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수인은 인간보다는 영물에 가까웠다고 전해진다.
산을 지켰고, 대지를 채웠고, 바다를 다스리고, 하늘을 살폈다.
인간은 그런 수인을 두려워했다. 또한 배척했고, 동시에 그들을 숭배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인간과 수인의 경계도 서서히 허물어졌다. 인간과 수인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줄기에서 태어난 이들을 중심으로 같은 터에 나라를 만들고, 공존의 삶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완전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역사의 흐름 속에 수많은 위인을 배출해냈고, 각자의 자리에서 그렇게 살았고, 존재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과 수인 간에는 종족 번식이 불가했기에 그들이 완전히 합쳐질 수는 없었다.
점차 번식욕이 강한 인간의 수는 늘어났고, 수인은 반대로 서서히 줄어들었다.
수인은 점점 개체가 줄어드는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진화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임신이 가능한 수컷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임신이 가능한 수컷은 어느 무리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수인은 그들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돌연변이로 규정했다.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쏟아지는 멸시와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그들은 점점 사라져가거나, 존재를 감추기 시작했다.
오직 ‘토끼’만이 임신이 가능한 수컷을 보호했다. 다른 수인 종족들은 그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수인 사회는 그들에게 ‘음란하고 난잡한 토끼’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인간의 세계에도, 수인의 세계에도 섞일 수 없었던 그들은 어느 순간엔가 도시에서 자취를 감췄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깊은 산골을 지키던 산군 호랑이 족의 아래에 들어가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그들을 지키는 호랑이가 내막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멸종되어 보기 힘든 호랑이지만, 호랑이 족은 여전히 백두대간을 호령하고 각 지역의 산을 지키며 살아갔다. 그들은 사회에서 명망 받는 집안의 자제로 손꼽히며 때로는 기업가로 때로는 정치인으로 사회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존재했다.
그 위엄을 등에 업은 그들의 기운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자와 같았다.
이 이야기는 서울의 산을 지키는 산군 호랑이 집안의 호랑이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진화한 토끼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