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6화
276화 – 손절
#1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자가 게이트 너머에서 등장했다.
한 명이 아니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자.
낡아빠진 수도복을 입은 자.
그리고 거대한 방패를 든 자가 나타났다.
“드디어 만났구나.”
압도적인 기운이 주변을 잠식했다.
무수히 많은 언데드와 마족보다 여기, 드레젠과 마주한 네 명의 기운이 훨씬 거대했다.
-나왔다
-두두둥장!
-드디어;;
-보.스.등.장!
“진짜 너냐?”
“허허, 이것 참.”
네 사람 중, 방패를 든 자와 낡은 수도복을 입은 자가 말했다.
드레젠은 검을 빙글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없는 동안 잘 지냈냐.”
“하-! 배신자 주제에 낯짝도 두껍지.”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 한때 검성이라고 불렸던 자가 입을 열었다.
드레젠은 뻔뻔하게 웃었다.
누가 누구더러 나쁜 자들이라는 건지.
그가 검성을 향해 말했다.
“여전히 그 열등감이 남아있구나. 너희들이 왜 고향을 지키지 못했는지 알겠는데?”
“이 자식이…….”
“그래 봤자, 넌 배신자다. 네 이름을 저주하며 죽어간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거대한 방패를 든 자, 로버트가 말했다.
그는 못 막을 것이 없던 자였다.
심지어 드래곤 브레스조차 일순간이었지만 막아냈었다.
그 위용은 능히 영웅이라 불리기 충분했다.
“그래, 날 뭐라고 부르든 상관은 없다. 결국, 늬들이 능력이 부족해 외부인을 끌어들였던 거니까.”
이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
하지만, 이놈들은 생각보다 더 뻔뻔한 놈들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전 국민이 보고 있는 이 방송에서, 정말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기껏 영웅 행세를 하게 해줬더니, 돌아오는 게 배신이었나? 배은망덕한 놈.”
“우리 꼴을 봐라. 덕분에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이 됐잖나.”
“한심하고 저열하군. 넌 항상 그런 식이었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뒤에 가서는 홀로 용사인 척하는-.”
-ㅋㅋㅋㅋㅋ;;
-ㅈㄴ뻔뻔한 거 보소
-와 쟤네들은 진짜 답이 없다
-진짜 어마어마한 또라이들이네;;
저 정도는 되어야 최종 보스지.
뻔뻔함의 극치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 때문일까, 드레젠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역겨운 건 여전하구만. 많은 사람들이 그러더라. 너희들이 그러니까 세상을 못 지켰다고. 헛소리하지 말고 덤벼.”
드레젠의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힘.
압도적인 마나와 기이한 힘으로 무장한 네 명의 영웅.
그들이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드레젠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래, 주절주절 말만 해봤자 무의미하겠지.”
엣 생각이 났다.
드레젠은 훈련을 빙자한 구타를 당했었다.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명목하에 그들이 했던 짓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슬금슬금 대련을 피했다.
왜?
‘내가 어느 정도 강해지고 난 후엔, 대련보단 실전 위주로 굴렸지.’
멍청한 놈들.
그때부터는 자신들을 동료라며, 그렇기에 서로를 굳게 믿고 있어야 한다며 가스라이팅을 시전했다.
말이 되는 일인가.
당연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격분해야 맞다고 하겠지.
그렇지만, 드레젠은 그러지 않았다.
‘완성되고 나서야 녀석들을 죽이려고 했었지.’
그 힘에 거의 근접했을 때, 하이디엔의 도움을 받아 더 나은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이들은 그저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열등감 덩어리일 뿐이었다.
용사의 힘이 점점 커지는 것을 견제하는 한심한 귀족들.
드레젠에게, 이 네 명의 영웅들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않았다.
“너희들은 내가 어디까지 강해졌는지 알지 못하겠지.”
“흥, 네놈은 우리 넷 중 둘의 합공을 견뎌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드레젠은 더 말하지 않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부딪쳐도 상관없었다.
이 전장이 그에겐 무한한 마나의 샘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파지지지직-!
전신이 떨리며 드레젠의 전력이 개방되었다.
“정신 바짝 차려라.”
“흥-!”
철혈의 방패라고 불린 자.
방패의 타닉스라고 불렸던 자가 전진했다.
그의 방패는 단순히 막기만 하는 무구가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 단단한 방패였으며, 그 무엇보다 날카로운 대검이 되기도 했다.
방패 하나로 마스터를 뛰어넘은 자.
그가 바로 타닉스였다.
“셋이라-.”
죽은 자들의 왕은 공중으로 떠올랐다.
언데드의 군단을 부리며 전황을 뒤집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의 지팡이가 휘둘러지자, 디바인 오러가 내뿜는 빛이 사그라들었다.
어둠과 빛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관계.
‘역시 더 강해졌군.’
오러로 인해 받은 축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메시아라이저]
[히트라이저]
[랜더마이저]
[성좌의 축복]
[성좌의 포옹]
[스트랭스]
[헤이스트]
[…….]
항상 홀로 싸웠던 전장이 아니다.
일정한 버프만 있었던 그때가 아니다.
지금 드레젠은, 능히 성좌와도 겨룰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콰아아아아아-!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제법 실력이 늘었는데?”
“확실히 더 좋은 육체를 얻었군!”
검성과 철혈이 나직이 감탄했다.
드레젠은 무려 영웅 셋과 함께 싸우는 중이었다.
스텔라의 날개가 펼쳐지고, 무지막지한 공방이 오갔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퍼포먼스네;;
-3 대 1을 저렇게 압도한다고?
-이야;; 진짜 버프가 무섭긴 하구나.
직접 전장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이 감탄을 쏟아냈다.
역시 영화나 애니메이션보다 훨씬 정교하고 실감 나는 액션이었다.
오죽하면 이제부터 판타지 영화 촬영에 드는 비용이 대폭 삭감될 것이란 얘기가 나오겠는가.
그야말로 차세대를 이끌어갈 기술력이었다.
‘역시, 힘이 더 강해졌군. 그러니까 빨리 끝낸다.’
드레젠의 검이 강하게 움직였다.
방패를 뚫어내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우그러뜨리거나, 아니면 거대한 말뚝을 박아넣어 뚫어내던가.
드레젠의 검은 말뚝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콰직-!
“크읏-! 이런 힘이!”
“무려 드래곤과 성좌의 버프다 이 자식아-!”
콰아앙-!
드레젠이 발로 검 끝자락을 후려치자, 그 단단하던 방패에 쩍-! 하고 금이 갔다.
철혈의 방패는 당연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방패를 이렇게 뚫어낸다고?
대체 얼마만큼의 버프 마법을 받은 것인가.
‘어둠의 힘을 이 정도까지 밀어낼 수 있다니.’
쿠드드득-.
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방패의 균열이 점점 커졌다.
결국, 철혈의 방패는 순식간에 방패를 잃었다.
방패가 산산이 부서지는 사이, 다른 영웅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감히 무기를 버려!?”
“실로 오만방자하군!”
갓 핸드라고 불렸던 이.
그리고 검성.
두 명이 들이닥치며 건방지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드레젠은 쏟아지는 공격을 의연하게 받아쳤다.
콰앙-!
거대한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이걸 받아낸다고?’
‘대체 무슨-.’
갓 핸드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기술을 고스란히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그 기술의 이해도가 훨씬 높았다.
두 주먹에 찬란하게 맺힌 오러가 현란하게 움직였다.
무투가들의 정수가 그대로 녹아있는 움직임.
-싸움 수준 실화냐
-저 정도면 현실에서 덤벼도 못 이기겠는데?
-엌ㅋㅋㅋ 그거 맞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움직이지?
‘힘은 옛날보다 훨씬 낫군. 하지만-.’
“너희, 내 특성을 잊어버렸냐?”
“그런 쓰레기 같은 몸으로 특성을 운운해?”
검성이 검을 내질렀다.
칠흑 같은 어둠을 근본으로 한 광파가 몰아쳤다.
거스를 수 없는 물리력에 드레젠이 훌쩍 날아가 버렸다.
드레젠은 훨훨 날아가면서도 검을 회수했다.
“흠-.”
좌아아악-!
자세를 고쳐 잡으며 드레젠은 생각했다.
뭔가 이상한데.
녀석들은 이렇게 무식한 놈들이 아니었다.
힘만 무식하게 강한 녀석들이 아니었는데-.
‘더미인가? 아니면 뭔가 녀석들을 변하게 한 걸까?’
이렇게까지 쉬울 줄은 몰랐다.
기술적으로 너무 차이가 컸다.
그가 기억하고 있던 영웅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너프가 됐네요. 전회차에선 이렇게 무식한 놈들이 아니었는데.”
-??
-?
-저게요?
-우린 너프한 놈들도 못 이기겄는데
-ㅋㅋㅋㅋㅋ 기만 보소
그게 사실인 걸 어떡하냐.
드레젠은 쓴웃음을 삼키며 검을 움켜잡았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갓 헨드를 보니,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저 녀석들, 신체를 개조했다.
“몸을 개조했군요. 베리드의 기술력이 인간보다 떨어지진 않을 텐데.”
“뭐라 중얼거리는 것이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인지, 득달같이 달려드는 세 명의 영웅.
흘끔, 뒤를 돌아보니 언데드 군단을 맞이해서 그럭저럭 잘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전선이 유지된다는 건, 그럭저럭 균형이 팽팽하다는 뜻이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막아내는 쪽이 더 유리하게 흘러가야 전선이 유지되는 것.
‘저쪽은 잘 하고 있으니-.’
나만 잘 처신하면 되겠군.
착 감기는 검을 잡고 다시.
“내가 도와줘야겠군.”
“흠.”
죽음의 왕이 흑마법을 휘둘렀다.
쿠웅-!
데스 나이트 몇 구가 영웅들을 지원하기 위해 나타났다.
드레젠은 푸욱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조금 긴장했었다.
“너희 좀 추하다는 생각은 안 드나?”
“뭐라고?”
“고고한 영웅들은 어디 가고 떼거리로 몰려드는 놈들만 남았는지.”
“…….”
영웅들은 말이 없었다.
드레젠에게 그들의 처리를 이해해달라는 말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은 곧이어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다.
“전성기때에 비하면 실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겠지. 아직도 관절부가 삐걱거리거든.”
허허 웃으며 갓 헨드가 웃었다.
곧바로 그는 격렬한 분노를 드러냈다.
“너 때문에-! 우리는 한 번 죽어야만 했다! 너만 있었어도 우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대현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거냐?”
“대현자? 그는 네가 없는 대륙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했지.”
“진짜 멍청한 놈들이었군.”
드레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딴 놈들이랑 더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5년 동안 망가졌듯, 영웅들도 수많은 시간 동안 천천히 망가진 것.
드레젠은 그들의 마지막을 얼른 장식하고 싶었다.
“니오베, 로드. 이제 끝내죠.”
[그러지.]
콰아아앙-!
하늘에서 뚝 떨어진 두 명의 드래곤.
영웅들의 표정이 변했다.
“재미없군. 이렇게 시시하게 끝낼 전쟁이었으면 드래곤이 개입하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내가 보기엔…….”
드레젠은 영웅들의 어깨너머, 게이트를 바라봤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진짜 적은, 아직 게이트 너머에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화신체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