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1화
271화 – 황제의 결정
#1
브레이시스 제국의 황궁.
오랜만에 황제의 부름을 받아, 속국들의 왕이 모두 모였다.
그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긴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소식은 들었다.
외계의 생명체가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것.
“……그래서, 그 백작이라고 한 자는 언제쯤 도착하는 겁니까?”
“조금 더 기다려보면 되겠지. 워낙 바쁜 자라고 했으니.”
“그자가 신성 왕국의 실세라던데, 그것도 사실입니까?”
“그거까진 잘 모르겠소. 하지만 교황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는 건 확인했소이다.”
왕끼리 모인 자리였지만, 오가는 얘기는 다 한 가지로 귀결됐다.
드레젠이라는 자.
드래곤과 성좌의 가호를 받았다는, 전설이 될지도 모르는 자의 이름.
과연 그가 진짜 전설이 될 만한 재목인지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폐하. 케이드 백작이 도착했다는 보고이옵니다.”
“그래. 들라 하여라. 황자와 황녀는 모두 자리에 있는가?”
“그렇습니다. 폐하.”
모든 준비가 끝났다.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이 전쟁에 참여해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황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드레젠.
혜성처럼 나타나 폭풍을 몰고 온 사내.
3황자의 말을 들어보니, 성좌가 보낸 자일 수도 있다는 소리도 들렸다.
‘셋째의 태도를 보아하니, 결국 황권을 포기할 것 같진 않구나.’
셋째 아들은 거인족과 일평생 싸우겠노라고 맹세했다.
본래라면 평생 그렇게 변방에서 살아갈 운명이었겠지.
하지만, 드레젠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
그의 맹세는 이뤄졌고, 엄청난 신뢰를 얻었다.
‘거기다 드레젠이라는 엄청난 패까지 있으니.’
첫째, 장남이 가지는 적법성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지만, 황권이란 건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 셋째 아들이 가지는 파워는 어마어마했다.
중앙 귀족들을 장악하지 않아도, 그에겐 실질적인 군사력이 있었다.
“백작을 들라 하여라.”
“명 받들겠습니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행동에 반응해, 다른 왕들이 모두 일어섰다.
황자, 황녀도 마찬가지.
수련을 마치고, 어제 복귀한 구스타프 백작도 막 도착해 있었다.
대전의 문이 열리고, 드레젠이 등장했다.
‘저 자인가.’
‘마스터? 아니…….’
이곳엔, 일신의 무력으로 왕국을 지탱하는 자들도 있었다.
마스터.
그 지고한 경지에 오른 이들이 모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런 이들이 드레젠을 바라보며 느낀 감정은 경외감이었다.
‘그랜드 마스터?’
전설로만 등장한 단어.
먼 옛날, 스카이워커 초대 가주만이 이뤄냈던 경지.
그 끝자락에 발을 걸친 것이 아닐까 하는 기운이 풍겼다.
당당한 걸음걸이와 엄청난 포스.
단연코, 현존하는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백작. 일어서게.”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그간 평안하셨는지.”
“하하, 그대 같은 자가 이 땅을 지키고 있는데, 평안하지 않을 리가 없지. 자, 이제 만찬을 즐기면서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세.”
3황자가 미리 일정을 조율했기에 가능했던 일.
오늘은 맛있는 점심 식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타국의 왕들은 드레젠의 기운에 압도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궁금한 것도 있었다.
‘식사 예절은 어떨까. 아까 전엔 완벽한 인사법이었는데.’
‘변경에만 있어, 예법엔 무지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군.’
‘내 딸과 한 번 엮어볼까?’
왕들의 머릿속에 청신호가 켜졌다.
귀족들은 언제나 보여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법.
변경 백이 중앙 귀족들에게 은근히 무시받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드레젠도 똑같을 거란 생각을 하는 왕들이 몇몇 있었다.
왕뿐만 아니라 황자, 황녀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전쟁터만 돌아다니던 백작이, 뭘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식사하는 건 처음인가.’
에피타이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만찬.
그때부터 정치는 시작됐다.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족이 쳐들어온다니, 그래, 우리는 뭘 하면 되겠는가.”
“최대한 많은 병력이 필요합니다. 단 한 번의 전투를 위한, 그런 병력이죠.”
“최대한 많은 병력이라…….”
황제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최대한 많은 병력이란 어떤 기준을 의미하는 걸까.
중앙 귀족, 변두리 귀족들의 사병까지 모조리 끌어모아야겠지.
황제로서, 이것저것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뒤에서 움직이려는 자들이 있겠지. 그런 자들도 견제 해야 한다.’
그가 고민하는 기색을 알았는지, 드레젠이 말을 이었다.
완벽한 식사 예절로 에피타이저를 한 입 머금은 그의 모습은, 귀족이 아니라 황족 같은 느낌이었다.
“반란, 내분, 뒤에서 움직이는 자들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것까지 이미 생각했소?”
“그림자 기사단, 그리고 다크몬드가 움직일 겁니다.”
대놓고 선언했다.
어마어마한 내용에, 대전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금 귀족들 앞에서, 대놓고 어둠의 세력을 끌어들이겠다고 협박하는 꼴 아닌가.
“지금 대놓고 암살자들을 쓰겠다는 말이오?”
“그렇게 협박하면, 반발이 심할 텐데요.”
“반발이 심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대륙 전체가 사라지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
드레젠이 다시 한마디 거들자, 다들 말이 없어졌다.
대륙 자체가 사라진다니, 사실 여기 있는 이들은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달칵-.
다음 찬이 나오고, 식사는 계속 이어졌다.
사람들은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대륙이 없어진다는 말, 확신할 수 있는가?”
“예.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모두가 모인 것 아니겠습니까.”
확신에 찬 말투는 계속 이어졌다.
딱히 증거도 없으니, 무어라 따질 수도 없는 상황.
게다가 그림자 기사단이 움직인다고 했으니,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 이름은 함부로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림자 기사단과 다크몬드라……. 그대가 그걸 움직일 권리가 있는 거요?”
“뭐, 그렇습니다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죠. 지금 여기에 귀하들이 모인 이유는 이 대륙을 지킬 수 있느냐 아니냐 아닙니까?”
자꾸 논지를 흐리려는 이들 때문에, 대화 진도가 도통 나가지 않았다.
황제는 드레젠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차라리 그가 자신의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당당히 황권을 차지하도록 지지했을 텐데.
‘그림자 기사단에 다크몬드라, 혹시 저자가 그곳의 수장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면 연고가 있는 건가?’
“그곳에 무슨 인연이 있는 건가? 백작?”
“깊은 인연이 있지요. 제가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이자, 다크몬드 수장의 은인이니까요.”
헙-.
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그림자 기사단의 수장은 철저하게 모습을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여태까지는 그랬으니까.
한 나라의 귀족이 다루기엔 너무도 큰 힘이었다.
‘워낙 조용히 움직여서 그런지도 몰랐군.’
‘그게 사실이라면…… 권력이 위태로워질 거 아닌가.’
‘공공의 적인가?’
국왕들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힘을 합치러 모였는데, 오히려 드레젠을 공공의 적으로 돌리기 시작한 것.
드레젠 역시 분위기를 읽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이 또 불만을 표했다.
“폐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말들이 협박으로 들리시는 겁니까?”
“협박이라, 느끼기엔 그렇게 들리는군. 하지만 그게 꼭 필요한 일이라면, 그렇게 해야겠지.”
“폐하!”
“대륙의 존폐가 걸린 일인데, 자기 밥그릇만 챙기고 있을 건가? 그러다가 전쟁에서 패하기라도 하면? 그때는 쥐꼬리만 한 병력으로 어떻게 수습할 건가?”
“하지만 폐하. 전쟁이라는 건 한 번의 전투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적재적소에 병력을 배치해야-.”
황태자로 유력한 1황자가 나름 논리적인 말을 하며 주장을 펼쳤다.
그 말을 끊은 것은 드레젠이었다.
“황자 저하. 외람되지만, 이번 전쟁은 단 한 번의 전투만 있을 겁니다.”
“무엄하다! 황자가 말을 하는데 중간에 끼어들다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닐 텐데요. 저는 이곳에 단순히 ‘백작’의 신분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더 식사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으므로, 드레젠은 식기를 내려놨다.
황녀들이 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신경 쓸 사안도 아니었다.
지금 드레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모르고 나대는 인간들.
그들에게 진짜 힘의 맛을 보여줘야 할 차례였다.
“니오베.”
[불렀는가. 나의 반려여.]
“여기, 제 존재를 의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의심은 끝이 없네요.”
[건방진 자들이로고. 인간의 알량한 법규로 그대를 옭아매려 하는가. 내 직접 가겠노라.]
“도움이 좀 필요하겠어요.”
[그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내 웃으면서 가겠다.]
그와 그녀의 대화는 모든 이가 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느껴지는 존재감에, 모두의 식사가 종료됐다.
황제는 반사적으로 도리안 백작을 찾았다.
“도리안. 결계를-.”
“죄송하지만, 소용없습니다. 폐하.”
“뭐?”
“케이드 백작은 드래곤의 맹약잡니다. 드래곤과 삶을 함께 하는 자죠. 게다가…… 성좌의 후계자로 선택받은 잡니다.”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건가?”
도리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가 드래곤에게 마법 수련을 받고 온 사실은, 폐하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 그렇지.”
“제 스승님이 바로 지금 오시는, 위대하신 자 니오베입니다.”
“…….”
그녀의 목소리는 은근한 자부심도 있었다.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래, 인간 기준으로 그는 절대자였지만, 대륙 기준으로는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성좌, 그리고 드래곤이 있는 이상 황제는 그런 위치였다.
“그대들이 인간의 지도자들인가.”
환한 빛이 일고, 녹빛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등장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황녀들이 일반인처럼 보일 정도로 완벽한 미모.
모두가 숨을 죽이고 새로 나타난 사람을 바라봤다.
“……드래곤.”
“위대하신 자, 그린 드래곤 로드를 뵙습니다.”
구스타프 백작이 그와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황제 역시 고개를 숙였다.
“브레이시스 제국을 다스리는 자가 위대하신 자를 뵙습니다.”
니오베가 주변을 둘러봤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드래곤 피어가 좌중을 장악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황제여,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지도자들이여, 명심하라. 이곳에 있는 드레젠은 성좌의 대리인이자, 드래곤 로드의 대리인이며, 나, 니오베의 대리인이기도 하다는 걸.”
“아, 알겠습니다.”
“황제여, 결정하라. 그대는 이 대륙을 살린 영웅이 되고 싶은가?”
이젠, 마지막 결정만이 남았다.