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평소와 다름없는 출근길이건만 큰 결심을 한 최서율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정신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손등을 토닥거린 강무혁이 슬며시 웃었다.
“그렇게 긴장됩니까?”
“네…. 저 아무래도 청심환이라도 하나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 사서 들어가야겠네.”
“후….”
강 회장과 토끼 마을 촌장님, 토끼 마을을 지키는 산군 호랑이가 모인 자리에서도 떨지 않고 자기 생각을 또박또박 말하던 최서율은 중요한 결심을 하고는 며칠 전부터 정신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회사에서는 자기 일을 꼼꼼하게 챙기는 최 대리로 있다가 집에만 오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져서는 이미 결정한 일을 거듭 고민하곤 했다.
“누가 등 떠밀지도 않았고, 강요한 일도 아니니까 지금이라도 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주차장에 차를 세운 강무혁이 최서율을 돌아보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최서율이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많은 게 변할 텐데 저만 숨어있을 수는 없죠. 할 수 있습니다.”
강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오늘, 최서율이 토끼 수인이라는 걸 부사장 지원실에 알리기로 했다. 어쩔 수 없이 밝힌다기보다는 토끼 수인들이 밖으로 나와 생활하고, 더는 정체를 감추지 않기로 한 것에 가장 먼저 발맞춰 움직일 생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이 의견에는 다른 누구도 개입하지 않았고, 심지어 강무혁도 어떠한 의견도 내지 않았다. 오로지 최서율만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지켜보고, 최서율의 말에 동의해주는 정도가 다였다.
“내가 있으니까.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너를 지켜줄 수 있는 호랑이가 곁에 있는데, 겁먹을 필요가 있나?”
잘 정돈된 머리카락을 결에 맞춰 손으로 쓰다듬은 강무혁이 보송보송한 솜털이 올라온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강무혁의 손목을 덧잡은 최서율이 배시시 웃었다. 곱게 접히는 눈꼬리에 입술을 내린 강무혁이 갈까? 하고 속삭였다.
작은 가슴이 위로 솟을 만큼 크게 숨을 들이켠 최서율이 당차게 차 문을 열고 내렸다.
* * *
“어, 그러니까… 가만있어봐라. 그러니까. 그 최 대리가, 토끼….”
횡설수설하는 박 부장을 밀쳐낸 선 과장이 최서율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대박, 나 할아버지한테 얘기만 들어봤지. 실제로 토끼 수인 보는 건 처음이에요! 왜 그동안 말 안 했어요! 진짜 대박이다. 진짜!”
“그러게요. 저도 어릴 때 들어봤던 기억은 나는데 이제는 거의 멸종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세상에.”
개 수인인 유 대리까지 나서서 토끼 수인은 말로만 들어 봤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수인에 대해 배우기는 하지만 수인이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는 박 부장과 황유진 사원은 뒤에서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옆으로 고경훈 비서가 슬쩍 붙어 섰다.
“토끼 수인이라니, 정말 신기하죠?”
“고 비서님은 알고 계셨어요?”
“아뇨.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토끼 수인이라도 딱히 신기할 게 뭐가 있어요. 인간들 눈에는 수인이 다 신기하고 그런 거지.”
황유진 사원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박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서율의 손을 잡고 팔도 주물러보고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눈을 빛내는 사슴 수인 선수미 과장을 지켜보는 눈들에 호기심이 덧씌워졌다.
이미 사회 안에 동화된 수인을 특별히 신기해할 필요는 없지만 ‘토끼 수인’의 등장은 어른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소재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하얀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만연한 최서율에게 모두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선 과장님, 제가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뭘 그런 거로 죄송하고 그래요. 어차피 부사장님도 아시고, 회장님까지 알고 계신다면서요. 아,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쌓아왔던 정을 생각하면 조금? 정말 조오오오금. 섭섭하긴 하지만 그건 최 대리님이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걸 테니까 잊어 줄게요. 신경 쓰지 말아요.”
“정말 감사해요.”
“생각해보면 가끔 최 대리님이 뭘 그렇게 열심히 먹나 싶었는데 토끼들이 원래 건초나 채소를 계속 먹잖아요. 그런 거랑 일맥상통하는 건가? 나는 최 대리님이 너무 열심히 먹어서 집에 가면 맨날 굶고 있다가 회사 나와서 겨우 먹는 건 아닌지 걱정도 했다고요.”
유 대리가 말을 얹자 최서율이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일맥상통하는 거 맞아요. 오히려 밥은 조금 먹고 간식을 많이 먹어서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토끼 습성을 다 버리지 못해서 그랬던 거예요. 집에서 굶고 그러지 않습니다.”
다행이라고 말하는 유 대리의 선한 눈에 웃음이 가득해졌다. 너무 신기하다며 최서율의 손등을 쓰다듬고 있는 선 과장의 뒤로 스윽, 어둠이 덮쳐왔다.
평소에는 멀리서도 매우 기민하게 느끼던 부사장의 기운을 너무 즐거운 나머지 제때 알아채지 못한 선 과장이 바짝 다가온 맹수의 기운에 화들짝 놀라 파르르 떨었다.
“부사장님?!”
“선 과장님, 그 손은 놓고 얘기하죠?”
부드러운 목소리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선 과장의 손에서 최서율의 손을 빼낸 강무혁이 냉큼 손을 뒤로 빼려는 작은 손을 힘주어 잡고 앞으로 당겼다. 의도치 않게 부사장의 옆에 서게 된 최서율이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려댔다.
“최서율 씨가 토끼 수인이라는 것 말고도 전할 말이 하나 더 있어서 왔습니다.”
“…….”
‘토끼 수인’ 때문에 안 그래도 술렁였던 분위기가 한층 더 심란해졌다. 부사장의 입에 주목하면서도 그 옆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최서율에게 다시 시선이 쏠렸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으려니 입이 바짝 말랐다. 강무혁의 팔을 잡아끌 듯 붙잡은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파닥파닥 튀어댔다.
“저… 혹시, 두 분 사귀신다고….”
강무혁이 그런 최서율을 바라보던 짧은 순간,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 유 대리가 다른 사원들의 눈치를 봤다. 윤 비서가 눈을 지그시 감았고, 고 비서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 대리와 눈이 마주친 박 부장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사장님, 그… 회사에 소문 다 났습니다. 같이 출퇴근하고, 회사 근처에서 손잡고 식사도 하셨던데… 회사에 인원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계시죠? 허허허. 저희야 뭐, 좋은 일이니까 모른 척해드리자 했는데, 이 정도면 뭐….”
“회사 복사기도 다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손수건을 꺼내 땀을 훔치는 박 부장이 말을 마치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선 과장이 애써 웃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아….”
“그렇습니까?”
윤 비서가 굉장히 골치 아프다는 듯이 미간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이미 회사에 소문이 다 나 있었는데 본인들만 몰랐다는 사실이 우습지만, 부사장의 위치를 생각하면 마냥 웃을 일만도 아니었다.
“부사장님은… 최 대리님이 입사할 때부터 토끼 수인인 걸 알고 계셨습니까?”
막내 황 사원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연히 알게 됐을 뿐입니다.”
“아아….”
고개를 끄덕이더니 엄지를 척! 하고 들어 올린 황 사원이 최서율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축하드려요. 최 대리님. 호랑이와 토끼 가족들에게도 공인받은 사이인데 지원실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기분이 치솟기도 했다. 고맙다고 작게 속삭인 최서율이 어디로든 숨고 싶은지 자꾸만 강무혁의 팔 뒤로 얼굴을 감췄다.
“두 분 한창 뜨거울 때라는 거 알고 있지만, 회사 근처에서는 처신을 조심해주시면 좋겠고, 두 분의 연애가 일에 지장을 주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불쑥 끼어드는 칼 같은 윤 비서의 말에 최서율이 얼른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못마땅하다는 듯이 윤 비서를 노려본 강무혁이 다시 허리를 숙이는 최서율의 셔츠 깃을 잡아 쥐었다.
“어억….”
몸이 뒤로 젖혀지며 숙였던 허리를 들어 올린 최서율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짧게 버둥거렸다. 강무혁이 손을 떼며 구겨진 셔츠 깃을 똑바로 펴주었다.
“뭘 그렇게 안절부절못합니까.”
“아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저는….”
당황하는 최서율의 얼굴을 보며 부사장 지원실의 사원들도 덩달아 진땀을 흘려댔다. 윤 비서의 말 중, 틀린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부사장을, 그것도 열애를 발표한 부사장을 앞에 두고 저렇게까지 말해도 되는 걸까 싶어 괜히 눈치가 보였다. 부사장과 윤 비서의 짧은 신경전에 좌불안석이 되어 말이 없어진 지원실 식구들이 강무혁의 품으로 포르륵, 딸려 들어가는 최서율을 바라보았다.
“윤 비서 충고는 잘 새겨듣도록 하죠. 할 말은 다 한 거 같은데 둘이 얘기 좀 하고 나가겠습니다.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일에 지장 없도록 업무 시작하시죠.”
최서율이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펄쩍 뛰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끌어안다니 예상에 없던 행동이라 놀랐는지 무언의 항의를 해대는 움직임이 격해졌다. 그렇다고 몸을 꽉 붙잡고 있는 강무혁을 밀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서둘러 회의실을 비우며 나가는 동료들의 뒷모습도 보지 못하고 느슨해진 팔에서 빠져나오며 강무혁의 가슴팍을 노려보았다. 불만을 가득 담은 입술이 씰룩거렸다.
마지막으로 자리를 비운 윤 비서가 회의실 문을 닫자 강무혁이 최서율의 얼굴을 잡아 올려 눈을 맞췄다.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지 않으려는 최서율의 얼굴을 억지로 끌어당기자 발이 뒤로 물러났다. 입술이 앞으로 비죽 튀어나오고, 눈살은 못난 모양으로 찌푸려진 채였다.
“이게 화낼 일은 아닐 텐데?”
“사람들 앞에서 무례하게 구는데 화내지 않을 사람이 어딨습니까.”
최서율은 강무혁이 사람들 앞에서 힘을 과시할 때, 제게 그 힘을 쓸 때를 가장 싫어했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나오는 힘과 신체적인 힘. 두 가지 모두 포함되었다. 그럴 만한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해 달라고 부탁하곤 했지만, 강무혁은 기분에 따라 종종 누군가 보는 앞에서도 힘을 과시하곤 했다.
사람들, 그것도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제 손을 잡고, 당기고, 끌어안는 행위와 그걸 거부하는 제게 가해지는 물리적인 압박은 최서율을 심통 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래서 기분 나빴습니까?”
“회사에서는 그러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했지. 그런데 선 과장이 네 손을 막 주물럭거리잖아. 거기다가 회사에 소문이 다 났는데 귀띔도 안 해준 윤 비서도 괘씸했고, 우리 연애에 자기가 훈수 두는 것도 듣기 싫었고.”
“…이유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래도 윤 비서님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선 과장님과도 과도한 접촉을 한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지원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막 끌어당기고….”
강무혁이 최서율을 회의실 책상으로 밀어붙였다. 다가오는 강무혁의 너른 가슴팍에 밀려 뒷걸음질 치던 엉덩이가 책상에 닿았다. 어설프게 엉덩이를 걸친 채 뾰족하게 나온 입술을 모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래서 화가 났어?”
“…화가, 난 건 아닌데….”
“그런데 입술은 계속 내밀고 있을 거고?”
“…….”
빤하게 올려보는 눈동자가 반질거렸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강무혁이 응? 하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최서율이 입술을 안쪽으로 천천히 말아 물며 고개를 저었다.
진심으로 화가 났다거나,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감정적인 부분은 자제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을 뿐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줄 거라는 예상을 빗나간 호랑이가 조금 얄밉기는 했지만, 뜨겁게 바라보는 눈빛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지금 나가봐야 하는데, 사내 연애의 묘미로 뽀뽀 한 번 하고, 나가는 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가 방금…!”
“쉿.”
바로 입을 열며 발끈하는 볼을 잡은 강무혁이 작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펄쩍 뛰어오르던 어깨를 짓눌렀다. 책상에 아예 주저앉은 최서율을 향해 상체를 기울인 강무혁이 입술 끝에 제 입술을 가볍게 맞대며 웃었다.
“집에서는 부사장이라고 부르면 엉덩이 맞을 줄 알아.”
“부사장… 으음, 응….”
뽀뽀라고 하더니 깊숙하게 혀를 밀어 넣고 진득하게 핥아 올린 강무혁이 빳빳하게 당겨진 최서율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누가 들어올까 싶어 영 집중하지 못하자 나무라듯 가느다란 목을 붙잡아 힘을 주었다. 최서율이 두 손으로 강무혁의 팔을 꾹 눌러 잡았다. 책상이 살짝 뒤로 밀리며 끼긱,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렸다.
“으응! 으…”
뭐라고 말하듯 움직이는 최서율의 혀를 감아올린 강무혁이 짧은 순간에 젖어 버린 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가 놓더니 다시 그 위에 제 입술을 가볍게 몇 번 찍어 눌렀다. 쪽, 쪽. 간지러운 소리가 울렸다.
“일하러 가자, 서율아.”
못마땅한 듯 힘이 들어간 눈가에도 입 맞춘 강무혁이 만족한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열이 오른 귓가를 주무르듯 만지작거리자 최서율이 바닥을 박차며 벌떡 일어났다. 책상이 다시 뒤로 밀리며 끽! 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이제부터 회사에서는 뽀뽀 금집니다. 흥!”
벽처럼 단단하고, 들처럼 너른 가슴팍을 퍽, 밀친 최서율이 쿵쿵 소리를 내며 걸어 회의실을 나섰다. 빠른 몸짓으로 가슴팍을 치고 나서는 최서율의 뒷모습을 보던 강무혁이 허! 하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가슴께를 슬슬 문질렀다.
<2권 끝.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