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64)

12.

품에 안겨있는 토끼의 작은 심장이 콩콩 뛰어대는 고동이 느껴졌다. 팔에 배를 대고, 가슴에 얼굴을 누른 토끼가 귀를 쫑긋할 때마다 복슬복슬 여린 털이 턱 아래를 스쳤다.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강무혁이 테라스를 지나 잔디를 밟았다. 그 한가운데에 조심스럽게 토끼를 내려놓았다. 높이가 균일하게 잘린 잔디 사이사이로 작은 들꽃이 피어있었다. 노랗고, 하얀 작은 꽃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토끼를 바라보던 강무혁이 테라스에 준비된 소파로 돌아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처음 보는 모습도 아닌데 토끼가 한번 뛸 때마다 심장께가 간질거렸다.

“끼잉!”

꽃을 찾아 날아온 나비를 보고 쫓기 시작하는 토끼가 엄청난 속도로 정원을 뛰어다녔다. 아직 이른 봄이라 올해 들어 처음 보는 나비였다. 토끼도 나비가 반가운지 팔랑팔랑 이리저리 날갯짓하는 나비를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낸 강무혁이 흥미롭다는 듯이 토끼를 쫓고 있던 제 시선을 알아차리곤 괜히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통통한 뱃살이 움직이는 걸 보다가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죽여 웃어버렸다.

봄이 되면 저절로 뱃살이 빠진다고 하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산에 함께 갔을 때보다 더 빨라진 듯한 뜀박질 속도를 보니 봄을 맞이하는 토끼의 몸 상태도 겨울보단 가볍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짧은 앞발과 통통한 뒷발 사이에 있는 동그란 배가 자꾸만 바닥에 닿았다. 불편해 보이지만 토끼는 별생각이 없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바빴다. 그러다가 가끔 뒤를 돌아보며 폴짝거리다가 잔디밭을 데구루루 구르는데 결국 숨죽이던 소리를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렸다.

강무혁은 안 웃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실없이 웃는 사람도 아니었다. 재밌는 예능 프로그램보다도 더 재밌는 토끼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토끼를 쫓는 눈이 바삐 움직여댔다.

멀리까지 달려가 꿈지럭거리던 토끼가 강무혁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뛰어왔다. 허공에 귀가 팔락거리고, 동그랗고 조그만 앞발이 바닥을 짚을 때마다 강무혁의 입꼬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발치까지 달려온 토끼가 앞발로 강무혁의 청바지를 타닥타닥 두드렸다.

“왜, 목마릅니까?”

동물화가 되면 말은 알아들어도, 사람의 언어로 말할 수 없어서 일방적으로 질문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데 이 똑똑한 토끼는 뭘 원하는지 제대로 보여주려는 듯 바닥을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초당 몇 번씩 움직이는 코도 귀여웠지만, 입 밖으로 빼꼼 내민 앙증맞은 혀를 보니 이번엔 마당의 바위를 다 뽑아 던지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위로 한껏 치솟은 토끼의 귀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강무혁이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먹기 편하게 그릇에 물을 담아 내어주자 짭짭. 소리를 내며 물을 마시는데 그 모습 또한 하염없이 바라보게 만드는 아주 요망한 토끼였다.

물을 다 마시고 미련 없이 돌아서 다시 마당으로 뛰어간 토끼가 잔디밭을 마구 굴러다녔다. 왜 저러는 거야. 한참 바라보던 강무혁이 다리를 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모습 또한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귀여웠으니 상관없었다.

토끼로 마음껏 마당을 뛰어노는 최서율을 보니 저도 답답한 옷을 벗어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여기서 호랑이가 된다면 깜짝 놀라는 건 최서율 뿐만이 아닐 거였다.

산을 울리는 호랑이 울음소리를 듣고 사슴 수인인 선 과장과 개 수인인 유재영 대리는 기절할지도 몰랐고, 직접 호랑이를 만나보지 못한 일반 사원들과 리조트 직원들이 놀랄 거였다. 늑대 수인인 윤 비서는 저를 미친 듯이 씹어댈 것이고, 무엇보다 저 심장 약한 토끼가 노발대발할 걸 생각하면 모두를 위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나았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당을 구르고 있던 토끼가 보이질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토끼를 찾으려던 강무혁이 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꺅!”

깜짝 놀라 이상한 소리를 내며 펄쩍 뛰어오르는 토끼를 강무혁이 두 손으로 잡아 올렸다. 토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썹을 구긴 강무혁이 눈을 부릅떴다.

* * *

토끼가 강무혁의 손에 들려진 채 화장실 바닥에 내려졌다. 끼잉. 잔뜩 풀이 죽은 토끼가 귀를 내려 얼굴을 가렸다. 코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이고 있는 작은 털 뭉치를 손으로 쓰다듬은 강무혁이 자그마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앞발로 눈을 가린 토끼가 기우뚱 뒤로 넘어갔다. 그 꼴이 아주 우습고, 하찮고, …귀여웠다.

“그 야생화가 얼마나 비싼 건 줄 압니까? 비싼 건 둘째고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걸 다 파헤쳐 놓으면 어떡합니까?”

최서율이 열심히 파헤치고 있던 건 북쪽의 산에서 어렵게 구해온 야생화였다. 이 지역의 산군 호랑이가 리조트 내에 야생화를 많이 심어 멸종되지 않게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을 때부터 여러 기관과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옮겨온 매우 비싸고, 소중한 꽃이었다. 리조트에는 곳곳에 심어진 야생화만 따로 돌보는 팀이 있을 정도였다.

지원실에서 일하는 최서율이 야생화의 존재에 대해서 모를 리 없었다. 낑.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푸드덕 흔드는 토끼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씻겨 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요.”

“낑… 끼잉.”

싫다는 걸 표현하는 토끼를 보다가 세면대 물을 켠 강무혁이 적당히 따뜻하게 물 온도를 맞췄다.

“발만 씻겨 주겠습니다. 옷 가져다줄 테니까 나머지는 혼자 씻고 나오세요.”

한바탕 호통을 친 강무혁이 토끼를 살살 달랬다. 까짓거 야생화야 돈을 얼마를 줘도 다시 사 오면 그만이라지만 야생화를 키우기 위해 주변에 뿌려둔 비료를 온몸에 묻히고 뒹구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됐다. 그 비료를 온몸에 묻히고 뒹굴고 있기에 들어 옮긴 건데 귀를 한껏 내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토끼를 보고 있자니 너무 심했나.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동그랗게 쪼그라져 있는 토끼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토끼를 한쪽 팔에 걸쳐 놓은 강무혁이 세면대에 물을 켜고, 비누 거품을 내어 흙이 잔뜩 묻어 있는 앞발을 살살 문질렀다. 통통하고 보드라운 느낌에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흙과 잔디가 묻어 있는 엉덩이도 털어주고 뒷발까지 꼼꼼히 씻겨낸 강무혁이 수건으로 털이 마를 수 있도록 발을 붙잡아 살살 문질렀다.

토끼의 털이 이렇게 촘촘하다는 건 처음 토끼를 주웠던 날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조금 더 쉽게 털을 말려줄 수 있었다. 다음에 또 최서율이 집에 놀러 오면 이렇게 발이라도 닦아줘야겠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대충 털이 마른 걸 확인한 강무혁이 다시 바닥에 토끼를 내려놓았다. 샤워실에 비치된 가운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는 토끼의 코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씻고, 가운 입고 나오세요. 최서율 씨 짐을 내가 뒤질 수는 없으니까.”

“…….”

“알았으면 낑. 해보세요.”

“끼잉….”

고개를 조아리며 내는 소리에 피식거리며 웃은 강무혁이 욕실을 나섰다.

* * *

최서율이 씻는 동안 챙겨 온 짐을 최서율의 방 건너에 있는 방에 풀었다. 지금 입은 옷보다 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전화로 저녁 식사 준비를 부탁하고 소파에 앉아 TV를 켜 뉴스를 보았다.

물소리가 그치고 잠시 후 문을 연 촉촉한 최서율이 얼굴을 내밀었다.

“다 씻었습니까? 방에도 욕실이 있는데 생각을 못 했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부끄러운 건지, 따뜻한 물에 데워져서 그런 건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최서율이 맨발을 들썩이며 짐이 있는 방으로 쏙 들어갔다. 드라이기 소리가 들리고 편한 옷을 갈아입은 최서율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시보다 봄이 늦게 찾아오는 산의 공기는 오후에 들어서자 차갑게 뚝 떨어졌다. 산 너머로 오늘 하루의 마지막 햇살이 노을이 되어 걸리고 주황빛으로 물든 공간에 훈훈한 공기가 맴돌았다. 최서율이 강무혁이 앉은 소파에 주저앉으며 아이구.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할머니, 할아버지나 낼 법한 소리를 내는 최서율을 보던 강무혁이 소리내어 웃었다.

“피곤합니까?”

“네… 너무 열심히 뛰었나 봅니다.”

“쉬지도 않고 뛰었으니 피곤할 만하지.”

정원을 열심히도 깡충거리던 토끼가 생각나 웃어버린 강무혁을 바라본 최서율이 입술을 툭, 내밀었다.

“놀린 거 아닌데 표정이 왜 그럽니까?”

“왠지 놀림당한 거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저녁 먹고 푹 쉬세요.”

핫바 하나와 고구마말랭이만 먹고 이만큼이나 버텼다는 걸 깨닫기 무섭게 허기가 몰려왔다. 때마침 벨이 울리고 한 상 가득 음식을 준비한 리조트 직원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등장만으로도 벌써 맛있는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코를 킁킁거리고 있던 최서율이 참지 못하고 상을 차리고 있는 직원들 주변을 서성이며 식탁을 채우기 시작하는 음식들을 들여다보았다.

“수고했어요.”

“전화해 주시면 정리하러 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부사장이 머무는 방이다 보니 경력이 많고, 높은 직급의 직원까지 출동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깍듯하게 하는 인사에 함께 허리를 숙여 인사한 최서율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간 문이 쿵. 닫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최서율이 좋아하는 생채소와 나물 반찬, 강무혁이 좋아하는 고기까지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은 먹음직스러움을 넘어서 눈으로만 보아도 맛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잘 차려진 상태였다. 오이를 집어 오독오독 거리는 걸 보던 강무혁이 적당히 익어 맛있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밀어 넣었다.

“채소만 먹으면 안 좋습니다. 오늘처럼 체력을 많이 쓴 날에는 고기도 꼭 드세요.”

“네….”

당근까지 입에 밀어 넣고 있던 최서율이 잔소리를 시작하는 부사장을 짧게 흘겨봤다. 여기까지 와서 왜 이런 잔소리를 들어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래도 강무혁 덕에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으니 이 정도쯤은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찌나 정신없이 먹었는지 통통하게 올라온 배를 두드리던 최서율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사실 식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졸렸는데 배가 채워지니 급격하게 졸음이 몰려왔다. 집에서 회사와 달리 완전히 제멋대로 행동하던 습관이 리조트라는 공간에서 가감 없이 표출되는 느낌이었다.

부사장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있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소파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아버리는 최서율이었다.

“소화 시키고 자야지.”

“으으응….”

식사를 마쳤다는 연락을 마치고 나온 강무혁이 냉장고에 채워져 있던 맥주를 한 캔 들고 소파로 걸어왔다.

곤하게 숨을 내쉬고 있는 최서율의 볼을 톡톡 두드렸지만, 손만 휘저어대는 통에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졌다. 아직 이른 저녁 시간인데 이렇게 일찍 재워도 되는 건가 싶었다. 숨도 쉬지 않고 정원을 뛰어다니던 토끼를 생각하면 이렇게 잠드는 게 당연했기에 잠시 그대로 두기로 한 강무혁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든 최서율의 얼굴을 안주 삼아 맥주 한 캔을 비워낸 강무혁이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최서율을 방으로 옮겼다. 솜털처럼 가벼웠던 토끼와 비교하자면 거의 산을 하나 옮기는 수준의 무게였지만 힘겨울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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