의 집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차량이 제공되었다. 운전기사는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태국인이었는데 태국에서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동행할 예정이었다.

방콕 도심으로 향하는 길은 하나도 제대로 보지 못한 최서율이 잠이 가득 담긴 눈을 하고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강무혁도, 윤 비서도 최서율 몰래 웃음을 삼켜야 했다.

“취임식은 오후 7시부터 시작입니다. 시간 맞춰 로비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5시간….”

손목시계를 확인한 강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서율이 호텔 직원과 배정된 방에 관해 얘기하는 사이 윤 비서의 귓가에 무슨 말을 속삭인 강무혁이 경악하는 윤 비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깨에 얹어진 강무혁의 손을 털어낸 윤 비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사장님.”

타이밍 좋게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오는 최서율을 확인한 강무혁이 윤 비서에게 슬쩍 윙크하며 방금 나눈 얘기에 대해 함구할 것을 종용했다. 윤 비서가 정말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강무혁을 바라보았다.

짐은 이미 각자의 방으로 옮겨진 상태라 가볍게 이동할 수 있었다. 윤 비서는 일반실, 강무혁과 최서율은 최상급 스위트룸에서 묵게 되었다. 강무혁에게 윤 비서처럼 일반실에서 지내겠다고 말했다가 따가운 눈총을 받고 한발 물러났다. 윤 비서님께 죄송해서 어쩌냐고 중얼거리자 강무혁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반실과 엘리베이터도 다른 이 고급 호텔은 최서율에게는 너무도 신기하고, 어려운 신세계였다. 매우 현대적으로 지어진 건물에 태국의 전통 소품으로 장식된 내부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한껏 자아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먼저 인사하며 자리를 떠나는 윤 비서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최서율이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바짝 올라와 있던 어깨를 늘어트렸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최서율의 어깨를 살살 주물러주는 강무혁이었다. 손이 저리도록 긴장했던 게 풀리니 다리까지 후들거리는 지경이었다.

“윤 비서님께 방해되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어요.”

“방해?”

“네… 사실 이 일정에 저까지 따라온 건 오히려 짐을 늘리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윤 비서님이 저까지 신경 쓰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윤 비서가 들으면 눈물 나겠네.”

서울에서 출발할 때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윤성연 비서가 강무혁의 고등학교 후배라는 것과 두 사람이 회사 밖에서는 스스럼없이 지낸다는 것이었고 그들의 티키타카가 가히 환상적이라는 것이었다.

“윤 비서님이 들으시면 한숨 쉬시겠죠.”

“그럴 수도 있고.”

금장식으로 꾸며진 엘리베이터는 숨만 쉬고 있어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휘황찬란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후덥지근한 날씨를 고려해 엘리베이터에도 에어컨 바람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무섭게 손을 잡는 강무혁에게 화들짝 놀랐다가 둘만 있는 공간에 안심한 듯 몸에 힘을 푼 최서율이 그의 두꺼운 팔뚝에 머리를 기대며 늘어졌다.

“피곤해?”

“네, 긴장한 게 풀리니까… 조금….”

최서율이 작게 하품하며 고개를 돌려 이마를 강무혁의 셔츠 위로 슬슬 문질렀다. 윤 비서의 눈치를 보느라 긴장한 건지, 명색이 첫 출장이라고 긴장한 건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둘만 남으니 긴장이 풀리고, 몸 곳곳이 아픈 것 같았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보던 강무혁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다른 손을 빼내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토끼일 때의 최서율을 쓰다듬듯 정수리부터 목덜미, 귀 뒤쪽까지 섬세하게 만져주는 손길에 커다란 눈이 끔뻑거렸다.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엘리베이터 안에서 웅웅 울리는 강무혁의 목소리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인 최서율의 입술에 폭신한 입술이 닿았다. 도르륵,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피듯 눈치를 보는 입술에 다시 입 맞춘 강무혁이 숙였던 몸을 일으켜 제자리로 돌아갔다. 맞잡은 손의 손등으로 호랑이의 까슬한 손끝이 둥글려졌다.

다정하게 이끄는 손을 잡고 객실에 입성한 최서율은 한동안 방을 구경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국적으로 꾸며진 방은 여느 도시의 호텔과는 확실히 달랐다. 휴양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고려했다는 게 충분히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강무혁이 달라진 실내장식을 꼼꼼히 확인하며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져 놓았다. 넥타이와 시계까지 풀어내고 나서야 답답하던 셔츠의 단추도 풀 수 있었다. 여름용이라고 해도 이 습하고, 더운 기운을 이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에어컨이 있어도 절대 이 기후에서는 살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가벼워진 몸을 하고는 통유리에 딱 달라붙어 방콕 도심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최서율의 뒤로 다가갔다.

“이제 좀 쉬자.”

“네, 저는 좀 씻으려고요.”

“그래, 씻어.”

허리를 끌어안은 강무혁의 품에 잠시 몸을 기댔던 최서율이 두꺼운 팔에서 벗어나며 재킷을 벗었다. 마찬가지로 넥타이와 시계까지 풀어 강무혁의 것 옆에 올려 두고 단추를 풀던 최서율이 소파에 길게 앉아 저를 바라보고 있는 강무혁과 시선을 마주했다.

매일 보는 얼굴이고, 이제는 더 자세히 깊게 알고 있는 얼굴인데도 갑자기 귓가가 홧홧했다. 그의 눈이 땀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제 셔츠에 닿아있다는 걸 알기 무섭게 화들짝 놀라며 몸을 휙 돌렸다.

푸흡. 강무혁의 웃음소리에 더욱 민망해졌다. 벌거벗은 몸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보였고, 봤음에도 이런 분위기에는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제가 부끄러워졌다. 최서율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씨, 씻겠습니다.”

양말을 벗어 정리해놓고 빠르게 욕실로 들어간 최서율이 속옷까지 벗어 놓고 매우 널찍한 샤워부스 안으로 발을 디뎠다. 안으로 들어온 최서율이 샤워기의 물을 틀기 전 바깥을 내다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깥 세면대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어….”

거울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제 몸이 아닌 강무혁의 맨 등이 보였다. 굵직한 근육이 자리 잡은 너른 어깨가 꿈틀 움직였다.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난 최서율의 맨 궁둥이가 차가운 타일 벽에 닿았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이, 이게 왜… 보이는 거예요?”

“요즘 유행 아닌가? 이런 호텔이나 리조트가 꽤 되는 거 같던데.”

“꽤 된다고요?”

최서율이 갑자기 켜진 샤워기에서 쏟아진 물에 어푸거리며 벅벅 세수하기 시작했다.

홀딱 벗은 상태로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욕실로 들어온 강무혁이 샤워부스의 문을 열어젖힌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연인이 샤워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가 들어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일어난 일이라 나가라고 말할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두 사람이 서고도 남을 만큼 넓은 샤워부스에서 강무혁의 손에 씻김 당한 최서율이 뜨거워진 얼굴을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샤워볼과 강무혁의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발가락 끝이 간질거렸다.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부끄러워해.”

“이상해요. 집이 아니어서 그런가….”

“어떻게 이상한데.”

기분이 이상하긴 한데 어떻게 이상하다고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최서율이 뚱해진 눈으로 강무혁을 올려보았다.

웃음을 머금은 입매와는 다르게 그의 뜨거운 눈이 저를 바라보는 게 견딜 수 없을 만큼 간지러웠다. 발끝부터 올라오던 간지러움이 무릎 뒤쪽을 강렬하게 치고 빠르게 아랫배까지 도달했다. 저도 모르게 발끝을 모아 꿈지럭거린 최서율이 강무혁의 맨 어깨에 묻은 거품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어깨를 쓰다듬고, 단단한 빗장뼈를 지나 가슴팍을 가로지른 작은 손이 쩍쩍 갈라진 복근에 닿았다. 타일 벽을 짚은 강무혁의 기다란 팔뚝으로 굵직한 힘줄이 올라왔다. 더 내려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손을 보던 강무혁이 최서율의 젖은 머리카락에 입술을 내렸다.

“왜 망설여.”

“이게… 맞는 건가 싶어서요.”

강무혁이 웃자, 젖은 두피로 바람이 일었다. 꿈지럭거리는 손을 붙잡아 아래로 내린 강무혁이 움츠러든 최서율의 손을 제 성기 위에 올려놓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해보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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