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강무혁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집중하는 최서율의 눈이 한여름의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예쁘게 반짝거리는 눈 너머에는 걱정이 한가득 서려 있었지만, 강무혁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허벅지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려 무릎을 둥그렇게 쓰다듬었다.
“일단, 우리 아버지. 회장님을 만난다고 하면 문전박대당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또, 실현할 수 있든 하지 않든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
“언제까지 그 산골 안에서 숨어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토끼 수인에 대한 인식도 다르고, 아니 토끼 수인이 아직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긴다고 해도 법의 보호 안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나쁜 놈들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호랑이들이 있는 한, 토끼 수인을 함부로 건드릴 존재는 없을 겁니다.”
최서율은 제가 촌장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배시시 웃었다. 사랑스러운 조카들이나 그 아이들의 친구들… 또 태어날 아기 들을 생각하면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살아가는 삶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았다.
장성해버린 토끼 수인들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더 크게 성장할 발판을 마련해주는 일은 지금의 어른들이 해야 할 몫이 아닐까. 최서율은 제 아버지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싶어졌다.
“부사장님, 제가… 혹시, 회장님을 먼저 만나 보면 어떨까요.”
“회장님을 만나면 회장님의 아내인 우리 어머니도 만나야 하고 어쩌면 사장님도 만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최서율 씨는 토끼 마을 촌장 아들의 자격으로 문턱을 넘겠지만, 이미 우리 집안에서는 최서율 씨를 제 연인으로 알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미 가족들이 토끼를, 토끼 수인을 매우 궁금해한다는 걸 전달했기 때문에 최서율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기대되는 강무혁이었다.
꼭 어떤 결실을 보기 위해 인사를 한다기보다는 최서율이 겪은 상황이 특수했고, 최 회장의 도움을 조금이라도 받았으니 감사 인사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최서율이 제 존재를 드러내는 게 부담스럽다고 하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도 말해 둔 상태였다.
“부사장님도 저희 부모님을 만나 보셨으니… 저도 부사장님의 부모님을 만나 뵙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네… 저를… 토끼 마을 촌장의 아들로 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없는 사실도 아니고… 부사장님의 여, 연인으로… 인정해주신다면… 저는 더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연인이라는 말이 어쩐지 간지러웠다. 괜히 귓가를 박박 긁은 최서율이 이마를 강무혁의 맨 어깨에 댔다. 발긋발긋 색의 짙어지는 귓바퀴를 입술로 물고 쪽쪽 거리던 강무혁이 최서율을 번쩍 들어 올렸다.
꺄아! 저도 모르게 소리친 최서율이 목을 꽉 끌어안았다. 허공에 마구 구르는 두 발을 단단히 붙잡은 강무혁이 그렇게 움직이면 던져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소리와 하지 말라는 웃음소리가 거실 폴딩도어를 넘어 마당에도 울려 퍼졌다.
막 담벼락 아래의 작은 입구로 고개를 들이민 오소리 한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당 안을 살폈다. 아직 훤한 대낮인데 해를 모조리 가려버린 호랑이의 침실 문이 굳게 닫혔다.
* * *
“긴장됩니까?”
“네. 저 오늘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습니다.”
“저런….”
먹성 좋은 토끼가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로 긴장했다니 안쓰러우면서도 웃음이 났다. 이렇게 떨면서도 제 부모님을 만나겠다고 예쁘게 차려입은 걸 보니 사랑스럽기도 했다.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며 셔츠를 하나 더 챙기기에 왜 그러냐고 물으니 저녁에 입으려고 따로 챙긴다고 말하는 최서율이었다. 혹시라도 땀 냄새가 나서 후각이 예민한 호랑이 부모님의 신경을 건드릴까 봐 그렇다고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입도 몇 번 맞췄다. 생각도 저처럼 깜찍하게 하니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커다란 대문을 넘어서자 숨을 흡. 참은 최서율이 허벅지에 가지런히 올려 두었던 손을 꿈지럭거리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그 손을 토닥인 강무혁이 작은 손을 꽉 잡아 쥐었다.
“내가 있는데 뭘 그렇게 걱정해.”
“그래도… 부사장님께는 부모님이지만, 저한테는 회장님이고 또… 휴….”
“부모님 앞에서도 그렇게 정 없게 부사장님이라고 부를 겁니까.”
호칭 문제로 몇 번이나 대화를 나누었지만, 접점을 찾지 못한 두 사람이었다. 부사장님 말고는 어떻게 불러도 다 받아주겠다는 말에 최서율은 자꾸만 망설였다. 편하게 부르는 일이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사생활에서 습관이 되어버리면 회사에서 실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문제였기에 지금까지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도 저를 부사장님이라고 부를 최서율을 생각하니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오늘만이라도 그 호칭은 뺍시다.”
“그럼 뭐라고… 부르죠?”
“그건 네가 생각해봐야지.”
“벌써 다 왔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게요. 순발력을 발휘한다든지 해봅시다.”
“그런….”
“아, 부사장이라고 부르면 그 숫자만큼 엉덩이라도 때려줄까.”
“제가 애도 아니고….”
입을 가리며 슬쩍 웃는 강무혁을 얄밉지 않게 흘려본 최서율이 퉁퉁거렸다. 잘 정돈된 정원을 지나 저택 앞에 도착한 차가 부드럽게 멈췄다. 내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숨만 몰아쉬고 있는 최서율을 강무혁이 에스코트했다. 강무혁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린 최서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마어마한 크기의 건물에 입을 떡 벌렸다.
“우와아….”
“최서율 씨 고향에 있는 집도 웬만한 집보단 크던데 이걸 보고 놀랍니까?”
“한옥이랑… 다르지 않습니까.”
저도 모르게 ‘부사장님’이라고 부를 뻔한 최서율이 튀어나오려던 말을 얼른 혀 아래에 감췄다. 강무혁이 그런 최서율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안아 이끌었다.
넓고, 큰 현관을 지나 들어온 집안에는 냇물이 흐르는 듯한 물소리가 들렸고, 호랑이의 냄새가 가득했다. 낯선 호랑이의 냄새에 한걸음 물러나는 최서율을 다독인 강무혁이 괜찮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최서율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에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낯선 호랑이의 냄새까지 익숙해진 건 아니었기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잔뜩 긴장한 최서율을 이끌고 응접실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가 가장 빨리 반응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안녕하십니까. 최서율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서율 씨.”
허리를 꾸벅 굽혔다가 올라온 최서율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는 호랑이 어머니를 보고 어깨를 움찔 튕겼다. 강무혁이 등을 붙잡아 주어 뒤로 넘어가지 않았을 뿐이지 예의 없이 한걸음 물러날 뻔해 진땀을 흘렸다.
“저도 반갑습니다. 사모님.”
“어머, 사모님이라니… 편하게….”
빤히 바라보고 있는 아들의 눈치를 살핀 어머니가 평소보다 한 톤 높아지려던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웃었다. 잔뜩 긴장한 최서율의 손을 덥석 잡은 그녀가 편하게 부르라며 손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인자한 어머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여인을 보며 배시시 웃은 최서율이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다. 어머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본 강무혁이 한껏 올라갈 뻔한 입꼬리를 단속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그래. 반갑네. 편하게 앉게나.”
“최서율 씨, 나도 있어요.”
“아,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옆에서 불쑥 끼어들며 손을 흔드는 강무혁의 형인 사장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란 최서율이 파르르 거리자 강무혁의 눈이 뾰족해졌다.
“형은 왜 왔어?”
“내가 못 올 데 온 것도 아닌데 야박하게 굴지 마라.”
형제가 기 싸움을 시작하자 응접실의 분위기가 한층 달라졌다. 가족들은 모르겠지만 토끼 수인인 최서율은 그걸 기민하게 느끼곤 저도 모르게 강무혁의 팔뚝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등에 땀이 나는 것 같았다. 호랑이 앞이라서도 있겠지만 처음 만나는, 그것도 강무혁의 가족 앞이라 너무 많이 긴장한 탓이었다.
토끼 마을 산군 호랑이에게 얘기는 들었다며 편하게 이야기의 물꼬를 튼 강 회장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는 듯이 최서율에게 꼬치꼬치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강무혁은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건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최서율이 워낙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바람에 듣고만 있는 처지가 되어야 했다.
강 회장은 토끼 마을과 토끼 수인에 큰 관심을 보였다. 게다가 진화한 수컷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며 흥미롭게 최서율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서율은 마치 면접을 보는 기분으로 토끼 마을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계기와 서울에 올라와 어떻게 지냈고, 어떻게 입사하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흥미진진하게 그 이야기를 듣던 강무혁의 형이 최서율의 이마에 맺힌 땀을 보고 푸흡. 작게 웃었다.
“아버지, 면접 보세요? 왜 이렇게 질문을 많이 하세요. 최서율 씨 땀에 다 젖겠네.”
“그러게요. 여보. 궁금한 마음은 알지만 일단 밥부터 먹이고 얘기해도 늦지 않겠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궁금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말하는 최서율의 손을 잡은 강무혁이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최서율 씨가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식사하면서 얘기하시죠.”
“저, 괜찮은….”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을 꾹 눌러 잡은 강무혁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손뼉을 짝짝 쳐댔다.
“상 차려 놓은 지 오래됐네. 다 식겠다. 얼른 가요.”
강 회장과 큰아들을 일으켜 식당으로 향하던 어머니가 강무혁의 손을 꼭 붙잡고 긴 숨을 내쉬는 최서율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어머니는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꼼꼼히 확인했다. 골고루 잘 먹는 남편과 큰아들에 비해 채식보다는 육식 위주의 식단을 더 좋아하는 작은 아들을 생각해 고르고 고른 반찬들이었다. 게다가 데려온 사람이 토끼 수인이라고 하니 식탁은 더욱 풍성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와. 어머니 잔치하세요?”
“잔치는 무슨… 손님 온다는 데 신경 좀 썼지.”
10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테이블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최서율이 강무혁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긴장한 탓에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더니 허기가 몰려왔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강 회장은 식사 중에도 호구조사를 멈추지 않았다. 최서율이 조심스럽게 자기가 토끼 마을 촌장님의 다섯 번째 아들이라고 밝히자 호랑이 부모님과 큰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섯 번째?”
“네, 형제들이 좀 많습니다.”
“총 몇이나 되지?”
“열두 명입니다.”
“열 두울??”
얘기를 들으며 자기 식사에 집중하던 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처음 강무혁이 최서율의 형제 숫자를 듣고 놀랐던 것만큼 격한 반응이었다. 어색하게 웃은 최서율이 그날과 비슷하게 그 정도는 마을에서 적은 편에 속한다고 말해 가족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다음 주에 그 지역 산군 호랑이랑 촌장님이 오신다고 했는데, 그럼 자네 아버지라는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오. 그거, 참 신기하구먼.”
강 회장의 눈에 긍정적인 웃음이 걸리자 마음이 편해진 최서율이 열심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손을 아무리 열심히 놀려도 강무혁이 먹는 속도나 양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지만 고기와 채소를 골고루 먹는 최서율이 예쁘다는 듯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이미 ‘토끼 좋아’가 쓰여있는 것 같았다.
“이거 좀 마셔요.”
“네, 감사합니다. 부사….”
말을 하려다 말고 커다란 눈을 도르륵 굴려 강무혁의 눈치를 살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손등에 머리를 받친 채 그런 최서율을 보던 강무혁이 작게 웃었다. ‘한 대.’ 입 모양으로 말하는 강무혁을 보며 낭패감이 짙어진 얼굴로 입술을 꾹 씹었다 놓은 최서율이 돌연 눈꺼풀을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자기도 좀 드세요.”
“풉.”
“흠흠.”
“어머….”
여유롭게 굴던 강무혁의 얼굴이 퍼석하게 굳어버린 걸 본 최서율이 만족한다는 듯이 강무혁의 앞에 물컵을 밀어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 호칭이 아주… 강무혁스럽지 않고 좋네.”
“죄송합니다. 둘이 있을 때 부르는 습관이 나와 버려서….”
“듣기 좋은데 왜요. 우리는 괜찮아요. 역시 젊은 사람들이 연애하면 저런 재미가 있네요.”
웃으며 말하는 어머니와 함께 환하게 웃은 최서율이 얼굴을 뚫어버릴 듯 바라보는 강무혁에게 그만 보라는 듯이 눈짓했다.
“우리 무혁이도 그렇게 불러주나요?”
“아뇨… 무, 무혁 씨는… 아직도 ‘최서율 씨.’하고 불러주세요.”
‘최서율 씨.’ 할 때는 강무혁의 목소리를 흉내 내듯 목소리를 굵게 만들어 웃음을 자아냈다. ‘부사장님’이라는 호칭 대신 ‘무혁 씨’라는 호칭을 얻어낸 최서율은 한결 편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웃지 못하는 사람은 강무혁 혼자뿐이었다.
“무혁이 너도 좀 부드럽게, 다정하게 불러주고 그래.”
“왜 그렇게 말하지? 나도 서율아. 하고 불러주잖아.”
“그….”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 용을 쓰다 보니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건들면 톡, 하고 터질 것처럼 뜨겁고, 팽팽해지는 작은 귀를 보던 강무혁이 피식. 하고 작게 웃었다. 입술이 작게 옴쭉거리는 걸 보다가 참지 못하고 테이블 아래로 최서율의 손을 꾹 잡아 쥐었다.
작은 손이 손바닥 안에서 파닥거릴 때마다 강무혁의 얼굴로 웃음이 짙게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