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부사장 집을 방문하는 일에 제법 익숙해진 최서율은 이제 다람쥐 부부와도 안면을 텄고, 산에 사는 토끼와 사슴, 족제비, 너구리, 청설모와도 서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산의 동물들이 산군 호랑이 냄새를 묻히고 그와 걷는 토끼를 숨죽이고 훔쳐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최서율은 더 열심히 산을 뛰어다녔다. 성격대로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녔더니 다리가 아파 밤에는 찜질을 해야 할 정도였다. 무리했더니 잘 먹히지 않았던 고기도 아주 꿀맛인 요즘이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다행히 더 자주 가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재미를 느끼고 있었지만, 곧 오픈을 앞둔 리조트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주말에도 출근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최서율을 비롯한 부사장 지원실 식구들은 주말도 반납한 채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범진그룹에서 준비하고 있는 세 번째 리조트는 친환경을 앞세운 새로운 개념의 리조트였다. 인간과 수인, 동물까지 모두가 어우러져 자연을 만끽할 수 있도록 설계된 리조트는 부지 내의 모든 시설이 개인 빌라로 지어졌고, 그 안에서 레저스포츠와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으면서 주변 경관을 해치거나, 자연을 훼손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산군 호랑이 집안이 이끄는 기업답게 그런 우려의 목소리를 잠재울 만큼 자연 친화적인 리조트를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리조트 사업은 A부터 Z까지 부사장 강무혁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상반기 가장 중요한 사업이다. 이 사업을 통해 강무혁은 부사장으로서 대내외 입지를 충분히 다질 거라는 전망이 보고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회장과 사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부사장 지원실은 정신없이 굴려지고 있는 처지였다.
“밖에 꽃이 폈나?”
“아직 안 폈습니다.”
“그래? 봄인 거 같은데 맨날 회사에 있으니 잘 모르겠네.”
“점심 먹으러 가면서 나가는 데 뭐 그렇게 맨날 답답하세요.”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는 부장의 등으로 선 과장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부장의 옆에서 말을 거들던 윤 대리가 명확한 사실로 부장을 후려치는 선 과장을 보며 뜨악. 하는 표정을 한 채 자리에 앉았다.
홍보팀 회의에 참관했다 돌아오기 무섭게 업무에 복귀한 최서율도 그런 그들의 대화가 재밌다는 듯 소리 없이 웃었다.
“최 대리님도 피곤해 보여요.”
“네. 피곤하네요. 요즘은 꿈을 꿔도 리조트 관련된 꿈을 꾸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러게요. 이러다가 봄에 꽃구경 한 번 못하고 여름 오는 거 아닌지 몰라요.”
“여름 전에 리조트 오픈하니까. 꽃구경은 할 수 있겠죠.”
파티션 너머에서 고개를 쭉 내밀고 말하는 윤 대리에게 맞장구치던 최서율이 이번에는 눈이 접힐 정도로 웃으며 키득거렸다. 이런 시간도 없다면 회사 생활이 지긋지긋해서 진작에 때려치웠을 터였다. 어쩌다 보니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되어 그나마 마음만은 편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요즘 통 얼굴 보기 힘은 부사장을 떠올리면 괜히 입술이 좀스럽게 모였다.
뾰족하게 모인 입술을 오물거린 최서율이 토끼로 너른 마당과 산을 마음껏 뛰어다니던 제 모습을 떠올리며 구시렁거렸다.
“왜 이렇게 일이 많은지….”
일이 몰아치다 보니 집에 가면 겨우 씻고 잠들기 바빠 피로가 가시질 않았다. 풀 내음 가득한 곳에서 마음껏 뛰놀고 싶었다. 흙을 밟았던 일이 마치 꿈같이 느껴졌고,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리울 지경이었다.
이쯤 되니 오히려 사슴 수인인 선 과장이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가 어딜 가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를 포함해 부사장 지원실 식구들은 제가 수인인 걸 모르는데 그런 질문은 실례가 된다는 걸 알기에 묻지 못하고 생각만 하는 중이었다.
“오늘도 야근 각?”
“내일까지 보고드려야 하는 회의 내용이 있어서 저는 좀 더 하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또 윤 비서님한테 한 소리 듣지 말고 잘 정리해서 넘겨요. 나는 오늘은 여기까지.”
부장이 컴퓨터를 종료함과 동시에 모두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서로의 일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각자 바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틈이 날 때 얼른 퇴근해 쉬는 게 내일을 위해 더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나, 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하고 깊은 밤이 찾아올 무렵 어느 정도 정리를 끝낸 최서율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래도 어제보다 일찍 퇴근 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입사 초반에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남아있는 게 무서워 무조건 선배들과 함께 퇴근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이제는 혼자 있는 이 공간도 무섭지 않았다.
“이제 퇴근 합니까?”
“으악!”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니 덜 무서웠던 거지 이렇게 불쑥 들려오는 타인의 목소리에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던 건 아니었다.
코트를 걸쳐 입다 말고 소리를 지른 최서율의 몸이 뒤로 완전히 넘어갔다. 그대로 바닥에 볼품없이 넘어지기 딱 좋은 자세였는데 그 꼴을 면하고 안착한 곳은 세상에서 제일 낯설면서도 익숙한 부사장의 품이었다.
“괜찮습니까?”
“으허, 하… 네에… 네. 괜찮습니다.”
토끼는 아주 예민한 동물이었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 기절하거나, 작은 변화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그 특성을 그대로 타고 난 최서율은 콩알만 해진 심장이 뛰지 않고 멈춰버린 건 아닌지 걱정되어 제 가슴께를 꾹꾹 문질러 보았다. 다행히 심장은 멈추지 않고 콩콩 잘도 뛰고 있었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사람 민망하게.”
“기척도 없이 다가오셨는데 당연히 놀라죠.”
“토끼는 놀라면 죽을 수도 있다던데 조심해야겠네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토끼를 공부한 게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지 강무혁이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수려하게 빛나는 얼굴을 고개를 바짝 들어 구경하던 최서율이 지금 제가 기대고 있는 곳이 어딘지 눈치채곤 한 걸음 물러났다.
몸에 둘러져있던 강무혁의 기다란 팔이 스르륵, 풀렸다. 놀란 마음에 괜한 심통이 솟았다. 입술이 앞으로 조금 튀어나왔는데 혹시나 들킬까 싶어 얼른 안으로 말아 물었다.
“심통이 단단히 난 표정이네요.”
“아닙니다.”
“그래요?”
“네.”
삐죽,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입술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저를 놀라게 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다고 얼굴에 표출해내는 최서율을 바라보고 있는 강무혁의 입꼬리가 재밌다는 듯이 올라갔다. 그걸 미처 보지 못한 최서율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둘러 가방을 챙겨 들었다.
“부사장님도 이제 들어가십니까? 윤 비서님도 안 계시는데 혼자서?”
“네. 일이 좀 있어서 밖에 있다가 잠깐 들렀습니다.”
“아…. 그럼 전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최서율이 얼른 강무혁을 지나치려 몸을 틀었다.
“데려다주겠습니다.”
한사코 거절한다고 해도 밀려날 강무혁이 아니었다.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호랑이 앞에선 한낱 애교에 불과하다는 걸 이미 경험을 통해 배운 최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쩌억, 올라오는 하품을 숨기기 위해 옆으로 몸을 돌리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최서율이 눈꼬리 끝에 맺힌 눈물방울을 쓱쓱 닦아냈다.
“피곤합니까?”
“부사장님은 안 피곤하십니까? 저희보다 더 바쁘시잖아요.”
“피곤합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강무혁이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안 그래도 키가 큰 강무혁이 더 커다래지는 걸 보던 최서율이 강무혁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무섭게 생겼는데 참 잘 생겼다.
우뚝한 코는 어떻게 만들어졌길래 저렇게 크고, 단단해 보이는 걸까. 붉은 입술은 끝에서 끝이 매우 길었다. 토끼는 몰라도 다람쥐 한 마리는 그냥 들어갈 정도로 커 보이는 입이 매번 놀라웠다. 눈썹은 누군가 맨날 그려주는 것처럼 진하고, 두꺼웠는데 무척 수려했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을 즐기며 힐끔힐끔 부사장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가만히 있어도 부리부리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서늘하고 매서운 눈은 그가 호랑이라는 걸 단번에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였다. 그 모든 게 보는 이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너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이목구비가 신기해 하나씩 뜯어보던 최서율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집에서 보는 강무혁과 회사에서 보는 부사장 강무혁은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정장부터 깨끗하게 닦여진 구두, 반듯한 넥타이. 정확하게 그어진 가르마를 따라 올려붙여 둔 머리까지. 집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편한 옷과 흙 묻은 운동화.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머리카락. 길에서 마주치면 몰라보고 지나칠 정도로 다른 느낌이랄까….
회사의 그 누구도 모르는 강무혁의 편한 모습을 알고 있다는 게 갑자기 새삼스러워지고 신기해졌다. 게다가 회사에서는 일정한 선을 그어두고 적당히 예의 있으며, 적당히 다정하고, 적당히 까칠하고, 까다로운 느낌이라면 집과 산에서의 강무혁은 조금 더 편하고, 조금 더 따뜻하고, 조금 더…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최서율이 제 귓가를 살살 긁적였다. 그러면서도 강무혁을 훔쳐보는 눈을 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 전에 강무혁이 날카로운 눈매를 접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과 표정이었지만 피곤이 느껴졌다.
“…토끼라도 보여드릴까요?”
최서율이 가방을 잡고 있던 손가락을 통통 튕기며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유난히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는 모르지만, 부사장과 개인적인 시간을 몇 번 보냈다고 부사장이 친구처럼 느껴지는 지경에 이른 건지, 너무 피곤해서 앞뒤 분간을 못 하는 바보가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최서율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 강무혁이 엘리베이터의 벽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해보든지.”
맞받아치는 강무혁의 목소리에도 가벼운 장난기가 담겼다. 피곤함을 풀어주기 위해 토끼를 보여주겠다니. 그 생각 자체가 귀여워 당장이라도 엘리베이터 벽면을 부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어 길게 늘어진 입꼬리를 하고는 가만히 최서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눈을 맞추고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항상 최서율이 긴장하고 있던 탓에 분위기가 어색하고, 차가웠던 걸 생각하면 아주 유하고, 편한 공기가 가득 차올랐다.
아직 밤공기가 차가운 이른 봄, 한겨울에도 히터는 켜지 않는 강무혁이 추워할 최서율을 위해 직접 히터를 켜놓은 차의 공기만큼, 두 사람 사이에 맴돌던 차가웠던 기류가 따뜻하게 물드는 밤이었다.
* * *
지각을 간신히 면한 최서율이 종종걸음으로 눈앞에 보이는 회사 정문을 향해 속도를 올리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가장 늦게 퇴근했지만, 강무혁 덕에 편하게 귀가해서인지 푹 자고 일어났다고 늦장을 부리다가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버렸다. 사원증을 꺼내어 목에 거는데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정문 앞을 서성이는 여러 명의 경찰과 사옥 가드들의 심각한 표정이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해주었고, 1층 데스크의 안내원과 경비들의 표정에서도 심각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하는 최서율에게 쏠리는 시선도 느껴졌다.
“최 대리. 어제 늦게 갔어?”
“아주 늦지는 않았습니다. 한 8시쯤?”
“그래? 시간이 비슷하네.”
“뭐가 비슷해요?”
한층 풀어진 날씨에 맞춰 꺼내 입은 가벼운 봄 코트를 벗어 정리한 최서율이 얼른 무리 지어진 사람들 곁으로 다가갔다. 선수미 과장과 유재영 대리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고, 걱정으로 가득 찬 박경석 부장의 미간에는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다.
왜 그래? 하는 눈으로 황유진 사원을 바라보는데 황유진 사원이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궁금해서 저도 모르게 발을 구른 최서율이 얼른 알려달라는 듯이 선 과장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야근하고 퇴근하던 수인 사원이 납치될 뻔했다고 해요.”
“납치요?”
“네?!”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놀란 최서율과 황유진이 동시에 소리를 치듯 반문했다. 안 그래도 우렁찬 황유진 사원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 크게 울대는 통에 옆에서 덩달아 놀란 최서율이 한쪽 귀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가슴도 동시에 꾹 눌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