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2화
272화 – 집결
#1
드래곤, 그리고 맹약자.
성좌의 대리인.
인간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아득한 것들이었다.
엄청난 숫자의 인간.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이 바로 자신들 아니었던가.
“결정을 해야겠지요.”
인간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브레이시스 제국의 황제.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그가, 드레젠과 한 여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는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특히 그의 아들, 딸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 아바마마!”
“그만하거라. 이미 저분은 우리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분이니.”
자신의 동생이 발끈하려는 것을 막은 3황자.
오직 그만이, 황자와 황녀들 중에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이 땅, 브락시아는 인간만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 드레젠은, 단순한 백작이 아니다. 이 세상의 운명을 쥐고 있는 자야.’
3황자는 황제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지금 그의 선택으로 인해, 인류 전체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어필했다.
드레젠, 그리고 드래곤은 그럴 만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으므로.
3황자의 말을 들은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드레젠에 대한 대우를 완벽하게 바꾸기로 마음먹을 것.
“힘닿는 곳까지, 모든 병력을 지원하겠나이다. 이 대륙의 생명을 걸고.”
“좋아. 그대의 대답은 잘 받았다. 모두에게 전하지. 인간 제국이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니오베가 웃었다.
그리고 드레젠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어깨에 힘을 잔뜩 실어주는 것.
그건 자신뿐만 아니라 드래곤 전체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기도 했다.
드래곤의 선택이 어리석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하니까.
“잘 마무리하고 오거라. 노는 인원 없게, 전원 참전시켜야 할 것이야.”
“그래야죠. 딱 한 번이면 되니까.”
“그럼, 본인은 가보마. 내 레어로 찾아오거라.”
드레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드래곤이 사라지고, 주변을 꽉 눌렀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며 드레젠을 바라봤다.
대체 저 인간은 무슨 일을 하며 다녔기에 드래곤의 반려가 되었는가.
‘성좌의 대리인이라고? 믿을 수가 없군.’
“황제 폐하의 선언은 잘 들었습니다. 다른 국왕분들도 명심하셔야 할 겁니다. 정말 멸망을 막기 위한 전투이니까요.”
“많은 이가 죽지 않겠소?”
“그러겠지요. 하지만…… 가장 위험한 자들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이들이 될 겁니다.”
“…….”
일반 병사들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전장을 유지하고, 전열이 밀리지 않을 정도로만 운용할 생각이었다.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굳건히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드레젠과 수많은 지원군들이 나서서 적들을 박살 낼 테니까.
“저에겐 아직 가지고 있는 카드가 많습니다. 인간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본인도 잘 알고 있으니, 걱정 마시길.”
“크흠, 그럼 언제, 어디서 모이는 겁니까?”
“한 달 후, 아르게논 대륙의 평야에서 결전이 치러질 겁니다.”
한 달.
무언가를 준비하기엔 빠듯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국가 단위로 역량을 쏟아붓는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드레젠의 말은, 파문이 되어 조용히 퍼져 나갔다.
“짐이 더 도와줄 일은 없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제 병력들을 싸그리 모아 주십시오. 특히 귀족들의 병력이 필요할 겁니다.”
“알겠네.”
“반란은 걱정하지 마십쇼. 제 세력이 움직일 테니까.”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방진 말이었다.
감히 누가 자신에게 저런 행동을 했던가.
하지만 왜일까.
그가 만났던 어떤 인간보다 믿음직스러웠다.
‘진정한 용사인가.’
그가 용사 프로젝트를 불발시켰다.
그때 당시에는 불안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희생을 줄일 수 있었으니까.
“그대만 믿고 있겠네.”
“맡겨만 주십쇼. 제 명예를 걸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할 겁니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그는 호언장담을 하면서 식사를 마쳤다.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잠깐의 희생은 필수 불가결했다.
그들의 희생을 영원히 기린다면, 잊혀지는 일도 없겠지.
‘사실 사지로 내모는 입장이 달가운 건 아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한 번의 전투로 깔끔하게 적을 박살 내는 것뿐.
정치도, 계략도 소용없는 결과물을 만들 생각이었다.
이제 집결까지 자동으로 돌려놓으면 될 것이다.
모든 명령은 전달했으니까.
“그럼, 이제 마지막 전투까지 자동 진행을 돌려놓겠습니다.”
-크 드디어 마지막이다!
-진짜 대단하겠구만ㅋㅋㅋㅋ
-어쌤블! 어쌤블!
-이제 우리도 들어갈 준비 해야겠네요
-후하후하 긴장되넼ㅋㅋㅋ
“다들 준비하십쇼. 마지막 전투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는 자동 진행을 돌려놓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드레젠의 캐릭터는, 미리 아르게논 대륙으로 건너가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2
아르게논 대륙.
어느 숲속에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내가 있었다.
요즘 신대륙 주둔지에서는 괴담 비슷하게 돌아다니는 자의 이야기.
일대의 몬스터를 다 쓸어버리는 괴인에 대한 얘기였다.
“스승님은 언제 오시는 걸까?”
“그러게…… 우리가 너무 의심해서 그런 걸지도.”
주둔지의 최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남매.
두 사람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드레젠.
자신들의 마력을 인정해 주었던 자.
아더와 스테판은 그 날을 죽도록 후회했다.
“미련한 새끼, 날 믿어준 것도 모르고…….”
“언젠가 다시 만나면,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보면 되지.”
“……말이야 쉽지. 잔뜩 쫄아서 아무 말도 못 할 거면서.”
맞는 말이었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다짐했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 말문이 턱 막혔다.
무릎을 꿇고 빌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도 찾아오지 않았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오늘도 여기 있었군. 두 사람.”
“아, 영감님.”
“그 백작님 때문인가? 아직도?”
은자디아가 그들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달콤한 와인 하나를 병째 들고 온 그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신경 쓰이는 일이 많을 땐,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이 최고라네. 자네들에게 들어온 의뢰가 있는데, 한 번 해보는 건 어떤가.”
“어떤 의뢰에요?”
“근래에 몬스터를 쓸어 담고 있는 괴인에 대한 조사. 자네 둘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믿네만.”
대검을 어루만지던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자디아의 말대로, 정신 사나울 땐 머리를 비우는 작업 하나 정도는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알겠어요. 의뢰인은 어디 있나요?”
“저기-.”
그가 견고하게 지어진 성체를 가리켰다.
그들의 주둔지를 책임지고 있는 귀족이 머무는 곳이었다.
아더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사이였지만, 서로 필요할 때는 이용해 먹고 있었다.
의뢰주가 부르면 가야지.
“지금 가도 되는 겁니까?”
“지금 불러오라고 하더군.”
“그럼, 가 볼까? 가자 스테판.”
스테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귀족에게서 의뢰를 받고, 서둘러 움직였다.
밤이 아니면 그를 발견할 수 없다는 소리에, 두 사람은 간단한 짐만 챙겨 숲 안으로 향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당연하지. 넷이서 어디까지 갔다 왔는데.”
아더는 드레젠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두 사람은 달이 기울어진 시간에서야 괴인의 흔적을 쫓을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확인한 두 사람은,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스테판이 마나의 흔적을 분석하던 도중,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챘다.
“어? 이거-.”
“왜, 뭔데?”
“이거…… 그분 마나야.”
“그분? 설마-.”
스테판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드레젠이 이 주변에 있었다.
두 사람이 잔뜩 얼어버린 표정으로 서로를 둘러봤다.
그자가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이, 일단 가 보자.”
“조사만 하는 거니까, 잠깐 보고 오는 건 괜찮겠지.”
“맞아. 가자. 멀지 않아.”
두 사람은 천천히 괴인에게 접근했다.
드레젠이라고 확신이 되는 상황에서,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진짜 흑마법사 쪽 사람일까?
우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어쨌든, 만나보면 알겠지.’
아더는 잡생각을 떨쳐내고 앞으로 나아갔다.
숲이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곳곳에 황금빛 가루가 보였다.
그 핏자국은 점점 심해져, 종국에는 흙 반, 피 반으로 물든 대지가 나왔다.
“……스승님?”
이곳은 본래 변종 오크들의 땅이었다.
언데드의 영향을 받아, 죽음의 힘을 받아들인 오크들의 영역.
그들이 가진 마나는 탁하고 지저분해서, 시체를 재료로 쓰기에도 애매했다.
그런 오크들을 남김없이 주살한 사내, 드레젠이 천천히 두 사람을 돌아봤다.
“-오랜만이군. 여긴 어쩐 일이지?”
자동 진행으로 매크로를 돌리고 있었던 드레젠이 잠시 복귀했다.
이벤트가 발생했다는 메시지 덕분이었다.
사람들과 한창 떠들고 있던 그가 허겁지겁 게임에 복귀하자, 시청자들의 신경이 다시 쏠렸다.
“근래에 숲에서 몬스터를 학살하고 다닌다는 괴인이 있었는데…… 그게 스승님일 줄은 몰랐네요.”
“그러고 보니, 너희들에겐 말하지 않았구나. 곧 전쟁이 일어날 거야. 그때를 대비해서 힘을 비축해 두는 거고.”
“전쟁……이요?”
“베리드. 마족과 우리 브락시아 쪽이 한판 붙는다.”
전쟁.
무거운 단어에, 두 사람은 자세한 이야기를 원했다.
그 전에, 스테판이 드레젠에게 이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저기- 그때 일은…….”
“뭐, 그건 딱히 신경 안 쓰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실제로 급한 일 때문에 대륙을 떠난 거였거든.”
“아아…… 그렇군요.”
두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마음 졸였던 시간이었는데, 이렇게 금방 풀릴 줄이야.
다행이었다.
드레젠은 이들에게 대화를 잘 건네면, 또 하나의 아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곳, 아르게논 대륙에서 전쟁이 일어날 거야. 딱 한 번의 전투로 끝나는 전쟁이지.”
“저희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
“왜 없겠어. 병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주둔지로 가서, 용병들을 모아 줘. 한 달 후, 그곳으로 대륙의 모든 병력이 집결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조사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그래, 몸조심하고.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여기 남아 있는다.”
마지막 지원군까지 모은 드레젠.
이제 정말로 모든 병력을 끌어모았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만들어졌으니, 해볼 만할 것이다.
그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동진행을 마저 눌렀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