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8화
278화 – 여운이 남는 엔딩은 명작에서 나온다
#1
신이 사라지는 모습은 허무했다.
여기까지 했던 준비들의 결실.
그것이 바로 지금 눈앞에서 일어났다.
열심히 준비한 것 치고는 꽤 허무했다.
“이걸로 끝났네요.”
결국, 드레젠 본인이 쫓았던 복수는 무척 허무했다.
실체도 없었던 이들.
멸망했던 세계의 잔재.
아직 끝나지 않은 성좌의 전쟁.
‘그래도, 내가 할 일은 끝이지.’
조금 더 일을 해야 하는 건 성좌들이고, 나머지는 이제 평화롭게 살 일만 남았다.
드레젠은 위를 올려다봤다.
저게, 성좌들의 본거지이자 세계를 여행한다던 함선.
스텔라와 헬라, 자신을 세르바투스라고 밝힌 이가 드레젠에게 다가왔다.
“고마워. 덕분에 일이 잘 풀렸어.”
“저도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 해야 할 일을 너무 잘 해줘서 이렇게 된 거지.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기고, 이제 평화롭게 살라고.”
스텔라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해야만 하는 일을 잘 못 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았다.
그렇기에 드레젠은 칭송받아 마땅한 영웅이었다.
헬라가 그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앞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종종 이곳에 들러 주거라. 그대에겐 유흥이나 마찬가지이니.”
“그 정도야 어렵지 않죠.”
“그리고 또 원하는 바가 있으면 말하라.”
드레젠은 전장을 수습하고 있는 니오베를 바라봤다.
지금 모두가 보고 있는 상태에서 말하기엔 어려운 일이겠지.
그는 홀로 있을 때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런 창조주님께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아서요.”
“알겠다. 그럼 우리는 나머지 일을 수습하러 가 보겠다. 고생했다. 용사.”
헬라와 스텔라가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두 여인이 사라지고 나서, 거인이 다가왔다.
세르바투스.
신의 대리인이자, 성좌 군단의 참모라고 불리는 자였다.
[고생했네. 그대의 무용담은 앞으로도 영영 기록될 것이네.]
“당신이 아니었다면 다 죽었을 겁니다.”
[그 괴물을 꾀어내는 데 많은 에러 상황이 있었지. 그대 덕분에 잘 해결할 수 있었소.]
“왜…… 그렇게 쉽게 나온 걸까요?”
세르바투스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매우 간단한 답이었다.
[우리가 도망갈 곳을 완전히 차단했으니까. 저번에는 같은 방식으로 실패했지. 이번에는 그대가 있어 성공했고.]
과거의 실패를 바로잡는 것.
그건 드레젠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좌들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들을 하지만, 그들도 예측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다.
[우리 역시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었소. 더욱이 감사하는 바이오. 언제든지, 우리는 그대를 환영하오.]
세르바투스가 고개를 숙이고 함선을 쳐다봤다.
그의 몸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 뒤로, 성좌의 함선이 유유히 떠났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승리의 함성이 메아리친 것도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드디어 엔딩이었다.
#2
“후우…….”
방송이 끝났다.
강일은 조용히 캡슐 밖으로 나왔다.
자세를 잡자마자, 묵직한 무언가가 그를 껴안았다.
큰 눈망울에서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있는 하이디엔이었다.
“……고생하셨어요. 정말.”
“아냐. 너야말로 고생했어.”
강일은 후련함과 섭섭함을 동시에 느꼈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이었다.
이른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을, 왜 이렇게 질질 끌었는지…….
어쨌든, 이제 강일의 모험은 끝났다.
“축하해요. 오늘은 진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그러자.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잠시만.”
강일은 스마트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원하는 바를 말할 차례였다.
회포를 풀고,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나니 소중한 사람이 생각났다.
마지막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자에 대한 생각이었다.
“여보세요?”
“오, 고생했다. 축하해.”
“아닙니다. 덕분에 이길 수 있었어요.”
“다들 잘해준 덕분이지. 헬라가 말한 건 기억하고 있어?”
강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진짜 보상을 받을 차례였다.
“니오베를 보고 싶습니다. 그녀도 이제 저희 세계에 적응해야 할 것 같거든요.”
“반려와의 맹세를 지키려는 점, 아주 좋아. 바로 조치해 줄 테니까, 잠시 기다려.”
“감사합니다. 이곳은 안전한 게 맞습니까?”
“그럼, 당연하지. 덕분에 일이 정말 잘 풀렸어.”
안도감이 들었다.
성좌들이 지켜준다는 말처럼 안도감이 드는 단어가 또 어디에 있을까.
이곳 사람들은 꿈에도 모를 일이겠지.
강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현의 목소리가 명쾌하게 들렸다.
“너랑 나랑은 통하는 게 있나 보네. 나도 두 명이랑 알콩달콩 잘 살고 있는데.”
“공식적으로 결혼은 못 할 것 같네요. 이쪽 법은 아시잖아요.”
“하하! 그건 알아서 하라고. 어쨌든, 이제 행복한 시간 보내기 바란다.”
“감사합니다.”
짧은 통화가 끝났다.
하이디엔이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제게도 언니가 생기는 건가요?”
“언니라니…… 뭐, 틀린 말은 아니네.”
“마법에 관한 얘기도 많이 할 수 있을 거고, 제가 이곳에서 많은 걸 가르쳐드릴 수 있을 거예요. 정말 기대되는데요?”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빛이 강일을 웃음 짓게 만들었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 환한 빛이 강일의 방을 가득 채웠다.
녹색 빛의 머리칼이 찬란하게 빛나는 여인, 니오베가 빛 속에서 걸어 나왔다.
“……여긴?”
“니오베. 저 알아보겠어요?”
“……그대, 나의 반려인가?”
생김새는 달랐지만, 니오베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자신과 함께 했던 드레젠이라는 것을.
외모는 달라도, 영혼의 향기는 똑같았으니까.
그녀가 강일의 얼굴을 매만졌다.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잊은 채, 그의 모든 것을 한참이나 느꼈다.
“이건, 이건 놀랍구나. 다른 차원이라니.”
“원한다면 저랑 이곳에서 쭉 살 수 있어요.”
“나는 반려가 있는 곳에 있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여긴…… 마나가 없구나.”
“맞아요.”
그녀는 휙휙 고개를 돌리며 신기한 듯, 주변을 바라봤다.
니오베가 보지 못했던 문물들이 가득했다.
그녀가 만 년 가까이 살아왔음에도 보지 못했던 것들.
자신의 반려는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구나.
“그대는…….”
“어서 오세요. 위대하신 자. 하이디엔이라고 합니다.”
“영혼은 같지만 다르구나. 어찌 이런 일이…….”
하이디엔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강일의 시간여행은 사실 게임이었으며, 진짜 브락시아에서 온 생존자가 바로 자신, 하이디엔이었다고.
그 말을 모두 들은 니오베의 두 눈이 붉게 변했다.
이 두 사람, 그리고 생존자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준비했는지 가슴 깊이 느껴졌으니까.
“내가, 그대들 덕분에 이렇게 살아있구나. 정말 고맙다. 나의 은인들이여.”
“여기서 살아도 되고, 게임 안에서 살아도 됩니다. 편한 대로 하게 해 드릴게요.”
“무얼, 나는 반려가 있는 곳에서 행복하게 살 것이다. 이런 문명이야 배우면 되겠지.”
드래곤에게 있어 배움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강일과 눈을 마주치며 생긋 웃었다.
전 세계 어느 사람과 견주어도 아름답다는 소리가 나올 외모.
그런 미녀가 강일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잠시 혼자 있어 주어라. 난 생존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괜찮겠지?”
“그렇게 해요. 이제 진짜 끝났으니까.”
“고맙구나.”
두 사람은 잠시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기 전, 강일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의 몸에 있는 부정한 것들은 그 다음에 해결해 주마.”
“언니라고 부를까요?”
“언니? 좋다.”
“이곳은 지구라는 곳인데…….”
하이디엔은 조잘조잘 떠들며 밖으로 나갔다.
강일은 드디어 해피 엔딩이라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가 원했던 것들은 모두 이뤘다.
정상적인 신체, 어머니의 돌아옴.
영웅들에 대한 복수와 브락시아의 구원.
‘그 세계는 그렇게 흘러가겠지.’
언젠가 한 번 놀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이제 진짜 게임 스트리머로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
#3
드레젠의 클리어.
세이브 더 브락시아의 엔딩은 그렇게 세상에 공개됐다.
더 놀라운 것은, 똑같은 엔딩이 하나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이디엔은 ‘세이브 더 브락시아’는 놀라운 게임이라고 기사를 냈다.
[드레젠이 다른 게임 하는 것도 보고 싶다.]
그 압도적인 피지컬로 다른 게임을 하면 어떤 모습일까?
사람들의 궁금증이 조금씩 커져갔다.
드레젠은 본격적으로 코치 생활과 스트리머를 병행해 나가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드레젠이라는 스트리머를 찾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나저나, 우리도 캡슐을 통하면 그쪽으로 갈 수 있나요?”
“그건 형님이 해결해준다고 그랬으니까.”
문제 될 건 없었다.
강일도 보고 싶었다.
크리스, 샤페론, 그밖에 다른 이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가 구원한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흘러갈 것인지.
#에필로그
하시스 성.
평화로운 곳에서도 검을 휘두르는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오늘도 열심히 성주 수업을 받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상대는 놀랍게도, 비슷한 또래의 사내아이였다.
“후우-!”
“더 강하게 휘둘러야지!”
따악-!
목검을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공방을 한참 주고받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일격을 날렸다.
콰직-!
마나를 견디지 못한 목검이 부러지는 것으로 마무리된 결투.
멀쩡한 목검을 들고 있는 크리스가 사내아이를 보며 말했다.
“많이 늘었네, 류.”
“헤헤, 고마워.”
“준비하던 건, 잘 되고 있어?”
“응, 당분간 못 올 거야.”
소년의 이름은 류.
본명은 류현진.
요즘 강일이 새롭게 키우고 있는 아이였다.
성장력이 뛰어나. 크리스는 자주 대련을 해 주는 중이었다.
“더 강해져서 오겠지?”
“응. 꼭 합격하고 올게.”
현진은 밝게 미소를 지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제 회백색의 세계로 변하지 않는 하늘.
크리스는 흘러가는 시간을 음미했다.
‘당신이 만든 평화, 이젠 저희가 지키겠습니다.’
이제 드레젠은 성주가 아니었다.
그는 용사로서, 제국의 대공이 되었으니까.
이 하시스 성은, 성역으로 선포되었다.
많은 이들이 하시스 성으로 와, 우뚝 선 드레젠의 동상에 기도를 올렸다.
“가끔 놀러 오신다고 했으니,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야겠지.”
크리스는 자신의 성을 개명했다.
이제 그는 스카이 워커 가문이 아닌, 케이드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다.
“도련님! 식사 시간입니다!”
“응, 갈게!”
“엘프 로드께서도 오셨어요-!”
“알았어!”
이제 모든 종족들이 하시스 성에 모이는 것은 딱히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모든 종족의 대통합.
드레젠은 그걸 이룬 진정한 영웅이었으니까.
크리스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다시 와, 이곳을 보며 웃음을 지을 때까지.
‘꼭 보여줘야지.’
그가 성장한 모습을 보고 웃어주는 그 날까지.
케이드 공작가의 크리스는 그렇게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가 경쾌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평화로운 케이드 가문의 어느 날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