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어떻게 씻고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눈을 떴을 땐 이미 날이 밝아있었다. 맨몸을 겹치고 누웠던 강무혁은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고,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 위에 최서율만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여름용 이불이 아닌 조금 도톰한 이불이 몸을 덮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숨을 들이켜던 최서율이 얼른 팔을 내려 두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콧속으로 들어와 폐부를 가득 채우는 호랑이의 진한 냄새에 숨이 턱 막힌 탓이었다.
온통 호랑이의 냄새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밤과 새벽을 걸쳐 이 방에서, 이 침대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르게 떠올라 벌어진 입이 다물리질 않았다.
“으아아….”
이불에 얼굴을 묻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던 최서율이 아릿한 통증이 남은 허리와 둔부 사이를 느끼며 간밤의 일이 꿈이 아님을 다시 깨달아야 했다. 부끄럽거나, 후회가 되어서는 아니었다. 너무 좋았다. 그와 마음을 나누고, 마음껏 그를 만질 수 있고, 끌어안고, 안길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를 하지 못해서 내내 맴돌며 허투루 보내야 했던 시간이 아깝기도 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발칙한 생각을 하다 보니 옆에 있지 않은 그가 궁금해졌다.
밖은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장마 기간이라 비가 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주말임에도 산에 가서 놀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다. 알몸으로 나설 수 없어 두리번거리니 센스있는 강무혁은 최서율이 일어나 입을 옷까지 잘 챙겨두고 자리를 비운 듯 탁자 위에 옷가지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최서율은 빠르게 옷을 걸쳐 입었다.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티셔츠는 딱 보아도 제 것이 아닌 강무혁의 것이었다. 섬유유연제의 부드러운 향기를 비집고 호랑이의 향기가 짙게 배어 나왔다.
침실은 별거 없이 깔끔했다. 직접 발을 디뎌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끽해야 서재 정도까지만 들어가 봤으니 강무혁이 없는 틈을 타 침실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침실에는 구경할 만한 게 없었다. 특별한 장식품도 없었고, 그 흔한 액자 같은 것도 붙어있지 않았다.
정말 침실의 기능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듯 커다란 침대와 테이블, 의자 정도만이 적당한 생활감을 채우고 있었고 거실과 마찬가지로 육중한 호랑이가 어슬렁거리기 좋게끔 공간을 넓게 활용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재미없게….”
틈만 나면 예쁜 쓰레기를 사다 모으는 최서율의 집과 비교하자면 크기는 백배 이상이라곤 해도 가진 물건은 한없이 소탈했다. 입술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옴쭉거리던 최서율이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밖으로 나섰다. 기다란 복도 끝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살금살금 거실을 나서는 하얀 발이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아 떨어지는 소리도 내지 않으려 발끝에 힘을 주었다.
최서율이 조리대에 서서 무언가 만들고 있는 강무혁의 너른 등을 보자 솟구치는 애정을 감추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부르르 떨었다. 비슷한 색의 티셔츠를 입고 있는 강무혁은 오늘따라 더욱 너른 어깨를 뽐내고 있었다.
숨소리를 죽이며 아일랜드 식탁을 돌아 주방 안으로 들어간 최서율이 강무혁을 놀라게 할 생각에 잔뜩 기대하며 손을 뻗었다.
“어흥!”
“……!”
손이 등에 닿기 바로 직전에 돌아본 강무혁이 놀리듯 ‘어흥’ 하고 외쳤다. 허공에 뻗은 팔을 거둬들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최서율이 눈을 깜빡거렸다. 미동도 없이 삐걱거리고 있는 그를 본 강무혁이 들고 있던 국자를 내려놓고 가스레인지의 불을 줄였다.
“최서율 씨.”
“으흐….”
입꼬리가 아래로 축 내린 최서율의 눈가가 아작 구겨졌다.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손을 잡아 얼른 품에 안은 강무혁이 부들부들 떨리는 등을 토닥였다.
“놀랐습니까? 방에서 나올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요.”
“그럼 그냥 이름을, 부르시지, 왜… 놀라게 하십니까아….”
맞닿은 작은 가슴팍에서 두구두구두구 요란스럽게도 뛰어대는 심장이 느껴졌다. 강무혁이 움찔움찔 들썩거리는 최서율의 정수리에 입술을 눌렀다.
살금살금 방문을 열고 다가오는 토끼가 원하는 걸 눈치채곤 골려줄 생각이었는데 상대를 잘 못 골랐다는 낭패감이 밀려들었다. 토끼가 깜짝 놀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명시되어 있던 문헌의 말은 진실인 듯 최서율은 깜짝 놀라면 굳어버리거나 숨쉬기 힘들어했다. 그런 그를 두고 이런 장난을 쳤으니 눈물 몇 방울 보는 건 당연할지도 몰랐다.
“미안합니다. 많이 놀랐습니까?”
가슴팍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는 얼굴을 들어 올려 확인한 강무혁이 벌그죽죽해진 볼에 입을 맞췄다. 따뜻하고 폭신한 볼을 가늠하듯 몇 번 입술을 누른 그가 엉덩이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으아!”
진정되어 가던 가슴이 다지 방망이질을 시작한 듯 뛰어댔다. 가스레인지 옆 조리대에 최서율을 올려 둔 강무혁이 거의 같아진 시선으로 눈을 맞춰왔다. 축축하게 젖은 눈가를 쓸어 주고 실없이 웃더니 이내 다시 입술을 맞대어 왔다.
“배고플까 봐, 뭐 좀 먹이려고 했는데 그냥 침대에 있을 걸 그랬습니다. 자고 일어난 얼굴을 보는 것도 재밌었을 텐데 싶네요.”
“지금도 재밌어 보입니다. 저 정말 놀랐다고요….”
“그랬습니까? 이제 조심하겠습니다.”
“네….”
이제 막 연인이 된 사이라고는 해도 그 전에 직장 상사에다가 나이도 네 살이나 많은 이에게 너무 되바라지게 행동한 건 아닌가 싶어 눈치가 보였다. 강무혁을 빤하게 바라보는 시선 너머로 최서율의 눈동자가 반득거렸다.
괜찮다는 듯이 한참을 만지작거리며 달래준 강무혁이 허리는 아프지 않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괜히 부끄러워져 가스레인지 위, 냄비로 시선을 돌렸다.
곰 아주머니께서 주말 동안 먹을 수 있도록 끓여 놓은 김치찌개가 작은 열에 보글보글 끓고 맛있는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가스레인지 불을 완전히 줄여버린 강무혁이 냄비 뚜껑을 닫고 아래로 향하고 있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왜 그러십….”
“여기는, 어떻습니까. 아픕니까?”
커다란 손이 엉덩이 한쪽을 잡아 왔다. 최서율이 귀가 떨어질 듯 빨개진 채 조리대 위에서 다리를 송당거렸다. 어깨를 잡고 밀어내려고 힘을 주자 진짜 귀엽네. 속삭인 강무혁이 열 오른 귓가와 볼, 턱 아래에 빈틈없이 입술을 내렸다.
“으응, 부사장, 님….”
입술을 마주하면서도 입안에 고이는 침을 어쩌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피했다. 그만하라는 듯 어깨를 탁탁 가볍게 내리쳤다. 최서율이 좋아하는 김치와 강무혁이 좋아하는 고기가 잔뜩 들어간 찌개가 어젯밤 밥은 먹지 않고 라면을 먹은 최서율의 입맛을 확 돌게 했다. 제대로 먹지도 않았는데 밤새 심한 운동을 했으니 배가 고픈 건 당연했다.
“찌개 진짜 맛있겠습니다.”
“아주머니 솜씨야 당연히 일품이죠.”
“부사장님이 끓여주셔서 더 맛있겠습니다.”
강무혁의 목에 팔을 걸고 눈을 마주한 최서율이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웃었다. 강무혁이 치솟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내리며 짧게 헛기침을 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끓인 줄 알겠습니다. 요리에는 영 솜씨가 없는데.”
“그래도 저 먹으라고 데워주셨잖습니까. 그러니 부사장님 정성도 들어간 거로 하겠습니다.”
조리대에서 내려오려던 다리를 잡은 강무혁이 틈을 벌려 제가 들어갈 자리를 만들고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완전히 밀착한 상태로 마주한 눈동자가 무언가를 갈망하듯 일렁였다.
최서율이 강무혁의 팔과 어깨를 더듬었다. 목덜미를 타고 올라간 손이 턱에 닿기 무섭게 입술이 맞닿았다. 고개를 꺾으며 밀려 들어오는 강무혁을 끌어당기듯 잡고 입술을 벌렸다. 달큼한 냄새가 입안에 한가득 고였다가 목구멍으로 쑥 넘어갔다.
축축한 살덩이가 맞닿아 비벼지는 감촉에 등줄기를 빳빳하게 세운 최서율이 부드럽게 넘어가는 강무혁의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잡았다. 새벽 내내 닿아있던 살갗의 감촉이 좋아 자꾸만 손을 꼼지락거렸다.
“으응….”
턱을 지나 목덜미로 내려오는 입술에 맞춰 고개를 뒤로 젖히자 주방 너머로 보이는 창문에 흐릿한 시선이 닿았다. 어젯밤 얼마나 물고 빨아 놓았는지 입술이 닿는 살갗이 아려 그마저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꾹 닫혀버렸다.
“아픕니까?”
“조금….”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목덜미 가장 안쪽에 입술을 붙였다가 뗀 강무혁이 다시 입술을 찾아 정확히 맞춰왔다. 미처 제대로 열리지 못한 입술을 이로 깨물어 열어 내곤 안쪽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정성을 담아 끓인 찌개는 그들의 옆에서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이제 막 시작한 연인에게는 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식은 찌개쯤은 다시 데우면 그만이었다.
* * *
“엄마도 참… 내가 앤가? 괜찮다니까? 응, 알겠어요….”
달콤한 낮잠에 빠져 있다가 대뜸 울려대는 핸드폰에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온 최서율이 저를 잔뜩 걱정하는 어머니와 통화를 하느라 거실 소파에 무릎을 세워두고 앉았다.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니 제게 일어난 꿈같은 일과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커다랗게 다가왔다. 이제 어엿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제값을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의 목소리는 그런 저를 참 약하게 만드는구나 싶어 쓴웃음이 나왔다.
-율아, 혹시 이번 축제 때는 여기 못 오니?
“아… 벌써 그렇게 됐나? 생각도 못 하고 있었네?”
-아버지가 말은 안 해도 내심 너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고… 엄마도 네가 보고 싶고….
“어떡하지… 이번에도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직장인이 어디 내 마음대로 쉴 수 있나? 그래도 휴가 한 번 알아볼게요. 나도 엄마 본 지 오래됐고… 다들 보고 싶으니까.”
-그래. 좀 알아봐. 이럴 때라도 봐야지.
“네. 근데 아직도 규모가 그렇게 큰가? 어릴 때는 엄청나게 크게 했던 거 같은데.”
-어휴, 크지 그럼. 추석이랑 설보다 더 크게 하잖니.
“아버지랑 형이 일이 많겠네.”
-아버지랑 형만 바쁘니? 어미도 죽어난다.
어머니의 앓는 소리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최서율이 소리를 죽여 키득거렸다. 말은 이렇게 해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마을의 모든 일에 간섭할 어머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참, 이번에는 비가 많이 와서 약초를 구하기가 정말 쉽지 않네. 약국에서 산 약은 좀 잘 드는 거 같니?
“응, 괜찮아요. 안 그래도 비 많이 와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신경 쓰지 말고 비 오는데 약초 구한다고 산에 가고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걱정이 커졌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수인 전용 발정기 억제제는 어떤 날은 약효가 잘 들었고, 어떤 날은 제대로 들질 않아 밤에 고생하는 날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내주신 약은 끝까지 다 먹었다고 말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약도 집이 털릴 때 엉망이 되어버렸기에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보내주신 약을 먹지 못한지 두어 달이 되어갔다. 애도 아니고 원하는 걸 보내달라고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떼를 쓰지도 못하니 그저 괜찮다고 마음이라도 안심시켜드려야만 했다.
최서율이 전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내려놓았다. 이러다가 산이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 만큼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여전히 그 기세를 꺾지 않고 무섭게 쏟아졌다.
내리는 비를 보고 있자니 붕 떠올랐던 가슴이 조금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좋아한다고 말했고, 그 마음에 대한 답도 들었다. 더 걱정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남아있어 마음이 아주 가볍지만은 않았다.
“…….”
다리를 모아 끌어안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경찰서에서 나서면서 집주인과도 짧게 통화를 했다. 집을 비워둔 채로 월세를 계속 내는 건 부담스러웠기에 조금이라도 깎아 줄까 싶어 전화했는데 혹시 집을 내놓을 생각이 없냐는 말만 들었다. 계약기간이 아직 두어 달 정도 남았으니 생각해보겠다고 말하며 본전도 찾지 못한 채 뾰족한 수도 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생각이 많아 머리가 무거웠고, 이마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똑똑. 벽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최서율이 모습을 드러내는 강무혁을 보고 힘없이 웃었다. 지금 털어놓으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가슴이 너울거렸다. 그가 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제 본래 모습까지도 좋아해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일었다.
“어머니와 통화하는 것 같아서 방해하지 않았는데. 표정이 왜 그럽니까?”
1인용 소파라 옆에 앉을 수 없어 동그랗게 말린 몸을 답삭 들어 안았다. 다리를 모아 붙잡고 있던 모양 그대로 들린 최서율이 강무혁의 허벅지 위에 앉혀졌다. 바로 옆에 같은 모양의 소파가 있음에도 이렇게 힘을 써서라도 같이 앉겠다는 마음이 너무도 이해되어 버둥거리지 않고 하는 대로 얌전히 안겨있었다.
소파에 느른하게 앉은 그의 몸 위서 널찍한 가슴에 몸을 기대었다. 얼굴은 그의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파묻고 이제는 익숙해진 호랑이의 냄새를 따라 킁킁. 코를 움직여댔다.
“고향에 오라고 하십니까?”
“네, 곧 축제가 있거든요. 같이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가면 되겠네요. 연차도 많이 쌓였을 텐데.”
“…그러면 며칠이나 자리를 비워야 합니다. 요즘같이 바쁜 시기에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랑 같이 가면 어떻습니까.”
“…네?”
기대었던 고개를 반짝 들어 올린 최서율이 강무혁의 가슴팍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소파 등받이에 뒷머리를 대고 있던 그가 옆으로 고개만 비스듬히 틀어 동그란 눈으로 입술만 방긋거리는 얼굴을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걷고 싶다며.”
“아….”
“그러니까 갑시다. 같이.”
형형색색 등불이 마을 개천 길에 걸리면 그 모습이 경이롭도록 아름다워 어린 마음에도 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으리라 다짐했었다. 어쩌면 두 사람이 나눈 최초의 고백일지도 모르는 그 대화를 기억한 강무혁이 좋았다. 가슴이 넘실넘실하다가 어느 순간 감정이 넘쳐흘렀다.
종을 뛰어넘어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도록 해준 이에게 지금이 아니면 못 할 말을 얼른 해주고 싶어 혀 밑이 간지러웠다.
“부사장님, 그런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