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64)

2.

“부사장님!”

무릎에 힘을 주고 뻘떡 일어났다. 제대로 서기도 전에 강무혁의 손에 잡혀 다시 앉혀졌지만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는 걸 보여주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최서율 씨가 그런 거랑은 거리가 멀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이런 말도 성추행에 속하는 건 알고 계시는 거죠?”

“기분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깍듯하고, 솔직하게 뱉은 사과가 얄미워 보일 정도였다. 몹시 기분이 상했지만, 완벽한 을의 처지에서 더 말을 얹었다간 제가 불리해진다는 걸 알기에 입을 닫았다. 최서율이 씩씩거리는 모습을 평온하게 웃는 낯으로 바라보는 강무혁은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얼굴 그 자체였다.

“내가 비밀로 해주면 나한테 뭘 해줄 수 있습니까?”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에게 무얼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최서율은 당장이라도 이마를 짚고 싶었다. 금전으로도 채울 수 없고, 적당한 선물로 대처할 수 있는 물음도 아니란 걸 알기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곤란함으로 물드는 얼굴을 보는 강무혁은 마치 아주 재밌는 장난감을 보는 듯 흥미로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이 갑자기 너무 얄미워 보여 당장이라도 뒷발로 걷어 차주고 싶어졌지만, 그 얄팍한 욕구에 인생을 걸 수 없으니 참았다.

“제가… 뭘 해드려야 합니까?”

“글쎄요?”

“부사장님은 저보다 가진 것도 많으신데 제가 뭘 해드려도 만족스럽지 않으실 텐데요.”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팔꿈치 짚고, 손등에 머리를 기댄 강무혁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돈이야 차고 넘치지.”

“그럼 저더러 뭘 어쩌라는 건지…!”

참고 있던 울분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오다가 쏙 들어갔다.

“뭘 해드려야 할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일이 바빠서…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부사장과 이런 실랑이를 계속할 수도 없었고, 더 있다가는 큰 실수를 하고 제 발로 회사를 나가야 하는 상황이 생길 것 같아 벌떡 일어난 최서율이 가볍게 인사하고 얼른 돌아서 문을 향해 걸었다.

거의 돌진하다시피 앞만 보고 걸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빠르게 걸었던 게 언제였나 생각될 정도로 급한 걸음이었다. 커다란 나무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순간 크릉. 범의 울음소리가 부사장실을 가득 메우고, 살짝 열렸던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등 뒤로 바짝 다가온 강무혁이 최서율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마치 닿을 듯 가까이 붙어왔다. 그의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범의 소리에 바짝 긴장한 작은 등이 부르르 떨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문고리를 꽉 붙잡고 떨리는 숨을 내쉴 때마다 어깨가 솟았다가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조금만 가까이 있어도 토끼인 게 느껴지는데. 그동안 몰랐던 게 아쉬울 지경입니다. 진작 알았더라면 더 빨리 써먹을 수 있었을 텐데요.”

“써먹다니요? 무, 무슨….”

“비밀로 해주겠습니다. 대신, 토끼로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네?!”

긴장감으로 팽팽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최서율이 몸을 반쯤 돌려 뒤에 선 강무혁과 눈을 맞췄다.

“무슨 말씀이시죠?”

“제대로 못 들었습니까? 토끼로 놀러 오라고 했습니다. 초대장이라도 써줘야 합니까?”

“토끼로 놀러 오라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토끼로 놀러 오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퇴근 후에 설명해주겠습니다. 이만 자리로 돌아가서 열심히 일하시죠. 최서율 대리님.”

닿을 듯 가까이 서 있던 강무혁이 옆으로 물러나 직접 문을 열고 굳어있는 최서율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별안간 문밖으로 떠밀려진 최서율이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부사장의 말을 곱씹느라 잠시 멍해졌다. 문이 열려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난 윤 비서와 고 비서가 둥그레진 눈으로 그런 최서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서율은 그 시선을 느끼곤 하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쏜살같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직접 부사장이 자리로 불렀으니 무슨 일이냐고 궁금해하는 동료들의 물음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엉망진창으로 하루를 보낸 최서율이 틈만 나면 제 머리를 잡아 뜯으며 시간을 보냈다. 토끼로 놀러 오라니. 초대장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부사장이 원하는 걸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종일 머리를 얼마나 쥐어뜯었는지 누가 보면 싸우고 온줄 알겠다고 놀리는 부장의 말에도 같이 웃지 못한 최서율이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울상이 되어갔다. 지금이라도 모르는 척 먼저 집에 갈까 생각하는 데 메시지가 들어왔다.

[오늘은 튀지 말고, 6시 10분 지하 2층에서 봅시다.]

귀신같은 호랑이 부사장의 메시지에 책상 위에 이마를 쿵 박아버린 최서율이 으앙. 소리를 내며 답답한 마음을 표출하듯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 * *

“맨날 채소만 먹는데 배는 왜 나온 겁니까?”

“부사장님, 제가 그런 말도 성추행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먹는 양도 적지 않습니까.”

“초식동물도 살찝니다. 그리고 저는 수인이라 고기도 잘 먹습니다.”

“그럼 이거도 먹어보세요. 아스파라거스만 먹이려고 여기로 온 거 아니니까.”

불편해서 못 먹겠다고 말할 수 없기에 접시에 올려진 고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금요일에 회식했던 레스토랑 음식도 매우 맛있었는데, 오늘 부사장이 데리고 온 레스토랑도 음식이 매우 맛있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고기가 입에 들어가기 무섭게 녹아버리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고향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맛이었다.

스테이크와 함께 나온 아스파라거스나 버섯, 채소들을 집어 먹던 최서율이 예쁘게 잘린 고기를 열심히 집어 먹었다. 먹고 체하더라도 남길 수는 없으니 먹어야 했다.

“잘 먹으니 보기 좋네요.”

“이 뱃살 유지하려면 이 정도는 먹어야 합니다.”

“앞에 말은 장난이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편하게 드세요.”

“네, 네-”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부사장이 어찌나 고기를 맛있게 먹는지 식사를 방해할 수 없어서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그는 호랑이답게 고기를 먹는 모습이 맛깔스러워 보였다. 제가 먹는 크기 세 배의 고기를 시켜놓고 큼직하게 잘라 덥석덥석 잘도 먹는 모습에 절로 침이 고일 정도였다. 거기다가 곁들여 나온 채소들도 어찌나 잘 먹는지 넋을 놓고 보게 만들어 저도 모르게 입이 아- 하고 벌어졌다.

“같은 고긴데 제 것이 더 맛있어 보입니까?”

“아, 아니요. 부사장님이 너무 맛있게 드셔서….”

“나야 육식동물이니까 당연히 고기를 좋아하지.”

커다란 입을 길게 늘이며 웃는 강무혁의 얼굴은 처음 보는 듯 낯선 얼굴이었다. 자주 웃고, 자주 다정하게 구는 부사장이었지만 저렇게 진심으로 웃는 얼굴은 3년 만에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부사장은 누구일까. 불편한 가운데 밀려드는 새삼스러운 기분에 괜히 고기를 폭폭 찔러보았다.

“그날은 감사했습니다. 정말…. 제가 사드리고 싶은데, 여긴 너무 비싸니까. 다음에 제 분수에 맞게 대접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고기를 한입에 넣은 강무혁이 소리도 없이 육즙이 터지는 고기를 씹으며 최서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마치 생고기를 씹고 있는 날 것의 호랑이 그 자체라 움찔, 어깨를 떨어버린 최서율이 민망한 듯 테이블보를 만지작거렸다.

“그래요. 다음에 최 대리 분수에 맞게 대접하세요. 생명의 은인인데 그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지.”

강무혁은 빗물에 코를 박고 낑낑거리고 있던 토끼를 떠올렸다. 물에 젖은 갈색 털을 손으로 꾹꾹 짜주고, 손수건으로 덮어 집으로 데려왔더랬다. 정신을 못 차리고 늘어져 있던 토끼가 드라이기가 돌아가는 소리에도 반응이 없어 한참 고생을 했었다.

축 늘어진 뱃살이 어찌나 귀여운지 그걸 손으로 몇 번이고 찔러봤다. 손을 가만히 둘 수가 없을 정도로 귀여운 털 뭉치가 몸이 따뜻해지고 나서야 귀를 쫑긋거리며 배에 닿아있던 손을 뒷발로 밀어내던 게 생각났다. 벨트 위에 볼록하게 나온 뱃살을 콕, 찔러보고 싶은 충동에 괜히 손에 쥔 포크만 빙글빙글 돌려대는 강무혁이었다.

“왜… 웃으십니까?”

“토끼인 최서율 씨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떠올라서 웃었습니다.”

디저트로 나온 따뜻한 차를 호로록 마시고 있던 최서율이 쿨럭. 기침했다. 강무혁이 저런. 중얼거리며 티슈를 한 장 내밀었다. 살다 살다 호랑이에게 귀엽다는 말을 들어보리라고 생각해보지 못했기에 괜히 부끄러워져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진짜 토끼의 모습으로 우리 집에 놀러 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그… 토끼의 모습으로 부사장님 댁에 오라는 말씀이신가요?”

“이해가 잘 안 됩니까?”

아무리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한 입장이라곤 하지만 수인으로서의 자존심까지 버린 건 아니었다. 알몸으로 밖을 뛰어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인 동물화 된 모습을 실수도 아닌 제 의지로 타인에게 보여야 한다니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부사장님, 제가….”

“서울의 중요한 산은 저희 집안에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 아는 얘기겠지만, 작은아버지께서 은퇴하시고 산을 받은 지 아직 5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산에 사는 동물이야 뻔하다고는 하지만 작은 동물이 주를 이루는데 모두들 오랫동안 돌봐주던 산군 호랑이가 떠나고 제가 온 걸 아직도 낯설어하는 눈칩니다.”

“아….”

서울과 경기도에 걸쳐있는 청계산은 강무혁이 서른 살이 되면서 물려받은 산이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현대에서 와서는 산군 호랑이가 하는 일은 인간들의 무분별한 개발을 막고 동물들이 동물답게 살아가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호랑이라는 존재는 동물들에게 최고 상위 포식자이지만 이제는 야생 호랑이는 없고, 산군 호랑이 수인만이 남아있기에 야생동물들은 호랑이와 가깝게 지내는 걸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고민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산을 지켜주던 산군 호랑이가 떠나고 새롭게 등장한 산군 호랑이와 작은 동물들이 친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노력해서 살피라는 작은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평일에도 일을 마치고 나면 호랑이의 모습으로 산을 둘러보지만, 강무혁이 등장하기 무섭게 모든 동물이 몸을 숨겼다.

산군 호랑이라는 타이틀에 큰 뜻이 있던 게 아니었던 강무혁은 작은 동물들의 삶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부사장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는 집안에서 능력을 인정받아야 했기에 고민이 쌓여갔다. 좋은 산군 호랑이가 회사도 이끈다는 어르신들의 확고한 믿음에 부응하고 싶었다.

“종종 마당에 놀러 오는 다람쥐 부부가 있는데…. 그들 말고는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서율 씨의 도움을 받아 동물들과 친해져 보려고 합니다. 이게 내가 비밀을 지켜주는 조건입니다.”

어느 날 굴러들어온 토끼가 동물들과 산군 호랑이 사이의 좋은 매개체가 되어줄 거라는 확신이 섰다. 주말 내내 최서율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대충 생각의 윤곽만 잡아 놓았는데 오늘 최서율을 보면서 완전히 생각을 굳혔다.

무슨 일이든 똑 부러지게 해내고 심성이 착한 최서율이라면 약점을 잡혀서 하게 된 일이라 할지라도 성심을 다해서 해줄 거란 믿음 때문이었다. 3년여의 세월 동안 함께 일했으니 그 정도의 믿음은 가질만했다.

“그 말씀은 제가 정말 토끼의 모습을 하고 부사장님과 잘 지내면 산에 사는 동물들이 부사장님을 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좀 터무니없긴 하겠지만 저도 좀 급한 상황이라 그렇습니다.”

최서율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부사장이 아닌 타인과 대화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처음 부사장의 집에서 눈을 떴을 때. 장식장에 있는 가족사진을 보고 놀라 기절할 뻔했던 날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전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빠르게 변하는 상황에 발맞춰 똑똑하게 굴고 싶지만, 머리가 그만큼 빠르게 움직여주질 않았다.

“산에 자주 갑니까?”

“아니요. 못 갑니다.”

“그럼 계속 그 모습으로 지냅니까?”

“집에서만… 토끼로 있습니다.”

높은 산을 단숨에 뛰어올라 달렸던 때도 있었다. 종종 고향 집에 가면 그렇게 뛰어다니곤 하지만 일이 바빠 고향에 가지 못한지도 2년이 되었다. 꼭 산이 아니더라도 흙과 풀을 밟으며 뛰놀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가득했다. 최서율이 결심한 듯, 강무혁과 바로 눈을 맞췄다.

“비밀, 꼭 지켜주시는 거죠.”

“물론입니다.”

산 중턱에 있는 부사장의 집에서, 산에서 사는 작은 동물과 유대관계를 위해 토끼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위험하지도 않을뿐더러 알몸으로 집에 돌아올 일도 없을 것이다.

운동장처럼 넓은 마당에 잘 손질된 잔디도 신발이 아닌 토끼 발로 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 코끝에 풀 냄새가 풍긴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하겠습니다. 간결한 문장으로 제안을 승낙한 최서율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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