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당장 일어나라는 것처럼 바로 옆에 떡 버티고 서서 퇴근을 종용하는 강무혁의 눈치를 보다가 겨우 저장만 해놓고 자리를 정리한 최서율이 사무실을 나서며 우물거렸다. 제대로 저장한 건지 내일 경을 칠 일은 없는지 되짚어 보던 중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췄다.
대충 인사만 하고 가면 되겠다 싶어 돌아서던 최서율의 손목을 아프지 않게 잡은 강무혁이 매우 자연스럽게 문 앞에 서 있던 몸을 제 쪽으로 당겼다.
구두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최서율이 멀뚱한 눈으로 강무혁을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데려다주겠습니다.”
“아직, 지하철… 있습니다.”
“압니다.”
이미 문은 닫혔고 엘리베이터는 더 아래로 육중한 몸을 이동시키느라 바빴다. 본래 엘리베이터에서는 각자 문을 바라보고 서 있어야 마음이 편한 법인데 마주 보고 서 있으려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거기다가 입을 꾹 다물고 별다른 말도 없이 어딘지 모르게 흉흉한 기색을 뿜어내고 있는 강무혁은 최서율을 더욱 불편하게 했다.
“부사장님, 혹시….”
“네.”
“화나셨습니까?”
“…….”
대답 없는 얼굴을 보고 있는데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회장님의 지시를 대놓고 어겨서 화가 난 건지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화가 난 건지 알 수가 없어 이유 없이 가슴이 떨렸다. 강무혁이 호통치며 화를 내도 무섭고, 말없이 화가 났다는 걸 표출해내도 무서웠다. 그가 평소에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느껴지는 기운만으로 잔뜩 주눅 드는 것이었다.
손목을 놓아주지 않는 채 걷는 강무혁을 따라 걷느라 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놓아달라고 할 수 있었지만, 괜히 건드려 화를 돋우기 싫어 입을 다물었는데, 텅 빈 주차장에 세워진 강무혁의 차에 밀어 넣어지면서 기분이 조금 상해버렸다.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라고? 마지막까지 남아 혼자 일한 것도 생각해보면 무척 서러운 일인데 최고 상사라는 사람이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잔뜩 기분 나쁨을 표현하고 있으니 속에 없던 불길이 갑자기 치솟는 것 같았다.
“부사장님, 제가 잘 못 한 건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조용히 하고 집까지 가세요.”
“아니요. 말도 안 해주시고 화났다는 것만 표현하시면 제가 불편해서 어떻게 이 차를 타고 집에 가겠습니까? 저도 종일 일해서 피곤하고 힘듭니다. 부사장님의 이유도 없는 화를 감당할 만큼 여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차마 강무혁의 얼굴을 확인할 용기가 없어 정면만 바라보며 하고 싶던 말을 쏟아낸 최서율이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내릴 것처럼 두 손으로 가방끈을 꼭 쥐었다.
“이유가 왜 없습니까? 당장이라도 최서율 대리가 토끼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걸 처음에 한 약속이 있으니 참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면 눈치껏 사람들 따라서 퇴근했어야지. 이 시간까지 남아서 일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합니까?”
“…제가 사고 나는 걸 왜 부사장님이 걱정하십니까?”
괜한 짜증과 자존심에 말이 불쑥 튀어 나갔다. 대놓고 걱정된다는 걸 말하는 강무혁에게 너무 심했나 싶어 얼른 입을 합. 다문 최서율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납치 미수 사건의 피해자인 사원은 당분간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가 초식동물 수인이라 그런 일을 겪은 건지, 그냥 아무에게나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었던 건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모두가 예민하고, 조심하고 있긴 했다. 이만큼 수인 사원에 대한 복지가 좋은 범진그룹에서 일하면서 부사장씩이나 되는 상사가 특수한 상황에 놓인 저를 걱정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텐데 싶어 멋쩍은 마음이 밀려왔다.
“걱정하면 안 됩니까?”
“저만 특별히… 걱정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얻어걸린 거지….”
“특별히 걱정해줬으면 좋겠습니까?”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입술 끝이 간질거렸다. 애꿎은 입술만 만지작거리다가 그건 아닙니다. 딱 잘라 말해버렸다. 밀려드는 민망함은 머릿속을 마구 어지럽혀댔다.
“특별히 걱정됩니다.”
“왜… 요?”
물어 놓고 강무혁의 입술이 열리는 걸 차마 보지 못한 최서율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부사장의 차 안에서 풍기는 향긋한 내음에 숨이 턱턱 막히고 코끝이 답답했다.
“비밀입니다.”
하. 최서율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저랑 장난하십니까?”
“궁금하면 알아내려고 노력을 하던가 하세요.”
“부사장님.”
아무래도 이대로 넘기면 오히려 마음이 찜찜해서 안 될 것 같았다. 부사장의 특별히 걱정된다는 마음을 받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걱정된다는 이유로 화까지 받아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주의해 달라는 뜻을 담아 한마디 하려고 아예 몸을 돌린 최서율이 강무혁의 서늘한 눈과 마주하고는 벌어졌던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럴 때 특히 더, 너무 호랑이 같은 얼굴이 되는 그가 얄미울 지경이었다.
“당분간 퇴근 같이합시다. 어차피 우리 사무실에서 내가 제일 늦게 퇴근하니까 최서율 씨도 남들보다 일을 더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요. 싫습니다.”
“거절은 거절하겠습니다.”
남들보다 일을 더 하는 것도 싫었고 부사장의 선을 넘는 호의를 아무 이유 없이 받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런 최서율의 입장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이는 강무혁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던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 올랐다.
“앞으로 늦게까지 남아있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그럼 최서율 씨가 토끼라는 걸 지원실에 밝히겠습니다.”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최서율 씨의 안전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그래도 몇 번이나 부사장님 댁에 갔었고… 또… 우리가 한배를 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안전을 위해 그렇다고 말하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그게 맞는 방법일 수도 있었다. 부사장으로서 또 회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것도 이해했다. 하지만 제가 그동안 거짓말하고 무언갈 감췄다는 걸 이렇게 허무하게 밝히기 위해 그 고생을 하며 노력했던 건 아니었기에 당장 대답할 수 없었다.
최서율의 처지를 잘 이해하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공존하는 강무혁은 오히려 최서율을 혼란스럽게 했다.
“한배를 탔지. 그럼 승선원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돌보는 것도 의무 아니겠습니까?”
“부사장님이 선장입니까?”
“그럼 네가 선장 하든지.”
빤하게 바라보는 눈과 잠시 시선을 마주했던 최서율이 고개를 털어내듯 흔들었다.
“됐습니다. 부사장님이 선장 하십시오. 그렇지만 제게도 같은 일이 생기리란 법은….”
“없겠죠. 없을 거고, 없게 할 겁니다. 그러니 바꿀 생각 없습니다.”
“…….”
“원하는 대답 나올 때까지 못 내립니다.”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질문에는 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최서율이었지만, 회사에서 일어난 납치 미수 사건을 알고 내심 걱정하고, 긴장했던 건 사실이었다. 부사장실의 수인 사원을 제외하면 야근할 인원이 좁혀지는데 그중의 하나가 저일 테니까.
좁은 골목에 떡하니 서 있는 커다란 차에 갇힌 꼴이 된 최서율이 턱의 주름이 자글자글해질 때까지 입술을 쭉 내밀었다. 불만을 표현하는 표정을 보던 강무혁이 코웃음 쳤다.
“부사장님. 정말 치사할 때 있는 거 아십니까?”
“내가 그렇습니까? 처음 알았습니다.”
“네. 치사합니다. 호랑이가 이렇게 치사해도 되는 겁니까?”
“호랑이라고 치사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데 좀 치사하면 어떻습니까?”
“치….”
저도 모르게 잇새로 바람을 뿜어낸 최서율이 제가 뱉어낸 말에 놀라 입술을 손으로 꾹 눌렀다. 동그래진 눈을 바라본 강무혁이 분위기에 맞춰 참아보려고 노력하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그의 웃음소리에 최서율이 눈에 힘을 주며 눈동자를 굴렸다.
“내가 아주 편해졌나 봅니다?”
“그건 아니지만….”
“얼른 대답하고 들어가서 쉬세요.”
입술을 눌렀던 손으로 입술 끝을 만지작거리는 손을 직접 잡아 내린 강무혁이 조수석으로 성큼 다가왔다. 가까워지는 호랑이의 뜨거운 숨결에 놀란 최서율이 몸을 뒤로 물리며 히끅. 딸꾹질을 시작했다. 뒤통수가 유리창에 콩. 하는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대답.”
“끅! 그렇게… 히끅. 하겠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냄새였다. 신경을 자극하며 느껴지는 호랑이의 진한 기운에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천적의 기운을 거부한 최서율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두툼한 손끝이 여린 살갗에 닿았다. 투명한 눈물이 그 손끝에 예쁜 모양으로 맺혔다.
“울지 말고, 들어가서 쉬세요.”
“운 거 끅. 아닙니다. 흐읍.”
딸꾹질을 참아보려고 입을 틀어막은 최서율이 강력하게 운 게 아니란 걸 어필하듯 눈썹을 찌푸렸다. 깊게 패인 하얀 미간 사이를 쓱쓱. 투박한 손길로 대강 문지른 강무혁이 다시 운전석으로 몸을 물렸다.
최서율이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길게 숨을 내쉬곤 얼른 문을 열었다. 아직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도 같이 퇴근하는 거 잊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최서율의 대답이 아래로 쿡 처박히듯 늘어졌다.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은 강무혁이 꾸벅 인사한 최서율이 빌라 안으로 후다닥 달려들어 가는 걸 확인하고는 출발했다.
사건이 다 마무리된 게 아니었다. 이제 겨우 용의자의 신상이 확보된 단계였다.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 없었다. 토끼 수인은 도시에서 보기 힘든 존재였다. 그렇게 희귀한 존재가 회사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을 가지고 유난스럽게 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최서율이 토끼 수인인 걸 알게 된 이상 모른 척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너무 가까이서 일어난 사건이라 더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었고, 보호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이 일었다. 꼭 의무감이 아니더라도 자꾸만 최서율에게 눈길이 갔고, 마음이 쓰였다. 아무래도 신나서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토끼를 너무 많이 본 탓 같았다. 매우 과하게 신경이 예민해진 강무혁이 이마를 눌러 짚었다. 이래저래 요즘 최서율의 모든 것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퇴근만 같이하는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저녁도 같이 먹었고 어떤 날은 후식까지 빵빵하게 먹고 헤어지는 날도 있었다.
이제는 강무혁에게서 흘러나오는 호랑이 특유의 냄새도 익숙해졌는지 심장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무섭고, 두렵지 않았다. 일이 몰아치는 날에는 남들보다 조금 더 늦게 집에 갔고, 어떤 날은 정시에 퇴근해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너무 많이 얻어먹고 있다는 생각에 제가 사겠다고 말했다가 된통 무시당한 최서율은 이렇게 된 거 다 털어먹겠다고 다짐했지만, 워낙 배가 작아 쉽지 않았다.
강무혁은 종종 그렇게 적게 먹는데 왜 뱃살이 나왔냐고 놀려댔다. 최서율은 앉아서 일만 해서 그렇다고 받아치고 괜히 신경 쓰여 그날은 평소보다 더 적게 먹었다. 이제 놀리지 않을 테니 편하게 먹으라고 권하는 강무혁이었지만 그런다고 떨어진 입맛이 되살아나는 건 아니었다.
토끼는 적게, 자주 먹는 동물이었다. 최서율도 토끼라는 걸 증명하듯 종일 무언가를 입에 달고 다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강무혁은 언제부턴가 사람들 몰래 간식을 사다 나르기 시작했다. 타부서 회의에 참관했다가 돌아오거나, 점심시간에 우르르 빠져나가 사람이 없는 틈을 노려 최서율의 책상 구석에 올려놓았다.
덕분에 채소 스틱과 말린 과일, 견과류, 주스 등을 종일 먹었다. 왜 자꾸 이런 걸 주냐고 물으니 ‘그냥’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 무심한 말투와 표정에 최서율이 부사장의 심중을 파악하느라 며칠은 머리가 아팠더랬다. 그렇게 깊게 생각을 하다 보니 주겠다는데 먹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간식값이 줄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오늘은 뭘 주실까 기대하는 염치없는 마음도 생겨버렸다.
처음 입사했을 때 신입 주제에 사무실에서 대놓고 뭘 먹을 수 없어서 숨어서 먹다가 체했는데 그걸 안타깝게 여긴 박 부장이 그냥 편하게 먹으라고 말하고부터는 일의 효율을 높인다는 이유로 오독오독 열심히 먹어댔다. 지원실 식구들은 그냥 그런 사람인가보다 하고 생각했지, 그가 토끼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늘도 열심히 먹었습니까?”
“열심히 먹는 거 아닙니다. 그렇게 먹어야 버틸 수 있어서 먹는 겁니다.”
“압니다. 장난도 못 치겠네요.”
“오늘 사다 주신 채소 스틱… 맛있었습니다.”
“그걸 제일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네. 정말 맛있습니다.”
채소가 다 똑같은 채소인데 이상하게 부사장이 사다 주는 특정 브랜드의 다이어트 식품 중의 하나인 채소 스틱은 꿀맛이었다. 뭘 첨가했나 싶어서 찾아봤지만, 그냥 생채소일 뿐이었다.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책상에 올려져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입꼬리가 씰룩거려서 표정을 관리하느라 힘들었다.
“과일은 맛이 없습니까?”
“그것도… 엄청 맛있습니다.”
“그래요?”
“네.”
고개까지 끄덕이며 맛있다는 걸 설명하려고 조잘거리는 최서율의 얼굴에 드리운 함박웃음을 바라보던 강무혁이 소리 없이 웃었다. 분명히 소리 내지 않았는데 귀를 쫑긋한 최서율이 강무혁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