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64)

5.

“다행히 미수로 그쳤고, 경비업체에서 집까지 바래다줬다고 하던데, 회장님한테 보고가 들어가는 바람에 아침부터 발칵 뒤집혔어요.”

“출근하는데 경찰은 쫙 깔려있고, 납치될 뻔한 사원이 초식동물이었다고 해서 다들 긴장하고 있어요.”

“아, 네….”

범진그룹의 수장인 강진규 회장은 서울의 산을 지키는 호랑이 중의 호랑이라고 불리었다. 수도권 지역의 산을 지키는 산군 호랑이 가문의 수장으로 인간에게는 조금 냉정한 구석이 있지만, 수인 사원들에게는 유난히 따뜻한 사람이었으니 회사 직원이 아니어도 강진규 회장을 우러러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그의 회사 정문에서 일어난 수인 사원 납치 미수 사건은 당연히 회사를 발칵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으리라.

구태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회장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사원들은 이 일이 작은 사건으로 대충 덮고 일단락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아침부터 윤 비서님 전화 받고 어찌나 놀랐던지. 당분간 선 과장이랑 유 대리는 혼자 늦게까지 남지 않고, 야근하더라도 같이 퇴근해야 할 거 같네.”

박 부장의 표정이 심각했다. 일이 워낙 많다 보니 각 부서 회의에 참석하고 그 회의 내용을 정리해 부사장에게 전달하는 것만 해도 하루가 빠듯할 터였다.

“에이, 저는 남자고 개 수인인데 저까지 그럴 필요 있나요.”

“무슨 소리야. 납치될 뻔한 수인도 남자였다고 하던데. 그리고 그 납치범들이 늑대랑 삵이라는 소리가 있어. 위험해. 위험해.”

괜찮다는 듯이 말하는 유 대리의 등짝을 아프지 않게 툭툭 두드린 선 과장이 그래도 다 같이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 대화에 끼지 못한 최서율이 괜한 걱정에 손가락을 맞잡고 꾹꾹 주물렀다.

당장 손을 들고 저도 토끼라 당분간 야근은 어렵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럴 거였으면 벌써 예전에 솔직하게 말했을 텐데 인제 와서 솔직해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지도 못한 걱정이 가득 쌓이는 아침이었다.

각자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시작했다.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복도를 박차며 걷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 알기에 지원실은 긴장감으로 평소보다 더욱 조용했다. 부사장의 걸음 소리에는 화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수행비서 팀의 걸음에 묻은 다급함도 느껴졌다.

부사장 지원실 앞을 지나던 강무혁이 고개를 획 돌려 최서율을 바라보았고 그런 강무혁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친 최서율이 겁먹은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눈썹을 뚝 떨어트렸다.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낸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침부터 납치 미수 사건 얘기를 들었더니 표정이 쉽게 풀리질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최 대리가 선 과장과 유 대리를 걱정해서 그런다고 생각하겠지만 제게도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해 내내 얼굴이 그 모양일 수밖에 없었다. 그 얼굴을 강무혁에게 고스란히 들킨 것 같아 안 그래도 무거운 마음이 더 무거워진 최서율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윤 비서와 부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던 강무혁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을 열고 나왔다. 뒤따르던 윤 비서가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남겼고 대답도 없이 앞만 보고 성큼성큼 걷던 강무혁이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는 최서율을 바라보았다.

아주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시선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리던 최서율이 강무혁이 지나가고 나서야 떨리는 가슴께를 눌러댔다.

화가 난 것도 알겠고, 지금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도 알겠는데 왜 저렇게 저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제가 토끼인 걸 알면 조금이라도 더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봐주면 안 되는 걸까. 부사장의 마음을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그런데 그 눈빛이나 행동에 하나씩 반응하고 가슴 떨려 하는 제가 제일 이상했다.

다른 쪽으로 기우는 생각을 다잡았다. 그저 호랑이 수인이 토끼 수인을 정말 잡아먹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부사장이 호랑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했다며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질 뿐이었다.

* * *

건물 경비를 맡은 업체 대표와 지역 경찰서 서장까지 모두 모인 회장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범인을 당장 잡고 싶지만, 늑대 수인이라는 단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늑대 무리의 수장에게서는 무리에서 쫓겨난 무뢰배인 것 같다는 대답만 들은 상태였으니 회장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범진그룹 회장이 직접 불러 모은 이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느라 입이 굳게 닫힌 상태였다.

“다시는 우리 회사에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수사에 조금 더 힘을 싣겠다는 말과 경비를 강화하고 노력하겠다는 말밖에 없었다. 만족할 만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최선이라는 걸 알기에 사람들을 물린 강 회장이 이마를 짚었다.

“이러다 아버지부터 쓰러지시겠어요.”

“내가 이런 거로 쓰러질 위인으로 보이냐?”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조심하시라는 뜻이에요.”

성격 좋기로 유명한 강무혁의 형 강무선이 아버지인 회장을 달래듯 허허 웃으며 앞에 앉은 강무혁에게 눈짓했다.

“그래요. 아버지. 몸 생각도 하셔야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연 강무혁을 바라본 회장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나 아직 안 죽었다.”

“알아요. 알죠. 아침부터 그렇게 호통을 쳐댔는데 누가 모르겠습니까.”

“당분간 회사에 단 한 명도 야근시키지 마.”

“아버지, 저희가 애들 소꿉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야근은 불가피….”

“어허!”

강진규 회장의 호통 소리에 회장실이 울렸다.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울음은 늙었지만, 아직도 위용을 잃지 않은 산군 호랑이 수장의 그것이었다. 얼른 꼬리를 내린 두 아들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앞에 다가온 리조트 오픈 건을 생각하면 한 시라도 일을 쉬기는 힘들었다.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지만, 야근해야 할 정도로 일을 쌓아 놓는 건 상사의 무능력이고, 사원의 업무태만이라는 호된 가르침만 받은 두 형제였다.

당분간만이라도 업무시간 안에 모든 일을 해결하고 전 사원이 제시간에 퇴근하도록 하라는 지시는 업무전달을 통해 각 부서의 부장, 팀장에게 전달되었다. 임원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회장에게서 업무에 대한 지시가 내려오는 건 범진그룹이 생기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차 한잔하고 내려가라.”

“못 들었어? 야근 금지라는데 할 일이 산더미야.”

“생각은 딴 데 가 있는 거 같은데.”

“누가? 내가?”

“그래. 이 호랑이 새끼야.”

“듣는 호랑이 새끼 기분 나쁘게 말하네. 자기는 호랑이 아닌 줄.”

처음부터 생각이 딴 데 가 있던 게 맞아서 더욱 펄쩍 뛰는 강무혁이었다. 그렇다. 아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강무혁의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단박에 파악한 강무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을 듣기 위해 다가왔다.

그런 제 형을 가차 없이 밀어낸 강무혁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강무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비상계단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운동 좀 해라. 그러다가 산도 못 타는 늙은 호랑이 된다.”

“저 자식이.”

요즘 들어 무릎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형을 놀리듯 웃은 강무혁이 빠르게 비상계단을 밟았다. 내내 머릿속을 뛰노는 토끼의 얼굴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겁먹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아침의 최서율의 눈빛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당장 달려가 지원실에 최서율도 수인이니, 야근에서 제외하고, 퇴근길을 조심하도록 도와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비밀을 지켜주기로 한 조건이 있기 때문에 말을 바꾸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단정히 메어있던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강무혁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는 최서율을 확인하고는 지원실로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부사장의 등장으로 지원실 직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눈가를 풀지 못해 표정이 살벌하기 그지없었기에 그 얼굴을 바라보는 지원실 사원들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버렸다.

“박 부장님, 업무 연락 확인하셨습니까?”

“네. 지금 막 확인했습니다.”

“그렇군요. 회장님께서 직접 내린 지시니까 잘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선 과장님과 유 대리님은 당분간만이라도 특별히 조심하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멀뚱히 서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살피듯 바라보던 강무혁의 시선이 최서율에게 닿았다. 그 시선을 느낀 최서율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까만 동공이 강무혁의 눈빛에 따라 조금씩 흔들렸다. 정처 없이 흔들리던 동공이 다시 제 길을 찾아 강무혁의 눈과 온전히 마주했을 때, 갑자기 마음이 기우뚱 흔들렸다. 요동치며 섞여드는 여러 감정에 입술을 달싹거리던 최서율이 치밀어 오르는 이유 모를 뜨거운 덩어리를 삼키듯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깨물었다.

인사도 없이 돌아서는 강무혁의 등으로 눈꼬리가 축 처진 최서율의 시선이 길게 따라붙었다.

* * *

“최 대리님 어떡해요.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할 일이기도 하고…. 괜찮습니다.”

“회장님이 아시면 우리 다 잘리는 거 아니에요? 최 대리님 그냥 같이 가요.”

“며칠 동안 일찍 갔잖아요. 진짜 괜찮아요.”

억지로 등까지 떠밀어 보내버린 지원실 식구들이 사무실을 떠나고 나서야 한숨을 몰아쉰 최서율이 작은 손으로 얼굴을 열심히 문질렀다. 종일 쌓인 피로가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회장이 직접 내린 지시를 지키기 위해 며칠 동안 야근 없이 업무시간에 충분히 일했지만 결국 일이 쌓이고 말았다. 아이가 아파서 일찍 들어가야 한다는 부장을 먼저 보내놓고, 수인인 두 사람과 끝까지 남아 돕겠다는 막내 사원까지 보내놓고 나니 적막한 사무실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멋쩍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제가 수인인걸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으니 솔직하지 못한 대가라고 여기고 감내해야 했다. 손이 빠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이점을 이용해 얼른 끝내고 가야겠다며 아자! 아자! 허공에 외쳐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확인도 하지 못하고 있던 최서율이 똑똑. 벽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키보드를 쿵. 쳐내곤 고개를 돌렸다.

“최서율 씨. 나랑 싸우고 싶습니까?”

“부사장님?”

“회장님 지시가 우습습니까?”

“아닙니다. 일이 좀 남아서….”

“그래서 혼자 남았다?”

누가 봐도 그럴만한 상황이란 걸 모를 리 없는 강무혁이었다. 아침부터 아이가 아프다고 울상 짓고 있던 박 부장이야 일찍 퇴근할 줄 알고 있었고, 선 과장과 윤 대리가 수인인 걸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제시간에 퇴근했을 테고 최서율 성격에 막내 황유진 사원을 붙잡고 있을 리도 없었다.

“대충 끝났으면 퇴근합시다. 나도 지금 가는 길이니까.”

“부사장님 왜 올라오셨….”

리조트가 있는 곳을 시찰 갔던 강무혁이 당연히 퇴근했어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이 시간에 다시 회사로 돌아와 이만 가자고 말하는 게 의아했다. 마치 제가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들른 사람 같아 귀 뒤쪽이 간질거렸다.

“고 비서가 최서율 씨 혼자 사무실에 남아있다길래 왔습니다.”

“저… 때문에요?”

“네. 문제 있습니까?”

이번에는 목덜미가 간질거렸다. 귀 끝이 홧홧해져 뜨겁다 못해 떨어질 것 같았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어 한참 허둥거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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