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꼭 끌어안은 몸 그대로 침대에 앉혀졌다. 정돈된 이불이 풀썩, 휘날리자 맹수의 짙은 내음이 사방으로 퍼졌다. 최서율을 그대로 앉혀두고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은 강무혁이 차갑게 식은 최서율의 맨발을 두 손으로 잡아 주물렀다.
“저녁은 먹었습니까?”
“네….”
“라면?”
여름이라 한층 더 뜨거워진 손바닥이 하얀 발등을 덮었다. 시선을 올려 바라보는 강무혁의 눈을 멀뚱히 마주하던 최서율이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무언의 긍정을 알아챈 강무혁의 한쪽 눈썹이 좋지 않은 모양으로 치솟았다.
“그제도 먹지 않았습니까? 혼자 있어도 잘 챙겨 먹기로 했잖습니까.”
“그제 먹은 건 라면이 아니라 비빔면이었습니다.”
“그게 그거지.”
“…다릅니다.”
습관처럼 발을 동동거리려다가 발을 잡은 손에 막혀 종아리만 튕기고 말았다. 민망함에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고 호랑이 냄새가 피어오르는 얇은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곧바로 침실로, 그것도 강무혁의 침실로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귓가가 뜨거워졌다. 발을 주물러주는 커다란 손을 바라보다가 제 귀를 만지작거렸다.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예민해진 귀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겼다.
손톱을 세워 귀 뒤를 살살 긁어대던 최서율이 비에 흠뻑 젖은 강무혁의 머리카락에 손을 댔다. 반쯤 마르긴 했지만, 아직 물기를 머금고 있어 축축한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겼다.
주무르던 발을 내려놓고 다른 쪽 발을 잡은 강무혁이 고개를 들었다. 잘 손질되었던 머리가 헝클어져 이마를 덮고, 눈썹까지 가려버리니 사납던 호랑이의 눈빛이 한층 순해 보였다.
허공에서 마주한 시선에 모든 신경이 집중됐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기류가 두 사람을 감싸고 주변의 공기를 뜨겁게 달궜다.
강무혁은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으로 촉촉하게 젖은 하얀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두운 침실에서도 빛나는 반질반질한 눈동자가 저를 향해 움직이는 걸 확인할 때마다 가슴속에서 용암 같은 뜨거움이 치솟았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에게도 좋아한다, 사랑한다. 같은 고백의 말은 잘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관계를 지속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귀는 사이. 만나는 사이가 되어 있었고 마음에서 솟구치지 않으면 말하기 민망한 말이기에 입에 올리는 일이 별로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해달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미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 사이에 ‘고백’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무의미한 일에 매번 마음을 쓰고, 언제 말해야 할까 고민하고 혼자 전전긍긍하는 최서율의 모습을 보며 제게 의미 없는 일이 그에게는 큰 의미가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먼저 다가와 말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용기를 내어 제게 오고 있다는 말을 지키기라도 하는 듯 이끄는 대로 착실하게 따라와 준 최서율이 ‘좋아한다.’라는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하고, 앓았는지 알았기에 작은 몸에서 힘주어 끌어올렸을 큰 용기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 더 큰마음을 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냉기가 맴돌던 발이 따뜻해졌다. 작은 발을 손에 잡고 허옇게 드러난 무릎에 입술을 눌렀다.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던 최서율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주름도 선명하지 않은 깨끗한 무릎을 입술로 촘촘하게 더듬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새까만 동공에 담긴 새로운 우주가 성큼 다가왔다.
‘고백’의 위력을 제대로 실감 중이었다.
“부사장님….”
발바닥을 손으로 받치고 발을 들어 올렸다. 털에 감싸인 통통하고 동그랗던 토끼의 앞발만큼이나 작고, 사랑스러운 발이었다.
여름이 되어 살이 내리면서 발등의 뼈가 도드라졌다. 푸른 핏줄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 살결에 입을 맞추자 최서율이 발을 뒤로 물리며 움찔거렸다.
“처음에 최서율 씨가 토끼 수인이라는 걸 알았을 땐 화도 났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걸 왜 숨긴 걸까. 그래도 몇 년이나 같이 일했는데 상사로서 그 정도의 믿음도 없었나. 하는 섭섭함도 있었습니다.”
“…….”
“그다음엔 비밀을 지켜주는 대신 내게 필요한 만큼만 도움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내가 급한 상황이기도 했지만, 간절히 원하는 최서율 씨의 바람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는 이유가 가장 큽니다.”
“…….”
“또 그다음엔 안전을 핑계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습니다. 내가 왜 당신을 걱정하고 있는지 제대로 된 이유도 모른 채로 그렇게 계속 당신 곁에 있고 싶어졌습니다.”
“부사장님.”
“우리가 처음 키스하고 나서. 좋으면서도 무섭고, 기쁘면서도 슬프다고 했었나요.”
“…….”
“최서율 씨는 내가 언젠가 그 알 수 없는 감정에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호랑이가 토끼를 다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고,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하지만 같은 사람으로서 당신이 느꼈을 망설임과 두려움은 공감합니다.”
“…….”
“복잡한 마음을 이겨내고, 용기 내어 내게 와줘서 고마워요.”
최서율은 예민해진 귓가를 두드리는 빗소리보다 더욱 커다랗게 울리는 심장 고동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러다가 심장이 고장 나면 어쩌나 싶어 숨을 쉬는 방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가쁜 숨을 몇 번이나 몰아쉬어야 했다.
사람은 슬프거나 아플 때도 울지만 기쁘거나, 행복할 때도 운다는 걸 이미 수많은 경험을 통해 배웠지만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고, 숨이 가쁜 와중에도 눈물이 날 수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는 것 같았다.
“용기 내서 여기까지 온 만큼,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사랑해주겠습니다. 이제 그 어떤 것도 최서율 씨를 불안하게 하거나 위험하게 하진 않을 겁니다.”
최서율은 오늘 경찰서에서 들은 얘기를 강무혁이 알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다. 제가 경찰서에 다녀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던 것처럼 그 일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캐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저, 더는 불안해하거나 겁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강무혁이라 좋았고, 강무혁이어서 좋았다. 그것만 생각해도 숨쉬기 버거울 만큼 가슴이 벅찬데 그 안에 다른 것까지 담을 여력이 없었다.
눈가가 축축해진 채로 웃었다. 다그치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스스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도록 기다려준 사람을 향해 가득 차오른 감정이 뜨겁게 쏟아졌다.
“부사장님, 이제 약속 지키셔야 합니다.”
“무슨 약속?”
“제가 용기 내어 부사장님께 오면 호랑이 등에 태워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답한 기억은 없는데.”
“크릉.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크릉. 했습니까?”
“네… 그때 크릉. 하셨잖아요….”
옴쭉거리는 입술을 보던 강무혁이 웃었다.
제 마음이 중증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최서율의 얼굴이 보송보송한 털을 허공에 휘날리는 토끼만큼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워 당장이라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뛰어다니고 싶은 기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얘긴 나중에 하죠. 어려운 일도 아니고.”
“이번에는 잘 기억해두셔야 합니다.”
“잘 기억해두겠습니다.”
잡고 있던 발을 내려놓고 침대에 무릎을 디딘 강무혁이 최서율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밀어 넣어 쑥 끌어 올렸다. 순식간에 침대 한복판으로 옮겨지곤 얼른 손을 뻗어 가까이 다가오는 강무혁의 가슴팍을 손으로 짚었다.
“피곤하실 텐데… 얼른 씻고 주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 나한테 그냥 자라고 하는 겁니까?”
티셔츠 밑단을 밀며 들어오는 손을 옷 위로 겹쳐 잡은 최서율이 벌어진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지금이 무슨 상황이냐고 묻는 건 그만두었다.
“진도가… 좀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할 거 다 했는데 이 정도 참았으면 많이 참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저, 좀… 오랜만이라….”
강무혁이 고개를 비틀었다.
“들쑤시지 말아요. 필요 없는 발언으로 자극하지 말고.”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눈과 마주한 최서율이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떨림을 감지한 손이 말캉한 뱃살을 주무르듯 누르며 살결을 타고 안쪽으로 깊게 밀려 들어왔다. 맨살에 닿는 뜨거운 체온에 멍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제가, 아직… 준비가….”
“준비는 내가 해주겠습니다.”
배꼽과 명치를 지나 차근차근 몸을 타고 오른 손가락이 봉긋하게 솟은 젖꼭지에 닿았다.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에 눈이 질끈 감겼다.
눈을 뜨면 형형한 그의 눈과 마주할 걸 알기에 쉽사리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못한 최서율이 미간을 좁히며 강무혁의 팔뚝을 몇 번이나 고쳐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가슴팍에서 원을 덧그릴 때마다 떨리는 등허리에 힘을 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눈 떠요.”
“하아… 아, 부사장, 님….”
예민한 돌기를 꼬집듯 잡으며 속삭이는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차마 눈을 떠 강무혁을 바라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구겨진 하얀 미간에 입 맞춘 강무혁이 눈떠. 하고 속삭였다. 동시에 돌기를 긁어내리는 손톱에 어깨가 절로 옹송그려졌다.
“읏….”
돌기를 잡아 쥔 손끝이 이리저리 비틀렸다. 등허리로 힘을 바짝 준 최서율이 떨리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잡아먹을 듯 형형하게 빛나는 눈과 시선을 마주하자 사타구니 안쪽이 저릿했다.
등줄기를 굳히며 상체를 세우는 최서율의 목덜미로 강무혁의 입술이 닿았다.
“아! 부, 부사장님!”
커다란 덩치가 몸을 밀자 버둥거릴 새도 없이 침대에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흐트러진 티셔츠 안쪽에는 젖꼭지를 함부로 굴려대는 강무혁의 손이 볼록하게 솟은 모양을 하고 있었고, 목덜미를 타고 올라 귓가를 간지럽히는 혀는 오돌토돌한 돌기가 돋아나 여린 피부를 아리게 만들었다.
귓가에 척척한 소리만 가득했다. 귓구멍 안으로 밀려 들어온 호랑이의 혀가 귀를 침으로 다 적셔 놓는 소리에 자꾸만 몸 어딘가가 저리고, 간지러웠다.
“아… 으흐….”
쥐어 잡고 있던 젖꼭지를 살살 쓰다듬은 강무혁이 최서율의 이마와 콧대, 콧방울에 차례대로 입술을 눌렀다.
“눈감지 말아요. 지금 너랑 같이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봐야지.”
“그, 부사장, 님…. 그러니까, 아직, 좀… 준비가…!”
“준비는 내가 해준다고 했습니다. 더 애태우지 맙시다.”
허공을 가르며 허우적대는 최서율의 손을 잡아 입안으로 밀어 넣은 강무혁이 최서율의 손가락 마디를 아프지 않게 이로 긁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호랑이의 이가 닿았다는 감각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몰고 왔다. 정수리와 꼬리뼈 부근의 살갗이 간지러워 자꾸만 허리가 비틀렸다.
“토끼 냄새에 이렇게 휘둘리는 호랑이도 나밖에 없을 겁니다.”
“하아… 저, 저도….”
“흥분됩니까?”
최서율은 어린아이가 아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발정한 수인은 쉽게 동물화되지 못한다는 걸. 만약 애매한 흥분에 휩싸여 이도 저도 아니게 되면 오히려 인간의 모습에 귀나 꼬리가 튀어나오는 기괴한 모습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모습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이미 아래가 묵직해지기 시작했기에 여기서 물러서면 밤새도록 가시지 않는 열기를 붙잡고 앓아야 한다는 것도 알기에 뒤로 물러서지 않고 솔직해지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
“…네.”
가슴을 손바닥 전체로 감싼 강무혁이 무서운 기세로 입술을 덮쳐왔다.
여린 입술을 짓눌러 틈을 벌려낸 강무혁이 혀를 밀어 넣기 무섭게 이가 맞닿았다. 혀가 엉키고, 타액이 줄줄 흐를 만큼 격렬한 키스에 목울대가 여러 번 경련하듯 떨렸다. 쏟아지는 범의 기운과 함께 치솟는 열기가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몸을 채워갔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누구의 냄새인지 모를 것들이 넘쳐흘렀다.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종의 향기를 따라 정신없이 녹아들었다. 낑. 앓는 소리가 목구멍 안쪽에 맺혔다. 그 소리까지도 모조리 집어삼킬 듯 깊숙이 혀를 밀어 넣은 강무혁이 까슬해진 혀로 입천장을 긁었다.
“하으… 읍…!”
옅은 통증과 함께 쾌감이 치솟았다. 젖은 입술을 핥고 내려온 강무혁이 둥그런 턱을 물어 입 안에 넣고 굴려댔다. 부르르 떨리는 최서율의 몸을 손안에 넣고 이리저리 굴려대는 강무혁은 거침이 없었다.
그런 강무혁의 기세에 맞춰 맞닿은 몸 사이로 손을 밀어 넣은 최서율이 이름만 들어도 턱이 벌어질 정도로 값비싼 브랜드의 셔츠를 망설임 없이 잡아 벌렸다. 투두둑, 제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단추가 침대 밖으로 튕겼다. 그 틈으로 손을 밀어 넣어 곰살맞은 손길로 강무혁의 맨살을 더듬어 잡았다.
“요망하긴….”
“하아… 부사장, 님….”
몸을 가만히 두질 못하고 이리저리 비틀어대던 최서율이 불룩해진 하체를 강무혁의 탄탄한 복근에 비벼댔다. 그 양물의 앙큼한 질감에 헛웃음을 터트린 강무혁이 꿈틀거리는 최서율의 아랫배를 지나 속옷 속으로 손을 쑥,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