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미 식사를 마치고 최서율을 관찰하고 있는 강무혁의 눈에 아직도 빨갛게 열이 올라있는 귀가 보였다. 만져보면 아주 뜨거울 것 같았다. 무심코 손을 뻗을 뻔한 걸 억지로 내리누르며 부러 허리를 쭉 펴고 팔짱을 꼈다. 얼른 먹으라고 독촉하는 줄 알았는지 최서율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천천히 드세요. 체하겠습니다.”
“천천히 먹고 있습니다.”
뻔한 거짓말을 하면서도 뭐가 그렇게 맛있는지 접시에 있는 나물을 한 움큼씩 집어 입에 밀어 넣는 최서율이었다. 대체로 향기 나는 나물은 좋아하지 않는 강무혁이 신기하다는 듯 최서율의 작은 입속으로 밀려들어 가는 나물을 바라보았다.
“부사장님, 지루하시면 먼저 나가 계셔도….”
“안 지루합니다.”
“네….”
결국 밥공기에 밥을 두어 술 남겨 놓고 숟가락을 내려놓은 최서율이 그래도 나물은 다 먹었다며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해진 배를 문지르다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강무혁이 눈이 마주치곤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거밖에 안 먹는데….”
“살이 찌는 게 신기하시겠죠. 요즘 운동을 못 해서 그렇습니다.”
“매번 핑계가 바뀌네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
비싼 밥을 워낙 많이 얻어먹어서 가격이 적당할 때 한번 돈을 내려고 했던 최서율이 이번에도 강무혁에게 선수를 빼앗겨 버렸다. 지갑도 꺼내 보지 못하고 제지당해 잔뜩 울상을 지었다.
“고마움은 나중에 크게 받겠습니다.”
“언제는 제 처지에 맞게 대접하면 받으신다고 하셨으면서….”
“최 대리님 월급이면 이거보다는 나은 걸 살 수 있을 텐데요?”
“네. 그럼 제 처지에 맞는 곳으로 찾아보겠습니다.”
“그러세요.”
핸드폰으로 계산을 마친 스마트한 호랑이가 너른 등을 내보이며 먼저 가게를 나섰다. 봄이 성큼 다가왔지만, 여전히 밤공기는 싸늘했다. 강무혁은 적당히 시원하다고 표현했고, 최서율은 아직 춥다고 느꼈다.
서울 시내를 벗어나니 하늘에 별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깊은 밤이 아니어서 별이 자세히 보일 리가 없는데도 최서율은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반짝이는 별들을 콕. 콕. 집어댔다.
“별 좋아합니까?”
“고향에서는 밤이면 하늘에서 별이 쏟아질 듯 많이, 잘 보였습니다. 서울에 처음 와서 별이 보이지 않아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별 보기 힘들긴 합니다.”
“부사장님 댁에서도 안 보입니까?”
“어떤 날은 보이고, 어떤 날은 안보입니다. 산 아래 도시에 불이 좀 잦아들어야 보이는 데 그러기 쉽지 않죠.”
“그렇죠… 나중에 저희 고향에 같이 가서 그 별을 같이 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자각하지도 못한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최서율이 고개를 바로 내리고 가만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강무혁과 눈을 마주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식당에서 빨갛게 달아올랐던 귀가 아직도 뜨거웠다. 흐릿한 입김이 나올 만큼 차가운 밤공기에 코트 깃을 여민 최서율이 식당에서 만들어 놓은 나무 울타리로 다가갔다.
“내가 최 대리님 고향에 가면 다들 기절하겠네요.”
“기절이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진지하게 묻는 말에 웃음이 터진 최서율이 볼이 동그랗게 뭉쳤다. 까만 밤하늘과 은은하게 켜둔 정원의 조명이 최서율의 얼굴만 유난히 밝게 비추는 것 같았다.
강무혁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최서율의 어깨 위로 둘렀다. 뜨거운 호랑이의 체온으로 데워진 코트가 몸을 감싸자 온몸으로 열기가 끼쳐 들었다. 괜찮다며 돌려줄 타이밍을 놓쳐버린 최서율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코트를 재빨리 잡았다.
“부사장님. 저한테 왜 이렇게 하시는지는… 아직도 비밀입니까?”
“알아내려고 노력도 안 하고 궁금해하기만 하는 겁니까? 직접 알아보려고 노력이라도 하세요.”
“노력… 하고 있습니다.”
노력하고 있다는 말에 고개를 기울인 강무혁이 말갛게 빛나고 있는 하얀 얼굴로 천천히 시선을 더듬었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코트를 잡아 앞으로 당겼다. 최서율의 몸이 아주 살짝 휘청였다. 개의치 않고 목까지 코트가 덮이게 정돈해준 강무혁이 저보다 한참이나 작고, 한참이나 여려 보이지만 또 그렇지만도 않은 토끼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의무감이라는 적당한 말로 위장했지만 감출 수 없는 애정이 호랑이의 눈빛을 타고 흘렀다.
이제는 그의 눈빛에도 익숙해진 듯 최서율이 평온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가는 이른 봄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바로 섰다. 아랫배 깊은 곳이 간질거리고, 가슴 어느 한구석이 살랑거렸다. 강무혁의 그런 눈빛을 받는 순간이면 어쩔 수 없이 살갗으로 열기가 모여들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이제까지와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별다른 말은 하지 못한 채 밤이 깊어져 갔다.
“이만 가죠. 감기 걸리겠습니다.”
“네.”
호랑이의 코트에 푹 잠긴 토끼에게 호랑이 냄새가 났다. 직접 먹이를 입에 넣은 것보다 더 커다란 포만감이 일어 기분이 좋아진 강무혁이 슬쩍 웃었다. 호랑이의 기분이 쑥 올라가기 무섭게 토끼의 가슴도 펄쩍펄쩍 널뛰어댔다.
* * *
매번 함께 퇴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공사다망한 부사장 강무혁이 최서율을 위해 그 시간을 온전히 비워두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오늘은 혼자 퇴근하라는 부사장의 메시지에 고개까지 끄덕이며 알겠다고, 괜찮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눈치 없이 앞으로 튀어나온 입술은 좀처럼 단속이 되질 않았다.
꿈질꿈질.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튀어나온 입을 하고는 강무혁이 아침에 몰래 책상 위에 올려둔 말린 과일을 찹찹. 맛있게도 먹어댔다.
“최 대리, 뭐 불만 있어? 그러다가 키보드 부서지겠어.”
“네? 제 키보드요?”
“네. 키보드가 말을 안 들어? 그래서 두들겨 패는 거야?”
“어휴, 패긴 뭘 패요. 부장님도 참… 하하하.”
웃음소리가 어색해서 옆자리에 앉은 유 대리의 표정도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최 대리님 무슨 일 있어요? 슬쩍 물어보는 말에 아무 일도 없다고 대답했지만, 기분이 왜 이렇게 엉망인지 설명하기 힘들었다.
입술이 옴쭉옴쭉.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난리가 났다. 제가 왜 이러지 싶어 이마를 짚었다가 다시 키보드를 두들겼다가 마우스가 잘 움직이는 것 같아 책상에 탁탁 내리치던 최서율이 결국 어느 한 외벽에 부딪혀 정신이 번쩍 돌아온 사람처럼 자리를 박차며 벌떡 일어났다.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왜 저래? 다들 후다닥 몸을 돌려 지원실을 빠져나가는 최서율의 등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여기가 학굔 줄 알겠다는 부장의 농담에 시원한 웃음이 터졌다. 방금 최서율의 행동이 수업 시간에 화장실 가는 고등학생 같은 모습이었는지 웃지 않고는 못 배기는 모양이었다.
이 자리의 누구도 화장실 갈 때 화장실 다녀오겠다는 보고는 하지 않는다. 덕분에 다들 한바탕 웃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최서율은 화장실 구석에 찌그러져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미쳤지. 미쳤어. 왜 이러냐 최서율. 정신 차려라.”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안전의 이유로 같이 퇴근하는 사이에 개인적인 일로 혼자 퇴근하게 되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섭섭할 일인가 싶었다. 그 와중에도 튀어나오는 입술이 야속했고, 다독여지지 않는 가슴이 기이한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화장실 칸막이에 이마를 박으며 몇 번이나 기합을 불어 넣듯 후! 후! 깊은숨을 내쉬며 겨우 마음을 달랬다. 더 자리를 비우고 있을 수 없어 재빨리 화장실 밖으로 나오던 최서율이 그 앞을 지나던 강무혁과 제대로 마주치며 걸음을 뚝. 하고 멈췄다.
“부, 부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최 대리님.”
“네.”
“박 부장님이 일 못 한다고 때립니까?”
“네?”
부사장의 뒤에 서 있던 윤 비서와 고 비서가 고개를 내밀어 최서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최서율보다 한 척이나 큰 강무혁이 허리를 굽혀 벌겋게 달아오른 이마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 하며 얼른 이마를 감싼 최서율이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을 피하듯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최서율이 물러난 만큼 한걸음 다가와 귓가에 얼굴을 붙이는 강무혁이었다.
“꿀밤 맞았습니까?”
“안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마는 왜 그럽니까.”
“그게….”
우물거리던 최서율이 부사장의 뒤에 서 있는 윤 비서와 고 비서의 눈치를 살폈다. 뒤쪽에 있는 두 사람을 신경 쓰는 최서율을 알고 허리를 바로 세운 강무혁이 커다란 손으로 반질거리는 하얀 이마를 쓱, 문질렀다.
“부딪치지 말고 조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가볍게 허리를 숙인 최서율을 지나친 세 사람이 먼저 부사장 지원실 안쪽으로 사라져갔다. 아침에 인사를 나눴으니 굳이 인사할 필요 없던 지원실 식구들이 뒤이어 등장한 최서율을 바라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최 대리님. 이마 왜 그래요?”
“제가 아까 너무 졸려서 정신을 못 차렸는데 화장실 가다가 부딪쳤어요.”
“어휴, 졸리면 좀 쉬어요. 사람 잡겠네.”
“네, 감사합니다.”
이마를 문지르며 자리에 앉은 최서율이 말린 과일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었다. 울컥, 다시 기분이 끓어올랐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절대 야근하지 말라는 부사장의 지시에 모두들 5시 50분부터 컴퓨터를 종료하고 코트를 걸쳐 입었다. 6시가 땡! 하면 밖으로 나갈 생각에 최서율도 얼른 코트를 걸쳐 입었다. 종일 기분이 물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웠지만, 막상 퇴근한다고 생각하니 또 발이 가벼운 것 같았다.
사춘기도 아니고 이렇게 기분이 널뛴단 말인가. 퇴근길 지옥철을 타고 갈 생각을 하니 아찔했지만 괜찮았다. 그가 약속한 당분간이 끝나면 어차피 다시 겪게 될 일이었다.
“최 대리님, 오랜만에 같이 가는 거 같네요?”
“그러게요. 과장님. 제가 요즘 바빴죠.”
같은 방향은 아니었지만, 같은 노선을 이용하는 선 과장과는 퇴근길 짝꿍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져야 하지만 회사 정문을 같이 나서고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며 이런저런 수다를 떤 지도 벌써 3년이었다.
“그러게요. 요즘 나 버려두고 말이야. 혼자만 바쁘지?”
“에이~ 그런 거 아니에요.”
넉살 좋게 웃으며 가방을 어깨에 걸쳐 맨 최서율이 얼른 가자며 발길을 재촉했다. 어느새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작은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퇴근길에도 해가 지지 않아 그 광경을 보게 되니 유난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 진짜 봄이 오려고 하나 봐요.”
“어휴. 최 대리도 봄 타령이야? 부장님 봄 타령에 봄이 얼른 왔다 가버렸으면 좋겠어.”
“과장님도 좋으시면서 괜히 그러시네.”
같이 일 한지 시간이 꽤 지나다 보니 선 과장이 말은 그렇게 해도 누구보다 봄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부장님이 남자치고는 유난히 수다스러운 면이 있어서 귀찮은 구석도 있었지만, 다른 팀과 다르게 많이 배려해주고,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알면서도 선 과장은 유난히 부장님의 쓸데없는 말을 대놓고 타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좋지~ 좋긴 한데. 아니 적당히 말해야지. 누군 뭐 봄이 안 왔으면 좋겠나? 세상에서 자기만 봄이 오길 바라는 사람처럼 그러잖아. 아주 지겨워 죽겠어.”
남들이 들으면 엄청 사이가 안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또 다른 부분에서는 죽이 척척 맞는 선 과장과 박 부장이었다. 손발이 잘 맞는 직장 동료로는 최고라 생각될 정도였다.
손까지 붕붕 흔들어가며 선 과장과 헤어지고 나니 갈 길이 구만리였다. 얼른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토끼가 되어 침대에 누워있고 싶었다. 토끼가 된다는 건 입고 있던 옷을 속옷까지 벗어 던지고 가장 태초의 상태가 되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휴식의 시간을 의미했다.
이제는 익숙해져 자유자재로 모습을 변하게도 하고 충분히 인내하고 참을 수도 있지만, 어릴 적 최서율은 인간의 모습으로는 단 6시간도 버티지 못하는 말썽꾸러기 토끼였다.
-이번 역은…
반가운 안내 방송에 맞춰 인파를 헤치고 나서다가 발을 밟혔다. 울컥.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발까지 밟히고 나니 절로 우는 소리가 나왔다.
“씨….”
물론 발을 밟은 사람을 찾아낼 수도 없었고, 찾아낸다고 해도 별다른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좋지 않을 뿐이었다. 발자국이 남은 구두를 손으로 대충 털어내고 걷는 데 편하게 귀가했던 짧은 시간에 왜 이렇게 빨리 익숙해져서는 제가 이 별것도 아닌 일에 울컥해야 하는지 화도 났다.
이 모든 게 부사장 때문이라도 탓을 돌리다가 다시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는 호랑이 생각에 조그만 머리통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오늘 생각을 너무 많이 한 거 같아. 얼른 가자.”
고개를 설설 저으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느리고,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