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함께 산책길에 나섰던 최서율이 마을 축제를 보기 위해 나온 동창들과 마주치고는 반가움에 어깨를 들썩거렸다.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났다고 하더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도 최서율을 보는 게 아니라 강무혁을 힐끗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녀석들의 시선이 강무혁에게 닿는 걸 알고 민망함에 더 큰소리로 웃어버렸다.
“편하게 얘기하고 오세요. 나는 저쪽 좀 둘러보겠습니다.”
“그럼 세 번째 다리 앞 정자에서 기다려주세요. 얘기 마치는 대로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래요.”
오랜만에 고향에 왔는데 제 옆에만 붙어있으라고 할 수는 없으니 순순히 보내주었다. 친구들과도 만나고 싶고 하고 싶은 게 잔뜩 일 텐데 저를 챙기느라 하지 못한다면 그 아쉬움을 어떻게 달래주겠는가.
최서율을 보내놓고 한가하게 마을을 돌아보았다. 아는 이도 없고, 제게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람도 없으니 이것이 바로 휴가구나 싶었다. 윤 비서는 어제의 통화 이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회사가 저 하나 없다고 돌아가지 않을 곳도 아니니 회사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봉우리를 보다가 산에나 가볼까 생각했다. 산군 호랑이 어르신의 허락을 받으면 호랑이의 모습으로 산을 오를 수 있겠다고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걸었다.
“엇…!”
한적하게 거닐던 강무혁이 저를 보고 깜짝 놀라는 토끼 하나와 마주치곤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제 멀리서 최서율을 보고 도망친 그 토끼였다. 서울에서 큰일을 겪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그의 태도가 너무 부자연스럽고,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 일에 대해 제가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강무혁이 앞만 보고 열심히 걷고 있는 그의 뒤를 쫓았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개천 길을 뒤로하고 골목으로 들어서자 남자가 달리기 시작했다. 쏜살같이 따라붙어 좁은 골목으로 꺾어지려는 어깨를 붙잡았다. 제아무리 다리가 빠른 토끼라 하더라도 호랑이 수인 강무혁을 이길 수는 없었다. 팔다리를 휘두르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남자를 단숨에 제압해 벽으로 밀어붙였다.
“잠깐 얘기 좀 하죠.”
“저, 저는 할 얘기가… 어, 없는데요.”
“잠깐이면 됩니다.”
얼굴을 마주 보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남자와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비튼 강무혁이 손에 힘을 주어 빠져나가려는 남자의 어깨를 아프게 눌렀다.
“잘못했습니다. 저,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서, 서율이한테, 마, 말하려고 했는데…!”
“서율이가 뭐!”
겁에 질린 남자가 묻지도 않은 말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극한의 두려움에 몰린 듯 횡설수설하던 남자의 입에서 최서율의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강무혁의 기운이 갑자기 사나워졌다. 남자의 어깨를 부러트릴 듯 붙잡고 흔드는데 골목을 헤치며 달려온 최서율이 놀란 눈을 하고는 재빠르게 달려왔다.
“왜 그러십니까. 부사장님! 놓으세요. 네?”
“가만히 있어요.”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이거 놓고 얘기하십시오.”
급하게 달려와 턱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강무혁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최서율이었다. 잔뜩 화가 난 강무혁이 차마 최서율을 밀어내진 못하고 남자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입이 열리길 바랐지만 남자는 최서율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빠르게 저어댔다.
“미안, 해… 미안해, 서율아…! 그게, 그러니까, 어….”
답답하게 구는 행동에 강무혁이 남자의 좁은 어깨를 찍어누르듯 힘을 주었다. 아픈 소리를 내며 한쪽 어깨를 무너트리는 남자를 본 최서율이 경악하며 강무혁의 손을 떼어내려 손등을 잡고 탁탁 두드렸다.
“부사장님! 하지 마세요!”
“넌 가만히 있어.”
“…서율아, 미안, 정말 미안해.”
남자가 겁에 질린 눈을 하고 표정을 무너트렸다. 강무혁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던 최서율이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남자를 보며 울상지었다.
“왜, 왜 그런 말 해… 왜….”
“정말 미안해… 흐윽… 그 사람들이 나를….”
“형, 괜찮아. 괜찮으니까. 천천히 말해봐. 응?”
강무혁의 기운에 기가 바짝 눌린 토끼 수인이 바들바들 떨어댔다. 굵은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뭔가에 홀린 듯 미안하다고만 말하는 그를 붙잡고 더 얘기를 듣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는지 강무혁이 남자를 벽으로 내던지듯 밀며 손을 털었다.
담벼락에 가 툭 부딪힌 남자가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다리를 모으고 무릎에 얼굴을 감춰버린 남자가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최서율이 같이 울어버릴 듯 잔뜩 울상지으며 남자의 옆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형. 왜 그러는데. 말을 해야 알지. 내가 들어 줄게. 말해 봐.”
“서율아. 너도 당장 여기로 돌아와. 늑대들이 우리를 찾고 있어. 처음에는 나를 잡았는데… 내, 내가… 진화한 수컷 토끼가 하나 더 있다고 말했어. 네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면 살려준다고 해서… 너희 회사 이름도 알려주고… 집도 말했어. 어쩔 수가 없었어. 살려고 그랬어…. 진짜야. 말해놓고 너무 무서웠어…. 정말 미안해… 정말….”
“형….”
최서율의 손이 남자의 어깨에 닿기도 전에 남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강무혁이 쭈그려 앉은 남자를 순식간에 끌어 올렸다. 아악! 아픈 소리를 내며 버둥거린 남자가 비틀리는 다리로 바닥을 딛으며 휘청거렸다.
“부, 부사장님!”
“그 새끼들 지금 어딨어. 미안하다고 말하면 다 해결되는 일인 줄 알았어? 자기 살자고 지인을 팔아넘겨 놓고 너는 제대로 살길 바란 거야?”
크르릉. 위협적인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목울대를 치고 올라왔다. 강무혁의 손이 머리 가죽을 벗겨낼 듯 잡아당기자 남자의 눈이 까뒤집혔다. 가감 없이 범의 기운을 내뿜어 내는 강무혁의 기운에 눌린 남자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헐떡거렸다.
쭈그려 앉은 채로 멈춰있었던 최서율이 벌떡 일어나 강무혁의 팔을 잡았다.
“집에, 집에 가야겠습니다. 부사장님…. 하지 마세요. 손 좀, 놓고….”
커다란 두 눈에 차오르는 슬픔과 두려움을 읽은 강무혁의 전신으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당장이라도 남자의 목을 꺾어버리고 싶었지만, 토끼 마을에서 문제를 만들어서 좋을 건 없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틀어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털어내듯 던져버린 강무혁이 최서율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벽에 가 부딪히며 아래로 쓰러지는 남자에게 시선을 주던 최서율이 강무혁의 힘에 이끌려 질질 끌려갔다. 숨이 잘 쉬어지질 않아 계속 헐떡거리던 최서율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강무혁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도, 제대로 생각하는 것도 모두 고장 난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강무혁이 짧게 혀를 차며 자꾸 늘어지려는 최서율을 번쩍 들어 어깨에 걸쳤다.
“걸을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요.”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화가 잔뜩 나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목소리였다. 최서율이 강무혁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한옥의 대문을 넘었다. 축제가 한창이라 가족들이 모두 나가 있던 터라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최서율이 맹맹해지는 코를 킁. 하고 넘겼다.
대청마루에 내려 달라고 요구했지만, 강무혁은 안채를 돌아 뒷마당으로 향했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단숨에 뛰어넘어 방에 도달했다. 문을 닫고 나서야 최서율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 흔들리는 몸을 잡은 강무혁이 섬광이 번쩍거리는 눈으로 시선을 맞췄다. 안 그래도 불안한 가슴이 더욱 술렁여 최서율이 어깨를 움츠렸다.
한여름의 열기로 달궈져 있던 방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만큼 후끈했다. 최서율이 얼른 에어컨 리모컨을 들었다. 손이 덜덜 떨려 버튼을 제대로 누르지 못하고 몇 번을 삐걱거렸다. 그걸 보던 강무혁이 리모컨을 뺏어 전원 버튼을 누르고 온도를 낮췄다.
시원한 바람이 방안을 채우고 열기가 가실 때까지도 아무 말 없던 강무혁이 침대에 앉은 최서율의 발치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미안합니다.”
“…….”
“그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화가 나서 그만….”
최서율은 담담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강무혁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제 앞에서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게 강무혁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놀랐지만,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먼저 사과해주어 오히려 속이 좀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허벅지 위에 올려진 손등에 불거진 핏줄을 따라 손끝을 살살 긁어댔다.
“괜찮습니다. 형이 맞을 짓 했는데요 뭐… 그리고 세게 맞은 것도 아니니까….”
남자의 머리채를 휘어잡던 강무혁이 뿜어내던 살기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손을 달싹거렸다. 제게 그럴 리 없었지만, 떠올리니 오싹한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나는 이 일로 최서율 씨의 일상이 흔들리는 걸 원치 않습니다. 지금까지 지켜온 걸 무너트릴 만큼 큰일도 아니란 걸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복잡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 거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소중히 여겨오던 걸 지킬 수 있을 만한 힘이 내게 있다는 걸 믿고 의지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움직임을 멈춘 손을 붙잡은 강무혁이 고개를 비틀어 시선을 맞췄다. 최서율이 벙긋거리던 입술을 다잡았다. 제대로 눈을 마주하자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제가… 그래도 될까요… 저는 부사장님이 좋습니다. 토끼가 겁도 없이 호랑이가 탐날 만큼 마음만 깊어지고 있는데… 매일 설레고, 행복한 지금 이대로가 좋은데… 부사장님께 폐가 될까 봐 겁이 납니다. 부사장님이 아주 쉽고, 간단하게 일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해도… 제 마음에는 빚이 남을 겁니다. 마냥 기쁘게… 부사장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떨구자 엇나간 시선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강무혁의 손이 얼굴을 잡아 올렸다. 마주한 최서율의 까만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최서율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단번에 이해한 강무혁이 멍하게 벙긋거리는 입술을 손끝으로 훔쳤다.
“사람은 가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최서율 씨가 혼자서 이루어냈다고 자부하는 이 작은 일상도, 지금의 성과도. 모두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나도 마찬가집니다. 혼자서 여기까지 올 수는 없었습니다. 때로는 가족이, 때로는 친구가, 때로는 연인이 삶을 버티고,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 되어주는 겁니다.”
“하지만….”
“빚이 남을 것 같다면 충분히 갚을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가끔 우스갯소리로 말하더군요. 빚도 재산이라고. 내 도움이 빚으로 남는다면 그걸 재산으로 삼고, 나와 함께 더 나은 내일을 생각해주면 됩니다.”
울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았는데 자꾸만 코끝이 시큰거렸다. 눈가가 따끔거려 빠르게 눈꺼풀을 깜빡거린 최서율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고 앞니로 꽉 깨물었다.
“같이 가자며. 바로 어제 약속했는데 벌써 잊어버린 건가?”
“부사장니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요. 변하는 건 없을 겁니다.”
코를 킁. 들이마신 최서율이 강무혁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으며 바짝 안겨들었다. 침대에서 떨어져 품으로 쏟아진 토끼를 받아낸 강무혁이 방바닥에 엉덩방아를 쿵. 찧었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젖은 눈가를 비벼대는 최서율의 등을 한참 토닥였다.
“저 때문에 생기는 피해가 걱정됩니다… 혹시라도 그 사람들이 부사장님을 위험하게 하거나 다치게 하면 어떡합니까? 저는 그런 거 못 견딜 것 같습니다.”
“…상황에 맞지 않은데, 좀 크게 웃어도 됩니까?”
“네?”
고개를 들어 올린 최서율의 눈가가 축축했다.
“내가 그깟 늑대들을 상대로 위험해지거나, 다칠 수도 있다니. 그런 깜찍한 생각을 할 시간에 우리 결혼 얘기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주면 좋겠네요.”
“부, 부사장님.”
“언제까지 부사장님이라고 부를지도 좀 생각해보고.”
“…….”
“결혼해서 아기 낳고도 부사장님이라고 부르면 좀 슬플 것 같아서 그럽니다.”
최서율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형제들이 눈만 마주치면 결혼 생각은 있냐고 물어대서 곤란하던 차였는데 강무혁까지 이런 얘기를 하니 정신이 반짝거렸다.
“생각할 게 이렇게나 많은데 그런 새끼들한테 시간 뺏기지 말고, 더 좋은 생각만 해요.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합니다.”
마음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태평한 최상위 포식자의 마음을 한낱 초식동물 따위가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하지만 숨을 곳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불안함이 가셨다. 고개를 끄덕이는 최서율의 턱을 들어 올린 강무혁이 입술을 맞대왔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오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좋은 것만 생각하라는 말에 걸맞게 닿은 입술이 반가운 듯 최서율이 강무혁의 입술을 쪽쪽 맛있게도 빨아당겼다.
뒤통수가 침대에 닿을 만큼 몰아 붙여진 최서율이 강무혁의 목과 어깨를 더듬다가 팔을 뻗었다. 커다란 흉통을 한가득 끌어안고 꿈틀거리는 등 근육을 더듬어대다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떨었다. 강무혁이 그런 최서율을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지금?”
“…아, 아뇨!”
놀라 몸을 물리는 최서율의 허리를 잡아당긴 강무혁이 하얀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나는 상관없는데.”
“저는 상관있습니다.”
굳게 닫힌 방문을 힐끗거리며 고개를 젓는 최서율의 콧방울을 아프지 않게 깨문 강무혁이 웃었다. 숨기에 딱 좋은 그의 가슴팍 안에서 최서율도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