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64)

11.

휴게소에 들러 핫바도 먹고, 고구마말랭이도 한 봉지 산 최서율은 리조트에 도착할 때까지 아주 열심히 먹어댔다. 끼니가 아니면 간식은 즐기지 않는 강무혁도 최서율이 입 앞까지 들이민 핫바를 한입 먹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구마말랭이도 몇 개나 먹어보았다.

도착한 리조트에는 이미 부사장 지원실의 사람들과 비서진들까지 모두 도착해있었다. 다행히 부사장이 중간에 최서율 대리를 픽업한다고 미리 전달해둔 상태라 의심 없이 두 사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들뜬 표정이 가득했다. 부사장이 미리 배정해 놓은 방을 확인하고 난 뒤라 더욱 그러한 것 같았다.

옷차림이 평소와 완전히 다른 강무혁을 보는 표정들도 가관이었다. 누구십니까? 장난스럽게 묻는 박 부장의 옆구리를 쿡 찌른 선 과장이 부사장님 오늘 평소와 다르다며 분위기를 풀어냈다. 황유진 사원의 눈에는 하트가 커다랗게 내걸렸다. 부사장님 정말 잘생겼습니다! 하는 말에 모두 함께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부사장을 제외하고도 모두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부사장에게 시선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했다.

산길을 따라 풀빌라 형태로 만들어진 리조트는 가장 아래 A동부터 F동까지 넓은 면적에 걸쳐 나무숲 사이사이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수로 따지면 건물 자체가 많지 않은 편이었지만 방 형태에 따라 등급이 나누어졌고 각 빌라는 밖에서 안을 볼 수 없게 만들어졌다.

가장 싼 가격이 책정된 A동도 개인적인 공간을 확보해 두었고, 전 객실에 수영장이 설치되어있어 여름뿐만 아니라 겨울에도 물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말 그대로 그 안에서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었다. 리셉션으로 사용하는 정문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각 동에 사무실과 매점, 부대시설이 완비된 곳이 따로 있었고, 직원들은 클레임건을 제외하면 손님들과 체크인, 체크아웃 외에는 만날 일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되었다.

“다들 리조트는 둘러보셨습니까?”

“네, 부사장님. 그런데 저희가 여기를 정말 사용해도 되는 건가요?”

“리조트 측과 미리 협의가 끝난 사항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사장님은 F동에 계시는 겁니까?”

“네. 저는 그쪽에서 쉴 예정입니다. 저도 여러분만큼 바빴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가장 늦게 방 배정표를 받아 본 최서율의 눈이 동그래졌다.

“방은 제가 복불복으로 뽑았습니다. 이름은 보지 않고 숫자를 정해놓고 뽑은 거니까. 등급이 낮은 곳이라도 너무 섭섭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휴~ A동도 진짜 좋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A동에 머무르게 된 황유진 사원과 유재영 대리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각 동에 하나 혹은 두 명씩 지낼 수 있도록 배정해둔 상태였다. 당연히 최서율은 부사장과 같은 F동이었다. 공정성에 의심이 간 최서율이 배정표를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나쁘진 않았다.

F동은 리조트에서 가장 등급이 높고, 가장 비밀유지가 잘 되는 곳이었다.

“다음 일정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려고 합니다. 식사는 저희가 미리 사둔 음식이 있는데 적당히 분배했습니다. 부사장님 식사는 리조트 쪽에서 준비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잘됐네요. 각자 편하게 쉬시고, 하자가 있거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은 꼼꼼히 적어두시고 취합해서 보고해주시면 됩니다.”

황금 같은 토요일에 여기까지 내려와 서로 얼굴 보면서 지내는 것보단 오늘은 각자 시간을 보내고, 내일 함께 근처의 호수를 관광하기로 협의한 지원실 식구들의 일정을 전달하는 윤 비서의 얼굴에도 언뜻, 설렘이 스치는 게 보였다.

생각해보면 부사장 지원실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부사장의 개인 비서인 윤성연 비서였으니 온전한 휴식이 필요한 건 당연할 터였다. 그런 윤 비서를 바라보는 강무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최서율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지원실 사람들을 뒤로하고 윤 비서와 따로 무리에서 빠져나온 강무혁이 좋냐? 하고 물었다. 윤 비서가 코웃음 쳤다.

“좋습니다. 되도록 저 부르지 마시고 편하게 쉬십시오.”

“내 식사는 넉넉하게 2인분으로 부탁하고, 간식거리도 부탁한다고 전해주세요.”

“간식이요?”

“네. 간식이요.”

강무혁이 간식을 먹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윤 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늑대 수인답게 눈치가 빠르고, 우직한 윤 비서는 강무혁이 입사하기 전부터 인연이 두터운 지인이었다. 저도 모르게 말이 막 튀어 나갈 뻔한 윤성연 비서가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네. 알겠습니다.”

윤 비서에게 대답을 듣기 무섭게 무리 지어진 사람들에게 다가간 강무혁이 최서율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최서율 씨는 F동인 것 같은데 저랑 같이 움직이면 되겠습니다. 다들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만납시다.”

여기까지 와서 일 시키면 어떡하냐고 걱정했었지만, 다행히 편하게 쉴 수 있을 것 같아 안심하는 표정들이었다. 정문에서 만났으니 가야 할 길이 먼 사람들은 가지고 내려온 차를 타고 움직이기로 하고 헤어졌다. 다시 차에 탄 최서율이 살짝 긴장한 듯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긴장 합니까?”

“저 이렇게 비싼 숙소에서 자는 거 처음입니다.”

“그래서 긴장 했습니까?”

“네.”

“체크인은 내가 직접 해주겠습니다.”

“헐,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강무혁에게 그게 통할 리 없었다.

F동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기 무섭게 근처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뛰어나왔다. 직원 교육이 끝난 상태라 거의 처음 맞이하는 손님이나 다름없는 부사장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F동은 딱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고, 거의 산 중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부지만 사용했고, 나머지는 산의 생김새를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정비되지 않은 길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두 개의 키를 받아들었다. 주차장과 가까운 곳에 있는 건물이 최서율이 묵을 숙소였다.

“들어가 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문을 열어주고 옆으로 비켜선 강무혁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온 최서율은 현관부터 부내가 풀풀 풍기는 내부를 보고 떡 벌어지는 입을 얼른 손으로 가렸다. 동그란 눈이 여기저기를 살폈다. 친환경 소재로 지어졌다고 하더니 나무 냄새가 내부에 가득 차 있어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딱 보아도 비싸 보이는 가구로 채워진 공간에 차례로 눈을 두다가 말고 커다란 창문 너머의 정원에 시선을 빼앗긴 최서율이 꾹꾹 눌러 참던 감탄사를 뱉어내고야 말았다.

“우와아.”

거실 창에 열 수 있는 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정원과 연결되는데 처마가 있는 테라스에는 여러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소파가 있었고, 돌계단을 밟고 내려가야 정원의 잔디를 밟을 수 있었다. 잘 닦여진 창문에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어 입술만 꼼실거린 최서율이 다른데도 둘러봐도 되냐고 물었다. 강무혁은 물론이라며 길을 내어주었다.

방, 화장실, 욕실, 수영장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최서율이 거실 소파에 그림처럼 앉아있는 강무혁의 옆으로 와 털썩 주저앉았다. 몸이 통, 튕겨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소파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우직하게 그 무게를 자랑했다.

“좋습니까?”

“네. 정말 좋습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그동안 지원실 식구들이 고생했으니 당연한 포상입니다.”

제 돈 주고는 절대로 오지 못할 곳이었기에 당장 보완해야 할 흠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차차 살펴보기로 하며 다시 시선을 창문 너머 정원으로 옮겼다.

굳이 담벼락을 설치하지 않아도 커다란 나무가 촘촘히 앞을 막고 있어 밖에서 함부로 안을 보기 힘들어 보였다. 정원에는 산에 아주 오랫동안 뿌리박고 있던 바위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정돈된 정원과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어울렸다. 기분이 한껏 치솟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흙냄새와 나무 냄새를 맡고 있으니 그동안의 피로가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중이었다.

“식사는 F동 측에서 최서율 씨 몫까지 준비할 겁니다. 짐 풀고 산책이라도 하겠습니까?”

“네. 좋습니다.”

입꼬리가 씰룩씰룩 움직이는 걸 감추지 못했다. 기분이 좋아 코끝이 습관처럼 꿈질거렸다. 당장이라도 토끼로 변해버릴 듯 기분이 들떠 그 충동을 억누르느라 숨이 찰 지경이었다.

벌떡 일어나 다시 창문 앞에 선 최서율에게 가까이 다가온 강무혁에게서 손을 잡았을 때 느꼈던 뜨거움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손끝을 달싹거리며 고개를 들어 강무혁의 눈을 바로 바라봤다.

“부사장님 숙소는 바로 옆입니까?”

“네.”

“언제쯤… 가십니까?”

강무혁이 숙소로 돌아가면 토끼로 정원을 뛰어다닐 생각이었다.

“안 가려고 합니다.”

“네?”

“안가고 여기서 지내려고 합니다. 혼자 쓰기 너무 크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좋다. 싫다. 딱 잘라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최서율을 바라보던 강무혁이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최서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깨를 움츠리며 물러나는 최서율과 눈을 맞춘 강무혁이 어서 대답하라는 듯이 눈썹을 위로 한번 치켰다 내렸다.

“그럼 방은….”

“침실이 몇 갠데 그걸 걱정합니까.”

“아… 그, 그렇죠.”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던 최서율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통통하고, 보드라운 볼을 손끝으로 톡, 건드린 강무혁이 웃었다.

“방금 이상한 상상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펄쩍 뛰니까 더 의심스럽네요.”

“정말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허락한 걸로 알고 식사 준비도 여기로 부탁하겠습니다.”

바로 네. 하고 대답할뻔한 최서율이 어쩐지 강무혁에게 엄청나게 휘둘린 기분이 들어 입술을 꾹 닫아버렸다.

앞으로 툭 튀어나온 입술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불만을 바라보던 강무혁이 최서율을 달래듯 다시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닿을 때마다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뜨거운 게 치솟아 하마터면 머리카락을 움켜쥘 뻔한 강무혁이 얼른 손을 거두어야 했다.

“토끼로 쉬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정원으로 옮겨 주겠습니다.”

“그래도… 됩니까?”

“제가 토끼를 만지는 게 괜찮다면 당연히 됩니다.”

같은 곳에서 지내겠다는 제안을 수락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답을 길게 망설이던 최서율이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주고 있는 강무혁을 의식하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러댔다.

“그럼 부사장님은….”

“여기서 호랑이 만나고 기절하고 싶은 건 아닐 테니 그건 걱정하지 말고.”

최서율이 가슴을 부풀리며 숨을 들이켰다.

“또 배 나왔다고 놀리시면… 안 됩니다.”

말랑말랑, 털에 감싸인 토끼의 배를 떠올리곤 웃음을 참지 못한 강무혁이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안 놀리겠습니다.”

장난기가 가득했고, 웃음이 들어찬 목소리였다.

“그럼 잠시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열기로 가득 차 몸이 후끈거렸다. 심장이 가슴 아닌 몸 곳곳에서 뛰어대고, 정신에 들어있는 작은 전구가 깜빡거렸다. 부끄러웠지만, 얼른 저 잔디를 밟으며 뛰놀고 싶었다. 크게 밀려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한 최서율이 강무혁을 지나쳐 거실을 지나 첫 번째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코를 뚫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은 강무혁이 팔짱을 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봄 햇살과 청명한 하늘, 푸른 녹음이 어우러진 곳. 회사에 자리를 만들고 처음으로 제 능력을 시험대에 올려놓은 곳. 감회가 새로웠다. 자꾸만 웃음이 걸리는 입을 손으로 가린 강무혁이 헛기침을 했다. 결코 오랜만에 토끼를 볼 생각에 기분이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었다.

“낑….”

“최서율 씨?”

삐융. 귀여운 소리를 내는 토끼를 보고 있자니 강무혁은 리조트를 바라보며 느꼈던 감회고 뭐고, 다 잊히는 기분이었다.

토끼 때문에 기분이 좋은 건 아무리 노력해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호랑이에게 한 입 거리도 되지 않는 토끼가 고개를 내밀고 귀를 쫑긋거렸다.

처음 제집에 왔을 때 바닥 때문에 미끄러졌던 토끼가 생각나 얼른 앞으로 나서던 강무혁이 깡충깡충 잘도 뛰는 토끼를 보곤 멈추어 서야 했다. 최고급 원목을 깔아둔 바닥이 미끄러울 리 없었다. 토끼는 머리카락 색과 비슷한 황금색에 가까운 털빛을 자랑하듯 내보였다. 어린 개체도 아닌데, 성체도 아닌 듯 작기만 한 토끼가 거실을 이리저리 열심히 뛰어댔다.

짧은 앞발로 세수하듯 코와 얼굴을 이리저리 문지르더니 고개를 바짝 들어 올린 토끼는 강무혁과 눈이 마주쳤다. 토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귀를 쫑긋쫑긋하자 강무혁은 옆에 있는 소파라도 집어 던지고 싶을 만큼 가슴이 묵직해졌다.

이렇게 고조되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나갈래요?”

“낑!”

뒷발에 힘을 주며 허리를 펴고, 앞발을 쭉 뻗는 토끼를 보니 귀여워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놓을까 잠시 고민에 빠졌다. 허공에 멈춘 손을 바라보던 토끼가 끼잉! 어서 안아주지 않고 뭐하냔 듯 뒷발로 쿵쿵 바닥을 굴러댔다. 성질을 보니 최서율이 맞았다.

“그래요. 얼른 나가죠.”

털 뭉치를 들어 올린 강무혁이 토끼의 까맣고, 동그란 눈을 바라보았다. 옆구리를 받치고 등까지 감싼 손에 따끈한 토끼의 체온이 가득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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