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F동과 떨어진 C동에서 가진 자리였기에 리조트에서 제공되는 차를 타고 가도 됐지만, 강무혁은 최서율을 안고 산길을 걸었다. 코알라처럼 매달린 최서율의 팔이 목에 감겼다. 어깨너머로 툭 떨어진 얼굴에서 미약하게 숨결이 느껴졌다. 최서율의 목덜미 가까이에 얼굴이 닿자 특유의 냄새가 진하게 밀려왔다.
수인에게는 종을 구별할 만한 특별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나지 않는다기보단 여러 종족과 인간과 뒤섞여 살다 보니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제대로 맡아지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었다. 그런데 최서율이 토끼임을 인지한 순간부터 나던 이 냄새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강무혁이 솜털이 나풀거리는 최서율의 목덜미로 가볍게 코를 비볐다.
그날 밤에도 이렇게 쓰러졌을까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제가 비에 젖은 토끼를 줍지 않았더라면 혹시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었다면 어땠을까. 여러 가정이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구겨지는 건 원치 않았으니.
“부사장, 님….”
품에서 꿈지럭거린다고 생각했더니 언제 깬 건지 고개를 들어 올리는 최서율 때문에 중심이 흔들려 몸을 기우뚱거렸다. 혹시나 떨어트릴까 싶어 품에 있는 최서율을 소중하게, 더 단단히 받쳐 안는 강무혁이었다.
최서율이 너른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눈만 들어 올려 강무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취기가 가시긴 했지만, 여전히 흐릿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강무혁이 최서율의 볼에 제 볼을 맞대었다. 따끈하게 열 오른 피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괜찮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저 내려 주세요.”
“다 왔습니다.”
“걷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강무혁이 허리를 굽혔다. 발이 땅에 닿기 무섭게 떨어져 나간 최서율이 숲의 향기를 맡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작은 어깨가 위로 솟았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빙글, 몸을 돌린 최서율과 눈을 마주했다. 환하게 웃는 미소에 절로 입꼬리가 치솟았다.
은은하게 밝혀둔 리조트의 조명과 울창한 숲 사이를 스치는 봄밤의 바람 소리, 물씬 풍겨 드는 숲의 청량한 냄새, 저 아래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갈색 머리카락. 저를 향해 미소 짓는 얼굴까지.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마치 사진 한 장처럼 기억될 장면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성큼 다가가 붉어진 최서율의 눈가를 쓰다듬은 강무혁이 열 오른 볼을 톡톡 두드리고, 어깨를 스치며 손을 내렸다.
“술이 그렇게 약해서 어떡합니까. 아무 데서나 술도 못 먹이겠네요.”
“…저도 술고래가 되고 싶습니다.”
“박 부장처럼 되고 싶다는 말입니까?”
평소 술 한잔하자는 게 인사인 박경석 부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정도까지 바라는 건 아니라고 둘러대는 최서율의 손을 잡은 강무혁이 산길을 밟았다.
잡힌 손과 강무혁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최서율도 느리게 움직이는 강무혁의 걸음을 따라 걸었다. F동을 관리하는 사무실을 지나자 두 사람이 묵는 숙소가 보였다. 저택의 대문처럼 생긴 부담스러운 문을 지나던 최서율이 강무혁의 손을 잡아끌었다.
“부사장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네. 들어주십시오.”
“말도 안 해 놓고 무턱대고 들어 달라고 합니까?”
차가운 봄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또 그런 눈으로 본다고 말한 강무혁이 부러 더 고개를 치켜들며 눈을 맞추는 최서율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들어나 봅시다.”
“호랑이… 보고 싶습니다.”
본연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에 토끼를 보여달라고 하는 강무혁의 말에 최서율이 발끈했고 토끼의 모습을 보였다는 걸 부끄러워했던 것이었다.
당당하게 본연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최서율의 커다란 눈을 들여다보던 강무혁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보고 싶습니까?”
“네.”
“왜.”
“그냥… 보고 싶습니다.”
“창문 너머에서 몰래?”
“아니요. 옆에서, 가까이….”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래도….”
말을 늘리며, 맞잡은 손의 팔로 다른 손을 감고 강무혁의 팔에 매달리듯 바짝 몸을 붙인 최서율의 발이 자갈이 깔린 바닥을 굴렀다. 자갈이 이리저리 밟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강무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팔에 매달린 최서율을 조심스럽게 밀어낸 강무혁이 동그란 눈가를 스치듯 건드리며 몸을 물렸다.
“정원에서 기다리세요.”
숙소 안으로 들어가는 강무혁을 등지고 숙소 건물 옆, 샛길을 따라 테라스로 향했다. 낮에 열심히 뛰어다닌 정원이 보였다.
신경 써서 가꿔 놓은 정원은 토끼가 뛰어놀아 이리저리 밟힌 잔디와 하나, 둘 꽃을 피워낸 야생화, 산의 생김새를 보존하기 위해 그대로 둔 바위까지 모두가 어우러져 그 모습이 마치 그림 같다고 생각하게끔 했다.
강무혁이 앉아 저를 바라보고 있던 테라스 소파에 오도카니 앉았다가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호랑이가 문을 열고 나오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정원과 이어진 문을 밖에서 열어 두었다.
취기가 가셨다고 생각했는데 이따금 눈앞이 흐릿해졌다. 왜 호랑이가 보고 싶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충동적으로 호랑이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걸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걸까. 그냥이라고 대답했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를 않았다.
토끼 주제에 호랑이를 욕심낸다는 게 가당키나 한 걸까. 그런데도 가까이에서 호랑이를 보고 싶었다. 정확히는 호랑이 강무혁이 보고 싶었다. 마른침을 몇 번이나 삼켜야 했다. 감당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집채만 한 호랑이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괜한 긴장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볼을 꼬집어보고, 허벅지를 문지르고, 무릎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뒤에서 크르릉. 울대를 긁으며 거칠게 쏟아지는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숨을 집어삼킨 최서율의 눈에 둥그렇고, 커다란 호랑이의 앞발이 먼저 보였다.
어깨를 좁히고,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는 최서율을 스쳐 지나가는 거대한 호랑이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눈을 맞춰왔다.
숨도 멈춘 채 그와 눈을 맞추고 있던 최서율이 단번에 돌계단을 뛰어넘어 정원으로 내려가는 호랑이의 꼬리에 흐릿한 초점을 맞췄다.
정원을 어슬렁거리는 호랑이를 바라보던 최서율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방금까지 어떤 생각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았다. 본능적으로 치솟는 두려움과 함께 몽글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홀린 듯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딘 최서율이 호랑이가 훌쩍 뛰어넘었던 돌계단을 밟았다.
“크르릉….”
짐승의 울음소리가 고요한 산을 타고 울렸다. 포효하는 소리를 들으면 대지가 울릴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깊고, 거친 소리였다. 입술을 꾹 깨문 최서율이 속도를 내어 정원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런 최서율에게 시선을 고정한 호랑이와 가까운 거리에 멈춰 섰다.
“부사장님….”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두 번을 보아도, 세 번을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을 모습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강무혁이라고 생각하니 말을 붙이지 못할 만큼 무서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얼른 그에게 닿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마저 생겨났다. 윤기 나는 털을 만져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차가운 밤바람에 술기운이 완전히 날아갔는지 시야가 완전히 또렷해졌다.
말없이 호랑이와 눈을 맞추고 있던 최서율이 별안간 몸을 틀어 정원을 가로질렀다. 천천히 걷다가 제 뒤를 따르는 호랑이에게 손을 뻗었다. 손바닥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다가온 호랑이가 느릿하게 손바닥에 머리를 비벼댔다. 손가락 사이의 얇은 피부를 스치는 보드라운 감촉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정원 담벼락까지 다가간 최서율이 낮에 토끼가 한참 가지고 놀던 잡초 더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사이를 헤치듯 움직이는 손가락을 유심히 보던 호랑이의 코앞에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연분홍빛 들꽃 하나가 내밀어졌다.
“예쁘죠?”
대답할 수 없으니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호랑이와 눈을 맞춘 최서율이 꽃잎을 손끝으로 톡, 톡 건드렸다.
“풍로초라고 합니다. 사람 손이 닿지 않아도 산이고 들이고 아주 잘 자라는 꽃입니다.”
“…….”
“풍로초는 꽃말이 더 예쁩니다.”
말을 고르듯 입술을 오물거리는 최서율에게 집중한 호랑이가 크릉. 작은 소리를 내었다. 놀라 뒤로 자빠질 법도 한데 그사이 익숙해진 건지, 꽃에 집중하느라 듣지 못한 건지 최서율은 쭈그려 앉은 그대로 멈춘 채 작은 꽃잎만 만지작거렸다.
“그대가 있기에 행복이 있네.”
“…….”
“저희 아버지가 어머니께 청혼할 때 이 꽃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코딱지만 한 데 온 산을 뒤져 다발을 만들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좋아합니다.”
“…….”
꽃을 살랑거리며 흔들어 보이는 최서율의 눈이 반달로 접혔다. 꽃을 보니 부모님 생각도 나고, 보고 싶기도 해서였다. 감상에 젖어 있는데 호랑이가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코를 들이밀기에 냄새를 맡으려나 싶어 손가락으로 겨우 잡은 꽃을 앞으로 내밀었다.
“으악! 그걸 먹으면 어떡합니까?!”
입만큼이나 커다란 혀가 밖으로 나오더니 꽃을 쏙 가져가 버렸다.
호랑이의 입안으로 사라진 꽃을 보자마자 빽! 소리를 지른 최서율이 벌떡 일어났다. 입을 오물거리며 뒤돌아 가 버리는 호랑이를 종종거리며 따라갔다. 한참 가더니 정원 중앙쯤에 멈춰선 호랑이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며 켁켁. 이상한 소리를 냈다. 호랑이가 무언가를 열심히 뱉어내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먹어서….”
풍로초가 식용이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꽃을 먹어버리다니. 커다란 입을 벌리고 기침을 해대는 호랑이의 옆으로 가 등을 쓰다듬고 두 손으로 얼굴을 받쳐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송곳니는 최서율의 손가락보다 더 두꺼웠고, 얼굴을 들이밀어도 남을 만큼 커다란 입은 저도 모르게 손을 떨리게 했다.
“부사장님, 저 물면 안 됩니다. 아셨죠?”
호랑이의 커다란 혀에 딱 붙어 짓이겨있는 꽃을 손으로 집어냈다. 별짓을 다 한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웃음이 터져버렸다. 호랑이의 입속에서 뭉개진 꽃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잔디밭 어딘가에 휙, 던져졌다.
입안에 퍼진 쌉쌀한 맛이 별로인지 입맛을 다시던 호랑이가 정원 한가운데에 다리를 뻗고 엎드렸다. 최서율이 셋은 누워야 그 정도의 크기가 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호랑이 입에 손을 넣어본 토끼는 제가 처음일 겁니다.”
“…….”
“왜 먹었는지는 내일 여쭤보겠습니다.”
호랑이의 옆에 털썩 앉아버린 최서율이 보드라운 털을 정리하듯 등을 쓸어보았다. 그릉그릉거리는 소리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팔을 크게 벌리고 끌어안아도 남을 만한 크기의 호랑이가 꼬리를 허공으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무섭고도 귀여운 모습이 기묘해 보였다.
“별이 많습니다. 쏟아질 것 같아요.”
그런 호랑이의 몸에 기댄 최서율이 아예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밤하늘의 별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어릴 적 고향에서 늘 보던 하늘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졌다. 기대고 있는 호랑이의 등이 생각보다 푹신하고, 편한 것도 한몫했다.
좋으면서도 슬펐다. 그리운 고향의 하늘이 생각난 탓인지, 그에게 다 꺼내어 보이지 못한 마음이 아쉬워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 기분을 감추기 위해 달빛이 환한데도 별이 보인다고 부러 신기해하며 떠들던 최서율이 손가락을 간질이는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 손안에 넣고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호랑이한테 기대서 별 보는 토끼도 제가 처음이겠죠?”
“…….”
“이렇게 호랑이 꼬리를 만져보는 토끼도 제가 처음일 겁니다.”
“…….”
“아마 부사장님도 저를 만나 처음으로 겪는 일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
“제가 꼭 용기를 내서 부사장님께 가게 되면….”
“…….”
“저 좀…. 등에 태워주십시오.”
호랑이가 소리도 내지 않고 고개를 돌려 등에 기대에 드러누워 있는 최서율을 바라보았다. 날카롭지만 깊고, 따뜻한 눈동자에 최서율이 홀린 듯 웃었다.
“그럼 호랑이 등에 타보는 최초의 토끼도 되어보지 않겠습니까?”
호랑이가 크릉. 하는 소리를 내며 등을 들썩거렸다.
그렇게 열심히 강무혁에게 가 마음이 닿으면 어떤 기분일까. 그와 함께하게 될 시간은 지금까지 제가 살았던 세상과 완전히 다르지 않을까. 무수히 많은 감정이 휘몰아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듯 호랑이 꼬리를 잡아 괜히 가슴께에 쓱쓱 문질러보았다. 그가 전해주는 체온으로 가슴 속까지 따뜻해져 괜히 입꼬리가 씰룩씰룩 움직였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털을 만져보았다가, 그 털 위에 얼굴을 비벼보기도 했다. 그득하게 차오르는 이 만족감이 마치 육식동물의 포만감과 같다는 깜찍한 생각을 하는 토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