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개천을 따라 길게 늘어진 등불에 하나, 둘. 불이 들어왔다. 예전에는 초가 들어 있었을 곳에 이제는 귀여운 전구가 자리를 잡았다. 그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등불을 보며 환호하고, 즐거워했다.
기다란 개천을 따라 등불이 빛나고, 그 길을 따라 작은 상점들이 즐비했다. 음식을 팔기도 했고, 장난감을 팔기도 했고, 주점이 열려 이미 한껏 취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기도 했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는데 그 주변으로 아이들이 토끼 귀를 펄럭거리며 뛰어다녔다.
이제 막 동물화를 조절하기 시작한듯해 보이는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의 머리에는 하나같이 귀여운 귀가 솟아 있었는데 보송보송한 토끼의 귀는 어떤 아이는 크고, 어떤 아이는 작았고, 어떤 아이는 아래로 축 늘어져 있기도 했다.
마을의 어르신들과 인사를 해야 한다며 잠시만 다녀오겠다며 달려 나간 최서율을 기다리던 강무혁의 곁을 스쳐지나 뛰어가던 아이 하나가 앞을 향하던 발을 멈추고 강무혁을 올려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저씨, 토끼예요?”
“나? 토끼 같아 보여?”
“아니요.”
“그래? 그럼 뭐라고 보이는데?”
“어… 어, 어….”
아이가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들 강무혁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저씨 호랑이죠? 윗마을에 사는 호랑이님이에요?”
“아저씨 우리 등에 태워줘요.”
“아저씨 나 저기 다리까지 데려다주세요. 엄마가 거기로 오라고 했어요!”
이 지역 산군 호랑이 족이 토끼마을을 얼마나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 보는 호랑이를 향해 귀를 쫑긋쫑긋하며 자기 할 말만 열심히 해대는 아이들을 보니 그들의 애정이 더욱 절실히 느껴졌다.
최서율의 가족만 해도 저를 호랑이 수인이라 어려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최서율의 상사, 처음 보는 사람이라 어려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산군 호랑이 족과 얼마나 친밀히 지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강무혁이 저마다 자기 할 말만 해대는 아이들의 요구에 난처해졌을 무렵. 이놈! 하며 나타난 남자가 아이들의 시선을 모조리 빼앗아갔다.
“호랑이님!”
“호랑씨!”
“어흐으응! 나 호랑이 같지!”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그 남자의 주변을 에워쌌다. 익숙한 듯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보송보송 귀여운 귀를 만지작거린 남자가 강무혁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무혁도 가볍게 눈인사했다. 그가 토끼 마을을 지키는 산군 호랑이 어르신의 후계자라는 걸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서율이가 어르신들에게 붙잡혀서 얘기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곧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알겠습니다.”
“근데… 그, 혹시 서율이랑 사귀는 사입니까?”
“아, 그게.”
“곤란하게 하려고 하는 질문은 아닙니다. 저도 마음에 담아둔 토끼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물어본 겁니다. 말하려고 해도 영, 용기가 안 나서….”
남자는 날카로운 인상과는 다르게 허허실실 웃으며 멋쩍어했다. 다리에 매달린 아이 하나를 번쩍 들어 올려 목에 태우더니 어흥! 소리를 내주었다. 아이들이 자지러질 듯 웃으며 남자의 다리에 매달리려 발을 동동 굴러대거나 그 주변을 뛰어다니며 장난을 쳤다.
대충 인사한 남자가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에게 어떤 말을 해주었으면 좋았을까…. 개천을 따라 밝혀진 등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려던 찰나, 아롱아롱 빛나는 은은한 등불의 빛을 헤집고 토끼 한 마리가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부사장님!”
발그레하게 열이 오른 볼을 만지작거리며 어른들이 너무 많아서 인사하는 데 오래 걸렸다며 종알거리는 볼에 당장이라도 입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시선이 많아 참았다.
개천을 따라 나 있는 둑길을 따라 천천히 발을 맞춰 걸었다. 최서율의 어깨가 팔뚝에 꾹 맞물리고 손끝이 서로의 팔을 이리저리 스치며 살갗을 간지럽혔다.
용기가 없어서 토끼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한다던 호랑이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되짚다 보니 그동안 제가 생각했던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용기를 낸다.’라는 건 제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고 여기며 살았건만 생각을 조금 달리하니 최서율과 함께한 모든 순간에 용기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손을 잡고, 어깨를 끌어안고, 입술을 마주하고, 감정을 나누고, 마음을 얻기 위해 매 순간 새롭게 용기를 내어 다가갔고, 손을 뻗었고, 작은 몸을 끌어안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용기 있는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시간을 만들었고, 이렇게 토끼 마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낸 건 아닐까.
“최서율 씨를 만나고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토끼 마을이 신기해서 그러십니까?”
“호랑이가 용기를 내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까요.”
“네?”
최서율이 내딛던 걸음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강무혁을 바라보았다. 주변으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축제의 밤을 기뻐하는 소리가 이명처럼 멀어져갔다. 오로지 강무혁에게 집중한 눈동자에 오묘한 색을 품은 빛이 아롱졌다.
밀려드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강무혁이 최서율의 볼을 커다란 손으로 잡았다. 동그스름하고, 따뜻한 볼이 손바닥 안에 가득 들어차자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수많은 토끼 앞에서 네가 내 것이라고 도장 찍고 싶어지게 만들고 있잖아.”
손바닥이 닿아있는 볼이 순식간에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토끼의 눈꺼풀이 깜빡거릴 때마다 기다란 속눈썹이 팔랑팔랑 허공에 흔들렸다.
“등불 길을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했지. 그 미신에 기대어서라도 너랑 이루고 싶은 게 많은데.”
“…….”
“너는 어때. 나랑 저 끝까지. 같이 갈래?”
강무혁의 시선이 개천의 가장 끝자락을 가리켰다. 그 눈을 따라 고개를 돌린 최서율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걸 알았지만 가슴이 벅차올라 손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놓은 최서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래요. 가겠습니다. 같이… 가주세요.”
강무혁은 단호하게 말하는 빛나는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어쩌면 토끼는 처음부터 매우 용맹하고, 용기 있는 작은 존재였고, 저는 그 존재에 기대어 제 위엄있는 모습에 도취한 덩치만 큰 맹수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제 존재의 본능까지 쥐고 흔들 만큼 위대했다. 앞으로도 최서율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순간에도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얻은 것만 같았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고, 빈틈없이 메워진 충만한 뜨거움이었다.
“부사장님, 기분이 이상합니다.”
“왜요. 나랑 저 끝까지 갈 생각을 하니까 겁납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너무 기대돼서 빨리 달려가고 싶습니다.”
강무혁이 이마를 짚었다. 역시나 저보다 한발 앞서는 최서율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얼른 가서 그 끝에 뭐가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부사장님과 함께 가는 길이 기대돼서 가슴이 막… 터질 것만 같습니다.”
강무혁의 손을 잡아 제 가슴팍 위에 올려놓은 최서율이 느껴지냐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손바닥에 쿵쿵쿵쿵. 요동치는 심장 고동이 전해졌다.
“이러다 터지는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호랑이 입에 손도 넣어봤는데 쉽게 터지지 않습니다.”
강무혁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 위로 최서율의 웃음소리가 겹쳤다. 여러 빛깔의 등불이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영롱한 빛을 바라보며 걷는 두 사람 모두에게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찬란한 순간이었다.
* * *
“아휴, 부사장님, 술을 엄청나게 잘 드시네요!”
“그러게요. 우리 서율이가 막 사고치고 그러지는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일만큼은 철저하게 잘 해냅니다.”
강무혁은 최서율의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이런저런 질문을 받느라 정신이 없는 중이었다. 토끼 마을 전통주라는 묘주는 도수가 높은 데에 비해 끝맛이 달큼하여 앉은뱅이 술이라 불리었다. 그 술을 아예 드럼통으로 들고 나타난 최서율의 큰형이 거하게 술판을 벌였다.
그 중심에 강무혁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외부인은 바깥으로 나가 일하는 토끼 수인이나 행정업무로 외부인과 만나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 외에는 거의 처음 보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호기심에라도 이 판이 벌어질 걸 예상했던 최서율은 매우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강무혁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큰형은 토끼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애주가였고, 먹어도 먹어도 취하지 않는 괴물 같은 간을 가진 자로 유명했다.
부사장의 옆에서 궁금한 걸 하나씩 캐묻던 아버지는 이미 고주망태가 되어 어머니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고, 마당에서 뛰어놀던 조카들도 모두 한방에 들어가 토끼의 모습으로 잠든 지도 한참 전이었다.
큰형과 쌍둥이인 작은형은 최서율과 마찬가지로 진화한 수컷 토끼였다. 둘째 형의 배우자는 남자였는데 어찌나 옆에서 자기 반려를 싸고도는지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아 매우 멀쩡했다. 문제는 이미 만취한 매형. 둘째 형의 배우자인데 이리저리 몸을 흔들다가 금방 나가떨어질 것 같아 최서율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어있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강무혁에게 기댈 것 같아서 불안함에 자꾸만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오빠는 좀 가만히 있으라고 어깨를 잡아 누르는 여덟째 누이동생의 말에도 최서율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가 강무혁의 어깨에 기대면 상을 걷어 차버릴 심산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둘이 언제부터 사귀었어?”
“푸흡!”
물을 들이켜던 최서율이 제 앞에 앉은 큰 누나에게 물을 뿜어냈다. 주변에 있던 다른 형제들이 모두 몸을 물리며 아이 씨, 야. 아우 더러워.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랬더니 그 말이 열 마디쯤은 되어 안 그래도 정신없던 분위기가 더욱 산만해졌다.
“뭘 그렇게 놀라. 호랑이 냄새를 잔뜩 묻히고 나타나서는 우리가 모른 척해주길 바란 거야? 이거 서울 살더니 간땡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먼?”
“그러니까. 오빠. 동네 사람들이 오빠 호랑이랑 결혼했다고 다 쑥덕거려.”
“결호오온?!”
최서율이 눈을 키우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니, 큰오빠가… 나가서 입을 좀 털었어.”
“야 내가 무슨 입을 털었다고. 너는 큰오빠한테 말이 뭐 그렇게 자유롭냐?”
“엄마가 다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는데 형이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잖아.”
올해 성인이 된 열두 번째, 막내 남동생이 참외를 입에 물며 말을 보탰다. 최서율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형은 그 입이 문제야. 왜 있지도 않은 말을 해?”
“있지도 않은 말입니까?”
가만히 있던 강무혁이 말을 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 그게….”
말을 더듬거리며 강무혁의 눈치를 살피던 최서율이 도와달라는 듯 자기 형제들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열심히 말을 보탤 때는 언제고 모두들 눈을 피하며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말 해봐요. 없는 말입니까?”
“결혼에 대해서는… 말한 적 없지 않습니까.”
최서율이 차마 큰 소리로 말하진 못하고 강무혁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그걸 보고 있던 형제들의 눈에 경악이 들어찼다. 쟤 지금 뭐하니? 젖은 옷을 털어내던 큰 누나가 옆에 앉은 누이동생에게 다 들리도록 말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강무혁을 달래는 일이 우선이었는데 그에게서 폴폴 풍기는 술 냄새를 감지한 최서율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강무혁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부사장님, 취하셨습니까?”
“…내가?”
“그런 거 같아 보이는데….”
“그런가요. 잘 모르겠네요. 이렇게 독한 술을 많이 마신 건 처음이라.”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있으면서도 허리 한번 굽히지 않고 있는 강무혁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멀쩡해 보였다. 취한 사람이라면 바로 옆에 있는 매형처럼 흐느적거려야 하는데 전혀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아 알쏭달쏭해진 최서율이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잡아 돌려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야 진짜 너는 형제들 앞에서 뭐 하는 짓이니.”
“정신 차려라. 서율아. 여기 집이다.”
“오빠 진짜 서울 살더니 많이 변했네.”
제게 한마디씩 하는 형제들의 말도 싹 다 무시해버린 최서율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무혁의 허벅지를 잡아 몇 번 주물럭거렸다. 찬물을 담은 그릇을 내밀자 벌컥벌컥 받아 마신 강무혁이 벌떡 일어나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대청마루를 내려갔다.
그 모습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찾아볼 수 없으니 최서율의 형제들은 모두 안 취한 거 아니냐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최서율은 평소와 완전히 다른 그의 눈빛에 마음이 쓰였다.
말하지 않아도 가족들이 모두 알아버렸다는 건 오히려 감사하고, 마음이 편해지는 일이었다. 나서서 두 사람의 사이가 가당키나 하냐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강무혁이 자리를 비우자 자기들 사는 얘기로 이야기를 꽃피우는 형제들을 뒤로하고 일어선 최서율이 대문을 옆으로 돌아 여러 대의 차 중에 제일 끝에 있는 검은 차를 살펴보았다. 묵직하고 커다란 보닛이 담벼락에 딱 맞닿도록 세워진 고급스러운 차는 높은 담장이 빛을 막아주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안이 잘 보이질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목을 쭉 빼낸 최서율이 운전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강무혁을 확인하곤 화들짝 놀라 얼른 문을 열어젖혔다.
“부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서율아.”
심장이 발아래로 쿵 떨어졌다가 올라왔다.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가 술기운에 더 낮고, 그 끝이 성성하게 갈라져 유독 선정적으로 들린 탓이었다.
급한 마음에 조수석 문을 열었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어 커다란 차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아침에 올 때 차에 챙겨 두었던 생수를 열어 강무혁에게 건넸다.
“부사장님 물 좀 드셔보세요.”
“네가 먹여줘.”
“네?”
“먹여달라고.”
최서율이 들고 있던 생수통을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럽게 강무혁의 목을 받치고 주둥이를 입술에 대었다. 그 손을 슬쩍 밀어낸 강무혁이 고개를 돌려 당황한 듯 어버버 거리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고.”
“그럼… 어떻게….”
“네 입으로.”
“…….”
몽롱하게 풀린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취했구나. 알면서도 그런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주변은 온통 캄캄했고, 풀벌레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차 안은 달큼한 술 냄새와 호랑이의 짙은 향기로 가득했다.
생수통의 주둥이가 강무혁이 아닌 최서율의 입술에 닿았다. 물을 입 안에 한가득 머금고 두툼한 어깨를 짚은 최서율이 조수석 시트에 무릎을 대며 몸을 세웠다. 열감이 느껴지는 뺨을 잡고 입술을 겹친 최서율이 미지근해진 물을 강무혁의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꿀꺽. 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긴장이 되는지 생수통을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더.”
축축하게 젖은 입술이 벌어졌다. 홀린 듯 다시 물을 머금고 입안으로 물을 넘겨주었다. 강무혁의 입술 옆으로 물줄기 하나가 길게 흘러내렸다. 춥. 소리를 내며 그 물줄기를 빨아들인 최서율이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했다.
“부사장, 님….”
옅은 입술이 열리기 무섭게 좁은 틈을 벌리며 뜨거운 혀가 밀려 들어왔다. 입술이 닿기도 전에 혀가 먼저 맞닿는 건 강무혁이 가장 좋아하는 행위였다. 키스가 깊어지고 숨이 차오를 때쯤, 서율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강무혁의 어깨를 밀어낸 최서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먼저 가요. 술 좀 깨고 가겠습니다.”
최서율이 아쉬운 듯 제 입술을 말아 물며 우물거렸다. 작게 웃은 강무혁이 젖은 입술을 손끝으로 훔쳐주었다. 자박자박. 바닥에 깔린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물 좀 더 마시고 오라며 생수통을 손에 쥐여준 최서율이 맞붙었던 몸을 물리고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으로 문을 열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누나.”
“어휴, 부사장님 많이 취하셨니?”
“응, 들어가자. 술 좀 깨고 오신대.”
뒤를 힐끗 돌아보는 최서율을 보던 강무혁이 시트에 몸을 기대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이렇게까지 취기가 몰려오다니. 토끼라고 얕잡아 봤다가 큰코다치게 생긴 호랑이였다. 토끼마을에서의 첫날밤이 술에 절인 채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