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64)

10.

허둥거리며 부사장실을 빠져나가는 최서율의 빨개진 얼굴을 본 윤 비서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부사장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저 인간이 왜 갑자기 최 대리한테 저러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 뿐이었다.

싹싹하고, 일도 잘하는 사원을 괴롭히는 건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로 강무혁을 바라보았지만, 얼른 표정을 지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전달 내용을 꼼꼼히 살피는 강무혁은 평소 부사장의 모습이었기에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이번 리조트 시찰은 정말 그렇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네. 얘기 들어보니 다른 팀은 MT도 간다고 하던데, 우리는 그런 기회가 없지 않았습니까. 물론 오픈 전이라 부족한 것도 있을 테고 일의 연장으로 움직이는 게 되겠지만 1인 1실로 배정하고, 마지막으로 내 눈이 되어서 부족한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준다는 명목으로 처음 정했던 대로 진행하죠.”

“네. 그럼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나가려는 윤 비서를 잡아 세운 강무혁이 소파 팔걸이를 톡, 톡. 내리치며 돌아선 윤 비서를 바라보았다.

“방은 제가 직접 배정하겠습니다.”

“아, 네.”

“윤 비서는 나랑 제일 멀리 떨어진 곳으로 해줄 테니까 안심하시고요.”

“네. 제발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터트리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부사장실을 울렸다. 마음이 아주 척척 맞아떨어지는 우애 좋은 두 사람이었다.

리조트 오픈을 앞두고 시찰을 나가려고 준비하던 부사장 강무혁이 갑자기 계획을 수정하여 부사장 지원실 모두가 리조트에 가서 2박 3일 동안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물론 일의 연장선이라고 말했지만, 푹 쉬라는 의도도 있다는 전달 내용에 사원들은 오히려 좋아했다.

1인 1실이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호가 터진 마당에 더할 말이 없어진 윤 비서가 웃었다. 리조트는 풀빌라 형식으로 지어졌는데 혼자 쓰기는 너무 큰 감이 있는 숙소였다. 깊은 산 속에 자리했기에 수인이 아닌 사원들에게는 밤이 조금 무서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 모여 술판을 벌일 텐데 미리 교육받는 중인 리조트 직원들만 고생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부터 일었다.

“윤 비서님. 밤에 한 잔. 콜?”

소주잔을 넘기듯 손을 딱! 넘기는 박 부장을 보며 윤 비서가 표정 없는 얼굴로 박 부장을 바라보았다. 그런 무표정과는 다르게 태블릿 아래로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크~ 소리 없는 탄성을 뒤로 하고 제 자리로 돌아온 윤 비서는 리조트의 객실 현황을 파악하여 부사장에게 전달할 준비를 시작했다.

* * *

여행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고향에 간 지도 2년이나 되었으니 그사이에 따로 여행이라고 서울을 떠나 본 일이 없었다. 부사장이 무슨 생각으로 리조트에 다 같이 가자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서 일하게 되더라도 어딘가로 떠나는 게 너무 신난다며 며칠 전부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서율도 방긋방긋 웃었다.

2박 3일 동안 산속에 서 지낼 생각을 하니 벌써 여러 가지 계획이 머리에 떠올랐다. 1인 1실이라 했으니 밤에는 마음껏 잔디를 밟을 수 있으리라. 강무혁의 집에 다녀온 지도 한참 되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는데 생각만 해도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수학여행 가기 전날 밤의 설렘 같은 걸 느껴버린 최서율이 짐을 싸다 말고 가방 위로 엎어져 으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 좋음이 한껏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오랜만에 정장이 아닌 편한 옷을 차려입었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하얀 티.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청재킷. 딱딱한 구두가 아닌 가벼운 스니커즈까지 신었다.

날씨에 딱 맞는 가벼운 옷차림까지 하고 나니 당장이라도 방방 뛰어다니고 싶은 들뜬 마음에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시간을 확인하고 선 과장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던 최서율이 대뜸 손목을 잡아끄는 힘에 놀라 악!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사람이 서 있는데 그냥 지나칩니까?”

“부사장님?!”

“그래요. 납니다.”

선글라스를 벗으며 눈을 맞추는 사람은 부사장이 맞았다. 청바지에 검은색 라운드티를 걸친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부사장 집에 가던 날도 편한 차림을 한 강무혁을 못 알아볼 뻔했었는데 방금은 아예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고 지나치려고 한 거였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던 선글라스까지 꼈으니 못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목소리는 부사장이 맞는데 몸뚱이는 그가 아닌 것 같은 느낌에 자꾸만 의심의 눈초리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뜯어보고 있는 최서율이었다.

크르릉. 좁은 골목을 울리는 호랑이의 울음소리에 잡힌 손목을 마구 당기며 뒷걸음질 치는 최서율이었다. 부사장이 맞았다. 가끔 이렇게 자기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부사장의 짓궂은 성격은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았다. 호랑이 소리를 들었다고 심장이 마구 내달리고, 발끝부터 소름이 끼쳐 올랐다.

그와의 관계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편해졌다고는 하지만 그가 이렇게 가감 없이 범의 기운을 내보이면 꼼짝 못 하는 최서율은 영락없는 토끼가 맞았다. 작고, 하얀 토끼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부사장님, 그걸, 그렇게 그러시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나를 몰라보는 거 같아서 그럽니다.”

“아닙니다. 알아봤습니다. 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께를 꽉 눌러 잡은 최서율을 가까이 끌어당긴 강무혁이 허리를 숙여 최서율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혹시라도 토끼가 놀라 기절하진 않을까 하는 뒤늦은 걱정을 담은 눈이었다.

뜨거운 숨이 비집고 나오는 선이 옅은 입술에 시선이 갔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부사장의 목울대가 꿀렁거리는 걸 본 최서율이 얼른 고개를 들고 한발 뒤로 물러났다.

“휴….”

“최서율 대리도 그렇게 입으니까 다른 사람 같네요.”

“부사장님도요. 정말 몰라볼 뻔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일단 타죠.”

운전석 문이 닫히자 쿵! 하고 육중한 차체가 흔들렸다. 아차! 손뼉을 마주치며 허둥거리는 최서율을 보며 막 출발한 차를 멈춘 강무혁이 고개를 비틀었다.

“선 과장님하고 만나서 박 부장님 차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부사장님이 저희 다 픽업하시는 겁니까?”

“뭐라고요?”

“아니… 여기로 직접 오셔서….”

충격적인 만남에 정신이 팔려 약속을 잠시 잊었던 최서율의 얼굴로 난감함이 스쳤다.

“내가 왜 다른 사람들을 픽업합니까.”

“그럼 저는 왜….”

차가 다시 천천히 출발했다.

“선 과장님한테 일이 있어 따로 출발한다고 말해두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서로를 마주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최서율의 물음은 그저 물음표로만 남아야 했다. 제가 오길 기다릴 선 과장과 박 부장에게 사정이 있어 따로 이동하겠다고 연락해 놓고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시트에 몸을 기댔다. 회사도, 집도, 부사장의 집도 아닌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차가 낯설었지만, 기분이 붕붕 떠올랐다.

별다른 대화 없이 차가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서율 대리는 같이 가고 싶었습니다.”

“…….”

“이런 이유로 대답이 충분합니까?”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최서율의 고개가 운전대를 잡은 강무혁을 향해 돌아갔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는 얼굴은 날카로움이 조금 둥그렇게 마모된 느낌도 들었고, 서른 중반에 접어든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어려 보이기도 했다.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을 고르던 최서율이 손끝으로 제 허벅지를 갉작거렸다. 왜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네. 충분합니다.”

중심을 한참이나 벗어나 기울어지기 시작한 감정이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남들보다 저를 먼저 챙기고 싶었다고 말하는 강무혁의 말에 가슴께가 간지럽고, 따뜻해진 걸 숨기고 싶지 않았다.

창밖으로 봄기운을 가득 머금은 산과 들이 스쳤다. 무채색의 겨울을 떠나보내고, 새 옷으로 단장하기 시작한 곳곳에 연둣빛 새순이 제 색을 뽐내고, 이르게 피어난 꽃들이 그 빈틈을 채우고 있었다. 빼곡하게 들어차는 설렘을 숨기지 못한 최서율이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안 그래도 좋았던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둥실거리는 기분을 표현하듯 작은 입이 쉬지 않고 조잘조잘 움직였다. 그 얘기를 듣고 있는 강무혁의 얼굴에도 봄과 같은 미소가 화사하게 스며들었다.

“여름이 시작할 무렵에 저희 마을에 큰 축제가 열립니다. 곳곳에 개천을 따라 등불도 밝혀져 있고, 먹을 것도 많고, 불꽃놀이도 하고, 풍등도 날립니다. 참 재밌어요. 부사장님은 계속 서울에 사셨으니까 그런 거 잘 모르시죠?”

“가끔 금강산에 계신 호랑이 어르신을 만나러 가면 강원도 겨울 축제를 다녀오곤 했습니다. 물론 어릴 적 얘기지만.”

“아, 저희는 추울 때보단 여름이 시작할 때.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을 때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유례는 잘 모릅니다. 하면 하나보다 하는 거지….”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까? 마을 원로들이 알아서 하는 일지.”

“네.”

마을을 가로지르는 냇가를 중심으로 어여쁜 모양의 색색 등불이 걸리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와 시골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진귀한 물건과 먹거리가 가득한 축제날이면 산에 살던 호랑이 어르신도 내려와 아직 어린 토끼들을 등에 태우고 평소에는 가기 힘든 산 아래 강가까지 가주곤 했었다.

지짐이 익어가는 소리와 신나는 음악 소리, 평소에는 얼굴 보기 힘들었던 어르신부터 갓 태어난 아기까지 모두 나와 함께 먹고 즐기는 시간이 1년 중 유일하게 기다리는 날이기도 했다.

“산 아래 강에 내려가면 강 건넛마을에 빛이 반짝반짝하는 게 그렇게 예뻐 보였습니다. 나도 언젠간 저기에 가야지. 저기에 가서 공부해야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마을을 넘어 서울까지 오게 되었지만. 어릴 때는 그곳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토끼 마을은 대체로 공부도 그곳에서 합니까?”

“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을 안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크기가 꽤 큰가 봅니다.”

“산마을치고는 꽤 큰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에 사는 토끼 수인들도 적은 편은 아니니까요.”

“하긴, 아이를 그렇게 많이 낳으면 마을에 사람도 많겠습니다.”

“네. 북적북적합니다.”

고향 생각이 나는지, 고향 마을 이야기에 신이 났는지 시트에 편하게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열심히 떠드는 최서율에게 맞장구쳐주는 강무혁의 눈빛이 따뜻하게 물들었다.

“축제날 등불 길을 함께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

“언젠가 저도 사랑하는 사람이랑 그 길을 걷는 게 소원입니다.”

“그 소원, 이룰 수 있겠습니까?”

“못 이룬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손으로 핸들을 고정해 잡은 강무혁의 다른 손이 조수석으로 넘어왔다. 재킷 자락을 손에 쥐고 꼼지락거리고 있던 최서율의 손등을 덮은 커다란 손은 무척 뜨거운 체온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손을 밀어내지 않고 힘줄이 불거진 손등을 내려 보고 있던 최서율이 손을 달싹였다.

맞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손가락이 강무혁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호랑이가 그 마을에 가서 등불 길을 걷는 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끝이 단단한 손가락이 동그랗게 오므려진 손을 하나씩 펴내고 손가락 사이사이를 밀고 들어왔다. 크기부터 차이가 나는 손이 움직이는 걸 바라보던 최서율이 입술을 살짝 벌리며 한숨 같은 탄성을 뱉어냈다.

“저랑… 같이 가실, 생각이십니까?”

“소원. 이루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최서율이 벌어졌던 입술을 닫고 얼른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손안에 가득한 호랑이의 체온이 가슴께까지 퍼져 심장을 뜨겁게 달구는 것 같았다. 중심을 벗어나 기울어졌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기울어진 곳에 중심을 만들고 있었다.

익숙한 실개천을 따라 늘어진 등불 사이를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호랑이는 지금 자기가 어떤 말을 했는지 자각하고 있는 걸까. 심장이 뛰어대는 만큼 맥박도 날뛰었다. 이 혼란함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통해 느껴지는 선명한 고동이 오히려 온전한 평온을 가져왔다. 익숙하지 않은 기류였다.

“같이 가면… 좋겠습니다.”

어색함과 긴장감에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강무혁이 얽힌 손가락으로 힘을 주었다. 부사장과 손을 잡고 있다니. 꿈속에서 헤매는 기분이었다. 귓가가 간지럽고, 이어지는 목덜미가 뜨거운데 어깨는 굳은 듯 미동도 못 하고 있었다.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최서율이 띵동. 내비게이션 화면에 뜬 안내를 보고 금세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다음 휴게소 앞으로 3.4km라는 안내가 떠올랐다.

“핫바 먹고 싶습니다.”

“핫바?”

“네. 휴게소에 가고 싶습니다.”

내비게이션을 확인한 강무혁이 차선을 바꿨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으니 그렇게 해주려는 것이었다. 잔뜩 들뜬 최서율이 맞잡은 손을 들썩거렸다.

“그렇게 좋습니까?”

“네. 오랜만이라 더 좋습니다.”

“가죠. 핫바 먹으러.”

잡은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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