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오후에는 반 차를 내야 했다. 경찰서도 가야 했고, 집주인도 만나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질러진 집도 정리하고, 조금이라도 멀쩡한 짐을 찾아 챙기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어젯밤에 겪었던 일을 말했더니 모두 한마음으로 걱정해주는 것 같아 위로되었다. 그럼 당분간 어디서 지내냐고 묻는 말에 가까운 곳에 친척 집이 있어서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둘러댔다. 강무혁과 인연이 이어지면서 없는 말로 둘러대는 기술이 점점 늘고 있는 것 같았다. 거짓말하는 게 좋은 건 아니었지만 지원실 식구들이 알아서 좋을 것도 없기에 적당한 선에서 둘러대는 방법을 터득하는 중이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무혁과 마주하고 나니 꿈처럼 느껴졌던 어젯밤의 일이 현실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오전 내내 멍하고 혹시 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결국 다 허상이었다는 걸 알려주듯, 강무혁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강무혁의 집에서 아주 단잠을 잔 것도 신기했다. 처음 잠들었을 때는 무언가에 쫓기는 꿈을 꿨기에 걱정했지만, 라면을 먹고 누웠을 때는 눈을 감았다 뜨니 아침이었다.
라면을 먹었으니 바로 자면 안 된다는 강무혁의 말에 괜히 거실을 빙글빙글 돌며 운동 아닌 운동도 했더랬다.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최서율의 말에 자기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그런 말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확신에 찬 말이었다. 그가 정말 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모님 외의 사람에게 의지하는 건 처음이라 가슴께가 간질거려 몇 번이나 명치 아래를 쓸어내려야 했다.
“부사장님, 회의는….”
“윤 비서가 진행할 테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네에….”
최서율은 혼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강무혁은 단칼에 그 고집을 잘라 버렸다. 경찰서에 가거나 집주인을 만나는 일은 혼자 해도 되는 일이지만 그 집을 정리하고, 짐을 꾸리는 일. 그 짐을 들고 청계산 중턱까지 오는 건 어떻게 하겠냐는 말에 말문이 막혀 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이미 신고가 되어있었기에 집주인과 경찰서에서 만났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경찰과 강무혁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얘기를 나누었다. 집주인도 동네에서 부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범진그룹 부사장의 등장으로 경찰서가 한바탕 시끄러워졌었다.
최서율은 그런 상황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오히려 제게 유리하고, 긍정적인 분위기를 끌어나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건물 현관에 달려있던 CCTV가 망가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한숨이 터져 나왔지만, 온 동네 CCTV를 뒤져서라도 범인을 찾아내겠다고 말하는 경찰의 결의에 찬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강무혁은 공권력은 너무 믿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최서율은 민중의 지팡이를 믿지 않으면 선량한 시민인 제가 무엇을 믿나 싶었다. 안심하고 돌아가셔도 된다는 말에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그만해도 된다고 목덜미를 잡는 강무혁의 손에 이끌려 경찰서를 나서는 걸음이 들어갈 때보다는 가벼웠다.
집을 정리하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청소하려고 생각했는데 엄두가 나질 않았다. 강무혁은 그런 최서율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적당히 짐만 챙기라고 말했다. 짐이라고 해봤자 옷가지가 전부였다. 멀쩡한 물건도 없었고, 필요한 물건도 없었다.
집에서 사용하던 노트북도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나마 자주 사용하는 태블릿은 들고 있었으니 살릴 수 있었지만, 큰마음 먹고 산 노트북이 망가진 걸 보고 눈꼬리가 내려 앉아버렸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약은 겨우 한 봉지만 건질 수 있었다. 다 터져 볼썽사납게 흘러내린 약봉지를 보니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 놓았는지 범인에 대한 분노가 커져만 갔다. 그런 최서율의 옆에 서서 망가진 약봉지를 유심히 바라보는 강무혁의 눈을 알아채곤 이만 됐다며 강무혁의 등을 밀어 문을 나섰다.
“집은 업체에서 정리해줄 겁니다. 웬만한 건 버리고 가구는 그대로 두도록 지시했습니다.”
최서율의 손에 들린 짐을 뒷좌석에 밀어 넣은 강무혁이 최서율이 탈 수 있도록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최서율의 머리통을 헝클인 강무혁이 자리에 앉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문을 닫아 주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대우를 받는 것도 처음이었다. 예의 있는 행동이 몸에 밴 강무혁은 종종 이렇게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지나간 애인들에게서는 받지 못했던 호의였다. 애인…. 그 단어가 주는 설렘에 휩쓸린 최서율이 입술을 깨물며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얼굴을 막아보려 강무혁 몰래 고독한 사투를 벌였다.
* * *
가장 안전한 호랑이굴에 살면서도 종종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그럴 때면 귀신같이 저를 찾아오는 강무혁 덕분에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다. 너무 많은 부분을 의지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곁에서 체온을 나누어주고 의지가 되어주는 강무혁의 곁을 당장은 떠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살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강무혁은 집에서 절대 회사 일을 하지 않았다. 일이 많으면 아주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서 처리하더라도 절대 집에까지 일을 가지고 오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최서율은 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편이었다. 금요일에는 주말을 생각해 그 양이 더욱 많아졌다.
강무혁은 자기를 기다리면서 되도록 회사에서 처리하고 내일 또 회사에서 일하라고 말했지만 최서율은 기한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덕분에 평일 퇴근 후에는 식사만 같이하고 그 외의 시간 대부분을 개인 시간으로 보냈다.
아직 날씨가 완전히 따뜻해지지도 않았는데 첨벙거리는 물소리에 놀라 눈을 뜬 주말 아침에는 호랑이가 수영하는 진귀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더운 걸 유난히 싫어하는 부사장을 떠올리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아직 물에 몸을 담글 정도의 날씨는 아니었기에 강무혁의 몸 상태를 걱정한 최서율이 수영하는 호랑이를 바라보며 수온을 점검해 보는 일도 종종 있었다.
최서율이 사용하는 방은 바깥 기온에 맞게 적당히 따뜻했지만, 집안은 전체적으로 서늘함이 맴돌았다. 그나마도 최서율이 오고 나서 보일러를 돌리기 시작했다는 건 최서율이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일이었다.
매일 강무혁과 출퇴근 할 수 없어 강무혁의 차 한 대를 받은 최서율이 차 키를 손에 들고 벌벌 떠는 일도 있었다. 강무혁의 집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올 수 없고, 매일 산행하기에는 체력적으로도 무리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지만 최서율이 느끼는 부담감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곤란해하는 걸 보던 강무혁이 빌려 타는 게 싫으면 하나 사주겠다고 말해 최서율을 거품 물고 펄쩍 뛰게 했다. 절대 받을 수 없다고 우기다가 결국 당분간만이라도 차를 빌리기로 협의했다. 강무혁이 조찬 일정이 있거나, 현장 시찰, 출장 등 자리를 비울 때 도저히 혼자서는 출퇴근할 수 없을 때 사용했다.
어느 하루는 최서율보다 두 시간 정도 늦게 귀가한 강무혁이 새 노트북을 내밀었다. 회사 공용 노트북으로 일하던 최서율이 아무래도 노트북 구매를 미룰 수 없겠다고 생각할 즘이라 놀랍고, 신기했지만 대가 없이 고가의 선물을 받았기에 진땀이 나는 건 당연했다.
금전적인 부분이나, 물질적인 부분은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부족하지 않게 지원해주고 계셨다. 물론 대기업에 취직하고 벌이가 좋아지면서 독립하긴 했지만 물 쓰듯이 쓰진 못해도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살 정도는 아니었다. 성의를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받아주면 안 되냐는 말에 노트북을 받아 들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고마우면 뽀뽀나 한 번 하자는 아저씨 같은 말을 해 분위기를 차갑게 만들어 버린 강무혁이었지만 새 노트북을 들고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거리던 최서율이 먼저 다가와 입을 맞춰 주었으니 노트북값이 천만 원이어도 아깝지 않은 결과였다.
“부사장님! 여기 좀 보세요!”
호랑이굴에 사는 게 익숙해진 최서율이 주말을 맞이해 마당에 활짝 핀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동안은 집안일을 해주시는 곰 아주머니께서 돌봐주던 마당의 꽃을 이제는 최서율이 살피고 있었다.
서재에서 책을 보던 강무혁은 물줄기가 떨어지는 시원한 소리를 들으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평온함을 깨고 무슨 일인지 다급하게 뛰어와 쉬고 있던 강무혁을 큰 소리로 불러대는 목소리가 상당히 고조되어 있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강무혁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는 다시 마당으로 뛰어간 최서율이 잔디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앞에 어미 다람쥐가 자리를 잡았고 세 마리의 새끼 다람쥐가 최서율이 조심스럽게 내민 손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왔다. 그중 한 마리가 팔을 타고 올라 어깨에 자리를 잡고 꼬리를 살랑거렸다.
“우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미 다람쥐를 바라보았지만, 어미는 최서율을 동료로 인식하고 있어서인지 별다른 경계 없이 새끼들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얼마 전 강무혁이 준비해 놓은 열매를 잔뜩 가지고 찾아갔던 게 이렇게 효과를 보는 것 같아 너무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다.
“다람쥐 가족이 왔습니까?”
“네. 부사장님, 이거 좀 보세요.”
손 위에 올려진 두 마리의 새끼 다람쥐를 들어 보였다. 작은 녀석들이 꼬물거리는 모양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물론 강무혁의 눈에는 새끼 다람쥐보단 그런 다람쥐를 바라보고 있는 최서율이 더 귀여웠지만 말이다.
“아기들이 많이 컸네요.”
“네. 여름이 지나면 독립할 거 같은데 저는 벌써 섭섭해지려고 합니다.”
“자연의 이치입니다.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산군 호랑이를 인식한 다람쥐들이 일제히 강무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다란 손을 내밀자 최서율의 어깨에 올라있던 새끼 다람쥐가 폴짝 뛰어내렸다. 제 손바닥보다 더 작은 새끼 다람쥐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강무혁이 엄지 손끝으로 작은 머리통을 쓱쓱 문질렀다.
담벼락 아래에 뚫어 놓은 작은 구멍으로 아빠 다람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깊은 모양인지 아빠 다람쥐는 어미와 새끼들 주변을 맴돌며 산군 호랑이와 최서율을 살피는 듯 보였다.
“신기합니다. 아기들은 다 귀여운 것 같아요.”
“그러게요. 아주 귀엽네요.”
손에 있던 새끼 다람쥐를 어미 옆에 내려 준 강무혁이 손 위에 다람쥐에게 시선을 빼앗긴 최서율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뜨거운 시선에 고개를 돌린 최서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다람쥐와 비슷했고, 토끼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기 가지고 싶습니까?”
“…네?!”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손위에 있던 새끼 다람쥐들이 놀라 펄쩍 뛰어내려 어미 곁으로 달려갔다.
최서율이 갑자기 깜짝 놀란 게 민망해 헛기침하며 볼을 만지작거렸다. 강무혁이 덩달아 놀란 눈으로 최서율을 바라보았고, 최서율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발치를 뛰어다니는 다람쥐를 피해 옆으로 물러났다.
팔짱을 끼고 그런 저를 바라보고 있는 강무혁의 얼굴은 마주 보지도 못하고 허둥거렸다.
“왜 그럽니까?”
“아, 그… 아닙니다. 저 아기는 가질 생각 없습니다.”
“그냥 물어본 겁니다. 하도 예뻐하길래. 왜 이렇게 놀랐어요.”
“별로… 놀란 거 아닙니다.”
별로 놀란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엄청나게 동요하고 있는 최서율을 바라보는 강무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최서율이 얼른 고개를 들고 방긋 웃어 보였다. 꿰뚫어 보듯 깊고, 형형한 눈동자가 집요하게 닿았다.
최서율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마당을 등지고 저벅저벅 걸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와 비교하자면 매우 빠르고, 정신없는 걸음이었다.
바로 주방으로 걸어간 최서율이 정수기에서 냉수를 한잔 뽑아 마시고 후- 길게 숨을 쉬자 강무혁이 느릿하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최서율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매섭게 움직이는 시선을 슬쩍 피해 몸을 돌렸다. 그렇게 깜짝 놀랄 질문도 아니었는데 왜 그 순간에 진심으로 깜짝 놀란 건지. 저답지 않은 실수에 심장이 완전히 쪼그라들어 자꾸만 숨이 찼다.
“괜찮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오해할까 싶어서 말하는 건데….”
“…….”
“내가 아기를 가지고 싶어서 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
일반적으로 남성과 남성, 수컷과 수컷 사이에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었다. 핍박을 이기지 못해 다른 종족의 진화한 수컷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전해진다. 토끼 족만이 그 유전자를 이어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이라고 정해놓지는 않았지만 이제 막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예민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강무혁이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숨이 가쁜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입술을 말아 문 최서율이 볼을 봉긋하게 부풀렸다가 풀어내며 힘없이 웃었다.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부사장님도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가온 강무혁이 가만히 서 있는 최서율의 목덜미를 가볍게 쓸고, 허리를 숙여 입술을 맞대왔다. 키를 맞춘 입맞춤에 눈을 깜빡거리던 최서율이 입술에 닿는 촉촉한 감촉을 따라 움직이며 강무혁의 팔을 잡았다. 조금이라도 더 닿으려고 몸을 돌리기 무섭게 허리가 잡혔다.
깊어지는 키스에 온몸이 간지러워 가만히 있지 못하는 최서율 때문에 두 사람의 맞닿은 입술이 여러 번 들썩거렸다. 가볍게 입 맞춘 강무혁이 나무라듯 이마를 콩. 박아왔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네요.”
“너무….”
“너무?”
“너무… 좋아서요.”
하. 강무혁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터졌다. 커다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빤히 시선을 맞추고 있는 최서율이 발칙하고, 깜찍했다.
“사람을 정말 들었다 놨다 하네.”
이러는 와중에도 강무혁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최서율이 용기를 내 먼저 관계를 정립해주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키스 이상의 신체접촉은 하지 않는 걸 봐도 그걸 알 수 있었다. 강무혁이 고자가 아닌 이상 참고 있다는 걸 최서율도 알고 있기에 얼른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마음뿐만 아니라 제 안에 담아둔 더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비밀까지도 말이다.
“저녁은 나가서 먹죠. 주말인데 외식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좋습니다. 오늘은 제가 사드릴게요.”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그럽니다. 메뉴판 보고 결정하세요.”
최서율이 입술을 삐죽였다. 가고 싶은 곳이라니. 절대 지갑을 열지 못할 곳이겠지.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말해도 절대로 들어주지 않는 강무혁이었다.
앞으로 톡 튀어나온 입술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 강무혁이 그 위에 다시 짧게 입 맞췄다. 이제는 이런 입맞춤은 떨리지도 않는지 최서율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입술만 달싹였다.
“준비하고 나와요.”
먼저 돌아가는 강무혁의 너른 등을 보며 용기를 끌어 올릴 준비를 시작했다. 까짓거. 말해서 싫다고 하면 말아야지. 라고 쉽고, 편하게 생각하면서도 머리와는 다르게 심장이 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지 견디기가 힘들어 방에 들어와 침대에 잠시 엎드려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