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3화
273화 – 오랜만이다. 친우여
#1
아르게논 대륙의 구릉지.
먼 옛날, 제국의 땅이었을 이곳은 처참한 폐허가 되어버렸다.
이유인즉슨, 레드릭이라는 드래곤의 강림 때문이었다.
몬스터를 이끌고 나타난 레드릭은 제국의 한 귀퉁이를 구릉지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전설이 시작된 곳…… 이던가.’
드레젠은 절벽의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조금 있으면 이 지긋지긋한 인연들이 모두 끝나겠지.
그가 시야 한쪽 끝에 있는 마나 보유량을 바라봤다.
‘350만. 그럭저럭 모았군.’
이 정도가 딱 절반 수준이었다.
전성기의 절반.
하지만 상관없었다.
진짜 브락시아와는 달리, 이곳에 있는 마나는 아무리 끌어다 써도 문제 될 것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성좌의 힘까지 받았으니, 전력은 비슷하겠지.
‘오래도 걸렸네.’
허송세월, 그것도 죽어가는 상태로 5년을 버렸다.
그에게 ‘세이브 더 브락시아’는 구원이었다.
구원받은 자는, 구원한 자에게 빚을 갚아야겠지.
그리고-.
‘죗값을 치러야 할 거다. 옛 영웅들.’
일곱 영웅들이라고 떠받들었더니, 베리드에게 영혼을 내놓은 이들.
네 명의 영웅들을 떠올렸다.
검성.
철혈의 방패.
갓 헨드.
데스킹.
‘다시 생각해도 오글거리네.’
전성기 이상의 힘을 가진 네 명을 상대해야 했다.
드래곤이 있다지만, 녀석들의 힘도 만만치 않겠지.
그는 네 명 중, 딱 한 명만을 노리고 있었다.
“저는 검성을 상대해야겠군요.”
-그거 좋다.
-거의 최종 보스네
-크, 벌써 앤딩이라니 ㅜㅜ
-이건 다회차 해도 진짜 재밌을듯ㅋㅋㅋ
-아니면 또 다른 스토리가 있겠지!
오늘, 최다 시청자가 몰렸다.
무려 25만 명.
그만큼 최종 보스라는 타이틀은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이쪽이 메인 스트림이라고 공공연하게 밝힌 바 있었다.
시청자들은 게임이 아닌, 영화를 보는 것처럼 몰입했다.
“저기들 오네요.”
뿌우-.
희미한 나팔 소리가 들렸다.
하늘에서 점들이 보였다.
편대를 갖추고 날아오는 그리폰, 그리고 반대편에는 와이번들이었다.
두 생명체는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한쪽엔 지하 수맥이 있습니다. 제 하수인 중 하나는 그곳을 통해 올라올 겁니다.”
-전장 잘 골랐네.
-ㅇㅈㅇㅈ
-아 두근두근!
-진짜 팝콘 먹으면서 못 보는 게 한이닼ㅋㅋㅋ
현실에서 캡슐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새삼 지구가 얼마나 살기 편한 곳인지 느꼈다.
구우우-.
공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조만간 베리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할 거다.
‘웨이브처럼 쏟아져 나오겠지.’
그건 온전히 이쪽의 힘만으로 막아야 했다.
성좌들은 더 큰 전쟁을 치른다고 했으니.
그 끝엔 화신체들이 있을 거다.
병력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작은 항구에 초대형 군함이 빽빽하게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저 깃발은…… 제국? 주변 왕국 깃발들도 보입니다!”
유일한 항구에 정박하려는 배들 때문에, 혼선이 빚어졌다.
그때 나선 것이 바로 서펜트의 왕, 카라탁스였다.
그녀는 인근 몬스터를 모조리 끌어들였다.
[조심조심 타라. 비싼 몸이니까.]
[비늘에 흠집이라도 냈다간, 바다에 빠뜨릴 줄 알아라.]
웬만한 군함보다 큰 카라탁스와 그녀의 부하들이 다리 역할을 해 주었다.
병사들은 벌벌 떨면서도 차근차근 육지로 상륙했다.
십만 명? 백만 명?
수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병력이었다.
“……저게 다 뭐래.”
“어디 정복 전쟁이라도 하러 가나?”
용병들이 수군거렸다.
때마침 숲에서 아더와 스테판이 도착했다.
“벌써 도착한 모양이네.”
“그, 그러게. 진짜 도착했네. 전쟁이라니-.”
드레젠을 만나고 온 두 사람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병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진짜 전쟁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도 용병들을 모아야 해.”
“어, 얼른 가자.”
두 사람은 일단 은자디아를 찾아갔다.
일단 용병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은자디아밖에 없었으니까.
노병은 이미 용병들을 모아두고 있었다.
그 역시 전쟁의 기운을 감지했으니까.
“영감님. 드레젠 님이었어요.”
“으응-? 뭐가 말인가.”
“숲에 있던 괴인. 드레젠 님이었어요. 전쟁에 대비해서 준비할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은자디아가 작게 감탄했다.
대체 그자는 어디까지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용병들 역시 드레젠에게 빚을 진 상태였다.
한 번쯤은 갚아줘야 하지 않겠는가.
“잘 됐군. 그분이라면, 우리도 도울 가치가 있을 테니까.”
“다른 이들이 도우려 할까요?”
“이미 우리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네.”
둥둥 떠다니는 마법사들.
질서 정연하게 행군하는 중장보병.
다양한 몬스터를 테이밍한 기병.
적당한 위치를 찾고 있는 레인저.
가장 선두에서, 병력들을 지휘하고 있는 기사들까지.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뜻이 있는 자들은 미력하나마 도움을 주러 가겠네. 그것이 용병들의 도리 아니겠는가.”
“맞아요. 우리 두 사람이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맞지?”
“어? 어어-. 맞아. 조금 무섭긴 하지만…….”
그 소심하던 스테판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은혜는 은혜로, 원수는 원수로.
용병들의 신조 중 하나였다.
은자디아가 용병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제하진 않겠다만, 우리는 위험한 곳에 지원을 갈 생각이다. 따라올 자들만 따라와라.”
“-저는 가겠슴다.”
“저도요! 전쟁이라니, 살아남기만 하면 영웅 대접받는 거 아닙니까?”
와하하 웃는 소리가 들렸다.
경박스러운 웃음에, 병사들 몇몇이 그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긴장된 얼굴로 행군을 지속했다.
용병들 역시 대다수가 참가하겠다고 밝혔다.
“그럼, 우리도 지휘권자에게 허락을 받지.”
“나에게 말하면 됩니다. 전사.”
어느새, 그들 가까이에 와 있던 자가 있었다.
이번에 황제에게 총사령관직을 수여받은 3황자였다.
“브레이시스 제국의 3황자입니다. 이번 전투의 사령관직을 맡고 있습니다.”
“3황자님? 귀한 분이 어째서 여기에…….”
“드레젠 경을 만나셨다니, 얘기가 빠르겠군요.”
3황자는 은자디아에게 아주 간략한 브리핑을 해 주었다.
모든 상황을 듣고 난 용병들은 아주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목숨을 버리는 상황일 수도 있었다.
적은,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지원군이 많으면 좋긴 하겠지만,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우리도 가겠습니다.”
용병 한 명이 나섰다.
그는 드레젠의 이름과 세상의 운명이 걸린 일이라는 걸 언급했다.
“그런 중요한 일에, 저희 용병들이 끼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겁니다. 반드시.”
“……알겠네. 그대의 뜻을 존중하지. 그럼, 바로 합류하시오.”
3황자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말에 올랐다.
그의 옆에는 호위기사이자 기사단장인 벤시가 자리했다.
그녀는 은자디아에게 표식을 하나 내주었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기사급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황자 저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것이니, 그 누구도 무시하지 않겠죠.”
“감사합니다.”
“그럼, 전장에서 뵙죠.”
딱딱한 기사답게,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말에 올라탄 벤시.
용병들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다, 은자디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대장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오- 황자께서 하사하신 물건이라니, 그 정도면 가보급 아닙니까?”
“허허, 살다 보니 이런 영광도 다 있군그래. 이번 전쟁에서 제일 공을 많이 세운 사람에게 주면 딱이겠어.”
“오오, 갑시다!”
그렇게, 용병들도 전쟁에 합류했다.
#2
구릉지에 집결하는 병력들.
산을 타고 수인족이 넘어왔으며, 맨 앞에는 거인족이 자리했다.
양쪽 날개에는 엘프족과 드워프가 각자의 병기를 가지고 위치했다.
마지막으로 중앙은 인간들이 있었다.
“자, 여러분?”
-네!
-전쟁하고싶어전쟁하고싶어전쟁하고싶어!
-ㅋㅋㅋㅋㅋ아 진짴ㅋㅋ 언제 들어가냐고!
-현기증 날 거 가타!
“제가 타이밍은 맞춰 줄 겁니다. 이번 전쟁의 진짜 주역은 저와 여러분일 테니까.”
모두가 놀라겠지.
귀띔을 받은 것은 황자, 그리고 하이디엔과 사기라뿐이었다.
아,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드래곤들도 있었다.
“다 모인 겁니까?”
“그렇습니다. 총사령관.”
나란히 선 3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절벽 끝에, 모든 종족의 수장들이 서 있었다.
마치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상당히 멋있는 구도가 탄생했다.
드레젠의 팬들은 클립을 따서 여기저기다 퍼 나르기 시작했다.
“니오베, 그쪽은 준비 끝났습니까?”
[언제든지 불러만 다오. 바로 날아가겠다.]
저쪽도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성좌들의 응답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
상공에 있는 폭풍은 더욱 거세져만 갔다.
[아, 들리나?]
잠시 대기하고 있을 때,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현.
그의 목소리였다.
“들립니다.”
[5분 남았다. 일이 잘 풀렸어.]
“알겠습니다.”
5분.
드레젠은 3황자에게 5분이라고 전해줬다.
결전의 순간까지 5분밖에 안 남은 것.
파지직-!
균열이 열리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봤던 균열보다 몇 배는 커다란 크기였다.
“온다-.”
누군가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베리드는 가장 먼저 정찰병들을 내보내겠지.
그리고 조금씩 병력들을 투입할 것이다.
초반부터 힘을 빼면 안 된다는 얘기였다.
[마법사들, 준비.]
도리안이 마법사들을 총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녀가 드레젠의 메시지를 받고, 곧바로 마법을 준비했다.
마법사의 역할은 처음과 끝에, 온갖 마법을 퍼붓는 역할이었다.
드레젠은 수도 없이 많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 역시 평상시 실전처럼 훈련하는 이들이었고.
[연다-!]
현의 목소리가 들리고, 균열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됐다.
성좌들의 작업이 제대로 먹힌 것.
절그럭거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약속된 5분이 지나자, 베리드의 척후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이브 한 대와 수많은 병력들.
“이제 시작이다.”
[마법 발사-!]
전격, 화염, 얼음, 바람 등등.
수많은 마법이 허공을 수놓았다.
대규모 공성전에서만 발휘되는 마법병단의 활약.
이 정도 마법은 인간끼리의 공성전이 아니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 종족이 하나로 뭉쳐, 마족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전투 프로토콜 활성화.]
[대상 : 브락시아의 전 생명체]
[섬멸을 시작한다.]
하이브가 내려온 명령을 받고 붉게 점멸하는 눈빛으로 적들을 바라봤다.
마법이 마족의 병사들에게 내리꽂히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또 하나의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