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64)

26.

최서율이 강무혁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골랐다. 마음은 차올랐는데 막상 말이 되어 나와주질 않는 말을 고르려니 곤혹스러웠다. 이리저리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던 강무혁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왜 그럽니까. 뭐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있는데… 그게….”

동글게 깎인 손톱을 세워 강무혁의 어깨 부근을 갉작거리던 최서율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강무혁과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 담긴 애정이 보였다. 제가 너무 예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두 눈에 담긴 마음으로 흐물거리는 제 결심을 더욱 단단히 쥐어 잡을 수 있었다.

“편하게 말해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겁니까.”

“부사장님은… 진화한 수인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강무혁의 고개가 미세하게 기울었다. 애정이 담뿍 담겼던 눈에 서리는 물음표를 본 최서율이 입술을 길게 다물었다가 풀어냈다.

“진화한 수인이라…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기억은 납니다.”

“네… 그럼, 진화한 수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냐니… 어려운 질문이네요. 우리나라에는 진화한 수인이 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모두 그렇게 알고 있을 텐데요.”

“진화한 수인은 종족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보수적인 나라에서는 더더욱… 수컷, 남성인 존재가 임신이 된다니 얼마나 핍박받았겠습니까.”

강무혁이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덩달아 몸이 추켜 올려진 최서율이 어정쩡하게 앉아 있자 직접 두 다리를 잡아 팔걸이에 걸쳐주었다. 허공에 떠 있는 발가락 사이사이로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이 닿았다. 최서율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잇기 위해 숨을 골랐다.

“다른 종족들이 진화한 수인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토끼 수인만이 진화한 수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사회에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던 토끼 수인은 타 종족들의 거센 반발과 그에 따른 괴롭힘을 이기지 못하고 산골로 숨어들어 마을을 만들고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처음에는 씨족 별로 나뉘어 있던 마을이 점차 커다래졌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토끼 수인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고,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는 꽤 큰 촌락을 형성했습니다. 그 안에서 토끼 수인끼리 결혼하고 자손을 낳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서율 씨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이….”

“토끼 수인 안에 진화한 토끼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

“그 진화한 수컷 토끼 중의 하나가, 바로 접니다.”

멀리, 이명처럼 들리는 빗소리마저 아득하게 느껴지는 찰나의 순간이 지났다.

어깨를 감싸고 있던 강무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그 안에 잡힌 어깨로 떨어져 나갈 듯 엄청난 힘이 전해졌다. 아팠지만 아프다고 표현하지 못하고 그의 눈을 피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힘을 쓰며 시선을 마주했다. 눈썹이 하릴없이 꿈틀거렸다.

강무혁은 한참 동안 말없이 그런 최서율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부사장님….”

침묵의 시간을 참지 못한 최서율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제 비밀은 더 없는 겁니까. 처음에는 토끼 수인이라고 해서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는 더 엄청난 걸로 사람을 들었다 놓네요.”

“죄송, 합니다….”

“그게 왜 죄송할 일입니까. 말하지 못했던 것도 이해합니다.”

강무혁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지금 최서율의 발언이 얼마나 엄청난 건지 강무혁은 나라 전체가 놀라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달려갔다가 되돌아온 참이었다. 하지만 놀란 마음을 다 내비치면 이 작은 토끼가 품에서 도망갈지도 모르기에 토끼가 덩달아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놀란 마음과는 다르게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들이 몇 개 있었다. 가끔, 미치도록 식욕과 성욕을 자극하던 토끼의 냄새도 지나치게 발정기 억제제에 전전긍긍하던 모습도 작고 소담한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늑대 무리의 행동도 단번에 이해가 되어 고개가 끄덕여졌다.

“부사장님, 혹시 이런 제가… 좀 징그럽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면….”

“지금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내는지 알겠는데. 우리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라고는 해도 내가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예상했다는 건 좀 섭섭한 일이네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충분히 기뻐해야 하는 상황 아닙니까?”

“왜… 기뻐하십니까?”

예상치 못한 말에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멀겋게 뜬 눈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웃은 강무혁이 최서율의 티셔츠 밑단으로 손을 쑥 밀어 넣었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손바닥이 명치 아래를 쓰다듬고 배꼽 근처를 문질렀다. 최서율이 맨살에 닿는 손에 몸을 움츠리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여기에, 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니 당연히.”

“아….”

“좋지 않겠습니까?”

아랫배를 뭉근하게 더듬는 손길에 확 달아오른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따끈해진 볼 위에 입술을 내려 살살 비빈 강무혁이 다리를 꼼지락거리며 들썩이는 최서율의 목덜미를 잡아 쥐었다. 힘을 주면 순식간에 뚝, 부러트릴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연약함에 손끝에서부터 희열이 번졌다.

“어떻습니까. 내가 여기에 아기를 만들고 싶다고 하면.”

“그런 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말하기 어려운 비밀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만 급급했지,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럼 지금부터 생각해보죠. 나만 원한다고 가능한 일은 아닐 테니까.”

“네….”

혹시 얘기를 듣자마자 저를 내치는 건 아닐까 했던 불안함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돌덩이처럼 얹혀 있던 비밀스러운 공간에 다시 강무혁을 향해 흐르는 진하고, 선명한 연정이 차올랐다.

가슴이 그득하게 차올라 참을 수 없어진 최서율이 먼저 강무혁의 얼굴을 잡고 입술을 맞대었다. 단단하게 닫혀있던 입술을 혀로 핥아 올리면 당연하다는 듯이 입을 열어주는 호랑이의 입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달큼하고, 척척한 향기가 입안을 가득 채우도록 그렇게 한참이나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키스를 나누던 최서율이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섞인 숨을 뱉어냈다.

“울어요?”

얼굴을 보자며 잡아 쥐는 강무혁의 손바닥에 코를 박고 아주 잠깐 훌쩍거렸다. 불안한 마음이 풀어지고 나니 어쩔 수 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제가, 원래… 잘 울고 그러지 않는데….”

“어제부터 최서율 씨 우는 걸 자주 보는 느낌이 드네요.”

“부사장님이 이런 저라도 좋다고 해주셔서 그렇습니다. 이런 저라도 괜찮다고 해주셔서 너무 좋고, 안심돼서 저도 모르게 좀, 눈물이 조금… 났습니다.”

최서율이 축축해진 눈을 비비며 웃었다. 곱게 접힌 눈가를 마구 문지르는 손을 잡아 내리고 그 위에 제 손을 올린 강무혁이 두껍고, 투박한 손끝으로 보드라운 살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지금까지 이 커다란 비밀을 품고 여기까지 잘 살아온 토끼를 칭찬하듯 매우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집안사람들의 모든 걱정과 근심을 등에 업고 낯선 서울에서 혹시나 토끼 수인인 걸 들키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면서도 왜 이 도전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가 고민하던 수없이 많은 밤에 언젠가는 꼭 그 이유를 찾아내리라 다짐했었다.

토끼 중에서도 겁이 많기로 유명했던 제가 무엇에 이끌려 안전한 마을의 울타리를 넘어, 여기까지 와있는지. 어떤 이유를 찾게 될지 몰라 어떤 밤은 두려워 떨었고, 어떤 밤은 설레어 몸부림쳤었다.

“아….”

조금 터무니없어도 그 답에 강무혁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아주 오래전에 발끝부터 끌어모은 용기로 여기까지 왔고,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의 손을 잡았다고 그렇게 완성된 지금의 순간이 오래도록 찾아 헤맨 그 어떤 이유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럼 이제 대답해봐요.”

“무슨 대답… 이요?”

“나와 함께 토끼 마을에 갈 건지. 함께, 등불 길을 걸어 줄 건지.”

최서율은 형형색색 고운 빛깔을 받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입꼬리가 비죽 솟았다. 손을 맞잡고 강무혁과 그 길을 걸을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났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가겠습니다. 같이, 가주세요. 부사장님.”

고개 숙여 얕게 입 맞춘 강무혁이 그러겠노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토끼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호랑이를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젖은 눈을 하고도 방긋방긋 웃는 최서율이 귀여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강무혁이 놀라 펄떡이는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부사장님! 저를 부르는 소리에도 대답도 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최서율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기분은 좋은지 입에 걸린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 * *

오픈하고 첫 성수기를 코앞에 둔 리조트는 정신없이 굴러갔다. 덕분에 본사의 리조트 담당 부서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긴 회의를 통해 안건을 수정하고 새로운 이벤트를 논의해야 했다. 새 리조트인 만큼 각 부서에서 차출된 인원으로 새로운 팀을 꾸려야 한다는 의견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부사장 지원실의 사원들도 대부분 같은 마음이었다.

본래 본사에서 총괄하던 기존의 리조트 업무에 새 사업이 추가된 터라 안 그래도 업무가 많은 부사장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가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니 슬슬 부사장 지원실 충원에 관련한 얘기도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새 직원 뽑는 게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되나요?”

“아, 그래도 끗발 좋은 윤 비서님이 의견을 내면 좀 수용되지 않을까요? 지금도 충분히 손발이 잘 맞는다고는 하지만 일이 많긴 많으니까요.”

“그럼 유 대리가 윤 비서님이랑 친하니까 한번 물어라도 보던지.”

“저기요. 충원하는 게 무슨 어디 알바생 뽑는 것도 아니고 뭘 물어봐요. 인사팀에 정식으로 요청해야죠.”

자기들끼리 의견이 분분했다. 사실 일이 정말 많았다. 고향 마을의 축제가 시작하는 다음 주 목요일부터 연속 이틀 연차를 내놓은 최서율은 가시방석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회장님께서 직접 지시했던 야근 금지령은 여전히 발동 중이었지만 여름이 시작되면서 그나마도 흐지부지되고 있었다.

“참! 최 대리님, 이사는 했어요? 아직도 친척 집에 있는 거예요?”

“저, 저요?”

커피를 홀짝거리던 최서율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 대리가 너 말고 또 누가 있어요.”

“아, 그렇죠? 하하하. 아직 친척 집에 있어요. 범인도 못 잡았고….”

“헐. 그럼 집세는요? 그냥 내는 거예요?”

“네… 그게 진짜 너무 아깝긴 해요.”

울상짓는 최서율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선과장이 등을 두드렸다.

“뭐가 아깝습니까?”

탕비실 문을 두드린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사람들의 등이 흠칫거렸다. 최서율도 놀라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모습을 드러내는 부사장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 부사장님. 최서율 씨 집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최서율 씨 집 말입니까?”

강무혁의 시선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최서율에게 짧게 닿았다가 선 과장에게로 향했다. 선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직도 친척 집에서 출퇴근하는데 월세를 꼬박꼬박 내고 있다니 너무 아깝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직장인 월급에 그렇게 세는 돈이 있으면 언제 돈을 모으겠냐고 하는 말에 강무혁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선 과장에게 맞춘 채 손을 뻗은 강무혁이 최서율이 들고 있던 잔을 잡아 쥐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컵을 뺏긴 손이 허공에 팔랑거렸다. 방금 내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강무혁이 선 과장의 말을 들으며 최서율을 힐끗거렸다.

입술을 아주 작게 삐죽인 최서율이 돌아서 다시 커피를 내렸다. 버튼을 누르고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제집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대화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 채였다.

“최 대리님이 그 집에 다시 들어가 사는 건 무리가 있을 수도 있겠네요. 도둑이 들었다던데 걱정돼서 계속 살 수 있겠습니까? 집을 처분하고 지금 머무는 친척 집에서 지내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게요. 저도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최 대리 집 구하는 거 힘들면 우리 집 옥탑방에 와서 살래? 월세는 깎아 줄게.”

“네? 옥탑방이요?”

박 부장의 말에 막 내린 커피를 들고 고개를 번쩍 든 최서율이 강무혁과 눈이 마주쳤다. 미간을 가볍게 구겼다가 편 강무혁이 선 과장을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럼 커피 맛있게 드시고, 오후 회의 때 만나죠.”

“네 알겠습니다.”

“최 대리님 커피 잘 먹겠습니다.”

비어 있다는 옥탑방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박 부장의 목소리를 비집고 무언의 압박이 실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채곤 그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최 대리, 내 말 듣고 있어? 등을 툭툭 두드리며 열변을 토하는 박 부장을 향해 손사래를 친 최서율이 부장님네 세 들어 살면 집도 직장 같아서 싫다고 능청스럽게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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