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아, 진짜….”
약도 미리 좀 사둘걸,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당장 한 봉지만 남은 약을 생각하니 후회도 밀려오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되도록 빨리 나가 시중에 판매되는 발정기 억제제를 구해야 하는데 이 상황에 그거부터 해결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라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엉망이 된 집 한가운데 서서 혼자 정리하려니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두 다리도 굳은 듯 한발 움직이는 게 어려울 지경이었다.
후- 후- 가슴을 진정시켜보려 숨을 몇 번이나 몰아쉬었다. 그렇다고 진정되는 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인두겁을 벗어던지고 토끼가 되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귀와 꼬리 부근이 아프도록 팽팽해지고, 근지러웠다.
단순한 좀도둑이겠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보통 도둑이 들면 집안이 이 꼴이 된단 말인가. 이마를 짚고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얼마 전 어머니와 통화했던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리가 떨려 자꾸만 몸이 내려앉았다.
큰일을 겪었다던 고향 형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큰일이 제게도 일어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어떤 큰일인지 자세하게 물어보지 못한 그 날의 저를 후회한다고 해도 다시 전화해 물어보자니 어머니만 불안하게 만들 테니 그것도 못 할 짓이었다.
온도를 감지하고 알아서 돌아가는 보일러 덕분에 집안은 훈훈했지만 온몸으로 한기가 일었다. 손으로 두 팔을 붙잡고 아무렇게나 주물렀다. 해야 할 일도 있고, 생각해야 할 것도 많아진 이 상황에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고, 어려운 일이었다.
문득, 강무혁이 보고 싶어졌다. 바로 얼마 전이었다면 이런 상황에 부사장을 떠올린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을 텐데 이 상황에 강무혁이 떠오른다니 생각보다 마음을 크게 내주었나 보다.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타이밍이 아닌데도 자꾸만 생각이 그런 쪽으로 흘렀다.
최서율은 저 스스로가 천치처럼 느껴졌다. 혼자 이만큼이나 이루어냈는데 이까짓 일쯤이야 쉽게 털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렇지만… 만약 그가 와준다면… 지금 이 상황을 조금 더 용감하게 헤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떨쳐내지는 못했다. 약해지고 싶지 않아 떠오르는 얼굴을 억지로, 억지로 밀어냈다.
더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침대로 가서 앉았다. 발치에 치이는 책은 제가 아끼는 것 중의 하나였고, 취업했다고 형제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사주었던 정장도 엉망이 된 모양으로 구겨져 있었다.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치밀어오르는 울분과 설움을 표출할 방법이 없어 눈물이 맺혔다.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끌어당겨 더미를 만들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내어 울고 싶었지만 참았다. 다잡고 있던 마음마저 무너질 것 같아 억지로 꾹꾹 눌러 참고, 참았다. 그렇게 한참을 엎드려있던 최서율의 귓가에 미세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 소리를 듣고 있다가 뚝 멈춰버리는 진동을 인지하자마자 아! 하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전화 온 것도 인지하지 못하다니 다 망했다 싶어 다시 이불 더미 위로 쓰러졌다.
가방을 열어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해야 하는데 몸에 힘이 빠져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전화야 나중에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뭐부터 해야 하지… 다시 생각을 정리하려는데 징- 징- 이번에는 진동 소리가 아주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제야 힘없이 뻗은 손으로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부사장님] 그 네 글자에 코끝이 찡해졌다.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귀에 댔다.
“네, 부사장님.”
-집에 도착했습니까?
“네, 도착했습니다.”
-목소리가 왜 그럽니까?
“제 목소리가… 왜….”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말 이를 악물고 티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울컥울컥 울음이 터질 듯 목울대를 쳐댔다. 오늘따라 더 다정하게 들리는 강무혁의 목소리를 듣기 무섭게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그 알량한 결심이 야속할 지경이었다.
-울었습니까?
“부, 사장님….”
-네, 듣고 있습니다.
“그게….”
엉망이 되어버린 집, 심란하게 뒤엉킨 마음. 정리되지 않는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형형한 눈빛의 호랑이. 썩은 동아줄이라도 상관없었다. 지금 여기서 저를 구해줄 사람은 이 사람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억지로 주고 있던 힘이 발끝으로 쑥,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집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도둑?
“네… 그런데 제가 지금… 아무것도 못 하겠습니다. 혹시… 회의 끝나시면 저 좀….”
-지금 가겠습니다.
“회의는….”
-지금 회의가 중요합니까? 금방 갑니다. 세 번 노크하고 이름 말하겠습니다. 그때까진 아무도 문 열어주지 마세요.
“네… 부사장님, 빨리….”
-빨리 가겠습니다.
축축해진 눈가를 비벼댔다. 입 밖으로 내놓고 나니 그가 빨리, 최대한 빨리 와주었으면 했다. 용기를 내야 하는 상황에 욕심을 내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그가 와준다는 말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던 몸에 조금이나마 움직일 힘이 돌았다. 일어나 엉망으로 던져진 책을 들어 한쪽에 쌓아 올렸다. 도대체 그릇은 왜 던져 놓은 건지. 화가 치솟다가 또 울컥, 억울한 마음이 밀려왔다.
조각난 유리그릇들을 보다가 도저히 치울 엄두가 나질 않아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들을 하나씩 주워 털어냈다. 바닥이 보일 정도로 물건을 치우고 나니 낯선 발자국이 집안 곳곳에 돌아다녔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절로 입술이 말려들었다. 앞니로 아프게 입술을 깨물고 가장 아끼는 옷들이 엉망이 된 꼴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집안에 침입한 사람이 수인이라면 곳곳에 남아있는 토끼 냄새에 이 집에 사는 사람이 토끼 수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터였다. 그가 토끼를 노린다고 한다면 지금 여기에 발붙이고 서 있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
그런데도 하던 일은 마저 해야 했다. 방안까지 날아온 냄비를 들어 주방에 가져다 놓고, 주방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는 약을 또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부모님과 가족들이 보고 싶어 울음이 날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 냈다.
도둑맞은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다가 말고 관자놀이가 쭉쭉 당기는 통증에 주저앉아 머리를 꾹꾹 눌렀다. 가진 물건도 많지 않은데 이렇게 다 던져 놓으니 꽤 많아 보였다.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죽을 정도는 아닌가 보다 싶었지만, 다시 울컥하는 마음이 치솟아 젖어 드는 눈가를 손등으로 마구 문질렀다. 침대 옆에 넘어져 있던 옷걸이를 세워놓고 괜히 힘이 빠져 풀린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렸다.
[똑. 똑. 똑] 문을 세 번 두드리는 소리에 침대 가에 앉혔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문 앞까지 순식간에 달려갔지만, 혹시나 들려오는 목소리가 낯선 목소리는 아닐까 싶어 선뜻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최서율 씨. 강무혁입니다. 문 열어요.”
익숙한 그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정말 그가 와주었다는 안도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파도처럼 덮쳐오는 그 감각에 아주 잠시 멈칫했던 최서율이 빠른 손놀림으로 잠금장치를 풀었다. 안에서 문고리를 돌리기도 전에 밖에서 문을 잡고 열어젖힌 강무혁이 무시무시한 눈빛을 하고 최서율을 바라보았다.
“부, 사장님….”
억지로 눌러 참고 있던 눈물이 뚝, 뚝, 뚝 떨어졌다. 놓지 않으려고 단단히 붙잡고 있던 정신도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못난 모양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감추지 못한 최서율이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도 그 틈을 비집고 서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윽, 흑… 제가, 집에, 흑… 왔는데… 흡….”
단단한 손이 떨리는 어깨에 닿았다. 그의 품으로 끌려들어 가듯 안겨진 최서율이 깨물었던 입술을 풀고 울음을 쏟아냈다. 물씬 풍겨오는 성난 짐승의 냄새가 좋았다.
잔뜩 화난 기운이 여과 없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가 좋았다. 극한으로 몰린 마음을 달래주듯 제게로 와준 그가 좋아 단단한 허리를 망설임 없이 마주 안았다.
“부사장님, 흑… 무서워서… 흐엉….”
“괜찮습니다. 내가 왔으니까 괜찮아요.”
최서율을 끌어안은 강무혁의 미간이 완전히 구겨졌다.
엉망으로 뒤집힌 집안에는 최서율의 냄새와 함께 낯선 냄새가 간간이 묻어 나왔다. 최서율이 청각에 예민하다면 강무혁은 후각에 예민했다.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최서율의 집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제 영역이 침범된 듯한 묘한 기시감이 일었다.
어느 한구석 멀쩡한 곳이 없는 작은 집을 둘러보던 강무혁이 품 안에서 휘청이는 최서율을 단단히 받쳐 안았다.
“괜찮으니까 편하게 해요. 더 견디기 힘들면 토끼로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여기에 혼자 두지 않을 테니까.”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는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온몸을 들썩이며 울고 있는 최서율의 등을 쓰다듬고 조금 더 힘주어 품으로 가뒀다. 향긋하던 토끼의 향은 온데간데없고 눈물 젖은 축축한 냄새만 풍겨 올라왔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품 안에 있던 부피감이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쑥 꺼져 내렸다. 발치에 남은 옷가지를 바라보던 강무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무릎을 굽히고 앉아 서둘러 옷더미를 뒤적였다.
최서율의 향기가 풍기는 봄 코트와 재킷, 와이셔츠를 차례대로 뒤집어 찾아낸 토끼는 색- 색- 꺼질 듯 작은 숨만 내쉬고 있었다. 귀가 축 늘어진 토끼의 작은 머리와 등을 쓰다듬고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품에 안았다.
현관을 나서 돌아서던 강무혁이 문이 닫히기 직전에 다시 한번 최서율의 집을 훑어보았다.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돌아서는 그의 발걸음이 결의에 차 있었다.
* * *
자꾸 무언가에 쫓겼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열심히 내달렸다. 강을 따라, 들과 산을 마구 달렸다. 토끼일 때도 있었고, 두 발로 달리는 사람일 때도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흉기처럼 뻗쳐있는 산 중턱을 지나면서 살갗에 생채기가 생겼다. 아팠지만 돌볼 여력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달리다가 작은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그대로 계곡 아래로 굴러떨어지다가 눈을 번쩍 떴다.
“헉!”
벌어진 눈가가 경련하듯 떨렸다.
그 틈새를 비집고 굵은 눈물방울이 새어 나왔다. 눈꼬리를 지나 흘러내린 눈물이 관자놀이를 지나고 귓가에 맺혔다. 숨이 턱하고 막혔다. 누가, 왜 저를 그렇게 죽일 듯이 따라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난생처음 꿔보는 악몽에 오한이 일었다. 그러다가 머리를 스치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던 제집의 모습이 떠올라 심장이 마구 내달렸다. 꿈에서 달렸는데 마치 현실에서 달린 것처럼 가쁜 숨이 올라왔다.
일어나 앉아서도 눈물이 멈추질 않아 고생이었다. 이렇게까지 무서워할 일인가 싶다가도 소름 끼치는 감각에 자꾸만 등줄기가 부르르 떨렸다. 많이 놀란 것 같다고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아. 팔을 주물럭거리다가 침대 옆에 잘 정리된 옷과 속옷을 잡아 들었다. 제 것인지 남의 것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 입고 본다는 생각으로 빨리 손을 놀렸다.
최대한 빨리 속옷을 꿰어 입고 바지를 입었다. 매일 하는 행위인데도 손이 엇나갔다. 이를 악물고 도톰한 라운드 티셔츠를 머리에 넣었을 때 방문이 열렸다.
“으악!”
너무 놀라 중심을 잃은 최서율이 파닥거리다가 침대로 고꾸라졌다.
“최서율 씨!”
“…으흐윽… 흑….”
심장이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너무 놀라 그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 계속 주변을 맴돌고 있던 공포가 극대화되었다. 펑 하고 터지듯 쏟아진 울음을 참지 못한 최서율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라운드티에 남은 한쪽 팔도 넣지 못했고, 머리도 다 빠져나오지 못한 채였기에 티셔츠에 감싸인 동그란 덩어리 같은 꼴이었다.
“놀랐습니까? 미안합니다. 노크했는데 대답이 없어서 들어왔습니다.”
침대 위에 엎어져 있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앉힌 강무혁이 최서율의 팔을 잡아 라운드티 안으로 밀어 넣어주었다. 훌쩍거리며 팔을 끼워 넣은 최서율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려내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최서율의 얼굴에도 닿지 못하고 그 주변을 맴돌았다.
“미안합니다. 그만 울어요.”
“흐윽, 흑… 그렇게, 갑자기, 흐엉… 으허엉….”
“그래요. 내가 잘못했어요.”
강무혁의 옷을 입은 최서율은 마치 옷 속에 파묻힌 사람 같아 보였다. 겁에 질려 허옇게 떠오르는 얼굴을 붙잡고 쉴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던 강무혁이 얼른 최서율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두 팔로 강무혁을 꼭 끌어안은 최서율이 강무혁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떨리는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매우 친절하고, 다정했다.
어떻게 울었는지 귀까지 축축해진 최서율의 젖은 귓가에 입술을 붙인 강무혁이 쉬- 괜찮아요. 속삭였다. 어깨를 쓰다듬고 팔을 주무르고, 다시 등을 토닥이는 손길과 낮고, 상냥한 목소리를 듣고 있던 최서율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후들거리던 가슴이 진정되고, 숨이 정상으로 돌아오더니 울음이 잦아들었다.
“후….”
“이제 좀 괜찮습니까?”
“네….”
“토끼는 깜짝 놀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더니 거짓말은 아닌가 봅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목소리만으로도 최서율의 입이 새 부리처럼 뾰족해졌음이 느껴졌다. 등을 토닥이는 손이 느려지고, 허리까지 내려왔다가 아무렇게나 늘어진 손을 잡아 올린 강무혁이 끝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는 손가락에 입술을 비볐다.
강무혁의 목덜미 어디쯤 이마를 대고 있던 최서율의 눈이 그 손을 따라 움직였다. 목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일어나진 못하고 눈만 한껏 치켜올렸던 최서율이 손끝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에 어깨를 움츠렸다.
“경찰에 신고했고, 내일 집주인도 만나기로 했습니다. 오후에 나랑 같이 집에 가서 가져올 만한 짐 챙겨서 다시 이쪽으로 오면 됩니다.”
“다시…요?”
그제야 기대었던 몸을 일으킨 최서율이 멀뚱한 눈으로 강무혁을 바라보았다. 귀로는 들었는데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아 생각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요. 같이 퇴근도 하는 마당에 출근이라고 못 하겠습니까?”
“아니, 그, 저기… 부사장님.”
“그 집에서 혼자 지낼 수 있겠습니까?”
물론, 아니었다. 범인이 잡히지도 않은 상태로 그 집에서 생활한다는 건 죽으라는 말과도 같았다. 그렇다고 이번 일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 버리면 지난 10년 동안 저를 걱정하는 가족들을 버티며 고집해오던 서울 생활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이니 그것도 하지 못할 터였다. 범인이 잡힐 때까지만이라도 지낼 곳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젖은 눈가에 강무혁의 손이 닿았다. 부드럽게 문질러주는 손이 두껍고, 단단한 피부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부사장님은 불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호랑이굴의 토끼라니….”
“호랑이굴에 토끼가 사는데 호랑이가 불편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다람쥐 부부도 살펴볼 수 있고, 고라니 새끼도 잘 크고 있는지 알 수 있으니 잘된 일 아닙니까.”
“고라니….”
“호랑이굴에 사는 토끼가 불편하겠지.”
불편하고 자시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사를 하더라도 범인을 잡은 뒤에나 가능할 테고, 당장 있을 곳을 찾는 일도 무리가 있었다. 단지, 아직 무슨 사이라고 단정 짓지도 못했는데 부사장과 동거라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사장님은 저를 이렇게 걱정해주시고, 챙겨주시고… 도와주시는데 저는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지원실에 누가 되지 않게 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도 없습니다.”
“나한테 뭔가 해주고 싶습니까?”
“그러고 싶지만… 해드릴 수 있는 게….”
“왜 없습니까. 피곤해 보이면 토끼도 보여주고, 마당에 놀러 오는 다람쥐 부부도 챙겨주고, 이렇게 키스도 해주고, 잠도 같이 자겠습니까? 나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아니요! 잠은… 따로 자겠습니다.”
“그래요? 아쉽네요. 같이 자고 싶었는데.”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훅 더워지는 기분에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던 최서율이 손등으로 뺨을 꾹꾹 눌렀다.
“그런데 부사장님… 회의는 잘 마치고 오셨습니까? 혹시 저 때문에….”
“집에서는 일 얘기는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회사에서도 충분히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신경 쓰여서 그렇습니다.”
“내일 일찍 다시 회의하기로 했습니다.”
놀란 최서율의 입이 떡 벌어졌다. 부사장이 회의 중간에 나온 게 분명한 말이었다. 이번 주 안에 해결해야 하는 리조트 홍보에 관련된 회의였기 때문에 무척 중요한 회의였는데 저 때문에 망쳤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지도 못한 최서율이 눈썹을 뚝 떨어트렸다.
“최서율 씨 때문 아닙니다. 내가 결정한 일인데 표정이 왜 그렇습니까?”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제가 부사장님께 와달라고 해서 오신 거잖습니까.”
“와달라고 말하지 않았어도 갔을 겁니다.”
강무혁의 진심이 느껴졌다. 좋으면서도 가슴이 아릿해지는 감각에 괜히 손을 반쯤 덮고 있는 라운드티의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귓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처럼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만 자는 게 좋겠습니다. 내일은 나도 최서율 씨도 할 일이 꽤 많을 것 같으니까.”
“네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잠이 오진 않았다. 기절하듯 잠들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기 싫다고, 잠이 안 온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어서 말하지 못했다. 강무혁이 나가고 나면 핸드폰이나 보면서 시간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꼬르륵- 뱃속이 꿀렁거리는 소리가 아주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무혁을 바라보았다. 다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 확 몰리는 열기에 볼을 붉힌 최서율이 떨어져 나갈 듯 빨개진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당장이라도 침대 아래에 고개를 처박고 숨어버리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저녁도 안 먹었네요. 배고프면 잠도 제대로 못 잘 텐데. 뭐 좀 먹겠습니까?”
“…….”
웃음이 만연한 강무혁의 목소리에 민망함이 두 배로 치솟았다. 이불 위로 풀썩 엎드린 최서율이 대답도 못 하고 애꿎은 귀만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라면은 어떻습니까?”
라면이라는 말에 귀가 쫑긋 올라선 최서율이 벌떡 일어나 저를 바라보고 있던 강무혁과 눈을 맞췄다. 방금까지 민망해했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먹겠습니다. 냉큼 대답하는 최서율만이 남아있었다. 강무혁이 소리내어 웃었다.
라면은 최서율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고향에서는 자연산 유기농 식자재로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주신 음식만 먹었던지라 라면이라는 음식이 있는지도 몰랐더랬다. 동네 친구들도 잘 먹지 않은 거 보면 토끼 수인은 라면과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마트도 있고, 식당도 있는 곳인데 열아홉이 될 때까지 라면을 몰랐던 걸 보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토끼 마을에 라면을 들여오지 않는 게 분명했다.
처음 서울에서 지내면서 편의점에서 호기심에 먹어본 라면은 천국의 맛이나 진배없었다. 그 환희의 종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서울에 살기 시작하면서 삼시 세끼를 라면으로 먹은 적도 있었다. 물론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맛있어서였다.
“라면 좋아합니까?”
“네! 정말 좋아합니다.”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를 정도로?”
냄비에 물을 올리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던 강무혁이 고개를 비틀어 그 옆에 선 최서율을 보며 웃었다. 작은 발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자꾸만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큰소리로 웃어버린 강무혁이 찬장을 열고 라면 세 개를 꺼냈다.
“부사장님 세 개나 끓입니까?”
“나도 저녁 안 먹었습니다. 그리고 라면 하나로 배가 차겠습니까?”
“우와… 부자는 라면 먹는 클래스도 다릅니다. 한 번에 두 개라니….”
바로 오늘 저녁에 큰일을 겪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환하게 웃는 최서율이었다.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리는 동그란 얼굴을 보는데 강무혁의 가슴속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물보다 더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귀여웠다. 최서율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당장이라도 볼을 붙잡고 라면보다는 너부터 먹고 싶다는 해괴한 말을 뱉어낼 것 같았다. 그 입을 단속하다가 말고 문득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그였다.
“왜, 웃으십니까?”
“부자가 아니라 우리의 체격 차이 때문에 라면 개수도 차이가 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한 번에 두 개는 좀 사치스럽기도 하고….”
“그럼 오늘 라면으로 플렉스 해보세요. 하나 더 넣어도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그거 다 먹지도 못합니다.”
아쉽다는 듯이 입술을 내밀고 뚱해진 표정으로 라면 봉지를 열던 최서율이 그 옆에서 저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강무혁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부사장님은 라면 같은 거 안 드실 줄 알았습니다.”
“가끔 먹습니다. 그래서 늘 떨어지지 않게 사두곤 합니다. 종류별로.”
찬장을 완전히 열어 최서율에게 보여주었다. 마치 대단한 명품이라도 보여주는 것처럼 손짓하자 발끝을 세우고 목을 길게 빼낸 최서율이 찬장을 바라보며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깍지를 꼈다.
동그란 눈이 밤하늘의 별빛보다 더욱 아름다운 색으로 빛났다. 라면에 이런 반응일 줄 알았으면 채소 스틱 말고 라면을 사다 줄 걸 그랬다는 생각까지 하는 강무혁이었다.
“부사장님, 당분간 잘 부탁드립니다. 호랑이굴에 토끼가 사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잘 지내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합니다. 대신 매일 라면 먹는 건 금집니다. 이게 우리 동거의 첫 번째 룰이 되겠네요.”
“그런 게 어딨습니까!?”
방금까지 빛나던 눈이 동그래지고, 얼굴에 울상이 떠올랐다. 그런 최서율이 귀여워 볼을 한번 꼬집은 강무혁이 선반에 손을 짚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열심히 끓고 있는 라면을 뒤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