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가만히 앉아있어도 풀 내음이 풍기는 계절이 시작되었다. 최서율은 강무혁과 함께 지내는 생활에 아주 익숙해진 듯 집안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처음보다는 훨씬 편해진 모습으로 지냈다.
너무 편해진 나머지 회사에서도 자기도 모르게 부사장이 얘기는 하는 중간에 웃어버리는 실수를 저질러 박 부장이나 윤 비서의 눈치를 보는 일이 종종 생기곤 했다. 그럴 때는 무척 난감했지만 나름대로 공과 사를 정확히 구분해서 지낸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리조트는 오픈하기 무섭게 대호황을 누렸다. 개업 효과라고 말하기에는 그 기간이 점점 길어졌다. 이러다가는 여름휴가도 반납하고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투덜거리는 지원실 식구들이었지만 부사장의 이름을 걸고 처음으로 진행한 사업이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에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회사 내의 입지를 제대로 굳히기 시작한 강무혁은 일선에서 물러난 강 회장의 일을 사장인 형과 분담하면서 리조트 외의 사업에도 크게 관여하기 시작했다. 어깨가 으쓱한 건 그런거고 일이 늘어나 죽을 맛인 건 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무실이 너무 덥지 않습니까?”
이제 막 계절이 바뀌었다는 게 느껴졌다. 유순했던 바람이 조금 더 뜨거워지고, 햇볕이 내리쬐는 날씨라지만 건물 안은 아직 서늘함을 간직한 채였다. 냉방기를 돌리기에 애매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강무혁은 벌써 덥다고 난리였다. 새로 교체한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지 인터폰도 제쳐두고 직접 문을 열고 나온 강무혁을 위해 에어컨을 확인해 달라고 설비팀에 연락한 윤 비서가 이제 됐냐는 듯이 강무혁을 향해 눈짓했다.
“최서율 대리 좀 들어오라고 하세요.”
몇 걸음만 걸어가면 지원실인데 직접 말하지 않고, 안으로 쓱 들어가 버리는 강무혁의 뒤통수에 대고 눈살을 찌푸린 윤 비서가 옆에 앉아 멀뚱히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고 비서를 바라보았다.
“제가 직접 가야겠습니까?”
“네. 지금 전달하겠습니다.”
윤 비서는 요즘 들어 최 대리를 찾는 부사장의 호출이 잦아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별한 용건이 있으면 항상 비서진을 통해 전달하곤 하는데 둘이 뭘 하는지 들어가면 한참 소식이 없다는 것도 최근 들어 깨닫게 되었다. 부사장의 사생활에 대해 궁금하지 않기 때문에 윤 비서는 애써 모르는 척 고개만 설설 저어댔다.
곧이어 놀란 눈을 하고 고 비서와 함께 나타난 최서율은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윤 비서의 눈치를 봤다. 그걸 알아챈 윤 비서가 어서 들어가 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곤 얼른 문으로 쏙 들어가는 최서율이었다.
“요즘 부사장님이 최 대리님 자주 찾으시는 것 같습니다.”
방금까지 한 생각을 고대로 읊어 대는 고경훈 비서였다.
“한가합니까? 일 더 줘요?”
“어휴. 아닙니다.”
손사래를 친 고 비서가 얼른 자리를 잡고 보고 있던 서류로 눈을 돌렸다.
최서율은 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저와 부사장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흐르는 진땀을 얼른 닦아야 했다.
안으로 다 들어가지 못하고 문가에 서성거리다가 강무혁과 눈이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 민망해진 최서율이 볼을 긁적였다.
책상에서 소파로 올 것처럼 서류를 들고 펄럭이고 있는 강무혁은 오늘따라 어딘지 더 풀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같이 출근할 때 보았던 반듯한 재킷과 조끼는 사라졌고, 늘 각이 잡혀있던 넥타이도 느슨하게 풀어진 채였다.
“부사장님, 회사에서는 되도록 부르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왜요. 누가 눈치 줘요?”
“그건 아니지만… 눈치가 좀… 보이긴 합니다.”
부사장실의 소파는 얼마 전 교체되었다. 그 전의 것이 쓰지 못할 정도로 망가지거나 낡은 게 아닌데 교체한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위에서 하겠다면 하는 거기에 토를 달지 않았지만, 남들 몰래 이 소파에 자주 앉게 된 최서율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멀쩡한 소파를 왜 바꾸느냐고 강무혁에게 한참 종알거렸더랬다.
“일단 좀 앉죠.”
최서율을 향해 걸어오던 강무혁이 손짓했다. 천천히 자리에 앉은 최서율이 소파의 질 좋은 가죽을 손톱으로 톡톡 건드려보았다. 그러다가 어느새 옆으로 와 앉는 강무혁의 얼굴을 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
매일 보는 얼굴, 이전보다 더 자주 보는 얼굴인데도 가끔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지금이 딱 그러했다.
“부사장님,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안 아픕니다. 아파 보입니까?”
“네. 얼굴도 좀 붉고… 힘들어 보입니다.”
강무혁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최서율은 혹시나 강무혁이 감기에 걸린 건 아닐까 싶어 화들짝 놀랐다. 미처 생각이 제대로 움직이기도 전에 손이 강무혁의 얼굴에 닿았다. 상대적으로 차갑게 식어있던 손에 뜨거운 체온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손을 떨어버렸다.
“열나는 거 아닙니까?”
“열나는 거 아닙니다.”
“근데 열이….”
매끄러운 피부를 쓰다듬듯 만지고 있는 손을 붙잡은 강무혁이 고개를 비틀어 분홍빛이 맴도는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토끼의 발바닥을 만져볼 생각으로 털로 감싸진 작은 발을 주물럭거리다가 뒷발에 거하게 차였던 게 바로 지난 주말의 일이었다. 발까진 만져보지 못해도 이 작은 손을 마음껏 잡고 만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굳은살 하나 없이 보드라운 손에 입술을 비비던 강무혁이 눈을 치켜들었다. 손바닥에 닿는 입술의 감촉에 가만히 눈만 깜빡거리던 최서율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당장이라도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달려들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왜 그러시는….”
“나랑 땡땡이치겠습니까?”
땡땡이치자는 말을 이렇게 정중하게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강무혁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땡땡이… 업무 시작한 지 두 시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기온이 올라서 너무 덥네요. 가만히 있어도 짜증도 나고…. 집에 돌아가서 수영 좀 해야겠습니다.”
“저는… 수영은 못합니다.”
“옆에서 보는 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일도 걱정이었고, 다들 바쁜데 혼자만 빠져나간다는 게 마음이 걸렸다. 어쩌지 싶은 마음에 입술이 옴쭉옴쭉 움직여댔다. 마음이야 당장 내려놓고 강무혁을 따라나서고 싶지만 그럴만한 직위도 되지 못했고, 간도 콩알만 했다.
“가고 싶은지만 말해요. 흔한 기회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저만 쉰다는 게….”
“그럼 가서 일하게 해주겠습니다.”
솔깃했다. 일이야 집에 가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질반질한 눈이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걸 본 강무혁이 손안에 쥐고 있던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내려 주고는 곧바로 동그랗고, 작은 턱을 잡아 쥐었다.
“가는 겁니다?”
“네….”
최서율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술을 들이대는 강무혁이었다. 놀라 뒤로 몸을 물리며 어깨를 작게 옹송그린 몸으로 기다란 팔이 휘감겼다. 턱을 잡은 손이 힘을 주며 고개가 내려가지 못하게 막았다. 눈을 길게 깜빡이자 입술이 닿았다. 얼른 눈을 감은 최서율이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타닥타닥 튕겨댔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익숙하고도, 낯선 향기가 한가득 밀려들고, 발끝부터 열기가 치솟았다. 강무혁이 덥다고 말한 의미를 알 것 같은 뜨겁고, 짙은 키스였다.
* * *
“윤 비서님이 오해하실까 봐, 걱정됩니다.”
“무슨 오해?”
“저랑 부사장님이랑 갑자기 일이 생겼다는 게 말도 안 되고…. 윤 비서님이 아닌 저를 데려간다고 하신 것도 사실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강무혁은 눈치 빠른 윤 비서가 부사장의 사생활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지 이미 모든 사태를 파악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에 지장을 준다거나, 막대한 손해를 입히지 않는 이상 이렇게 계속 모르는 척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걱정스럽게 저를 바라보는 최서율을 눈을 보던 강무혁이 피식, 작게 웃고 말았다.
“오해할 일 없게 더 잘, 그럴싸하게 얘기해 둘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한 최서율이 수영장 옆에 마련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운 하나를 걸치고 기지개 켜는 강무혁을 바라보다가 떡 벌어지려는 입을 억지로 닫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덕분에 콧구멍이 커졌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 번을 보고, 두 번을 보아도 적응되지 않는 기골이 장대한 모습에 귀와 연결된 턱뼈가 벌어지려는 걸 억지로 참아 낸 덕분에 뼈마디가 아려왔다.
아마도 강무혁은 가운 안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을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커져만 가는 상상에 혼자 놀라 급하게 숨을 집어삼킨 최서율이 히끅! 딸꾹질을 시작했다.
“또 놀랐습니까?”
“아닙, 니다. 숨을 잘못 쉬어서… 끕!”
두 손으로 작은 입을 가린 최서율이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끅, 끕, 끕.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그때마다 어깨가 들썩들썩했다.
“숨 참고 물 마셔요. 딸꾹질엔 그만한 게 없습니다.”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인 최서율이 얼른 코를 집어 숨을 참고 물을 한가득 입에 물었다. 눈을 질끈 감고 숨이 찰 정도로 천천히 물을 삼켰다.
“그건 왜 가져 왔습니까?”
테이블 위에는 출근 후 집안일을 돌봐주시는 곰 아주머니가 갑자기 돌아온 두 사람을 반기며 챙겨준 맛있는 음료수와 물, 간식거리를 제외하고도 선물 받은 노트북과 회사 전용 외장하드가 놓여있었다.
“일하려고….”
“하….”
가운이 느슨해진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뚜벅뚜벅 다가온 강무혁이 노트북 화면을 툭, 하고 닫아 버렸다. 그 커다란 손을 멀뚱히 바라보던 최서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나만 땡땡이치고 최서율 씨는 정말 일 시킬 사람으로 보입니까?”
“하지만, 일을….”
“호랑이가 수영하는 걸 지켜보다가 나오려고 하면 저기 있는 수건을 가져오세요. 그게 오늘 최서율 씨가 할 일입니다.”
“아….”
멍하게 저를 바라보는 최서율의 귓가를 살살 만지작거린 강무혁이 웃었다. 커다란 입이 귀까지 벙긋 올라가고, 수려한 눈썹과 짙은 눈매가 휘어졌다. 그 위로 한낮의 햇살이 담뿍 내려앉았다. 강무혁의 뒤로 산봉우리가 보였고, 주변을 흩날리는 것은 먼지인지, 꽃잎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이 마치 그림처럼 느껴질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인 최서율이 뜨거운 체온이 남은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강무혁과 함께 산다는 건 종종 심장이 아플 정도로 두근거리는 걸 감당하는 시간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풍덩.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튀고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유유히 수영장 안을 헤엄쳐대기 시작했다.
아직 수영하기에는 이른 날씨였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룩주룩 흐를 만큼 여름이 무르익어야 수영할 날씨가 된다고 생각했던 최서율은 해가 떠 있는 시간이면 하루에 한 번은 첨벙거리는 호랑이를 지켜보는 내내 날씨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아직 춥지 않나…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 두고, 아주머니가 만들어주신 레모네이드를 입에 물었다. 시원하고, 톡 쏘는 청량함과 더불어 달큼한 맛이 일품이었다.
호랑이의 줄무늬가 수면으로 올라왔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호랑이가 더위에 약하다는 건 알았지만 다른 고양잇과 동물과는 다르게 수영을 즐긴다는 건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토끼가 아닌 다른 종의 습성이나 특징에 대해서는 무지하던 최서율은 호랑이를 알아가는 시간이 재미있었다. 가끔 기분이 좋으면 골골거리는 소리도 내고, 그루밍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토끼도 그루밍을 하기에 호랑이를 눕혀두고 그루밍하고 싶어지는 때도 있었지만, 아직 용기가 나질 않아 시도해보지 않았다.
의자에 편히 기대어 호랑이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다가 말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여름에 사람의 모습으로 종종 물놀이를 즐기곤 했지만, 그것도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물살을 가르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호랑이를 보니 아직은 서늘한 산바람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이 일었다.
바지를 동동 걷어 올린 최서율이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었다. 맨발이 물에 젖은 데크에 닿았다. 호랑이가 첨벙거릴 때마다 넘쳐흐른 물이 곳곳에 고여있었다. 그 위에 발을 대고 찹찹 소리를 내며 물을 가지고 노는 최서율에게 호랑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수면 위로 올라온 호랑이의 얼굴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부사장님….”
수영장 끝자락에 턱을 기대고 저를 바라보고 있는 호랑이가 어울리지 않게 귀여웠다. 노란색 동공이 오늘따라 빛나는 것만 같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최서율이 고개를 내민 호랑이의 앞으로 쭈그려 앉았다.
맨발에 닿는 물이 차갑게 느껴졌다. 손을 뻗어 젖은 호랑이의 얼굴에 손을 대었다. 심장이 도곤도곤 내달렸다. 몇 번 봤다고 익숙해진 호랑이의 젖은 털을 쓰다듬어 보았다. 역시나 물에 젖은 털이 차가웠다.
“감기 들겠습니다. 물이 너무 차가워요.”
호랑이가 수영을 즐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제아무리 호랑이라고 하더라도 감기 앞에서는 장사 없다던데… 걱정이 밀려왔다.
“이만 나오세요. 배고픕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해가 중천을 넘어서 기울어지기 시작했으니 배가 고픈 것도 당연했지만, 사실은 차가운 물에서 이 커다란 호랑이를 끄집어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호랑이가 대답하듯 ‘크릉.’ 소리를 냈다.
* * *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회사 일을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우기는 최서율에게 서재의 책상을 내어준 강무혁이었다. 최서율이 머무는 방에는 책상이 없기에 작은 탁자에서 일해야 하는데 쭈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곤 안 그래도 작은데 더 작아지겠다고 놀리더니 선뜻 서재를 내어 준 것이었다.
서재에 가득한 범의 기운에 멈칫한 최서율이 제 노트북을 끌어안고 강무혁을 돌아보았다. 집 전체도 호랑이의 냄새나 흔적이 가득 남아있었지만, 서재는 말 그대로 호랑이굴이라 불리기 손색이 없을 만큼 곳곳에 그의 기운이 잔뜩 묻어 있었다.
“무섭습니까?”
“네, 조금….”
때마침 걸려온 박 부장의 전화를 받고 두려움도 떨쳐낸 듯 성큼성큼 걸어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은 최서율이었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직장 상사의 전화가 이렇게나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 강무혁은 허탈한 듯 조금 웃어버렸다.
“네, 선 과장님. 하드에 자료 올려두었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해가 산등성이 위로 완전히 기우는 오후 무렵. 오늘 해야 하는 일을 어느 정도 끝낸 최서율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것 같아 춥다고 느꼈었는데 어느새 에어컨이 꺼져있었다. 오후가 되자 바람이 조금 더 뜨거워졌다. 시원한 바람과 뜨거운 바람이 반반 섞여 있어 기분이 좋았다.
제가 밀어낸 강무혁은 어디서 뭘 하고 쉬고 있을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난 최서율이 서재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을 잠시 미뤄두고 문을 밀며 밖으로 나섰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복도를 걸어 제일 첫 번째 방인 제가 지내는 방에 노트북과 외장하드를 던져 놓았다. 너른 거실에 앉아있을 강무혁을 생각하며 발을 내딛던 최서율이 바닥을 더 밀지 못하고 멈칫했다.
서재에 들어갈 때까지는 멀쩡하게 사람이던 강무혁이 어느새 다시 호랑이가 되어 거실 한중간에 드러누워 있었다. 호랑이가 숨을 쉴 때마다 두꺼운 털가죽이 위아래로 솟았다가 꺼졌다. 흠뻑 젖어 있었던 털은 당연하다는 듯이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고, 크릉- 코를 고는 것도 아닌데 그에게서 들려오는 소리에 심장이 또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최서율은 이 두근거림이 두려워서인지, 좋아서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귓가와 꼬리뼈 부근이 근지러워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는 건 정확하게 인지했다.
곧이어 갈색 토끼 한 마리가 최서율이 입고 있던 옷을 헤치며 튀어나왔다. 토끼를 위해 깔아둔 러그 위를 통통 튕기며 몇 바퀴 뛰어대더니 앞발을 바닥에 딛고 허리를 길게 늘이며 기지개를 켜고 두 발로 쫑긋 솟은 귀를 잡아 내려 몇 번 쓰다듬었다.
까맣고 작은 코를 꼼질꼼질 열심히도 움직였다. 호랑이의 꼬리와 뒷발을 지나, 얼굴까지 다가간 토끼가 하나도 남김없이 열린 폴딩도어 너머의 푸른 잔디를 바라보았다.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은 인간 최서율뿐만 아니라 토끼 최서율의 기분도 좋게 만들어주었다. 깊은 산속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에는 나무 냄새가 가득 담겨있었고, 꽃과 풀의 내음도 한가득 묻어 있었다. 산골짜기를 타고 내리는 계곡에서부터 시작된 힘찬 물줄기의 내음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을 통해 여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향기를 조금 더 자세히 맡기 위해 허공에 코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던 토끼가 호랑이의 앞발 위에 작은 제 앞발을 올려 보았다. 낑.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곤 호랑이의 얼굴을 살피느라 분주했다.
호랑이와 토끼의 보드라운 털이 불어오는 바람에 넘실넘실 춤을 추었다. 콩알만큼 작은 코를 호랑이의 축축한 코에 콩. 하고 대었다. 예민한 호랑이가 그 작은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호랑이가 제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토끼를 바라보았다. 놀란 듯 물러나던 토끼가 닫혀있던 앞발이 스르륵 열려 틈이 만들어진 것을 보고 망설임 없이 호랑이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포근하고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던 토끼가 고른 숨을 내쉬었다.
성큼 다가온 여름을 만끽하기에 딱 알맞은 낮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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