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64)

37.

몸을 뒤척이던 최서율이 반짝 눈을 떴다.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어떻게 누워도 몸이 불편했다. 저도 모르게 낑. 앓는 소리가 나왔다. 드레스룸 문을 열고 나온 강무혁은 이미 출근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는 듯 멀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강무혁이 일어나 허둥거리는 최서율을 보곤 완성되지 않은 넥타이를 잡고 침대로 다가갔다.

“좀 더 자요. 일주일 정도는 쉴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아닙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고개를 저은 강무혁이 침대에 앉으며 일어나려고 용을 쓰는 어깨를 눌러 눕혔다. 목까지 이불을 올려 덮어주고 가슴께를 토닥인 강무혁이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는 최서율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그 몸으로 출근은 무리일 것 같은데.”

“일어나서 조금만 움직이면 괜찮아집니다. 출근할 수 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닌데, 모르겠습니까?”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무구한 눈이 강무혁을 향했다.

“정말?”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고 시선을 맞추는 강무혁을 바라보던 최서율이 베개에 머리를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최서율의 자그마한 콧잔등이 주름을 만들어 내며 꼼질꼼질 움직여댔다. 곧이어 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이불 속에서 빠르게 빠져나온 손이 입가와 코를 살살 문질러댔다.

“이제 좀 알겠어요?”

“…….”

고개만 끄덕이는 최서율의 귓가를 만지작거린 강무혁이 아직 다 매듭이 지어지지 않은 넥타이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서율에게 가득 묻은 호랑이의 냄새가, 그가 누구의 것인지 보여주고 있어 속이 꽉 들어찼다. 정사의 흔적이 가득 묻은 최서율을 밖에 내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쪽으로는 유난히 겁이 많은 최서율인지라 재빨리 강무혁의 의중을 파악하고 얌전해졌다. 최서율을 등진 강무혁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출근 준비를 하는 강무혁을 구경하며 이불 속에서 한참 꿈지럭거리던 최서율이 다시 늘어졌다. 토끼 귀가 올라와 있던 머리를 쓸어주고 혹시나 에어컨 바람에 춥지 않을까 이불을 봐준 강무혁이 산을 출발해 회사가 아닌 본가로 향했다.

이제는 회사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간보다 집에서 산을 돌보며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일을 해결하기 위해 서울까지 행차한 토끼마을의 산군 호랑이를 직접 만났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쏟아질 잔소리가 벌써 목을 죄어오는 기분이었다. 산군 호랑이의 아들 호랑이의 귀띔으로 어디까지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대충 파악됐지만,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아직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서울 북악산 중턱에 있는 본가의 대문은 언제봐도 쓸데없이 크고, 높았다. 호랑이의 구역에 함부로 침입할 사람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위용을 뽐내고 싶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강무혁이었다.

대문을 통과해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본가의 건물은 본래는 한옥이었으나 오랜 옛날, 몇 번의 전란을 거치고 주인이 바뀌고 시대가 변하면서 재건축을 반복했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건물 앞에 주차한 강무혁이 저를 반가워하며 달려 나오는 고용인들에게 인사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 집에서 나고 자랐으니 길 찾기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응접실을 지나 연못이 보이는 통유리 길을 따라 두어 번 꺾어지면 아버지의 서재가 나온다. 아버지의 서재는 어머니의 취미 방과도 연결되었는데 부부의 연을 맺고 오래도록 사랑으로 지냈으나 개인의 시간을 존중하는 호랑이의 습성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서재로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있던 강 회장이 일어나며 강무혁을 맞이했다. 날짜를 정해놓은 가족 모임 외에는 만남이 잦지 않았던 요즘을 생각하면 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땀 배출이 원활하도록 돕는다는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강 회장은 기업 회장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소탈한 모습을 하고 아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강무혁은 어쩐지 잘 차려입은 제 모습이 어색했다.

“앉아라.”

뒤이어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 또한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이 반가운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걸 알지만 애써 무시한 강무혁이 팔을 벌려오는 어머니를 가볍게 안았다가 놓았다.

“얘가 신경 쓴다고 얼굴이 많이 상한 거 같아요.”

“신경 썼겠지. 토끼 수인을 지키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웠겠어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듣던 강무혁이 헛기침을 해댔다. 토끼 수인 마을을 지키는 산군 호랑이 어르신께서 거기까지 얘기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일은 잘 해결됐다고 연락받았다. 그렇게 큰일이었으면 더 자세하게 아비한테 설명했어야 했던 거 아니냐?”

“죄송합니다.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겨를이 없었던 게 아니고, 마음이 없었던 게지.”

“여보.”

“그런 거 아닙니다.”

“그래. 그런 거 아닌 거로 해주마.”

“그래, 무혁아. 아무도 안 다치고 잘 해결됐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혹시….”

어머니와 아버지는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다는 듯이 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토끼를 만나고 싶다고 말할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아직 아버지, 어머니께서 알고 있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집안 때문에 부담 주기는 싫습니다.”

“그래… 그런데 네 마음은 이해하는데, 너도 혼기를 훌쩍 넘겼고 또….”

“호랑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허락의 뜻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강무혁의 칼 같은 거절에 우물거리던 어머니도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고민하던 강무혁이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더 알려드려야 할 일이 있으면 연락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장성한 아들의 연애에 관여하는 행동은 옳지 않았지만 남자, 그것도 진화한 수인에 관련된 내용은 아들에게 직접 들으라고 했으니 부부는 궁금해 애가 닳을 지경이었다. 살갑게 미주알고주알 말해줄 성격도 아닌 걸 알기에 눈치만 보던 부부가 토끼…. 하고 말을 꺼냈다. 누가 호랑이 아니랄까 봐 제 부모도 뾰족한 눈으로 바라보는 강무혁이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떤 것도 그 사람과 상의 없이 말해드리지는 못합니다. 들으신 정도만 알고 계시고 다른 짐작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런데 무혁아, 나쁜 뜻은 아닌데… 우리도 한번 만나 보면 좋지 않을까?”

“호기심에 그러시는 거면 더더욱 안 됩니다.”

“냉정한 놈! 누가 호기심 때문에 그러냐. 네가 누굴 만난다고 하니 궁금해서 그러는 거지!”

결국 역정을 내는 강 회장이었다. 무척 팍팍하게 군다고 구시렁거리는 강 회장을 달랜 부인이 뒤이어 부드러운 손길로 여전히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는 아들도 달랬다.

“무혁이가 무슨 생각이 있겠지. 엄마, 아빠는 너를 믿지만… 토끼 수인이라고 하니 궁금해하는 우리 입장도 좀 생각해주렴.”

능숙하게 아들을 달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진정한 강무혁이 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소파에 몸을 기대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의해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가만히 계셔야 합니다.”

어쩐지 마음이 불안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을 들어보니 최서율이 직원이라는 건 모르는 눈치였다. 감추려고 하면 계속 감출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서울에 살면서 토끼 수인이라는 정체를 감추고 사느라 고생한 최서율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겁먹을까 싶어 마음이 쓰였다.

토끼 마을 산군 호랑이 일족이 다시 서울에 오기로 약속했다는 말을 듣고 자리를 정리한 강무혁이 회사로 향했다.

점심이라도 먹고 가라며 아쉬워하는 어머니께 다음에 들르겠다는 말만 하고 돌아서는 어깨가 조금 무거웠다. 토끼가 그동안 이 비밀의 무게를 견디느라 힘들었을 걸 생각하니 마음도 무거워졌다. 그 작은 어깨로 이만큼이나 버텨온 최서율이 기특하고,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회사에는 벌써 납치 미수 사건의 범인이 잡혔다는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납치 미수 사건에 관해 얘기하다가도 병가를 낸 최서율의 걱정을 늘어놓는 지원실 식구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옆에서 어제의 일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보고하는 윤 비서를 보던 강무혁이 손톱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혹시, 회장님이나 사장님이 최서율 씨에 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하세요. 당분간은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늑대 수인인 윤 비서는 같은 일족인 늑대를 경찰에 넘기며 무척 씁쓸해했다. 나쁜 짓을 일삼고, 같은 수인을 팔아넘기는 짓을 했기에 늑대 족의 수장도 포기한 그들이었지만 법의 처벌을 받고 난 후에 재기를 원하면 언제든 돕겠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던 강무혁이 피식, 웃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같은 종족을 제 편으로 만들며 번식해온 수인으로서는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윤 비서가 마음이 그렇게 넓은지는 몰랐지 또.”

“부사장님보다 제가 조금 더 너그러운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그럼 옆에 있는 고 비서 그만 잡고 너그럽게 좀 이해해줍시다.”

오늘만 해도 부사장의 회의 일정을 두 개나 잘못 기재해 혼쭐 난 고경훈 비서는 입사 초기부터 윤 비서의 특훈으로 만들어진 인재였다. 그런데도 덤벙거리는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가끔 이런 실수를 하고는 했다. 그때마다 그를 정말 쥐 잡듯이 잡는 윤 비서였다.

“제가 너그럽지 않았다면 고 비서는 지금 이 회사는 올려다보지도 못했을 겁니다.”

“인정.”

고개를 끄덕인 강무혁이 비어있는 최서율의 자리에 힐끗, 시선을 줬다가 돌아섰다. 부모님께도 회사에도 아직은 최서율의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저만 알고 싶은 욕심이랄까. 강무혁이 그런 제 유치함에 고개를 저었다.

“일어났습니까.”

-네, 지금 막 다람쥐랑 놀고 들어왔습니다.

“가만히 누워서 쉬었으면 했는데, 산에 다녀왔습니까?”

-아니요. 다람쥐가 마당으로 놀러 왔습니다. 도토리를 줬더니 입에 넣고 도망가더라고요.

“자꾸 먹이 줘 버릇하면 안 됩니다. 급한 상황이 아니면 스스로 먹이를 구할 수 있어야 산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꾸중은 아니었는데 꾸중을 들었다고 생각하는지 최서율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졌다.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일에 익숙한 두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통화로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것도 색다른 느낌이었다.

무얼 먹었는지, 제가 없는 집에서 무얼 했는지, 오늘 일정은 어땠는지, 전혀 모르는 공간에서 지내는 서로의 일과를 말하고, 듣고 있으니 일이고 뭐고 바로 퇴근하고 싶어지는 강무혁이었다.

퇴근 시간만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원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다른 일에 정신을 쏟느라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하니 야근까지는 아니어도 업무시간은 채워야 했다. 그래야 오늘만큼은 윤 비서의 불만 섞인 목소리와 눈초리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토끼 마을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최서율에게 가해졌던 위험에 대해 모두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소식을 듣자마자 놀라 울면서 전화가 왔고, 아버지는 다 때려치우고 당장 고향으로 돌아오라며 역정을 내었다. 형제들도 하루가 멀다고 전화하고 메시지를 보내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가해 토끼의 부모는 용서하려고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픈 그의 어머니까지 내칠 정도로 야박한 토끼들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서율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강무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굴었다. 하지만 가해 토끼를 평생 토끼마을에서 산군 호랑이의 감시를 받으며 살게 했다는 말에는 그게 벌이 되겠냐고 으르렁거렸다. 가해 토끼만큼은 큰 처벌을 받길 바랐던 모양이었다.

오늘도 전화가 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큰누나의 얘기에 마음이 복잡해진 최서율이 전화를 끊고 수영장에서 다 빠져나오지도 못한 강무혁에게 투덜거리듯 말했다.

“부사장님, 아버지께서… 다음 주에 산군 호랑이 할아버지가 오실 때 함께 오시겠다고 합니다. 하실 말씀도 있다고 하시고요.”

“그래요? 아버님께서 서울에 오신다니. 잘됐네요.”

“잘… 된 걸 까요…?”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뭐가 그렇게 걱정돼서 표정이 그럽니까.”

세상의 모든 걱정을 안고 있는 사람처럼 어깨를 늘이며 입술을 비죽거리는 최서율의 볼을 쓰다듬은 강무혁이 나무 데크에 오도카니 앉아 햇살을 받고 있던 얼굴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방금까지 수영장 물에 푹 담겨있던 젖은 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다가오자 놀라 눈이 커다래진 최서율이 손길을 피해 몸을 뒤로 물렸다. 그걸 놓치지 않고 팔을 잡아 제 코앞까지 토끼를 끌어당긴 강무혁이 웃었다.

“왜 도망가.”

“차가워서….”

“날이 이렇게 더운데 차갑긴.”

“으으… 차갑습니다!”

젖은 몸으로 끌어안으려고 하자 최서율이 버둥거리며 팔을 밀어냈다. 이리 와. 장난기가 다분히 섞인 목소리로 힘을 뽐내는 강무혁을 완전히 밀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젖은 품에 푹 안겨 얇은 티셔츠가 젖어 들었다. 찝찝했지만 시원하긴 했다.

수건을 깔아 둔 데크에 앉은 강무혁이 제 허벅지 위에 최서율을 앉혔다. 그의 알몸을 보고 있지 않아도 되니 괜찮았지만, 얇은 반바지 하나만 입은 엉덩이 사이에 닿는 그의 것이 부담스러워 자꾸만 꼼지락거리게 되었다.

“여기서 하고 싶은 거 아니면 가만히 좀 있지?”

“여기서 하시면… 부사장님 깨물 겁니다.”

“꼬박꼬박 부사장이라고 부르면서 대하는 건 아주 편해졌지. 이게.”

여전히 웃음기가 묻어 있는 목소리라 최서율도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어버렸다. 너른 어깨에 볼을 기대고 산들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강무혁과 눈을 맞췄다.

“말해봐요. 아버지가 서울에 오는 게 싫습니까.”

“싫은 건… 아닙니다. …다만 최근에 아버지께서 이제 토끼 수인도 사회로 나와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하십니다.”

토끼 수인들은 모두 비슷한 형편으로 먹고살았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있으면 과수원을 하거나, 농사를 지어 마을에서 자급자족하는 형태로 돈을 벌었고, 그곳에서 일하며 돈을 버는 사람도 있었다.

그랬던 마을은 아주 조금씩.

느리게나마 시대에 맞춰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변화했다.

이전처럼 사는 이들도 있었으나, 산군 호랑이 일족의 도움을 받아 농산물을 도시로 납품하기도 했고, 반대로 도시에서 물건을 들여와 장사하는 사람도 생겼다. 도시에 비하면 큰돈을 버는 일은 아니지만 몇 채 되는 집으로 부동산을 운용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양해지니, 미미한 수준이지만, 어쩔 수 없이 빈부의 격차가 생겨났다.

“…그래서, 혹시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이웃이 생겼던 건 아닌지 두려웠습니다. 이번 일은 제가 알던 세상에서는 일어날 리 없었던 일이니까, 마을도 혹시 어쩌면, 하구요.”

같은 동족에 의해 나쁜 일을 당할 뻔했다는 게, 서율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절대’란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직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형에게 전화해보니, 아프시다던 어머니 분은 마을에서 치료를 도와주기로 했답니다. 원래 그렇게 합니다. 공동체 의식이 아직은 강한 곳이라….”

‘그 형… 어머니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뭘 어떡해? 원래 하던 대로 마을 자금으로 치료해야지. 호랑이 어르신이 벌써 병원도 다 알아보셨더라고. 가까운 도시에서 치료받으실 거야.

‘아, 다행이다….’

다행히 토끼 마을은 최서율이 알고 있는 대로 단 한 사람도 그냥 아프게 버려두지 않았다. 마을이 빠른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해도 함께 그 안에 모여 살면서 만들어 놓은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

“하지만, 영원히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걸 아버지가 느끼신 것 같습니다.”

최서율이 겪은 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버지는 당장 돌아오라고 역정을 내었지만, 그것도 며칠이었다. 잠잠한 아버지가 걱정되던 찰나, 고향에 있는 형제들에게 받은 연락을 통해 아버지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토끼가 비록 다른 수인이나 인간과 비교하면 자식을 많이 낳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을의 규모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토끼들은 점점 더 넓은 세상을 희망할 겁니다. 지금의 공동체와 전통이 필요한 주민들도 있을 거구요. 아버지는 요즘 그 부분에 대해 마을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중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오시는 게 그 때문입니까.”

“네, 아마도….”

도시로 나가길 희망하는 젊은이들과 전통을 잃지 않고 토끼 마을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아버지는 얼마 전 결단을 내리신 모양이었다.

마을 안에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는 소식도 들었다. 이제 와 사회에 나가 무얼 하겠냐는 의견도 있지만, 어린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제도 안에서 교육받아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원래 마을 밖으로 나가는 걸 반대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마을 분들에게 입을 열었을 땐 이미 마음은 굳히셨을 거예요. 다만 촌장이라는 이유로 제 생각을 강요하고 싶진 않으실 겁니다. 그런 분이시니까요.”

“그럼 설득을 위한 명분이 필요하신 상황이겠군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래도 괜찮다는 ‘안전’을 확인받고 싶으실 테고.”

무혁의 말대로, 더 좋은 의견을 구하고 그들을 설득할 명분을 얻기 위해 서울 산을 지키는 강무혁의 집안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기대하고 찾아오실 텐데, 아버지가 혹시나 문전박대당하거나 무시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근처 도시에는 몇 번 왔다 갔다 했지만, 서울에는 첫 방문이시기도 하구요.”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하는 최서율의 말에 집중하던 강무혁이 슬쩍 웃어버렸다. 반바지가 밀려 올라가 허옇게 드러난 허벅지에 호랑이가 남겨 놓은 선명한 잇자국이 보였다. 그 위를 쓰다듬던 강무혁이 멀뚱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