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리조트의 구체적인 판매금액이 확정되면서 지원실이 술렁였다. 생각보다 비싼 값을 하는 숙소에 묵었던 사람들의 얼굴에 기쁨이 걸렸다. 최서율의 입은 거의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도 그럴 게 F동은 월급쟁이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가격이 책정됐기 때문이었다.
엄청나게 좋은 숙소를 사용했지만 사실 그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부대시설은 제대로 사용해보지 못했다. 토끼로 정원을 마음껏 뛰어놀고, 호랑이와 가까워지고… 리조트보다 더 좋은 걸 얻었으니 숙소에 대해 아쉬움이나 미련은 남지 않았다. 그래도 한번 발 들이기도 힘든 곳에서 두 밤이나 잤다니 기분은 좋았다.
“최서율 씨 그거 진짜 잘 먹네? 맨날 아침마다 사 오는 거예요?”
“아, 네. 맛있는데… 하나 드셔보실래요?”
아침마다 사 오냐는 질문에 입을 ‘오’하고 모았던 최서율이 얼른 표정을 풀며 선 과장에게 채소 스틱이 담겨있는 통을 내밀었다. 지원실 대부분이 회의에 바쁜 오전 시간에 강무혁이 몰래 가져다 놓는 간식을 사람들은 최서율이 직접 사 온다고 생각했다. 직접 손질해서 쌌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좋은 비주얼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부사장님이 주셨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최서율 대리님. 부사장님이 찾으십니다.”
갑자기 나타난 고 비서가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부사장이 찾는다는 말을 전했다. 깜짝 놀란 최서율은 막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당근이 걸려버려 몇 번이나 기침해야 했다. 옆에서 덩달아 놀란 유 대리가 물을 건네고 그걸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야 빨개진 얼굴이 제 색을 찾았다.
“부사장님이 두 번 찾았다가는 최 대리님 죽을 수도 있겠어요.”
“그러게요. 뭘 그렇게 쫄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얼른 들어가 봐요.”
어깨를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인 최서율이 얼른 부사장실로 달려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갑자기 나타난 고 비서 때문에 놀란 거지 부사장이 찾아서 놀란 건 아닌데 싶어 괜히 멋쩍어지는 기분이었다.
“얼굴이 왜 그럽니까?”
“당근이….”
“당근이?”
“목에 걸렸습니다.”
“저런….”
보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강무혁을 따라 시선을 올린 최서율이 왜 부르셨냐는 기본적인 질문도 하지 못하고 강무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올린 머리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하게 올라붙어 있었다. 훤하게 드러난 이마 아래에 빛나는 눈을 바라보던 최서율이 무언가에 놀라 깨어나듯 어깨를 움찔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왜 그렇게 놀랍니까?”
“아니, 그… 왜 부르셨습니까? 시키실 일이라도….”
“우리가 일이 있어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강무혁은 되도록 회사에서는 마주치는 일을 만들지 않았다. 일하던 중간에도 전달해야 하거나 받아야 하는 서류가 있으면 꼭 비서진을 통해서만 알려왔다. 이렇게 직접 부르는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퇴근길에야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매우 편해졌고, 관계도 눈부시게 발전했다지만 부사장실에 앉아있는 강무혁과 편하게 대화하는 건 아직 어색했다.
“회사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목은 괜찮습니까?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런 거로 누가 병원을 갑니까. 괜찮습니다.”
턱 아래부터 목까지 길게 쓰다듬어 내리는 손길에 어깨를 움츠린 최서율이 얼른 강무혁의 손목을 잡았다. 뒤로 한발 물러나면 그만큼 다가오는 커다란 덩치에 저도 모르게 또 한발 물러나던 최서율이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에 구둣발이 미끄러져 휘청거렸다. 깜짝 놀라 굳어진 허리를 쉽게 낚아채 품으로 끌어당긴 강무혁이 짧게 혀를 찼다. 최서율이 민망한 듯 배시시 웃었다.
“사람 민망하게 왜 그렇게 긴장하고, 놀라는지.”
“놀란 거 아닙니다. 미끄러워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가오시면 당연히….”
리조트에서 이후로 늘 차에 앉아서 뭘 했던 두 사람이었다. 눈높이가 잘 맞는 앉은 자세가 아닌 선 채로 마주하는 게 어색하기도 했고, 예고도 없이 가까워지는 건 아직 적응이 안 된 탓인지 괜한 긴장감을 불러왔다.
그날 밤처럼 끌어안겨 진 채 고개만 바짝 들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얼굴을 내릴 듯이 턱을 당긴 강무혁이 치솟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긴장됩니까?”
“네….”
최서율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머리카락이 강무혁의 가슴팍에 닿아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뻗쳐댔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즐기자. 싶었다.
토끼가 호랑이의 너른 가슴에 아예 기대어버렸다.
푹, 하고 기대오는 최서율의 무게를 느낀 강무혁이 몸을 돌리며 책상 옆 창문에 등을 기댔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끝에 신경을 집중하던 최서율이 이번에는 기대었던 가슴팍을 밀 듯이 짚으며 강무혁의 어깨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부사장실의 통유리 앞에 서본 일이 없었기에 그 풍경이 궁금했다. 정승처럼 버티고 서 있는 남자가 비켜야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있을 텐데 저를 안고 있는 이 호랑이는 당연히 비켜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혹시 보지 못하게 될까 봐 조바심이 일었다. 차마 비켜달라고 말은 못 하고 저도 모르게 바닥에 발을 구르며 까치발을 드는 최서율이 강무혁의 품 안에서 이리저리 바삐 움직여댔다.
“가만히 있어요. 오늘은 저녁에 못 데려다줄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충전해야겠습니다.”
“아….”
버둥버둥 열심히도 움직이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춰버렸다. 고개를 든 최서율이 멀뚱히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강무혁과 눈을 맞췄다.
“섭섭합니까?”
“…괜찮습니다.”
최서율이 미련이 가득 묻은 움직임으로 고개를 작게 저어댔다.
“눈은 그렇지 않아 보이네요.”
“조금… 아쉽습니다.”
바로 대답했던 것과는 다르게 솔직하게 대답한 최서율이 눈길을 뚝 떨어트렸다.
솔직한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얼굴을 내린 강무혁이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꾹, 찍히듯 닿았던 입술이 다시 촉. 소리를 내며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도 아쉽습니다. 집에 데려다주지 못하면 밤새도록 최서율 씨를 걱정할 테니까 도착하면 메시지 하나라도 남겨 놓으세요.”
“알겠습니다….”
맵시 있게 정돈된 강무혁의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던 최서율이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을 피하지 않았다. 그대로 그 입술을 맞이하며 구두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너른 가슴에 푹 안겨진 채 나누는 키스에서 달콤한 과일 맛이 났다. 코가 간지러워 찡그리면 달래듯 부드럽게 유영하는 입술을 정신없이 따라가다가 혹시나 제게 또 그런 향기가 나는 건 아닐까 걱정되어 집중력이 뚝 떨어졌다.
“아야….”
“지금은 내 생각만 했으면 좋겠는데.”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문 강무혁이 코끝을 맞대어 누르곤 가까이서 눈을 맞췄다. 그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넥타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턱으로, 넥타이로, 셔츠로 눈길이 점점이 아래로 떨어지며 고개도 덩달아 숙어졌다.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최서율을 따라 내려온 입술이 작은 입술을 쏙, 물어 당겼다.
낯선 향기가 가득 차오른 입안은 마치 달콤한 간식을 한 움큼 집어삼킨 것처럼 달았다. 입맛을 다시듯 찹찹. 소리를 내는 최서율의 행동에 웃음이 터져버린 강무혁이 두 팔에 가득 들어찬 몸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 * *
선 과장이 오랜만에 같이 퇴근한다고 좋아했다. 좋아해 주어서 좋았다. 그게 다였다. 회장님의 야근 금지령은 아직 풀리지 않았고 덕분에 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집에 돌아가야 했던 선 과장처럼 오늘은 최서율도 일을 바리바리 싸 들고 회사를 나섰다.
웬일로 일찍 가냐고 묻는 말에 그냥 피곤해서 집에 가고 싶다고 둘러댄 최서율의 축 처진 어깨를 두드려주는 선 과장이었다.
“과장님은 가끔 산에 가십니까?”
“산이요?”
“네… 수인이라고… 알고 있어서요.”
“아~ 주말마다 가죠. 가서 막 뛰어야 스트레스도 풀리고 일할 맛도 나고 그러거든요.”
“아….”
고개를 끄덕인 최서율이 혹시나 선과장이 기분이 나쁘진 않았을까 눈치를 살폈다. 눈치가 빠른지 선 과장이 그런 최서율의 등을 팡팡 내리쳤다. 괜찮으니 궁금한 건 언제든 물어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조트에서 돌아온 이후로 흙을 밟아보지 못했다. 용기를 내어 주말에는 부사장님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해봐야 할까. 입가를 더듬으며 이번 주 부사장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더듬어보았다.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이렇게 멀었었나 생각하며 실소를 터트렸다. 언제부터 편한 생활에 익숙했다고 이 짧은 거리가 멀다고 느낀다니 스스로가 어이없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터덜터덜 걷는 걸음마다 강무혁을 생각했다. 같이 퇴근하지 못해 아쉽다는 말에 진한 키스를 선사한 그가 너무 좋아 머리가 녹아버린 건지, 퇴근 전까지 얼굴을 봤는데도 보고 싶은 건지. 마음이 기울고, 감정이 움직인다는 게 이런 거였나… 연애가 처음도 아닌데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항상 강무혁의 차가 자리를 잡았던 곳이 텅 비어있었다. 먼저 돌아서 후다닥 뛰어갔던 초반에 비하면 지금은 가볍게 인사도 나누고 강무혁의 차가 출발하는 걸 보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호랑이에게 이렇게까지 익숙해진 제 모습이 낯설었지만, 그것 또한 좋았다.
마음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이렇게 부풀릴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거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최서율이 이전에 만난 사람은 모두 서울에서 정체를 감추고 살아가는 토끼였다. 진화한 수인이라는 이유로 여자는 만나기 힘들었고 주로 수컷, 남자를 만났다. 강무혁에게 본의 아니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많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얼른 이 모든 걸 말해주고 싶다가도 조금 더 천천히 말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가 이 모든 걸 알게 되었을 때 보일 반응이 걱정되는 까닭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문 앞이었다. 항상 한달음에 뛰어올랐던 계단도 오늘은 유난히 높게 느껴졌다. 휴. 짧게 숨을 내쉬고 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칫한 최서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아침에 정신없이 뛰어나간 것도 아닌데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분명 문단속을 제대로 한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동물적인 감각이 치솟았다. 등을 펄떡 튀며 뒷걸음질 쳤다. 위험해. 들어가면 안 돼. 완전히 뒤로 물러난 최서율이 문을 노려보고 섰다.
예민한 귀로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소리를 잘 듣는 특징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었다. 문 너머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조금이라도 들리면 바로 돌아나갈 생각이었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달래듯 가슴께를 눌러 진정하려고 노력하던 최서율이 제 귀를 붙잡고 마구 문질렀다. 심장이 벌컥거리는 통에 귓가가 시끄러웠다.
“으….”
극한의 두려움에 빠진 최서율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얼른 입을 가리고 제가 갈 수 있는 만큼만 앞으로 나아가 집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감지하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다행히 집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기척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 그제야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그저 느껴지는 감으로만 판단했기에 틀렸을 수도 있지만 일단 집 안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끌어모았다. 그렇게 위험하다는 서울 생활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고향에서도 모두들 걱정했던 일도 아무 문제없이 척척 진행해나갔다. 그 무섭다는 호랑이와 눈도 맞추고 입도 맞추지 않았던가. 겁 없이 호랑이 꼬리를 잡았던 그 밤을 생각하며 밑바닥부터 싹싹 긁어모은 용기로 문고리를 잡았다.
좁은 현관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켜진 불에 최서율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맙소사….”
현관에 서면 한눈에 집안의 모든 게 다 보이는 원룸은 그야말로 초토화 상태였다. 이렇게 작은 원룸에도 도둑이 든단 말인가. 겨우 가라앉혔던 두려움과 동시에 오한이 일었다. 얼른 문을 닫고 걸쇠부터 가장 아래 열쇠고리까지 잠그고 불을 켰다. 불빛에 밝아진 집은 뭐라고 말도 못 할 지경이라 입이 떡 벌어졌다.
깨끗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던 집안은 제대로 있는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주방의 집기가 밖으로 모두 끄집어 나와 있었고, 그나마 있던 컵과 접시는 모두 깨진 채 유리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주방과 맞닿아있는 그나마 앉을 만했던 공간에도 옷, 신발, 책등이 마구 널려있었다. 침대와 마주 보고 있는 작은 옷걸이 장은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제가 일어난 모양으로 똬리를 틀고 있던 이불도 이리저리 뒤집어 놓은 게 분명한 모양으로 침대와 바닥에 걸쳐있었다.
차마 신발을 벗을 수 없어 구두를 신은 채 집 안으로 들어온 최서율이 엉망이 된 싱크대를 보다가 조각난 유리그릇 위에 널려있는 어머니가 보내주신 약봉지를 주워들었다. 주르륵, 정성껏 달여주셨을 약이 바닥으로 흘렀다.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었다니 입이 절로 벌어졌다.
“아….”
어떻게 생각을 정리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해졌던 최서율이 그나마 터지지 않고 제 모양을 한 약봉지를 주워들었다.
이유 모를 서러움이 밀려왔다. 이런 일을 경험해본 것도 제 물건이 이렇게 모조리 다. 함부로 취급당한 일도 처음이었다. 경찰에 신고하고, 집주인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정상적인 순서가 떠올랐지만, 손이 쉽게 움직여지질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약봉지를 움켜쥐었다가 겨우 움켜쥐고 있던 가방에 챙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