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64)

14.

“으….”

술을 먹지도 않았는데 마치 숙취에 시달리는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어제 너무 신나게 정원을 뛰어다닌 탓일까. 새벽에 그런 일을 겪어서일까. 몸이 평소처럼 가볍지만은 않았다. 이불 속에서 길게 기지개 켜던 최서율이 옆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으악!”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네요.”

“부, 부, 부, 부사장님?!”

나오는 대로 말을 쏟아낸 최서율이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을 더듬었다. 자다가 깨서 호랑이를 봤고, 부사장이 방에 들어왔고, 제가 먼저 키스를 졸랐다. 키스가 꿈이 아니란 걸 보여주듯 입안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었다.

점막이 너덜너덜해진 입안을 혀로 더듬고 있는 최서율을 바라보던 강무혁이 기다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많이 아픕니까?”

“그건 아닌데….”

사람의 모습을 하고도 혀가 뾰족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당황한 건 사실이었지만 아파서 아무것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괜스레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듯 고개를 모로 돌린 최서율을 보며 웃은 강무혁이 베개에 팔을 대고 느른하게 몸을 기댔다.

“더 자요. 오랜만에 휴일인데.”

“왜… 여기서 주무셨습니까?”

“최서율 씨가 안 놓아줘서 그냥 여기서 잤습니다.”

“제가요?!”

놀란 듯 꽥 소리를 지른 최서율이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키스하다가 침대에 눕혀졌고… 또 키스했는데… 그 후부터 기억이 선명하질 않았다. 이리저리 휘둘리다가도 제가 먼저 그를 놓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가 무섭게 다가왔던 것 같기도 하고…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강무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앉았다.

“티셔츠를 잡고 놓아주질 않더군요.”

“제가… 그걸….”

다 늘어나 버린 강무혁의 가슴팍이 선명하게 보였다. 좋은 옷인 줄 알았는데 싸구려인가. 가슴팍을 노려보던 최서율이 뜨거워지는 볼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마치 첫 키스를 한 소년의 기분과도 흡사한 상태가 된 이 느낌이 좋으면서도 얼떨떨했다.

“내 비밀을 알게 된 기분은 어떻습니까?”

왜 저를 걱정하냐고 묻는 말에 비밀이라고 말했던 강무혁이었다. 강무혁과 지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 비밀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지도 몰랐다. 중심을 잡으려고 무던히 애를 써도 항상 한쪽으로 기울어 버리는 제 감정에 대한 답도 이제는 모르는척할 수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좋으면서도 무섭고… 기쁘면서도 슬픕니다.”

최서율이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네요.”

“지금은 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언젠가 제가 부사장님께 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날, 부사장님께서도 지금 제가 느끼는 마음에 공감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내 어떤 걸 보고 그 마음에 공감할 거로 믿습니까?”

“부사장님의 비밀을 믿습니다.”

강무혁이 피식. 웃었다.

“그럼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네.”

“좋으면서도 무섭고, 기쁘면서도 슬픈 와중에도 나한테 오고 있는 게 맞습니까?”

의미 없이 이불 위를 갉작이던 최서율의 고개가 아주 작고, 느리게 끄덕여졌다.

“…맞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삶은 모든 순간과 선택에 큰 용기가 필요했다. 담을 넘어 산속에 놀러 가는 일도, 바깥 도시의 일을 궁금해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매번 잡지를 받아, 몰래 읽을 때도 서울에 올라와 대학에 가는 일도, 취직하는 일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명확한 어떤 관계가 되지 못한 아쉬움이 침대 주변을 맴돌았다.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최서율은 그 말들을 혀 아래로 감추었다. 한낱 감정에 휘둘려 강무혁의 손을 잡았을 때 제가 감당해야 하는 수많은 일이 아직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한순간에 조용해지는 최서율의 목덜미를 스친 강무혁의 볼까지 올라왔다. 아침부터 체온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강무혁이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다정한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몸 어딘가가 간지러워 손이 닿는 모든 곳을 벅벅 긁고 싶어졌다.

“아, 그리고 새벽에 키스한 건 내가 하자고 한 게 아니라 최서율 씨가 하자고 한 겁니다. 혹시 그것도 기억 못 할까 봐 말해줍니다.”

“그게…!”

“그렇게 키스를 좋아할 줄 알았으면 더 일찍 해줄 걸 그랬습니다.”

“부사장님!”

“아. 해봐요. 상처 괜찮은지 봅시다.”

어깨를 펄떡이는 최서율을 보며 웃은 강무혁이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싫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 도리질 치는 최서율의 다물린 입술 위에 찍어누르듯 입 맞춘 강무혁이 놀란 토끼 눈가에도 입술을 눌렀다.

얼른 고개를 비틀어 피하는 어깨를 끌어안아 이불속으로 밀어 넣은 강무혁이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세상 편해 보이는 강무혁을 보며 최서율이 그제야 생각난 듯 몸을 일으키려 더 크게 버둥거렸다.

“부사장님, 다른 분들이 기다립니다. 오늘 근처에 호수에 가기로….”

“벌써 해가 중천에 떴습니다. 이미 전화가 열 통 이상 왔고, 최서율 씨가 아파서 자고 있다고 둘러댔습니다. 저녁에 만나서 같이 저녁 먹기로 했습니다. 지금이 정말 아침 같습니까?”

“아….”

강무혁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청명하기 그지없었고,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해가 너무 높이 올라와 있었다. 민망함에 이불 더미에 얼굴을 묻은 최서율이 꿍얼거렸다.

“그럼 부사장님이라도 가시지 그러셨습니까.”

“내가 너 없이 어딜 갑니까.”

귓가가 간지러웠다. 볼이 뜨거워졌고, 가슴이 벅차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 * *

호수를 구경하러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숙소에서 TV를 보며 이것저것 많이도 주워 먹었다. 입안이 아파서 천천히 오물거리는 입술이나, 볼록한 볼에 계속 짧게 입 맞추는 강무혁 때문에 몇 번이나 펄쩍 뛰어야 했다.

“부사장님, 저희 아직 사귀는 거 아닙니다.”

“압니다.”

“그런데 자꾸 이러시면….”

“그럼 예쁘지나 말던가.”

최서율의 얼굴이 잘 익은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런 말을 하는 강무혁이 혹시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닌가 싶어 뜯어보는 눈이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그런 최서율의 좁아진 미간에도 입 맞춘 강무혁이 작게 웃었다.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더없이 홀가분했다. 그걸 표출하듯 자꾸만 최서율에게 닿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심각한 표정으로 TV를 노려보던 최서율이 소파에서 일어나 쿵쿵 걸어 정원이 보이는 통유리 앞에 섰다. 정원에 호랑이 발자국이 커다랗게 남아있었다.

“부사장님 저렇게 흔적을 남겨 놓으시면 어떡합니까.”

“내가 호랑이인 거 대한민국에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왜요. 또 흙 파헤쳐 놓고 싶어서 그럽니까.”

“…네.”

고개까지 끄덕이며 냉큼 대답했다. 느른하게 소파에 기대어 있던 강무혁이 이마를 짚었다. 반질반질해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최서율과 눈을 맞추고 있으니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정원 다 파헤쳐 놓으면 안 됩니다. 어제처럼 야생화를 뽑아 놔도 안 되고요.”

“네, 알겠습니다.”

“안아서 내려 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정대로 숙소를 따로 썼더라면 굳이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마치 여기가 강무혁의 집이라도 된 것처럼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제 모습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이 들려오기 무섭게 큰소리로 외친 최서율이 방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신난 듯 팔짝거리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터졌다. 갈색 털이 빛나는 통통하고, 작고, 귀여운 토끼를 생각하니 또 괜히 뭐라도 뽑아내고 싶을 정도로 감정이 동하는 강무혁이었다.

“낑!”

어제완 다르게 폴짝 뛰어 방을 나서는 토끼를 두 손으로 잡아 들었다. 품에 안고 이리저리 토끼를 만져댔다. 귀도 만져보고, 뱃살도 만져봤다. 뒷다리를 허공에 훅, 훅 날리는 걸 보니 표적이 저였던 모양이다. 씩씩거리는 토끼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알겠다는 듯이 등을 토닥인 강무혁이 정원으로 향하는 돌계단을 밟았다. 정돈된 잔디 위에 토끼를 내려 주려다 말고 앞발 사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올린 강무혁이 까만 토끼의 눈과 눈을 맞췄다.

“삐유-”

코를 열심히 움직여대던 토끼가 내려달라는 듯이 뒷발을 허공에 굴러댔다. 쪽. 촉촉하고 작은 코에 입을 맞췄다. 허공을 유영하던 토끼의 뒷발이 뚝. 하고 멈췄다. 최서율에게서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났다. 달콤하고, 고소하고, 향긋했다.

당장이라도 입 안에 넣고 굴려버리고 싶을 만큼 심하게 식욕과 성욕을 건드리는 냄새였다. 어젯밤에도, 그 이전에도, 함께 차에 타고 있을 때도 그랬다. 드문드문 풍기는 그 냄새에 홀린 듯 손이 나갈 뻔했던 일도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냄샌지 모르겠습니다.”

눈을 맞추며 하는 말에 토끼가 귀를 쫑긋거렸다. 세모난 주둥이를 한입에 넣고 싶은 마음을 꾹꾹 내리눌렀다. 당황한 듯 멈춰버린 코에 제 코를 맞댄 강무혁이 고개를 살살 돌렸다.

뭉툭하게 구겨진 코끝이 비벼졌다. 삐이- 토끼가 앓듯이 소리를 내었다. 복슬복슬한 목덜미에 코를 묻은 강무혁이 얼굴 전체에 토끼의 보드라운 털을 비벼댔다. 등에 비해 더 부드럽고, 얇은 털이 있는 배 부분을 손으로 받치자 토끼가 버둥거렸다. 작다고는 해도 새끼는 아니었기에 무게가 상당했다.

떨어트릴 뻔한 강무혁이 미간에 힘을 주며 토끼를 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손 위에 올려두고 여기저기 만져보고 관찰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토끼의 성질을 제대로 건드리는 꼴이 될 테니 하지 않기로 했다.

불만을 표출하듯 버둥거림이 심해지는 토끼의 귀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놓은 강무혁이 다시 올망졸망 귀엽고, 촉촉한 코 위에 짧게 입 맞췄다.

“그만하겠습니다. 놀라지 말고, 천천히 놀다 오세요.”

잔디 위에 토끼를 내려 준 강무혁이 커다란 손으로 귀와 머리, 등허리를 길게 쓰다듬었다. 손이 떨어지기 무섭게 토끼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원 구석을 향해 내달렸다. 그런 토끼의 동그란 엉덩이를 바라보는 강무혁의 얼굴에 짙은 웃음이 걸렸다.

* * *

“다른 팀에서 부럽다고 난리가 났지 뭐에요.”

“그러게요. 저도 엄청나게 자랑해놨어요.”

“윤 비서님. 그럼 저희 내일 올라가서 그대로 출근인가요?”

“그걸 왜 윤 비서한테 물어봅니까? 나한테 물어봐야지.”

그릴 앞에서 고기를 굽던 강무혁이 고기가 산처럼 쌓인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선 과장과 황 사원을 바라보았다. 월요일을 포함한 2박 3일 일정이라 다른 부서에서 부러움을 사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미 맥주를 몇 캔 비워서인지 조금 굼뜨게 감사의 인사를 한 선 과장이 그래도 정신이 아직 남아있는지 부사장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진심과 내일 출근하기 싫어서 더 열심히 부사장을 치켜세우는 선 과장의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내일 서울 올라가서 바로 퇴근하세요. 대신 화요일부터는 정신 차리고 일하면 됩니다.”

입을 모아 대답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신남이 묻어 나왔다.

호수에 다녀온 사람들과 리조트에 대해서 짧은 회의를 했다. 처음 기획 단계부터 함께 했던 부사장 지원실 직원들의 신랄한 입담에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손에 얻은 강무혁의 기분은 꽤 좋아 보였다. 돈과 시간을 들여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다는 듯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내심 긴장했던 윤 비서의 얼굴에도 안도의 미소가 걸렸다.

남들이 맥주를 서너 캔 비워낼 때 이제 겨우 두 캔을 비워낸 최서율이 세 번째 캔을 따고는 몇 번 홀짝거리지도 못하고 스르륵 풀리는 몸을 한쪽 무릎을 세워 얼굴을 기댄 채 버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걷어낸 고기를 그릇에 담고 그릴 뚜껑을 닫은 강무혁이 비어있는 최서율의 옆자리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들 틈이 아닌 끝자리에 앉는 강무혁을 가운데로 끌어 오려던 사람들도 괜찮다는 부사장의 단호한 목소리에 금세 포기하고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괜찮습니까?”

“네, 조금밖에 안 마셨습니다.”

“조심하세요. 또 최서율 씨 잃어버리면 어떡합니까.”

장난이 다분히 섞인 말에 최서율이 눈썹을 구겼다.

“정말 조금만 마셨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방에는 내가 데려가면 되니까 편하게 먹어요.”

최서율의 그릇에 한입 먹은 오이와 반으로 잘린 당근, 작게 썰린 소시지가 있었다. 쯧, 짧게 혀를 찬 그가 접시를 들어 쓰레기 봉지에 버려버렸다. 어어- 고개를 들며 버려지는 것들을 보던 최서율과 눈을 맞춘 강무혁이 새 접시를 꺼내어 방금 구워온 고기를 얹어 주었다.

“고기도 먹어요.”

“먹여 놓고 뱃살 나왔다고 놀리려고 그러십니까?”

“안 그럴 테니까 편하게 드세요.”

강무혁이 윤 비서와 잔을 기울이며 최서율의 귓가에 얼굴을 대고 속삭였다. 떨어지기 전 킁킁. 냄새를 맡는 듯한 소리와 콧바람에 입술이 닿았던 귓가가 간지러워 어깨를 작게 움츠린 최서율의 눈이 사르르 접혔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관찰하듯 말도 없이 바라보고 있던 윤 비서와 고 비서의 시선이 최서율에게 닿았다. 늘 동그랗게 힘주어 뜨고 있던 눈이 반으로 접히는 광경을 보던 고 비서가 최서율 대리님 어쩌고저쩌고하고 말을 늘어놓았다. 웃는 얼굴이 예쁘다는 칭찬의 말이었다.

강무혁이 고기 한 점을 들어 고 비서의 그릇 위로 던졌다.

“고 비서님, 그만 떠들고 드세요. 오늘 피곤했을 텐데 많이 챙겨 드셔야죠.”

친절한 미소였지만 그 얼굴을 바라보는 윤 비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뭐. 하는 듯이 입을 움직인 강무혁의 어깨 아래 팔뚝으로 툭. 최서율의 이마가 닿았다. 강무혁이 건넨 고기를 입에 넣던 고 비서가 놀라 고기를 떨어트렸다.

“최 대리님!”

그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최서율과 강무혁에게 쏠렸다. 강무혁의 팔에 이마를 기대고 흔들리고 있는 최서율을 본 박 부장과 선 과장이 얘를 어떡하면 좋냐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길게 눈을 감았다 뜬 강무혁이 괜찮다는 듯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냥 두세요. 술이 약한 것 같은데 제가 이따가 데리고 올라가겠습니다.”

“어후, 그래도 부사장님께 어떻게. 유 대리 뭐해. 최 대리 잡아.”

“네, 오늘은 제 방에서 최 대리님이랑 같이 자겠습니다.”

벌떡 일어난 유재영 대리가 최서율의 팔을 잡으려던 순간 강무혁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최서율의 몸에 닿지 못한 유 대리의 손이 허공에 매우 어색한 모양으로 멈췄다.

“됐습니다. 그냥 두고 식사하세요.”

거부할 수 없는 기운이 깃든 목소리였다. 개 수인인 유재영 대리는 특히나 그걸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선 과장이 딸꾹!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런 선 과장의 등을 쓸어 준 황유진 사원이 물을 내밀었다.

삽시간에 퍼지는 범의 기운에 윤성연 비서가 이마를 손끝으로 긁적였다. 하지 말라는 듯 눈짓했지만, 강무혁은 매우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고 그 눈빛을 무시했다.

“부사장님, 피곤하시면 먼저 올라가서 쉬셔도 됩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와 강무혁의 상태를 파악한 윤비서가 부러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윤 비서를 바라본 강무혁이 고개를 설설 저었다. 늑대 주제에 눈치만 빠르다고 눈으로 욕을 하는 건지, 칭찬을 하는 건지 모호했다. 윤성연 비서가 그 눈빛을 단박에 무시하고 분위기를 이끌었다.

박 부장이 최서율을 같이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 손까지 밀어낸 강무혁이 최서율을 부축했다. 스스로 걷는다기보단 끌려가는 수준이었지만 윤 비서가 걱정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애쓴 보람이 있게 두 사람에게 닿던 시선은 이내 모두 흩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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