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7화
277화 – 마무리는 역시 성좌가
#1
괴리감이라고 해야 하나.
드레젠은 검을 부딪칠 때마다 실망감만 쌓여갔다.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도 참 묘했다.
검성이라고 불렸던, 검에 있어서는 실력자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게 진짜 실력이냐? 진짜야?”
콰앙-!
굉음 속에서도 똑똑히 들리는 드레젠의 목소리에, 검성은 아무런 말 없이 칙칙한 검을 내질렀다.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검술.
오러를 이용해 적당히 흘리면 그뿐인 검술.
드레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묘한 기술로 검성의 검을 받아냈다.
“쥐새끼 같은 놈.”
“설마, 이것도 기억 못 하는 건 아니겠지?”
방금 드레젠이 날린 기술은 검성이 주로 쓰던 검술의 일부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드레젠은 검성의 전투 방법도 모조리 익히고 있었다.
그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숨 쉬는 방법, 걷는 방법 하나까지 연구했었다.
이렇게까지 보여줬는데, 검성은 그저 검은 기운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진짜는 아니었는가.’
“크르르-.”
베리드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놈들이 진짜 영웅은 아니란 걸 알았다.
육체는 그대로일지 몰라도, 알맹이에 문제가 있었으니까.
드래곤 로드가 마법으로 철혈의 방패를 튕겨내며 드레젠에게 물었다.
“진짜 이놈들이 네 동료였다고?”
“그랬는데……예전만 못하군.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다 나오지 않은 녀석이 한 짓이겠지.”
“그럼 일단 빨리 끝내야겠군. 화신체가 이 정도라면,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는데?”
그러게.
드레젠은 안도와 찝찝함, 그리고 섭섭함을 동시에 느꼈다.
진짜 무서운 정이 미운 정이라고 했던가.
숱한 전장을 돌아다니고, 수많은 사건을 해결했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것이 많았는데-.
걱정한 것도 많았는데.
“……얼른 끝내자고.”
성좌의 날개가 더욱 세차게 빛을 뿜었다.
죽음의 왕이 내뿜는 어둠의 힘을 단숨에 불살라 먹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어차피 이놈들만 죽이면 전황은 뒤집어질 수가 없었다.
홀로 만 명 이상의 전력을 가진 드래곤들이 많았으니까.
“이만 끝내자.”
전성기 수준의 적도 아닌 걸 가지고 시간을 질질 끌 필요가 있을까?
드레젠은 천마검법의 최 후반부 초식을 준비했다.
과거, 천마는 이 일격으로 우주에서 노니는 적을 모조리 없애버렸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에 버금가는 위력이 있겠지.
드레젠이 자세를 잡았다.
이건, 정말로 간단한 초식이었다.
-베라. 그게 끝이다.
-예?
-베라고!
-그러니까, 뭘 벱니까?
-뭐든!
그때의 천마가 지었던 표정이 아직도 생각났다.
뭐든 베라는 말.
그렇게, 자신은 세상도 베어봤다는 말.
그 정도 경지까지 가려면 어느 깨달음을 얻어야 할까?
사실, 드레젠은 그렇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난 평범한 일반인이었는걸. 그래서인지, 세상을 벨 수는 없었지.’
중단세.
가장 평범한 자세이면서, 가장 완벽한 자세라고 평가받는 모습.
검의 기본은 이 중단세고, 검의 끝도 이 중단세였다.
그 대단하던 천마 역시, 이 중단세에서 모든 걸 끝냈다.
“피하면 살 수 있을 거다.”
“내가…피할……것 같은가?”
이젠 말도 제대로 못 하네.
드레젠은 피식 웃으면서 가장 강한 초식을 꺼냈다.
그의 필살기라고도 할 수 있는 검술이었다.
천마검법 · 종장 · 천마절세
(天魔劍法) · (終章) ·(天魔絶世)
천마는 이 초식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네가 진정으로 끊어버리고 싶은 것을 베는 마음을 담아’라고.
지금 드레젠이 끊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가 눈을 반쯤 감으며 찰나의 순간으로 빠져들었다.
‘이제 과거는 잊자고.’
과거의 잔재로 이렇게 고생해 왔었다.
이제는 모든 걸 털어놓을 때가 되었지.
이 게임의 엔딩을 보고 나면, 다른 게임도 손대볼까?
아니면 수많은 역사를 비틀어 볼까?
‘어느 쪽이든 좋다.’
나름 최종 보스가 이렇게 허무할 줄은 몰랐지만, 뭐 어떤가.
자신이 너무 준비를 잘 한 탓이겠지.
이 일격이 어떤 일격인지도 모르는 놈들에게, 추억 보정 따위는 없었다.
그저 게임의 엔딩을 보기 위해 치워야 할 장애물일 뿐.
“죽어라.”
중단세에서 시작한, 세로 베기.
가로든 세로든, 일반 베기만 하면 된다던 천마의 말에 충실한, 베기였다.
그의 오러, 신성력, 마력과 흑뢰.
모든 정수가 담겨 있는 일격이었다.
괜히 화려하기만 하다면 필살기로서의 의미가 없었다.
“크륵-?”
뭐가 어떻게 됐는지도 인지하지 못했을 일격.
검성은 검을 들어 막아보려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그의 신경은 반으로 갈라져 있었으니까.
흑뢰를 담아 마나의 간섭을 차단했다.
신성력을 담아 내부에서부터 장기를 폭발시켰다.
오러를 담아 깔끔하게 절단했고, 마력으로 모든 것을 파괴했다.
“크르륵-!”
“이젠 내 기억에서 꺼져라.”
휘릭-.
드레젠은 미련 없이 검을 빙글 돌려, 다른 이를 쳐다봤다.
검성과의 전투는 이제 끝났다.
남은 것은 드래곤을 상대로 쩔쩔매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커억-!”
검성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반으로 갈라졌다.
황금색 가루가 조금 흩날렸다.
털썩 쓰러진 그의 몸뚱이는 안쪽이 전부 기계로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시체를 다시 살려낸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드레젠은 쯧, 하고 혀를 찼다.
[크아악-!]
소리는 또 하나가 들렸다.
저 뒤에 있는 게이트.
그것이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드레젠은 히죽 웃었다.
그가 노린 것은 검성 하나가 아니었으니까.
“네놈이 영웅들을 모조리 죽이고 개조했구만?”
[이- 건방진 인간 놈이!]
콰앙-!
반으로 갈라진 게이트를 부수고 나온 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세계였다.
거대한 손 하나가 게이트를 찢어발겼다.
갈라져 가는 게이트 너머, 압도적으로 거대한 기계의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저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던가.”
고대부터 내려왔던 기계들의 여왕이자, 무엇이든 이뤄준다는 신.
그것이 바로 베리드의 진짜 지도자였던 것.
드레젠은 직감했다.
저건,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녀석이었으니까.
그가 가진 최고의 기술로도 작은 상처 하나 내는 것이 끝이었으니까.
“와, 저걸 어떻게 이기지?”
“저건-.”
“반려여, 저건 우리도 감당하지 못한다.!”
드래곤은 신이 아니었다.
성좌에 버금가는 존재일 뿐이지, 두 존재가 성좌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타난 거대한 기계는 신이었다.
베리드의 모든 것을 통솔하는 기계의 성좌.
“저건……우리 스케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요?”
-와 저게 찐보스였어?
-저거 어떡하지?
-ㅋㅋㅋㅋ 엌ㅋㅋ 막판에 엎어지나?
-지렸다;;
연출 하나는 정말 미친 수준이었다.
드레젠은 검을 늘어뜨리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지켜봤다.
쿠웅-!
공기 전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가 등장하는 것만으로 전황이 뒤바뀌어버렸다.
“이건 이벤트 보스가 아닐까요?”
드레젠이 문득,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좌가 이 정도까지 예상하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드레젠 본인도 저 뒤에 뭔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데, 성좌라고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버러지 같은 놈들. 모조리 내 병사로 바꿔 주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움직였다.
단 한 발자국.
저 발이 땅에 닿으면, 이곳에 있는 모든 존재는 속절없이 당하고 말겠지.
마지막 화신체가 설마, 그들의 성좌였을 줄이야.
드레젠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우리의 구원자가 왔네요.”
파직-!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발을 디디려던 거대한 기계의 신 역시 위를 쳐다봤다.
아득히 높은 상공.
태양을 가릴 정도의 거대한 전함이 그곳에 등장했다.
황금색 전함.
“후-.”
“드디어 왔구만.”
“저, 저건-.”
니오베가 전율했다.
드래곤 로드 역시 싸우다 말고 무릎을 꿇었다.
하늘에서 유성이 쏟아져 내렸다.
콰아아앙-!
실은 유성처럼 보이는 마나 폭격이었지만.
[네가 혼자 있기만을 기다렸지.]
중후한 음성이 들렸다.
한 줄기 광선과 함께 등장한 자.
체격은 거인보다 조금 더 작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런-!]
[뻔한 함정에 걸리다니, 베리드의 운명도 다했구나.]
이름 모를 성좌가 손을 뻗자, 마나의 폭풍이 기계의 신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노출되는 순간 온몸이 갈가리 찢길 위력이었다.
기술이 아니라, 재해급의 마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성좌는, 자신의 뒤에 있는 일반 병사들을 철저하게 보호했다.
“허…….”
드레젠이 계획한 전투는 여기까지였다.
창조주 이현이 말하길, 꼭꼭 숨어있는 존재 하나만 끌어내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임무를 충실히 완성했다.
“……세르바투스.”
드래곤 로드가 중얼거렸다.
어느새 두 명의 영웅은 폭풍에 휘말려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 허무하고도 허무한 최후였다.
창조주의 보좌관 세르바투스.
마나 폭풍을 다루며, 거대한 함선을 총괄하는 보좌관.
칼루스, 데이몬과 더불어 최강의 성좌 중 하나를 차지한 자였다.
“세르바투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아버지가 종종 얘기해 준 적이 있었지. 마나 폭풍을 다루며, 세계 하나를 능히 멸망케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함선을 지휘하는 자라고.”
“…….”
대체 저런 힘을 가진 성좌들이 왜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걸까?
드레젠은 멍하니 거대한 기계가 산산이 조각나는 것을 구경했다.
역시, 마무리는 성좌가 해야지.
귀찮고 힘든 일은 이제 질색이었다.
“그럼, 이제 끝난 건가?”
“적어도 이곳, 브락시아에서의 일은 그렇겠지.”
드래곤 로드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발적인 전투가 아니라, 단 한 번의 전투로 끝난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저런 병력이 대륙 곳곳으로 흩어져 게릴라 전을 펼친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했으니까.
[으아아아아아아-! 무의 추종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거짓된 창조주를 언젠가아악-!]
[무엄하군. 그 거짓된 창조주를 무서워해, 수 세기 동안 이렇게 숨어만 있던 주제에.]
한 손으로 마나 폭풍을 제어하고, 다른 한 손은 인류를 보호하는 모습.
그건 진정 성좌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세르바투스에 이어, 두 명의 성좌가 또 내려왔다.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두 존재, 스텔라와 헬라였다.
“우리가 도와줄까?”
[괜찮소.]
“빨리 끝내고 전쟁을 마무리해야지.”
[그런 것이라면-.]
헬라의 뒤엔 거대한 사신이.
스텔라는 본체인 푸른 눈의 드래곤으로 변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살아날 가능성?
그런 건 아예 없었다.
드레젠이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잘 가라.”
이젠 정말 끝이었다.
정말 환하게 웃을 일만 남았다.
진짜, 모든 것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